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 [할인행사]
박찬옥 감독, 문성근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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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53쪽)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의 한 구절이다. 이 때 시인이 말하는 ‘질투’는 부질없는 짝사랑이요, ‘나의 힘’이란 헛된 열망을 품은 어리석은 용기이다.

 

결국 사랑을 잃은 시인은 사랑을 ‘빈집’에 가두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떠나보낸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주인공 역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를 되뇌며 부질없는 열망을 떠나보낸다. 간혹 제목만 보고 ‘질투는 내 삶의 원동력이겠거니’ 생각하면 영화 내내 열없이 구는 주인공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영화는 간단하게 말해 한 남자에게 두 명의 여자를 빼앗긴 다른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 청년 이원상(박해일 분)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냉소적이고 냉담하다. 원상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여자가 계속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보라고 다그친다. 그에게는 정말 이미 끝난 일인데 말이다. 미련은 오히려 그를 떠난 여자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들이 걸어온 전화에 대고 그는 방 닦고 있다고 무심하게 대답할 뿐이다. 그는 순수해서 상처받기 쉬운 타입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상처를 받는 건 그의 여자들이다. 되는대로 말하고 연애를 저지르는 것 같은 일견 무책임해 보이는 중년의 편집장 한윤식(문성근 역)이 오히려 원상과 비교하면 성실하고 친절하다. 타인에게나 자기 스스로에게나...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은 듯한 여자 박성연(배종옥 역)의 매력에 영화를 보면서 새삼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길거리 리어카에서 어묵을 베어 물며, “우리 여관 가요.”라고 말한다.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욕구도 묻어 있지 않다. 분방한 것 같지만 사실 제일 삶에 성실하고 솔직한 사람이 그 여자이다.

 

 

 

 

 

 

에드바르트 뭉크  「질투 I」 1907년

 

 

미국의 어느 한 심리학자는 남녀가 질투를 표출하는 대상이 다르다고 말한다. 남자들이 여자의 성적 배신에 분노하는 반면 여성들은 남자의 감정적 배신에 더 분노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녀의 짝짓기 전략에서 나오는 특징인데, 남자는 여자가 다른 정자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최소화 해 자신의 종족 번식력을 높이려고 하고 여자는 남자를 오래 붙들어 놓아 아이의 양육에 대한 책임을 지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원상의 명대사, ‘누나, 그 사람이랑자지 마요. 나도 잘해요’를 보면 문득 남자의 짝짓기 본능이 느껴진다.

 

원상은 ‘누나, 그 사람 사랑하지 마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낯선 남자의 정자를 품는 게 두려웠던 걸까. 원상은 성연과 윤식의 동침이 내내 불편하다. 그에 반해 원상이 실수로 관계를 맺는 하숙집 딸 혜옥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원상에게 차라리 돈으로 보상하라며 악다구니를 쓴다. 자신과 자신이 품었을 그의 아이를 원상이 거두어들이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원상은 한윤식과의 정자 경쟁에서 백기를 들고 나온다.“아내한테도 잘 하고 애인한테도 잘 하면 되지. 마누라한테도 못 하고 바람도 못 피는 인간들보다 백배 낫다”는 한윤식의 말에 원상은 ‘명쾌하다’고 화답한다.

 

상당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할렘의 소유주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통사회에서처럼 원상은 윤식이 일부다처제 마냥 여성을 독식하는 데 대해 반기를 들지 않는다. 어차피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뇌까릴 뿐이다. 지배욕의 다른 표현인 질투는 어느 사이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선망으로 변한다. 결국은 삼각관계의 세 변에서 한 축이었던 성연은 사라지고 두 남자 사이의 수직관계만 남게 된다.

