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민음사, 1994)

* 아폴리네르 《알코올》 (문학과 지성사, 2001)

* 아폴리네르 《알코올》 (열린책들, 2010)

* 아폴리네르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민음사, 2016)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시 선집 《미라보 다리》(민음사, 1994)의 초판 발행 연도는 1975년이다. 이보다 더 오래된 아폴리네르 시집 번역본은 1953년에 장만영 시인이 엮은 책이다. 이규현 씨가 번역한 《알코올》(문학과 지성사, 2001)은 ‘품절’ 되었으므로 지금으로는 황현산 교수가 번역한 《알코올》(열린책들, 2010)과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인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민음사, 2016)가 믿고 읽을 만한 아폴리네르 시집 번역본으로 남아 있다.

 

 

 

 

 

 

 

 

 

 

 

 

 

 

 

 

 

 

* 황현산 《아폴리네르》(건국대학교출판부, 1996)

* 유기환 《알베르 카뮈》(살림, 2004)

 

 

황 교수는 아폴리네르 연구에 정통한 불문학자다. 파스칼 피아(Pascal Pia)《아뽈리네르》(열화당, 1983)를 번역하기도 했는데, 알라딘에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 책이다. 다행히 네이버에 검색하면 이 책의 생김새와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파스칼 피아는 프랑스의 언론인으로 본명은 피에르 뒤랑(Pierre Durand)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와 함께 레지스탕스 기관지를 운영했다. 장 그르니에(Jean Grenier)가 카뮈의 문학적 성장에 도움을 준 스승이라면, 피아는 카뮈가 글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도와준 후원자이다. 카뮈는 자신의 작품 《시지프 신화》를 피아에게 헌정했다. 살림지식총서 51번째 책《알베르 카뮈》(살림, 2004)에 보면 피아와 카뮈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피아를 ‘커피 애호가’이자 ‘아폴리네르 전문가’로 소개하고 있다. 황 교수가 번역한 《아뽈리네르》와 아폴리네르의 시 작품들을 분석한 《얼굴 없는 희망 : 아폴리네르 시집 알콜 연구》(문학과 지성사, 1990)는 구하기 어렵다. 건국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아폴리네르》(1996)는 분량이 얇고, 아폴리네르의 시 작품들을 중점으로 다룬 책이다.

 

 

 

 

 

 

 

 

 

 

 

 

 

 

 

 

* 아폴리네르 《내 사랑의 그림자》 (아티초크, 2015)

 

 

 

아폴리네르는 ‘상형시집’으로 알려진 『칼리그람(Calligrammes)』이라는 파격적인 형식의 시집을 펴냈다. 칼리그람은 ‘아름다움’을 뜻하는 ‘Calli’와 ‘문자’와 ‘그림’을 뜻하는 ‘gramme’를 합친 말이다. 쉽게 말하면, 칼리그람은 ‘글자로 만들어진 그림’이다.

 

 

 

 

 

 

 

 

아폴리네르는 동료 작가보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앙리 루소(Henri Rousseau) 등의 화가들과 더 가까이 지냈다. 그는 훗날 입체주의, 초현실주의로 분류되는 화가들의 재능을 일찍 눈여겨 본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은 활자나 시구의 배치를 통해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낸 독창적인 작품이다. 《미라보 다리》와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그리고 《내 사랑의 그림자》(아티초크, 2015)에 『칼리그람』에서 선별한 재미있는 상형시를 확인할 수 있다.

 

 

 

 

 

 

 

 

 

 

 

 

 

 

 

 

*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문학과 지성사, 2004)

* 유석호 《라블레,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사실 글자의 배열로 어떤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독특한 장식문화 중 하나이다. 그리고 문학사 전체를 볼 때 상형시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은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이 아니라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팡타그뤼엘 제5서』다.

