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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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이성계,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1392년 이성계가 왕좌에 올라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1388년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8도 도통사 최영과 우왕, 창왕을 제거했을 때 이미 예견됐다. 그의 조선건국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오래전부터 역사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했던 논쟁적인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학자들 중에는 ‘황금을 돌같이 보라’던 최영 장군과 ‘이 몸이 죽고 죽을 때까지 고려왕조에 충성하겠다’는 정몽주를 죽인 점을 보더라도 이성계는 잔혹한 쿠데타 세력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학문적으로 쿠데타는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지칭한다. 쿠데타는 지배자의 교체를 목적으로 하며, 혁명과 달리 민중의 지지가 없다. 쿠데타는 또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대파의 체포. 탄압, 정부요인의 납치, 암살, 군사적 강압 등을 배경으로 한다. 또 언로를 장악하고 대국민 선전에 나선다. 이렇게 볼 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은 명백히 쿠데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성계의 건국 과정이 아니라 그의 집권이 대다수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건국과정의 불법과 폭력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지배층간의 권력투쟁만 살피는 오류에 빠진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오직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을 뿐인가, 대다수 국민의 삶을 이전보다 나아지게 했는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조선을 건국할 당시 고려는 안팎으로 위기였다. 왜구가 날뛰었고 바닷가에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비옥한 땅과 소금 생산, 목축에 유용한 토지는 대부분 버려졌다. 조세수입은 줄었고 해로를 통한 운송은 불가능했다. 해안의 조세 창고는 모두 내륙으로 이동했다. 왜구가 날뛰고 있었지만 고려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권문세족의 토지 장악으로 농민의 조세 부담은 도를 넘었고 국가 재정은 극도로 취약해졌다. 세금을 낼 수 없는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길에 오르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성계는 권력을 장악한 후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권문세족의 농장을 해체하고 신진사대부에게 고루 토지를 나눠줬다. 문란한 조세제도를 고쳐 농민생활을 안정시켰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지방을 8도로 개편하고 고려 때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역까지 수령을 파견했다. 중앙에서 직접 전국 구석구석을 살피겠다는 의지였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은 명백히 쿠데타였다. 그러나 그의 쿠데타가 다수 백성에겐 유익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다. 이성계가 가장 크게 비판을 받는 부분은 새 왕조 건설이다. 굳이 기존 왕조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있는 한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국가와 국민은 왕과 왕족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정부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고려 왕조가 유지돼야 할 이유는 없다.

 

정도전은 ‘임금은 하늘이 만들어 준다’고 했다. 민심이 떠나면 왕조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분명히 고려를 무너뜨린 쿠데타 세력의 변명이다. 그러나 ‘민심은 언제든 왕조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진리다. 이 진리는 고려뿐만 아니라 어느 왕조에나 똑같이 적용된다.

 

 

 

 Scene #2  두 건국 공신의 엇갈린 운명

 

"임금의 자리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한번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 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리라."

삼봉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의 건국과 치세 이념을 밝힌 대목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자는 천하를 한순간에 잃게 된다는 사실을 건국에 즈음해 만든 법전에 명시해 놓았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그는 역성(易姓)혁명의 당위성을 국민저항권에서 찾았다. 정도전은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요, 군주의 하늘이라 했다. 임금보다는 나라가 더 위에 있고 나라보다는 백성이 더 상위 개념임을 제시했던 것이다.

 

 

 

왕(王)이란 글자는 본래 생사여탈권을 상징하는 도끼를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 조선왕의 면복에도 도끼 무늬가 들어 있었다. 정도전과 이방인은 서로 도끼를 쥐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였다. (77쪽)

 