 

영화는 ‘질투’라고 하는 위험하고 열정적인 감정을 밋밋하고 심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에 불쑥불쑥 침투하는 ‘질투’라는 감정이 거칠고 광포한 것만은 아니다. 때론 강자에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주인공의 질투처럼 지루하고 치사하고 싱겁기까지 하다. 영화 첫 장면에 난데없이 흘러나오는 ‘마카레나’노래처럼 유행이 사그라졌을 때 생각해보면 왠지 객쩍은 느낌이 드는 것이 이성을 되찾은 질투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상, 윤식, 성연 세 인물들의 불완전한 삼각관계를 통해 우리 일상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투영한다. 세상은, 인간관계는 그리 명확하지도 선명하지도 않다. 누가 누구를 책임지고, 사랑하고, 질투하기엔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거센 물결을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은 그 물결에 부딪히며 조약돌처럼 서로를 닮아간다. 영화 속에서 질투와 좌절이라는 내용의 암울한 터널 같은 청년 시절을 볼 수도 있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중년의 속물적 삶에서 냉혹한 현실을 볼 수도 있다. 나이와 권력의 높고 낮음이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관찰기로도 읽을 수 있다. 누구의 삶을 골라보든 그 삶은 역설적이고 모순투성이다. 하지만 누구도 밉살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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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과학 SE (2disc) - 일반케이스
미셸 공드리 감독,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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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한 남자의 판타지 보고서

 

 

 

 

 

펠트 천으로 만들어진 하얀 배 속에 나무들이 자라고 역시 펠트 천으로 만들어진 말을 탄 두 남녀가 그 배로 뛰어든다. 남자의 얼굴엔 종이로 만들어진 커다란 당나귀 귀가 붙어 있고, 푸른색과 하얀색 셀로판지의 물결이 뱃전에 부딪힌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만들었을 법한 어설프지만 상상력 넘치는 소품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골판지, 색종이, 가위, 풀만 있어도 아이들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던가.

 

아이들의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덜 자란 어른 이야기를 미셸 공드리 감독이 영화《수면의 과학》에 담았다. 침대 광고의 카피처럼 느껴지는 영화 제목은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 세계를 구분하지 못했던 주인공 스테판이 써 내려가는 판타지에 대한 보고서라고 하면 적당할 듯싶다.

 

미셸 공드리는 제목도 독특한 《수면의 과학》에서 사랑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설렘과 떨림이 시작되고 미세한 통증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때. 여전히 꿈과 현실은 경계를 잃지만 사랑의 면면은 그럴수록 또렷해진다.

 

 

 

Scene #2 꿈과 현실이 뒤섞인 멜로드라마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스페인 청년 스테판은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한 뒤 어머니를 찾아 혈혈단신 파리로 온다. 어머니의 배려로 직장도 얻었지만 그는 발명가이자 화가인 그의 취향과 전혀 상관없는 달력 회사에서 기계적인 노동에 종사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옛집에 몸을 의탁한 그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소녀 스테파니를 만난다.

 

처음에는 그녀의 친구 조이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섬세하고 여린 스테파니의 호의에 스테판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고,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의 머릿속은 그녀로 인해 한층 혼란스러워진다. 혼란스럽기로 말하자면 스테파니도 마찬가지이다. 스테판은 정신분열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엉뚱한 행동과 말을 일삼아 그녀를 혼란에 빠트린다. 스테판과 스테파니의 로맨스는 이렇듯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스테판이 파리로 와서 직업을 구하고 스테파니를 처음 만나는 순간까지 드라마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진행되지만, 그 이후 이야기는 이렇다 할 전개를 보여주지도, 절정의 순간을 통해 이야기적 쾌감을 주지도 않는다. 공드리는 스테판과 스테파니가 머무는 현실 세계, 스테판의 뇌 속 세계, 스테판의 꿈이라는 세 개의 시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스테판의 의식 구조를 파헤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꿈 속 세계에서의 자기 정체성에 더 큰 편안함을 느끼는 주인공이 멀쩡한 의식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실수가 반복된다. 불안에 사로잡힌 스테판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테파니에게서 안락을 느낀다. 스테파니는 그 몽상가를 이해해주는 지구상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둘의 사랑은 마치 풀로 붙여 만든 종이인형처럼 소박하지만 동시에 상처받기도 쉽다.