 

 

 

 

 

 

 

『팡타그뤼엘 제5서』는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문학과 지성사, 2004)의 후속작이며 여기에 실린 상형시는 ‘신성한 술병의 삽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라블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팡타그뤼엘 제5서』는 위작 논쟁이 끊이지 않는 문제작이다. 그래서 라블레가 ‘신성한 술병의 삽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미라보 다리》의 목차가 있는 장 바로 앞에 앙리 루소의 그림이 있다. 그림 밑에 『미라보 다리』의 유명한 시구가 인용되어 있다. 이걸 본 독자들은 루소의 그림에 있는 다리가 그 유명한 미라보 다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그림 제목이 '미라보 다리'가 아니다. 황 교수는 《아뽈리네르》에서 이 그림 제목을 ‘미라보 다리’로 잘못 소개했다. 루소가 그린 다리는 파리 16구의 명칭을 붙인 ‘파시 다리’이다. 이 다리는 1948년에 ‘비르 아켐 다리(Pont de Bir-Hakeim)’로 변경되었다. 미라보 다리와 비르 아켐 다리는 같은 행정구 안에 있을 뿐, 이름과 모양새가 다르다. 파리에 여행하러 갈 때 미라보 다리를 보게 되면, 다리가 있는 위치를 잘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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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4-1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에 갔을 때, 유명한 미라보 다리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애개 쪼끄매..이러면서ㅜ
그나저나 cyrus 님 전방위적인 글, 좋아요!

cyrus 2017-04-19 15:35   좋아요 0 | URL
유명한 다리를 직접 보셨군요. 저는 사진으로 봤을 때 다리가 크게 보였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가 보군요.. ㅎㅎㅎ

꼬마요정 2017-04-19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좋아요 ㅎㅎ 사실 ㅎㅎ와는 어울리지 않는데 말입니다. 처음 아폴리네르를 만난 건 미라보 다리였죠. 아직도 기억나네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딱 여기까지ㅜㅜ

cyrus 2017-04-19 19:50   좋아요 0 | URL
미라보 다리, 정말 유명한 시죠. 시인 이름은 몰라도 제목과 시구를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임모르텔 2017-10-14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어나 처음 듣는 단어예요! <칼리그람-글자로 그리는 그림>
저처럼 지식이 많지않은 사람이 읽는데에 어려움없게 해주시네요.ㅎㅎ
고리타분한 학교교육들~,~근데 뒤늦게 알아가는 기쁨이 이런거군요.

cyrus 2017-10-15 17:39   좋아요 0 | URL
학교에서 알지 못한 것들, 학교가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이 없었으면 사람들은 독서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

임모르텔 2017-10-15 20:11   좋아요 0 | URL
학교는 감옥이예요. 제 학창시절때는 5분만 지각해도 여고생 턱을 주먹으로 훅~을 날리는 남자선생이 있어서.. 전 말끼를 못 알아듣고 언어이해력이 짧아서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어요! ㅋㅋ반평균점수 깍으면 여고생들 배를 발로 차고 , 그 트라우마가 지금도 있어요.요즘 같으면 고소감이죠. 등교하면 늘 시범케이스 한명 족치고 가르치던 시절,,,..갑자기 Pink Floyd -The Wall ... 을 듣고싶군요!

cyrus 2017-10-16 10:33   좋아요 0 | URL
네, 옛날에 몹쓸 짓을 하는 선생님들이 한 두명은 있었죠. 장난이라고 해도 제자를 막 대하는 교사는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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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밥을 먹어야만 끼니를 제대로 해결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종종 면발이 당기는 날이 있다. 식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즉석에서 말아주는 국수를 먹는 것은 소박한 즐거움이다. 나름대로 의미가 담긴 잔칫집에서의 국수는 어떤가. 생일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혼례 때는 부부가 해로하라는 의미로 대접하는 국수를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겨우내 곰삭은 묵은 김치를 쫑쫑 썰어서 참기름 넣고 버무려 국수 위에 올려놓아 먹으면 입안이 개운해진다.

