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간다
개미는
손가락이 없어
산 입에 송장을 문 게 아니다
슬픔을 메우느라
차라리 저 몸에 입을 묻은 것
우리, 저와 같아서 사랑한다
그 말이 슬픔을 문 듯하여
이 길
나는 너를 물고, 슬프다

 


- 서영식 ‘송시’ -

 


이별의 슬픔은 그 크기가 사랑의 깊이와 같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의 슬픔은 견디기 힘들다. 만고에 빛나는 이별의 시가 있다. ‘송인’(送人)이라는 제목이 익숙한 정지상의 「대동강」이다.

 


비 갠 긴 둑에 풀빛이 어여쁜데
님 보내는 남포에서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마르려나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내느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사랑은 그 사람의 가치에서 형성된다. 그 사람의 가치가 내 목숨과 같을 때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자신만의 가치를 더 중요시해 간다. 자신의 가치가 더 중요해질수록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별의 슬픔도 옛사람 같지는 않은 듯하다. 이별에 관한 절창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이다.

 

「송시」는 전혀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개미들의 일상에서 이별의 슬픔을 훌륭하게 건져내고 있다. 너무 큰 슬픔은 울음도 부족하다. 울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상실감 또한 어쩌면 절대상황일 수 있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의 슬픔은 크고, 슬픔이 클수록 상처도 깊다. 상처가 깊을수록 사랑은 컸던 것이고, 이제 아름다웠던 사랑의 추억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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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 류시화, ‘패랭이꽃’ -

 

 

 

‘눈에 밟힌다'는 말이 있다. 발에 밟히듯 살에 닿아 사무친 것, 그래서 살에 박히듯 잊히지 않는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지키지 않은 약속, 가지 않은 길. 시간이 약이라지만, 새 시간의 물살에도 지워지지 않고 어룽대는 저 강바닥의 밑그림에는 약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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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류시화 ‘소금인형’ -  

 

 

 

                

 

 

 

새들처럼 지저귄다. 오늘도 사진만 남아있는 남의 책을 뒤적거려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이 사람과 접속하고 저 친구와 문자를 날리면서도 마음속은 늘 공허하다. 내적인 허탈감에서 벗어나려고 또 다른 새들과 만나고 무리지어 다니며 능력과 세를 과시해 본다. 요란하기만 한 빈 수레를 끌고 다니며 얹힌 내용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을 붙잡아 앉히고 인생의 의미에 진지해지기를 두려워한다. 끝없이 할 일을 만들고 쓰러지듯이 피로해야 만족한다. 너도나도 내다버린 우리의 소중한 가치는 무게를 지니지 못하고 가벼워져 둥둥 떠다닌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독을 멀리하고 싶어 한다.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외부 세상으로부터 멀미를 느껴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에 머무르려는 사람들도 더러 생겨난다. 이 불안한 느낌은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배급된다.

 

차라리 혼자이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내 삶이 소금인형처럼 녹아버릴까 봐 두려운 자, 사랑을 얻기 위한 절규에서 벗어나고픈 자들의 자해행위이자 도피행위이다. 나 홀로의 삶은 자유롭다. 그러나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세련된 삶인 것만은 아니다. 독립적인 삶은 스스로를 무장하고 훈련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자신에게 침잠하여 얻어지는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즐겨 보려는 것이,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이들의 노력이다. 자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용기 있게 뛰어든 소금인형은 바다로 내려가 흔적도 없이 자신을 녹여 버린다. 당신의 핏속으로 뛰어들어 미련 없이 녹아버린, 류시화의 시에 안치환의 목소리를 입힌 노래가 가슴에 녹아내리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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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편의 사랑 소네트
파블로 네루다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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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정형시들이 있다. 우리에게 시조가 있듯 중국에는 한시가 있고 일본에는 하이쿠가 있으며 유럽에는 이탈리아에서 발원한 소네트가 있다. 소네트는 14행(4.4.3.3행)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대개는 ‘사랑’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네루다는 스무살 때, 슬픈 사랑의 시, 버림받은 남자의 노래인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를 썼다. 그로부터 30년 지난 뒤에 쓴 <사랑의 소네트>. 네루다 초기의 육감적이고 열정적인 사랑과는 달리 짙은 향기가 아련히 숨 쉬는 사랑을 찬미했다.

 

1904년 칠레에서 태어나 솟구쳐 오르는 격정과 폭발적인 상상력으로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꿈과 현실을 그려 노벨문학상을 탔다. 가난하게 살았고 매우 서민적인 분위기에서 사춘기를 보냈으며 어른이 되어 도시의 비인간화를 뼛속 깊이 체험한 그의 감각과 감성의 뿌리가 민중에 내리뻗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랑의 대상은 그의 연인이기도 하지만 조국이나, 민중, 대자연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100편의 사랑 소네트를 읽다 보면 웬만한 시가 눈에 안 들어온다. 스케일 면에서나 상상력과 감성의 크기가 신적인 것과 연결된 것만 같다. 거대한 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는 그의 시. 숭엄한 삶과 사랑 앞에 인간의 기품이나 품위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아주 깊은 혼의 골짜기에서 길어 올린 듯이 기품 있는 영혼의 시. 언제나 열렬히 압도해온다.