 

그는 여자에게 고백 후 거절이 무서워 현실이 아닌 꿈에서 시뮬레이션을 하고, 현실에서 절망의 골을 느끼는 소심함을 지녔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은 한결같은 순진무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영화에서 감독은 스테판을 통해 꿈과 현실의 혼재를 멜로드라마라는 영화적 형식을 가미하여 그의 뛰어난 감각으로 섞어낸다. 하지만, 그러한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나타나는 교집합적인 성격은 장자의 '호접몽'에서 볼 수 있는 허무함보다는 사랑과 상상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도파민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사실 인간이 태어나 성인으로 커간다는 것은 각종 규율 속에서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선악의 개념 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눈에 몇 겹의 필터를 끼우게 됨을 뜻한다. 교육, 종교, 노동 등의 시스템은 사회화를 볼모로 권력을 차지하고 그 조직 논리에 따르지 못하는 자들을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주인공 스테판은 광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때 묻지 않은 상상력과 창의성으로 충만한 그에게 달력 만드는 회사에서 식자를 붙이는 단순 노동을 반복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아름다운 그림 대신 지구촌에 일어난 각종 재앙을 소재로 달력의 그림을 구성한 스테판의 상상력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게끔 명명된 DNA를 가진 그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광인은 과거 한때 천재성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됐지만, 중세 이후의 세상에선 그저 집단 감금의 대상일 뿐으로 운명이 조정됐다고 미셸 푸코도 지적하지 않았던가.

 

 

 

Scene #3 소통의 통로, 사랑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일종의 장애를 지닌 인물들이며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 혹은 '오브제'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이나 오브제조차 불완전하다.

 

스테판의 경우 꿈과 현실을 혼재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잡다한 생각, 그날 보고 들었던 것, 온갖 감정, 과거의 추억과 뒤얽힌 오늘의 추억’이란 요소를 집어넣어 ‘꿈 스프’를 요리할 수 있는 공간 스테판 TV를 가지고 있다. 그 공간에서 스테판은 자기의 생각을 실현 시킬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할 수 있으며, 어떠한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공간은 단지 스테판에게만 유용하다는 것이 비극이며, 현실에서는 이러한 스테판이 발버둥치는 자기 세계 확장 노력이 무시되고, 제재 당한다는 것이다.

 

스테파니의 경우 어떤 일을 시작한 후 완성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지녔다. 그녀는 자신의 집 방 한 구석에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 한 욕구를 대리충족 시켜줄 수 있는 작은 인형들과 미니어처들을 만들어놓고 진열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대상화하려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완성을 보지 못 하는 그녀는 계속 새로운 것을 널어놓는 행위를 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는 듯한 모습이다. 완성되지 않은 소유물에 대한 숫자 늘이기는 스테파니에게 또 다른 욕구 불만의 요소가 된다.

 

이 둘의 이러한 심리적 부재나 결핍의 극복요소로 공드리가 제시하는 것은 ‘가치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로써 ‘사랑’이다.

 

이건 어떤 이에게 비춰지기엔 흔한 사랑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 흔하게 비춰질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소통과 공유가 없는 사랑의 무가치성에 대해 영화 틈틈이 이야기하면서 때로는 스테판이 때로는 스테파니가 되어 그가 창조해내는 상상력의 세계와 더불어 맛깔나게 요리해낸다.

 

 

 

Scene #4 ‘꿈’과 ‘현실’로 만들어 낸 사랑철학서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이라는 사상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사랑철학서’이다. 철학은 인간의 존재와 실재에 대해 고민하게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성과 감성이라는 도구를 인간은 사용해왔다. 하지만 공드리에게 있어서 그 도구는 ‘꿈’ 이라는 것이며, 그의 체계 잡힌 논리는 이미 필름에 튼튼하게 잡혀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누군가는 공드리의《이터널 선샤인》에 비해 탄탄하지 못한 구성의 허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같은 주방장의 손에서 나온 다른 맛의 음식일 뿐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굳이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더라도 두 시간 남짓 동화 속 세상에 빠져 있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스테판은 현 사회의 잣대로 가른다면 덜 떨어진 인간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통해 기억에서 삭제되어 무의식에서만 꿈틀대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우리의 때 묻지 않은, 그러면서도 날렵했던 꿈의 모서리들이 깎여 나간 자리가 새삼 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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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
기타 (DVD)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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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죽는 것은 없어. 언제나 무엇인가가 남는단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것이 탄생해. 인생은 그런거야.