 

국수의 맛이 최고라는 생각하는 것은 입안에 감도는 그 ‘맛’이 아니다. 맛있는 국수를 먹을 때 마음속까지 아련해지는 것은 옛날에 여러 사람과 함께 국수를 먹으면서 느꼈던 ‘정(情)’ 때문이다. 소찬이지만 둘레 상에 모여앉아 젓가락을 움직이며 나누는 국수에는 서로를 아우르고 위로하는 힘이 있다.

 

끊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

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어느 저녁』 중에서, 14~15쪽)

 

도종환 시인의 『어느 저녁』에서 차려진 국수는 평등한 음식이다. 나도 한 그릇, 너도 한 그릇. 누구에게나 평등한 음식이어서 좋다. 굳이 여유를 부리지 않아도 좋은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말없이 국수를 먹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위로의 말보다 큰 위안이 된다.

 

 

 

 

 

Scene #2

 

 

인생의 본질은 니체(Nietzsche)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운명에 대한 사랑, ‘아모르파티(amor-fati)’다.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단순히 체념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내 운명이라면 당당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위버멘쉬(Übermensch)는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재창조하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이전과 다른 나를 부단히 재창조하는 인간상이다.

 

모래벌판으로 난 길과 낙타들의 행렬을 따라가다

오늘 수첩을 꺼내 아모르파티라고 적는다

오라 운명이여

한낮의 모래언덕과 초저녁의 푸른 초승달과

내게 오는 운명을 사랑하리라

세상은 오래도록 모래와 바람이 휘몰아치며

열사의 뜨거움과 밤의 냉기가 충돌하는 곳

쓰러질 때까지 내 운명을 지나가리라

선택하고 뉘우치고 또 나아가리라

 

(『아모르파티』 중에서, 58~59쪽)

 

『아모르파티』의 화자는 현재의 정체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Zarathushtra)를 닮았다. 그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위해서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멈춰 서서 성찰한다. 우리는 흔히 목적의식 없이 사는 사람을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목적이 있어야 방향감을 잃지 않고 매진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목적으로 바라보면 그 순간부터 목적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볼 기회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목적의식을 부여하면 그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그 사람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문이 닫혀버린다. 삶은 우연한 마주침의 연속이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숱한 고뇌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실적 삶에 거리를 두는 성찰의 시간이다.

 

 

 

 

 

Scene #3

 

 

세상은 지난 4월 16일에 멈춰버린 괴로운 순간을 털고 일어서자고 한다. 일각에서는 ‘유독 세월호 희생자들에게만 과도한 슬픈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냉소적인 의견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내 의견은 다르다. 우리가 남의 일인 사고로 인해 슬픔을 느꼈다면, 그 슬픔은 단순히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수준을 넘어 본인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이입이 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슬픔을 조금은 털어내고 냉철히 현상을 짚어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슬픔을 느끼는 것 자체를 집단적 무기력 증세로 보고, 이를 금기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매년 4월이 다가올 때마다 느끼는 슬픔은 ‘화인(火印)처럼 찍혀 평생 남을 아픔’이기도 하다.

 

비 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화인(火印)』, 114쪽)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는 일은 집단적 슬픔 · 애도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계기’였을 뿐이다. 세월호 사고와 연관된 각종 문제점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극우 세력은 세월호 사고라는 하나의 사건이 갖는 사회성을 부정한다. 희생자에 향한 애도하는 행위마저 이념의 색깔을 입혀 깎아내린다. 그들의 시각은 너무나도 오만하다. 우리는 슬퍼하고 추모할 자유가 있다. 잠깐의 슬픔 후에 다시금 일상으로 걸어 들어가 숨죽이며 사는 것도, 그 슬픔을 딛고 느낀 바대로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어 행동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우리가 느낀 대로 고인들을 추모하는 자유를 당신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왈가왈부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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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4-16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아직 잊을 권리가 없다..

cyrus 2017-04-17 15:18   좋아요 0 | URL
어제 영국 프로 축구팀 맨유 유나이티드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말로 세월호 사고 3주기 추모 성명서를 공개했어요. 이 소식을 전한 네이버 뉴스 게시물의 댓글 게시판에 맨유의 추모 성명서에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고, 화가 났습니다.