이성계의 뜻에 따라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국왕이 아닌 재상이 중심이 되는 입헌군주제를 꿈꿨다. 바로 이러한 재상중심체제와 세자 책봉문제 탓에 정도전은절치부심 비수를 간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살해당한다.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에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개국한 새 왕조 조선이었기에 이방원의 야심은 당연히 왕권에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이 바라보는 국권의 조건도 너무나도 달랐다. 어느 왕조에서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다툼은 치열했다. 조선 왕조 초기, 태종과 정도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이 표방한 왕도정치도 곧 신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반면 이방원은 강력한 왕의 권위를 고집했다. 결국 정도전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태종은 역대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정도전이 혼신의 정열을 쏟으며 이루고자 했던 것은 오로지 백성을 근 본에 둔 이상적인 국가였다. 정도전의 천재적인 열정과 천년대계의 꿈은 왕권에 눈먼 이방원 일파에 의해 허망하게 꺾였고 조선조 지배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폄훼되고 소외 됐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혁명정신은 조선왕조 500년을 유지시켰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Scene #3  부흥의 기지개를 켜다


경도 한성부에 관한 세부적인 설명(92~93쪽), ‘민음 한국사’ 시리즈는 풍부한 도판뿐만 아니라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기존의 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한국사를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자였던 방석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형 방간을 제거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즉위 후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가장 먼저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래서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사병을 없애 군사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의정부를 두어 재상들이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도록 하였지만 왕이 크고 작은 나라 일을 결정하고 6조로 하여금 왕명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왕권이 확립되자 호패법을 실시하여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 조세 징수와 군역을 활용했다. 대내외적으로 태종은 18년간의 왕위 동안 국가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명·일본·여진 등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다. 특히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병권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의 대마도 정벌을 주도했다.


이렇게 태종 때에 확고한 왕권의 안정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의 발판을 다졌다. 이런 태종의 노력으로 세종 때에 조선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우리 민족 문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태종 시우리가 눈여겨 봐야하고, 이제는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 이하 ‘강리도’)이다. 지도 이름인데 너무 길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는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 정말 유명하고, 중요하지만 조선 건국 초기에 나온 이 지도도 역사적 가치가 높다.


세계의 지리학자들은 조선 태종 2년(1402)에 만들어진 강리도를 보고 놀란다. 유럽도 제법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스페인은 금방 식별할 수가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랑스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인다. 1492년에 아메리카를 조우하게 될 제노아 사람 콜럼버스가 이 지도를 보았다면, 자신의 고향을 이 지도에서 찾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지팡구(일본)와 카타이(중국)가 얼마나 큰 지 놀랐을 것이다.


일본의 모습이 비록 작게 그려져 있지만,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학자들은 큐슈와 혼슈의 위치 잡기가 상당히 정확하고, 간토 이북의 묘사도 당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교기 지도보다 낫다고 말한다. 다만 일본 열도의 위치를 한반도 남쪽에다 그려 넣어 전체구도가 일그러졌고, 위도도 뒤집어져 있지만, 이는 여백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편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대교린의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애써 세계지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에서 가져온 지도를 그냥 이용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조선은 자주적으로 세계지도를 그렸다. 국초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요동수복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태종은 권근과 이회에 일러 우리 시각에 선 세계지도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북쪽으로는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고, 남쪽에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기 때문에 건국 초기 조선은 해외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혼일강리역대국지도의 세부 설명 (65쪽)

 

 

이회는 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명에서 가져온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합성하였고, 일본에도 사람을 두 차례나 보내 지도를 구하고, 실제조사를 하게 하였다. 강리도는 15세기 조선의 지도제작자들이 얼마나 외부의 정보를 가공하고 합성하는데 뛰어났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그리스의 위대한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아랍-페르시아의 지도 제작자, 중국과 일본의 지도 제작자들의 지식이 훌륭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세계지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실측도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과 조선이 대단히 크게 그려졌고, 일본은 왜소하게 그려졌다. 실제로 중국과 조선의 상대적 크기는 50:1이지만, 지도에서는 5:1로 그려져 있다. 한반도의 크기가 10배나 부풀려진 것이다. 한반도보다 2배의 크기를 지닌 일본열도도 지도에서는 1/5 가량의 크기로 그려져 있다. 역시 이것도 10배나 부풀려져 있는 셈이다.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 등 나머지 세계도 대단히 축소된 형태로 그려져 있고, 인도 대륙도 해안선에 붙어있어 금방 식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 지도가 당대 조선의 국제정치적 관심을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심상지도(心象地圖)인 것은 분명하다.