이유없는 시작이지.

 

- <안토니아스 라인> 속 대사 한 구절 -

 

 

* 미리 밝혀두건대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는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의 의미와 가치는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기에 나는 여기서 다소 지엽적인 관점으로 영화 속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사실 이 유명한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여성학이나 영화 관련 수업이 아닌 생뚱맞게 현대미술론수업 영상 자료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미술 수업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필 교수님이 외부 사정으로 수업 진행이 어렵게 돼서 임시방편으로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 한 여자의 일생으로 보는 '삶/죽음/삶'

 

안토니아스 라인은 여인 5대로 이어지는 긴 가족사가 넓은 땅과 함께 펼쳐지는 영화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딸 다니엘을 데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안토니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에는 안토니아와 다니엘 둘만 남는다. 굵은 허리에 두리두리한 몸매를 한 아줌마 안토니아는, 평생 성적 방종으로 고통을 준 남편을 원망하고 욕하며 숨을 거둔 어머니와 달리 결혼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웃집 농부 바즈의 구혼도 물리치고, 여러 이웃들과 어울려 씩씩하게 살아간다.

 

미술학교에 입학한 딸 다니엘이 결혼은 싫고 아이만을 원한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는 것을 도와주어서 아이를 갖도록 한다. 태어난 손녀 테레사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 성폭행의 아픔을 겪고 방황하지만 결국 오래 곁에서 지켜준 마을 친구와의 사이에서 딸 사라를 낳는다. 그러니까 사라는 안토니아에게 증손녀, 이렇게 해서 여인 5대를 이루게 된다.

 

마을에서는 쉬지 않고 사람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끌어안는 안토니아는 '사는 게 인생이며, 인생은 살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증손녀 사라에게 이야기한다. '이 춤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이라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자신의 마지막 날을 예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삶/죽음/삶', 이 영화는 안토니아의 모계 가족이 함께 모여 화목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과

주변 인물들이 한 사람씩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교차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나이가 많이 든 안토니아가 이제 죽음을 느끼며 준비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불러 모아 다가온 죽음을 알리고, 눈감은 채 죽을 준비를 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죽음이다.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온 몸에 기계 장치를 달고 문 밖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 모두가 꿈꾸는 마지막 모습이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인간의 운명, 그러나 끝나지 않는 인생. 영화 중반부에 점점 가족의 수가 늘어나 화목한 분위기의 가족 식사 장면이 많이 차지한다면 영화 결말부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죽음의 두려움을 환기시켜준다. 그래서 인생은 누군가 떠난 자리에서 또다시 시작되는 것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영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하나로 이어지게 처리해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이러한 인생의 주기를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생명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죽음에 의한 소멸은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 생명의 부활이 시작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존재의 본질을 묻는 이 질문은 인간에게는 가장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결국, 우리네 인생을 묘사하는 영화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그린 한 폭의 풍경화와도 같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인생의 단계」 1834년

 

 

노을 지는 해변에 다섯 사람이 등장했다. 바다에는 다섯 척의 배가 떠 있다. 다섯 사람은 인생의 시기를 뜻하고 다섯 척의 배는 인간을 의미한다. 스웨덴 국기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두 아이는 유년기, 아이들 곁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는 청년기, 중절모를 쓴 정장 차림의 남자는 중년기,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뒷모습의 노인은 노년기를 상징한다. 이 그림은 프리드리히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생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증거물이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향해 출항하는 배들은 활동적이다. 그러다가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완전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최종 목적지(사람의 인생에 비유한다면 '죽음')에 도착한다. 그러나 또 다른 배들은 미지의 세상을 향해 다시 한 번 돛을 활짝 펼쳐 출항할 것이다.