영국은 매년 힐스보로 참사를 잊지 않고, 추모를 합니다. 이런 모습은 당연한 건데, 우리나라는 3년이 지난 사고를 추모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4-16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게 가장 맛있는 국수는 80년대 중반 서대전역 기차역에서 먹었던 가락국수로 기억되네요.^^: 기억할 사람은 평생 가지고 갈 사건이 세월호 참사라 생각이 들어요. 물론 잊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요..

cyrus 2017-04-17 15:23   좋아요 1 | URL
대구 서문시장에 파는 칼국수가 유명합니다.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에 먹기 좋은 음식입니다. ^^

세월호 사고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 잊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건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추모하는 일을 사회통합에 저해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매도해서 지나간 일을 덮어버리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AgalmA 2017-04-17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달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여러 문화권 사람들이 지능으로 여기는 측면을 연구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같은 사회적 속성을 지능의 한 측면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동아시아와 아프리카 문화권에서 이런 점이 두드러졌다.˝
-리처드 리스벳 <무엇이 지능을 깨우는가> 중

그 분들에게 생각 좀 하고 살고 말하자 그러면 더 욕 들을라나요^^;

cyrus 2017-04-17 22:35   좋아요 0 | URL
차분히 설득을 해도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그런 좋은 말조차 듣기 싫은 적의 말처럼 들릴 거예요.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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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 번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 누구도 이 말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당연한 섭리로써 인간의 삶은 영구 장천 계속되지 않는다. 다 알면서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죽음을 사유하는 예술가는 죽음을 낯선 것이 아닌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통해 삶을 사는 자로서의 질적 전환을 시도한다.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시라는 형식을 통해 중화된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집이다. 죽음에 대한 허수경 시인의 태도는 적극적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동시에 즐기는 독특한 방식 속에 ‘죽음’이 중화되는 공간으로서의 시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라일락』 52쪽)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라일락』에서 가장 빛나는 구절이다. 라일락은 죽음의 이미지를 거느리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슬픔을 품고 있는 꽃 같은 느낌이 든다. 꽃이 시들기 전에 바람에 의해 꽃잎이 후드득 땅바닥으로 체념하듯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웃다가 지는’ 꽃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젊음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문화에서 죽음만큼이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나이 듦’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그녀는 꽃이 피고 지는 현상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쉬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중요한 것이 바로 ‘늙어가는 과정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마음가짐’이다.

 

사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죽음만큼 두려운 일이 되어가는 것은, 늙음을 ‘아름다움에 대한 모욕’이라 여기는 사회 문화적인 환경과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온다. 결국, 모든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깨닫는 것이 현재의 삶을 즐겁게 사는 데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매우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106~107쪽)

 

 

비정한 세상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이 세상을 등져버리고 싶을 때 선택하는 수단이 ‘고독’이다. 이보다 가장 극단적이고도 불행한 방법은 소중한 자아를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자살’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독도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라고 말한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는 인간에게 있어 고독이 과연 무엇인지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한다. 철저한 단절 속에 갇힌 고독은 어두컴컴한 죽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시인의 고독은 공포와 평안을 잘 분배한 것이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의 화자는 자신만의 섬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혼자 했다. 그리고 같은 처지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편지로 고백한다. 이 시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꼭 고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꼭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여기서 보여주는 ‘짤막한 안부 인사’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즉 욕구와 욕망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떠나보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무한하지만 끝이 있는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찾아오는 평온함.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글자는 상반된 단어이기는 하지만 두 글자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삶의 끝은 곧 죽음이요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시인의 씁쓸한 고백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삶과 죽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차분하게 비춰주는 시인의 언어는 성찰을 거듭하게 한다. 독자는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행복의 중심점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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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물고기 2017-03-15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 가는 먼 집]을 곱씹어가며 읽었는데 이 것도 구매해야겠어요

cyrus 2017-03-15 16:39   좋아요 1 | URL
《혼자 가는 먼 집》은 안 읽어봤습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제가 처음으로 읽은 허수경 시인의 시집입니다. 구름물고기가 언급하신 시집도 읽어보고 싶군요. ^^