태종은 자신의 뒤를 이을 왕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간다. 너는 태평의 시대를 열어라.”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 기반을 굳건히 했다. 이런 태종의 노력은 세종 때에 그 결실을 맺게 된다. 건국의 꿈으로 뒤척이던 조선은 이제 부흥의 기지개를 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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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2 -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 몸젠의 로마사 2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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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로마가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로마제국은 세계역사 중에서 가장 강하고 오랫동안 존속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탄생해 기원 후 476년 서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약 120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했다. 동로마제국이 유지됐던 시기까지 포함하면 약 2200년 이상을 대제국으로 존재한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 서구인들에게 로마의 역사는 그다지 호의적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은 로마의 쇠망을 조금 더 늦췄을 뿐”이라고 폄하한 토인비를 비롯해 많은 서구 역사가들은 “공화정시대는 존경하지만 제국이 되자마자 로마의 타락이 시작됐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로마처럼 당대 최강의 국력을 지니고서도 장기간 존속한 조직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로마’는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로마 시내를 뒤덮고 있는 웅장한 건축물들이 가지는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열등한 민족인 로마인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바로 로마의 ‘생존과 성공 DNA’를 찾는 과정일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테베라 강 유역에서 시작된 작은 공동체가 지중해는 물론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정확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적절한 대응, 즉 유연함이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국가나 조직은 물론 개인 안에서도 갈등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 갈등의 원인을 정확히 인식하고, 변화를 능동적으로 반영하는 체제를 준비하는 유연함, 그리고 그러한 유연함이 지배하는 문화의 필요성이 바로 로마가 공화정으로 전환하는 역사적 과정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Scene #2  견제와 균형 시스템으로 발전
 
로마제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시스템의 힘에 의해 성장했고 발전을 거듭했다는 점이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절대 권력을 지닌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된 ‘전제군주 시대’도 경험했지만 많은 지도층과 시민에 의해 국가가 운영됐을 때 조직력은 더욱 충만했다. 장군 한 사람보다 수많은 시민군이, 군주 한 사람보다는 수많은 집정관들이 로마 힘의 원천이었다.

 

왕정, 귀족정, 민주정 원리가 혼합된 정치체제가 성공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왕정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 국가 기초를 만들어 나갔으며, 성장기에는 귀족과 평민이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조화를 유지하면서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1인 지배에 의해 정치적 균형이 무너지고 국가가 개인에 의존하게 되면서 로마는 발전의 에너지를 잃어갔다.

 

로마 정치체제는 집정관에 초점을 맞추면 왕정처럼 보이고 원로원 기능에만 주목하면 귀족정처럼 보인다. 또 민회를 중시하는 사람은 민주정이라고 평가한다. 수많은 집정관이 해마다 바뀌었는데도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어느 한 부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가 시스템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

 

공화정 시기 집정관은 왕을 대신했는데 민회에서 선출돼 원로원 승인을 얻어 취임했다. 그 절차는 왕과 마찬가지였지만 종신제였던 왕에 비해 임기가 1년밖에 안됐다. 다만 재선은 허용됐고 연령은 40세 이상으로 제한됐다. 게다가 정원이 두 명이었고 동료 집정관 생각이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집정관이 동의하지 않는 한 정책은 집행되지 않을 정도로 견제와 균형 원리에 충실했다.