 

영화는 일레곤다는 안토니아를, 안토니아는 다니엘을, 다니엘은 테레사를, 테레사는 사라를 낳았다는 식의 모계(母系)가 탄생한다. 그리고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반복하면서 증손녀인 사라가 안토니아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러한 순환구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삶과 죽음의 고리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영화제목인 안토니아스 라인은 단순히 안토니아 중심의 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주기라는 예고된 삶의 연대기를 함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여장부’, ‘어머니 늑대안토니아

 

 

 

 

 

안토니아는 여장부처럼 당돌하면서도 자기 기준이 확고하다. 이웃 농부 바즈가 그녀에게 '내 아들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다'고 청혼을 한다. 그러자 안토니아의 대답. '난 아들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러고는 오히려 되묻는다. '왜 남편이 필요하죠?' 두 가족은 종종 식사를 같이 하며 친숙한 이웃으로 지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안토니아는 바즈에게 자신의 성적 욕구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표시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이 아닌 제3의 장소를 고른다. 숲 속의 오두막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같이 차를 타고 등불 하나 손에 들고 떠나는 두 사람. 안토니아의 딸과 손녀가 배웅한다.

 

한편으로는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주장하는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안토니아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머니 늑대는 선천적으로 사랑이 넘치고, 적응력과 직관력이 뛰어나며, 씩씩하고 용감한 존재다. 그래서 주체적인 삶으로 개척할 수 있는 당당한 풍모가 느껴진다.

 

각자 자기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가끔 한 식탁에 온 가족이 마주 앉고, 필요할 때는 제3의 장소에서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동거에 대해서 단순한 성적, 경제적 문제 해결을 위한 출구냐, 수많은 결함과 문제를 안고 있는 결혼 제도에 대한 대안이냐 하는 논의가 무성한데, 안토니아와 바즈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노년의 사랑과 결혼을 생각해 봐도 안토니아와 바즈가 하나의 대안은 되지 않을까. 노년의 사랑과 결혼이 호적 문제, 재산 문제 등으로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데, 각자 자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둘 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물론 한 쪽이 병에 걸리거나 세상을 떠났을 경우를 예상해서 분명한 약속들을 하는 것이 앞서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안토니아는 주름지고 검버섯 핀 얼굴이 되어서도 여전히 강하고 건강하다. 그리고 넓다. 몸담아 살고 있는 땅을 닮았다. 모든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주는 땅의 얼굴이다. 큰 나무를 닮았다. 저 땅 끝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서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생명을 묵묵히 지켜보는 나무의 모습이다.

 

세상 떠난 어머니를 빼고 여인 4대가 남자에 매이지 않고 생활해 나가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신선하다. 유쾌하기도 하다. 물론 폭력으로 상하는 어린 영혼의 이야기는 눈물 겹지만, 주변 남자들의 폭력과 오만, 위선 등이 깨져 나갈 때도 가끔은 웃음 짓게 하는 여유가 있다. 새로운 가족의 형태니 동거의 한 방식이니 하는 논의에서는 비껴간다 해도, 구원은 결국 여성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는 소리 높이지 않고 말하고 있다. 여성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인생을 정확하게 묘사한 영화인 것은 자연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안토니아가 그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안아 주고 있다.

 

남자 입장에서 본다면 영화 속 안토니아의 행동이 상당히 충격스러우면서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사람이라면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이라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오랫동안 붙어 있는 수식어를 잠시 잊은 채 영화를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안토니아와 그 주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울고 웃는 장면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우리가 잊고 있던 화목한 가족애의 훈훈함, 그리고 가볍지 않은 인생사의 진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여성 출연자들의 가슴과 음모가 드러나는 베드신이 있는 19금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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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11-05 11:2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이 영화 오래 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네.
꽤 괜찮았던 영화로 기억하는데, 봤을 때만해도 유럽 영화가 익숙치 않아
조금은 뜨아하기도 했어. 다시 보면 어떨까? 지금은 유럽 영화 좋아하게 됐는데 말야.ㅋ
확실히 이 영화는 페미니즘 이상을 뛰어넘는 뭔가가 있지.

요즘은 기억이 가물거려서 어떤 영화는 옛날에 봐 놓고도 안 봤다고
다시 보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어.ㅠㅠ

cyrus 2013-11-05 20:26   좋아요 0 | URL
처음엔 이름만 들었을 땐, 별 관심 없었다가 막상 보고나니 나름 충격적인(?) 장면도 있고,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서 이 영화가 좋았어요. 사실 저도 유럽 영화를 많이 본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언젠가 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보고 싶네요. ^^
 
[블루레이]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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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시는 공기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물질이 들어있다. 병을 일으키는 세균도 있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이물질들을 모두 뺀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 병이 없어질까? 아니다. 오히려 면역력이 사라져 인간의 몸은 더 큰 질병에 노출된다. 이 무결점 공기 이론을 사랑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고통과 상처없이 순전 무결한 사랑. 세상의 모든 연인이 바라는 것일 테지만, 그 완벽한 커플에 우린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이런 질문에 상상력을 더하여 만든 이야기다.