2017-03-15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5 20:41   좋아요 1 | URL
시집 리뷰를 어떻게 하면 잘 써야할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냥 느끼는대로, 생각나는대로 정리해서 쓸려고요. 이 시집, 작년에 읽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Agalma님의 리뷰를 보고, 저도 써봤습니다. ^^

[그장소] 2017-03-15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까지 ㅡ 우오~ 넘 맛나게 즐기고 갑니다!^^

cyrus 2017-03-15 20:43   좋아요 1 | URL
제가 고른 시들이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라서 진지하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장소] 2017-03-15 23:33   좋아요 1 | URL
제가 생각은 단순한데 시는 이런 시가 좋더라고요 . 가볍게 쓰는 시가 쉬운 시는 절대 아니지만 ... 덕분에 잘 읽었어요 . 아.. 들었어요! 시는 듣는 보는 그런 거 같아요.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창비시선 385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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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랫동안 한 장소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다. 문인수의 『중력』은 우리 삶의 안정감을 유지해주는 특별한 중력이다. 그 힘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세월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월은 살아있는 존재 위에 올라타게 되는데, 삶을 내리누를 정도로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움직이기 귀찮아지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만성적인 게으름은 몸과 생각을 점점 처지게 한다.

 

 

  내리누르는 힘은 바쁘다. 내리누르는 힘, 식성은 연속,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든 이름 위에 있다. 말 탄 세월은 그러나, 그러니까 사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저 모든 이름을 내리누르는 중이다. 중력, 그것은 그 무엇보다 무거워 무게가 없는 것. 그래, 당신의 눈시울이며 볼이며 목덜미며 뱃가죽이, 말투며 기억력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더 처지는 것이다. 지금은 비애가, 그 쭈글쭈글한 성욕이 너풀거린 활엽의 황홀을 뒤덮고 있다. 먹어라, 저 세월. 어떤 나무를 시퍼렇게 뒤덮은 칡넝쿨 속으로, 그걸 또 붉게 뒤덮는 저녁노을 속으로 누가 또 한바탕 새떼를 쏟아붓는다. 그럴 때, 제때 어둠이 오고, 그 어둠 위에 별들의 뾰족뾰족한 부리가 또 총총총총 올라타는 것이다. 오, 여명이 녹여 먹는, 여위는 별들…‥

 

(『중력』 중에서, 18~19쪽)

 

 

삶의 중력을 거스르는 유일한 사람이 나그네이다.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여행자이다. 그들이 집을 떠나 맞닥뜨리는 놀라운 세계에 매혹되곤 하지만, 그들처럼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까 봐 내심 두려워한다. 낯선 곳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나’를 대면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데 대해 근원적 공포를 느낀 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가끔은 한 사람의 나그네처럼, 그런 외로운 여행을 즐겨도 된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은 불안해 보이지만, 동시에 기묘한 안도감을 준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는 일상에 탈출하는 존재의 여정을 노래한 시다.

 

 

  나는 오늘도 내뺀다.

 

  나는 오랫동안 이 동네, 대구의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산다.

  나는 딱히 갈 곳도 없는데도, 시외버스정류장은 그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듯

  수십년째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선 골목골목들까지 나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아무 데나 가보려고,

 

  눈에 짚이는 대로 행선지를 골라 버스를 탄다.

  어느날은 강릉까지 표를 샀다. 강릉 훨씬 못미처 묵호에서 내렸다. 울진을 가려다가 또 변덕을 부려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아무 데나 내렸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 버려진 곳은 없어, 지금 오직 여기 사는 사람들…‥

  말 없는 일별, 일별, 선의의 낯선 사람들 인상이 모두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한 노인이 면사무소 옆 부국철물점으로 들어가

  한참을 지나도 영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갈 뿐,

  나는 지금 텅 빈 비밀, 이곳에서 이곳이 아니다. 날 모르는 이런 시골,

 

  바깥 공기가 참 좋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72~73쪽)