 

로마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도가 호민관이다. 로마는 공화정 초기인 BC 494년 이 제도를 도입했다. 호민관은 평민으로 이뤄진 민회에서 선출했으며 민회 의장으로 민회를 소집하고 주재했다. 호민관은 민회에서 독점적으로 법률을 발의할 수 있는 권리와 때에 따라 원로원을 소집하고 청원할 권리가 있었다. 또 집정관 및 정무관의 결정이나 다른 동료 호민관의 결정이 평민의 권익에 배치될 때에는 거부권을 행사해 무효화하거나 중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호민관의 중요한 역할은 평민의 요구를 대변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었다. 집정관이나 정무관의 전횡을 막아달라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든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평민이 언제든 찾아와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호민관은 밤낮 자기 집 문을 열어 놓아야 했고 도시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했다. 호민관은 위협을 받지 않고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의 신체는 신성불가침으로 선포됐다.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의무 수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로마는 호민관을 매년 선출해 평민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계급 간 갈등을 봉합할 수 있었다. 로마가 국가 운영의 묘를 살리면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호민관이 평민과 귀족의 완충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Scene #3  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으며 꾸준히 로마는 이루었다

 

우리는 흔히 “로마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경구를 자주 인용하곤 한다. 천년이 넘는 역사에서 로마는 계속 성공만 해왔을까.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쪽이다.

 

로마도 인간이 만든 제국인 이상 실패가 없을 수 없다. 오히려 성공보다는 실패와 좌절의 역사가 길었다. 하지만 그들이 짧게 성공했다 멸망한 동시대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다른 점은,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주저 없이 개혁을 단행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던 데 있다.

로마가 천년 이상 존속한 이유는 결코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들의 자질이 특별히 우수해서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한걸음 한걸음 개선해왔기에 번영을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미덕을 로마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초기 로마의 왕과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솔선수범과 절제된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나 로마의 모든 사회지도층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보수와 진보가 벽을 쌓고 살듯이 초기 로마도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심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권력에 눈이 먼 일부 혈통귀족들은 평민의 생활에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신경 썼을 뿐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이 제정됨으로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완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당시 귀족과 평민의 갈등은 로마 사회의 일치를 해치는 주범이었다. 리키니우스법에 따라 평민도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어 모든 국가 요직도 평민에게 개방됐다. 귀족. 평민 간 결혼도 합법화했다.

 

개혁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개혁은 반드시 기득권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개혁이란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기 어렵다.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역사상 수많은 민족이나 국가, 집단이 등장했지만 그러한 노력을 꺼려 쇠퇴해갔고 그 노력을 아끼지 않은 소수만이 미래를 개척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인들은 구조조정의 달인들이었다. 어떤 정치시스템이나 조직시스템이든 처음부터 국민이나 조직 구성원을 불행에 빠뜨리려고 생각하면서 만들어진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기가 ‘선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거나 시행되는 과정에서 ‘악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만든 자의 의지대로만 되는 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인은 시스템 자체에 있다기보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있다. 왕정, 귀족정, 민주정, 독재정으로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변화한 그리스와 비교하면 오랜 기간 동안 왕정, 공화정, 제정으로 바뀐 로마의 정체(政體) 변화는 둔한 소처럼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 정체의 변화를 ‘로마 혁명의 보수성’이라는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한번 개혁의지를 다지면 흔들림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기원전 4세기 7개월간 켈트족의 침략을 받아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로마가 이를 극복해간 과정이 좋은 예다. 20년 만에 로마의 복구가 어느 정도 끝났지만, 조금만 회복되면 반성의 자세를 금방 잊는 다른 민족과 달리 로마인들은 로마 부흥-방위체제 확립-내정 개혁 이라는 개혁 프로세스를 단호하게 밀고 나갔다.

 

Festina lente(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으며 다만 꾸준히). 로마는 그렇게 내부 갈등을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었다. 로마와 같은 노력과 시간과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본받을 점은 본받되 로마를 모방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융화와 접점이지만,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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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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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동요 속에 숨겨진 민중의 소망

 

‘맛동(薯童, 서동) 도령’. 어머니가 용의 정기를 받아 낳았고, 익산에서 자랐다. 생계를 위해 늘 마를 캐 팔러 다녔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때는 6세기말. 신라 26대 진평왕에게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셋째 딸 선화 공주가 있었다. 소문은 이웃나라 산골에 사는 서동의 귀에도 들렸다. 서동은 스님으로 변장해 서라벌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눠주는 대신, 자신이 직접 만든 동요 하나를 부르게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전하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인 ‘서동요’이다.