 

밸런타인데이.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온다. 출근길을 서둘던 사내. 자신의 차에는 흠집이 나있다. 기차역에 도착한 그는 ‘밸런타인데이’라는 사실이 우울하다. 그는 사랑을 고백할 여인이 없었다. 건너편 모타우크로 가는 기차. 출발 전이다. 남자는 무작정 건너가 기차에 오른다. 출근길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왜 충동적으로 그랬는지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어느덧 그는 모타우크의 바닷가에서 차가운 바람과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바닷가의 한 편에 주홍색 머리를 한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닷가에서 마주쳤던 주홍색 머리를 한 여자와 같은 칸에 탔다. 소심한 남자와 달리 여자는 쾌활하고 적극적이다. 여자는 남자 옆에 가 앉는다. 착하고 소심한 조엘(짐 캐리 분)과 당당하고 자유로운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은 그렇게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계속되는 말다툼 끝에 이별에 이르고야 만다. 클레멘타인이 먼저 조엘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사랑의 아픈 기억을 지워주는 희한한 병원. 이 사실을 안 조엘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삭제시킨다. 그렇게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조엘은 알 수 없는 고립감에 빠진다. 지워질수록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의 기억은 그 어떤 질서도 가지지 않은 채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자연스럽게 떠올릴 때가 있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지워가면서 조엘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을 무의식의 무덤에서 파내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경험했던 일들은 시간과 중요도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따라 기억 속에서 다른 선명도를 갖는다. 최근의 일들은 또렷하고 과거의 일들은 흐릿하다. 그러나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리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무의식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삭제작업들을 중단시키기 위해 무의식 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상처없이 안전하게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연인들의 욕망이다. 헤어진 경우에는 마음에 문신처럼 남겨진 상대방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괴로워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랑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든다. 누구에게나 사랑보다 그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아픈 순간이 있다. 시간은 모든 연인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인들은 서로에게 흠뻑 빠져 들기도 하지만 때론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을 후회 섞인 탄식을 되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때 사랑했던 그 혹은 그녀와의 기억을 쉽게 지울 수는 없다. 주고받았던 선물, 편지는 없애버리면 되고, 사랑을 나눴던 장소는 찾지 않으면 되지만 ‘내 머릿속의 메모리’는 ‘리셋’(reset) 다고 될 것이 아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내장된 기억장치의 용량 차이로 그 속도가 문제일 뿐이다.그래서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행복할까?’ ‘그럼 한 번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지워져가는 두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터널 선샤인>은 결국 사랑은 상대방의 모든 것, 아픈 기억까지도 포함한다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랑은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지만 그것들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자세라는 함의다. 또한 사랑의 추억이란 고통의 기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영화는 사랑은 단순히 기억이란 의식적인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랑은 무의식의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주변 인물들도 추억을 삭제했지만 우연한 순간에 동일한 상대를 향해 새로운 감정이 샘솟는 것이다. 그러나 조엘의 눈에 비친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시시각각 바뀌어 있다. 사랑은 질투와 욕망으로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기형도 시인은 연인과 헤어진 후의 사무치는 마음을 그의 시 '빈집'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중략)'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난 후에, 오히려 그 기억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사랑의 기억을 다시 재생하면서 그는 연인을 잊으려 했다. 조엘이 사랑의 기억을 소거하면서 잊으려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방법이야 무엇이든, 잃어버린 사랑을 기억에서 지우는 과정조차 달콤하고도 쓰라린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사랑하면서 만나게 된 눈물, 상처, 웃음, 행복은 사랑에 관한 모든 순간과 과정을 되새기게 된다. 그것은 훗날 잔잔한 추억이 되어 감동으로 재생된다. 첫 만남의 설렘이 영원할 수는 없다. 누구나 느끼는 이 딜레마를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의 수많은 연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와 그로 인한 상처를 보여주면서도 사랑을 긍정하도록 만든다. 진정 사랑하는 연인들이라면 어떤 상처가 있다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 상처들을 다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 설렘의 기억을 얼마나 자주 재생버튼을 누르느냐, 그것이 사랑을 유지시켜나가는 관건인 것이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이 영화에서 몇 번 인용되는 니체의 잠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망각에 저항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잠언을 수용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니체의 명언을 살짝 바꿔봤다. “망각하지 않으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용감하게 시간의 무자비함에 맞서 사랑의 정수를 맛보려 하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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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취향
아네스 자우이 감독, 알랭 샤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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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마음의 벽을 ‘섬’으로 표현했다. 프랑스 영화 <타인의 취향>은 사람들 저마다가 가진 '취향'이 그 섬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얼마나 자주 '내 취향'이라는 말을 내뱉는가. 내 타입, 내 스타일로도 말해지는 이 취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공해 진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것 저 것 다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교훈일 뿐 자신을 살아내기도 버거워지는 나이쯤이면 나와 공감대를 지닌 묶음에 들어가는 게 속 편해진다. 이제 그 밖의 세상은 굳이 어울릴 필요도 어울리고 싶지도 않은 여집합이 되고 만다. 꽤 여러 곳에 걸쳐져 있던 공통집합은 갈수록 줄어들어 어느새 작은 섬이 되고 만다.