 

 

시인은 홀로 떠나는 것은 두렵지 않다. 처음 떠나는 곳은 언제나 낯선 곳이고, 여행은 늘 혼자이며 고독한 것이다. 자유를 누리려면 기꺼이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여행이다. 시인은 조금씩 더 먼 곳으로 떠났으며, 더 외롭고 낯선 곳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아무 데나 가본 행선지가 설령 잘못 들어섰다 해도 나와 무관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시인의 인생과 여행, 그리고 시는 뒤엉킨 한 몸이고 한 뿌리다. 시인의 여행이란 그저 길에게 나를 맡기고, 바람과 구름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다. 숲에서, 바다에서, 낯선 도시에서 무언가를 가져오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거기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들은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와 있다. 굳이 수첩에 적지 않아도 마음이 모든 것을 받아 적는다. 마음이 받아 적은 것들은 언젠가 시가 되고, 행복한 기억이 된다. 설령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여행은 여행만으로 충분하다. 오랜 옛날부터 김삿갓 같은 시인들이 방랑에 탐닉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숨겨진 모험심과 새롭게 은유하고 싶은 감정을 자극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여행’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감식안’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일상’이 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하거나 조금 더 불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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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3-10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시집에까지 마수를 뻗치시는 독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cyrus 2017-03-11 09:39   좋아요 0 | URL
이 시집, 2015년에 읽은 건데 리뷰를 쓰지 못했습니다. 2년 전에 시집을 필사한 기록을 발견해서 머리를 쥐어짜면서 리뷰를 썼어요. 역시 시집 리뷰 쓰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

yureka01 2017-03-10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며칠전에 시낭송회때 문인수 선생님도 오셨는데..소개를 못시켰네요. 아마 이동네 원로시인이시거든요..저도 몇번 인사 드린적 있었습니다.언제 기회되면 꼭 한번 뵐 기회 생기실 겁니다^^..낭만이 참 풍부하신 .ㅎㅎㅎㅎ노래 몇 번 들었거든요~~~

cyrus 2017-03-11 09:41   좋아요 1 | URL
문인수 선생님 얼굴을 봤습니다. 그 분을 실물로 직접 본 게 그 날이 처음이었어요. 만나게 될 날을 기약하면서 문 선생님 시집이 나오면 사야겠어요. ^^
 
연옥의 봄 문학과지성 시인선 493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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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한다. 우리는 삶 속에 항상 죽음이 있음을, 그리고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자신을 죽음에서 지켜내는 정신의 전략을 마련해왔다. 죽음에 대한 망각과 모른 척 잡아떼기 또는 죽음을 사회에서 배제해 삶과 분리했다.

     

황동규 시인의 《연옥의 봄》은 죽음을 관조하여 삶이 굳건해지는 경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집이다. 이제 곧 여든에 가까운 시인이 죽음을 관조하는 자세는 삶 속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일인데, 그 과정은 마치 잊은 반쪽을 찾는 것과도 같다. 칠십 넘은 세월을 살면서 잊고 있었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한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죽음에 다가설수록 더욱 풍부해진다. 내가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저 바퀴 바로 앞에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말이다.

    

 

짧은 비 그치자 밝아진 골목길에 달팽이 하나

몸보다 큰 소용돌이를 등에 지고

끝에 눈 달린 두 더듬이 좌우로 헤저으며 기고 있다.

시멘트 조각 하나를 힘들게 피한다.

눈물보다 더 진득한 분비물을 온몸에 두르고

오체투지 하고 있군.

     

슬그머니 승용차 하나가 앞을 막아선다.

바퀴 바로 앞의 오체투지!

달팽이가 더듬이 조심조심 내저으며 침착히 기어 바퀴 폭을 벗어난다.

볼 것 다 봤다는 몸짓을 하며 나도 자리를 뜬다.

볼 것 다 보았다니?

그래, 살아 있는 것들 하나같이 열심히 피고 열고 기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거짓말 없이 어떻게 자리 뜰 수 있겠는가?