 

 

당신이 소금 장미나 황옥이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불이 뿜어내는 카네이션의 화살이었대도.

어떤 숨겨진 게 사랑받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

은밀히, 그늘과 영혼 사이에서.

 

꽃은 피지 않지만 그 속에 숨겨진 꽃의 빛을

지니고 있는 식물처럼 당신을 사랑해;

땅에서 올라와 내 몸에 은밀히 살고 있는

어떤 순수한 향기, 당신의 사랑이 고마워.

 

(소네트 17번 중에서, 29쪽)

 

 

소네트 17번에서 “꽃은 피지 않지만 그 속에 숨겨진 꽃의 빛을 지니고 있는 식물처럼 사랑하는 것”이란 문장은 사랑의 핵심으로 보인다. 다 알면 뻔하고 심드렁해진다. 연막탄이 터져 연기가 다 사라지기 전 아련한 상태까지 사랑의 신비가 아닐까. 솔직하게 사랑하되 다 보여주지 말 것. 사랑하되 매력을 잃지 말 것. 이렇게 사랑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것처럼 보이는 자가 실전에 약할 수 있다. 이도 저도 머리가 아프다 싶으면 자기 생긴 대로 사랑하면 된다. 다른 방법으로 사랑할 줄 모르므로.

 

사랑은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일어서게 하며 어기차게 한다. 나를 매만져 세상 사랑하며 살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벼리이다. 사랑의 묘력(妙力)은 경이로운 ‘변화’이고 놀라운 ‘치유력’이 되기도 한다.

 

 

빛을 위한 불, 빵을 위한 한 많은 달,

그 멍든 비밀 둘레에 바르는 자스민:

그러자 겁나는 사랑으로부터, 부드럽고 흰 손이

내 눈에 평화를, 내 오관에 태양을 퍼부었다.

 

사랑이여, 얼마나 빨리 당신은

상처 있던 자리에 기분 좋은 견고함을 만들어내는가!

당신은 맹금의 발톱을 물리쳤고, 이제

우리는 세계 앞에 하나의 삶으로 서 있다.

 

(중략)

 

그래도 이 땅을 넘어, 그 그늘진 어둠을 넘어

우리 사랑의 광휘는 살아 있으리.

 

 

(소네트 23번 중에서, 37쪽)

 

 

그럼에도 사랑은 시시때때로 모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지 모른다. 이 시집 속의 시인의 사랑법은 ‘양면 긍정’이고 ‘양면 수용’이며 ‘양면 적용’이며 ‘양면 통합’이다. 가령 사랑에는 아름다움만 있지 않다. 추함도 있다. 또 사랑만 있지도 않다. 미움도 있는 것이다. 이 모두를 포용할 수 있어야, 지혜롭게 건사할 줄 알아야 사랑이다.

 

사랑은 ‘무한’이다. 따라서 생사와 무관하다. 살고 죽음을 넘어서 있다. 생사를 초월하여 생사의 인식 밖에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이유가 도탑고 사랑스러워야 할 것이다. 시인은 사랑의 이유들을 ‘황금의 허리’, ‘이마의 주름살’, ‘투명’과 ‘불투명’ 이런 등등의 것들이 이유라 쓰고 있지만 사실 ‘당신의 모든 것’이라 해도 잘못 풀이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사랑하기 위해’ 즉 ‘사랑 자체’에 있을 것이다. 또한 그래서 양면의 삶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는 역으로 당신의 양면을 모두 긍정하고 이해하며 수용하고 포용하며 사랑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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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2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2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53쪽) - 

 

 

 

이런 종류의 글을 읽고 심장이 불에 덴 듯 놀랄 때, 그때를 청춘이라고 부른다. 또 이런 종류의 글을 자신의 청춘의 면죄부 혹은 자화상이라도 되는 듯 ‘내가 읽은 글’ 따위의 글에서 요란하게 소개할 때, 그때를 속물이라고 한다. 이처럼 소년은 늙기 쉽고 청춘은 한순간이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질투를 힘으로 변용시키는 자의 자기모멸과 자기 연민의 뒤섞임은 기형도로 말해지는 한 예민한 청춘의 자의식이 아니고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정서다.

 

질투란 어느 누구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의 유일한 무기다. 이 때 저 질투하는 자는 자신의 질투 때문에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내비치지 못한다. 그것이 저 가련한 자의 자존의 방식이다. 그는 질투 때문에 쓰고 또 질투 때문에 자신이 쓴 것을 믿지 못한다. 마치 세상이 쓰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 끊임없이 쓰고 또 쓰지만 그가 쓴 것은 오로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다만 ‘탄식’뿐.

 

시인의 문장에서 이 탄식의 끝에서 저 지독한 욕망, 스스로 두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그 불멸에의 열정을 엿본 것 같다.평생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나 머뭇거릴 운명, 그러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운명, 그 어리석은 운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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