 

 

 

 

 

<타인의 취향>에 떠 있는 섬들을 살펴보자. 성공한 사업가 카스텔로는 적당한 성공에 안주한 채 늘 먹을 것만 찾는 속물스런 구세대 남성의 전형이다. 이에 반해 그의 아내 앙젤리크는 전문가적인 취향과 품위를 지닌 중년여성임을 자부한다. 불균형, 그러나 뜻밖에도 둘의 관계는 원만하다. 저속한 취향은 고사하고 아예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일체의 취향조차도 가지지 못한 카스텔라가 그저 부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맞춰주었으며, 아내 역시 오직 자신의 취향만으로 완벽하게 구축해놓은 가정의 적잖은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기괴해 보이는 부부의 평온은 카스텔라가 뜻밖의 계기를 통해 ‘취향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카스텔라의 영혼을 뒤흔들어 깨운 것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실제로 한 점의 그림, 한 편의 영화나 연극, 시, 음악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만남이나 이별, 심지어 진부하기 짝이 없는 TV 드라마에서 스치듯 들리는 한 마디 대사로도 영혼을 뒤흔드는 경천지동의 균열은 시작될 수 있다. 조카가 등장하는 연극작품이 상연되는 극장에 가자는 아내의 청이 귀찮다. "지루한 연극을 왜본담". 그의 아내는 올케의 새집 단장을 도와주며 예쁜 인테리어를 싫어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쩜 저런 스타일을 고르지?" 연극배우 클라라는 영어회화 아르바이트로 만나게 된 카스텔로가 그냥 싫다. "대머리에 콧수염. 문학적인 소양이라곤 전혀 없고..." 카스텔로의 운전기사도 그의 보디가드도 저마다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왜 저들은 저렇게 살고 있는 거지?"하면서.

 

 

 

 

초반 영화는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등장인물 각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사회적인 관계 이외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진 이들 사이에 사연이 생겨나는 건 카스텔로와 클라라가 만나면서부터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첫 만남이 관객도 깜빡 속을 만큼 무의미하게 지나친다는 점이다.

영어회화 선생으로 면접을 받으러 온 클라라에게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카스텔로는 형식적으로 그녀를 대한다. 두 사람은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조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간 카스텔로는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클라라를 보게 된다.

 

이제 카스텔로에게 그녀는 그냥 클라라가 아니라 특별한 클라라가 된다. 누군가를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 또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이 특별한 것이 된다는 의미다. 문화적인 것들에는 전혀 무관심하던 카스텔로는 클라라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연극을 보고 예술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클라라에게 쏟는 그의 정성은 "내 타입이 아니야"라는 단 한가지이유로 무참히 거부당한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을 밀어 버리고 사랑을 고백하던 날 그녀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그를 밀어낸다.