     

(『오체투지』 중에서, 44~45쪽)

 

 

한없이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도 실은 온 힘을 다해 기어간다. 이 지구상의 존재들은 저마다 오체투지로 굴러가고 있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오체투지의 삶은 실존이며 생존이다. 그렇게 삶이 움직이는 순간이 힘들어도 달팽이를 생각하면 숨 쉬는 사소한 순간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망각은 곧 죽음이다. 다시 말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도 같은 존재다. 우리는 모든 걸 너무 빨리 지우면서 산다. 심지어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곳조차 잊어버린다. 죽음은 나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간다. 시인은 우리 삶 전체를 거대한 ‘기억의 집’으로 비유했다. 이승의 인간은 기억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음을 앞두면 소중하고 행복했던 집을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여기엔 이름 모를 하얀 꽃 한 무리가 피어 있군.

키 작고 꽃이파리 조금 산만하지만

가을 쑥부쟁이 닮은 봄꽃, 이름 가물가물.

아 저기에도 이름 사라진 노란 꽃.

머릿속이 캄캄해진다.

내가 드디어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보다.

     

이러다간 이 세상에서 같이 산 이름 몇마저

제대로 담지 못한 머리를 들고

저 세상 불 앞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꽃들이여, 새들이여, 저세상에는

기억이 더 아픈 자들도 서성댈 것이다.

그대들, 이름 같은 데 신경 쓰지 말고

제 생김새, 제 색깔, 제 꿈들을 가지고

기억의 집 들락날락하며 살다들 가시게.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중에서, 92~93쪽)

    

 

우리는 ‘기억의 집 들락날락하며’ 살고 있다. 잠은 죽음의 동생이다. 죽음의 본능을 가진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동생이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이다. 잠은 외부로부터 자극이 차단되고 반응이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회복이 가능한 상태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기억의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살고 있었다. 인간은 보통 일생의 30~40%를 잠으로 보낸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뭐가 아쉬워서 수면 부족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노동을 한다. 삶과 죽음이 반반씩 섞인 잠마저 잊으니까 죽음도 같이 잊어버린 걸까. 삶의 여유마저 사라지는 것도 서러운데, 수면의 여유까지 없는 세상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기억의 집’이 아니라 ‘고통의 집’이다. 기분 나쁜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누구나 이 생기 없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혼이 어디 나갔지?

쥐똥나무 쪽에서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혼이라는 거, 그게 어디 따로 있는 거우꽈?

펭생 자기답게 열심히 살면, 그게 그의 혼입주.’

     

(『섬쥐똥나무들의 혼』 중에서, 82쪽)

    

 

정신이 건강한 혼일수록 생기가 싱싱하게 돌고, 삶의 의욕도 넘친다. 꿈, 사랑, 성실로 똘똘 뭉친 오체투지의 생은 특별하다. 즉, 정신이 건강한 혼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주변을 의식해 경쟁 대상으로 삼지 말고,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자기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누구는 바른 역사 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 된다고 말했던데, 거짓과 허위 뒤에 비겁하게 숨은 사람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 그는 주변을 의식해서 자신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인다. 그 사람처럼 열심히 살지 못한 혼이 비정상이다.

   

삶이 하나의 전체로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삶의 한계’를 떠올릴 때이다. 시인은 시집을 통해 죽음과 친화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시인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연작시의 제목이자 시집 표제어인 ‘연옥의 봄’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간적 공간이다. 유한한 삶을 받아들이는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일찍 죽을 정도는 아닌 어중간한 영혼이 머무는 곳. 그러므로 그곳에 사는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죽음의 공포에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라, 삶을 보다 충만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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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7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8 08:34   좋아요 0 | URL
죽음은 내곁에 머무는 생존의 그림자.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김이지 2017-04-15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좋은 글입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공포에 떠는 삶이아니라, 삶을 보다 충만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삶이라는 것이 와닿는 대목이네요. 감사합니다

cyrus 2017-04-15 19:49   좋아요 0 | URL
한 번뿐인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벌써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