 

비로 클라라에게 어설픈 영시로 사랑의 마음을 고백했다가 가슴 아픈 거절의 상처를 받기도 하짐나, 그러는 가운데 차츰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새삼스레 느끼기 시작한다. 아직 잘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드는 그림을 구입하고, 내친 김에 공장에는 거대한 벽화를 주문한다. 유능한 부하직원의 말을 무시하고 매사에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하던 그가 직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를 고민하며, 벽화를 주문하기 전에 다른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카스텔라는 '변화'해간다.

 

 

 

 

하지만 앙젤리크는 남편의 이런 변화를 전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편은 변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저 자신에게 맞춰줘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고 분명해서 타인의 입장이나 취향을 배려할 수 잇는 여지가 전혀 없다. 모든 이들보다 우월함을 확신하는 그녀에게 있어, 타인의 취향이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저급한 것들이고, 이에 따라 세상은 자신의 일방적인 돌봄만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그런 앙젤리크에게 남편은 한 명의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 동물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고 흐느끼는 남편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거리며 마치 한 마리 강아치처럼 대하는 것뿐이었다.

 

이렇듯 타인과의 만남에 있어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소통의 오만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관계의 파국을 자초한다. 자신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아내의 무감각함은 역설적으로 카스텔로를 '각성'하게 한다. 아내에게 있어서 자신이란 존재는 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수단'이나 '배경'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카스텔로는 입센의 <인형의 집>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이기적인 남편으로부터 '인형'으로 취급받는 삶을 살았던 <인형의 집> 주인공 '로라'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아내의 취향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신이 선택한 단 한 점의 그림이 무참히 떼어진 후 결국 카스텔로가 아내를 떠나는 설정은 연극 <인형의 집>의 현대적인 범주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타이밍의 예술이라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벌레처럼 싫던 그가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대에 올라 끊임없이 객석을 쳐다보는 클라라. 놓쳐 버린 사랑으로 슬픔에 젖은 그녀가 마지막 커튼콜을 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영화 내내 냉정함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무대 맨 앞에서 카스텔로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취향만큼 견고하게 개인을 싸고 있는 껍질이 어디 있을까. 소통의 원천은 마음이라는 걸 잊고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자기방어, 단지 그것이 취향인데 말이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것이 ‘운명’이라는 단독 엔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라는 수동 기어와 핸들링으로 선택되고 작동된다고 암시한다. 그렇다면 연애한다는 것은 너와 나, 두 사람 간 취향의 선택과정이 아닐까. '나의 취향’이란 스스로를 남 앞에서 표현할 줄 알고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결국 나의 취향이란 나의 존재방식이다. 나의 취향을 인정받고 관계의 만족감을 느끼려면 바로 타인의 취향과 교감했을 때 가능하다. ‘타인의 취향’을 수용하여야 나의 취향이 자라고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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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8-01 01:00   좋아요 0 | URL
아! 이 멋진 글을 제가 왜 못보고 지나쳤을까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취향은 서로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비롯하여 결혼 후 제가 좋아하게 된 영화들은 대부분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물론 절대 닮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지요.
저는 여전히 액션과 공포물도 좋아하지만,
아내는 절대 때려부수는 영화나 피를 튀기는 영화를 보지 않거든요.

[룩엣미]도 보셨나요?
그 영화에 대한 평도 읽고 싶어지는데요.

cyrus 2013-08-02 00:08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저번 학기 때 현대미술론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담당교수님이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강조하다는 취지에서 이 영화를 보여줬어요. 이 영화 말고도 미국 흑인 문제를 다룬 '타임 투 킬'도 보게 되었죠. '룩엣미'는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시간 나면 영화를 많이 보고 싶네요 ^^

감은빛 2013-08-06 02:08   좋아요 0 | URL
[룩엣미]도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입니다.
[타인의 취향] 이후에 찍은 작품인데,
거의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 교수님이 강조한 시선과 관점에 대한 부분으로 보면
이 영화 역시 탁월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타인의 취향]보다 [룩엣미]를 더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