 

‘선화 공주님은 /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 맛동 도련님을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불과 25개의 한자로 이루어진 노래였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노래를 듣고 대노한 진평왕은 딸을 쫓아냈고, 서동은 큰 힘 안들이고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그녀를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무왕’(武王)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된다.

 

그러나 무왕이 생존했던 백제가 여전히 신라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사실을 보면 한창 마를 캐던 서동이 지은 동요가 아닐 수 있다. 서동과 선화는 향가 내용대로 부부의 정을 통하는데 성공했지만, 신라와 백제는 서로 평화를 유지하는 정을 통하지 않은 것 같다. 선화 공주는 무왕에게 간청하여 미륵사지 석탑을 창건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이자 적국인 신라에게 향하는 평화의 랜드마크가 될 수 없었다. 무왕이 신라 서쪽 국경을 여러 번 침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일연은 이 서동 설화가 계략과 모함에 대한 비난이 아닌 국경을 뛰어넘은'역사적 로맨스'로 남길 바랐다. 이후 무왕이 신라에 얼마나 적대적이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서동요’의 목적이 노래를 이용한 유언비어로 여자 차지하기였다면, 일연에게는 설화적 기록을 통한 국민화합이 목표였지 않았을까. 후삼국으로 다시 찢어진 나라를 하나로 통합한 고려의 최우선 국가 과제가 사회 통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따라서 서동 이야기와 서동요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고대부터 전승된 설화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질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서로 우호적인 관계로 지내기를 원하는 그 당시 민중의 소망 또한 서려 있는 것이다.

 

 

 

 Scene #2   “아! 저기 그가 있어. 매춘부 사생아가!”

 

이제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여기 서동요처럼 짧은 시와 노래의 위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이 있다.

 

1749년 프랑스, 루이 15세를 비방하는 시를 퍼뜨린 혐의로 한 의대생이 체포된다. 시의 내용이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지만, 해군과 왕실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모르파 백작을 해임하고 유배시킨 루이 15세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매춘부 사생아가 / 궁정에서 출세하네. / 사랑에서나 술에서나 / 루이는 손쉬운 영광을 바라네. / 아! 저기 그가 있어, 아! 여기 그가 있네. / 근심걱정 하나 없는 그 사람. // 보기만큼 어리석은 것이 틀림없어 / 백성들은 염려하네. / 그의 얼굴에 드리운 운명을. / 아! 저기 그가 있네, 등등. (‘매춘부 사생아’ 중에서, 177~178쪽)

 

의대생의 자백 후 시를 암송하고 퍼뜨린데 일조했다고 여겨지는 14인이 줄줄이 체포됐다. 이른바 '14인 사건'이다. 왕을 조롱하는 시가 당시로선 왕권모독이나 역모에 해당됐을 터였다. 하지만 체포된 사람들은 혁명이나 권력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음에도 경찰은 14인을 체포하는 데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 부었다.

 

백성들 사이에 이런 노래가 떠돈 사실을 안 루이 15세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프랑스인들은 이런 노래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권력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노래 속에는 왕과 퐁파두르 부인의 은밀한 관계, 모르파 백작의 몰락 등 공적인 사건들에 관한 뉴스가 가득했다. 불륜과 근친상간, 평민 출신 애첩 퐁파두르 부인에게 보석과 성채를 퍼주느라 왕국이 거덜났다는 주제의 노래와 시가 왕에게 전달됐다. 그 가운데 일부는 국왕 시해를 주장할 정도로 과격했다.

 

왕은 파리 시민이 주고받는 말과 노래에 몹시 민감했다. 파리 시민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도 프랑스 국민은 베르사유의 가장 내밀한 안식처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Scene #3  루이 15세의 ‘불통 태도’가 주는 교훈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56년

 

 

서동요는 참요(讖謠)다. 참요란 미래의 어떤 징후를 암시하는 노래를 말한다. 참요는 여론의 일종으로서 역할로 변환된다. 서동요나 루이 15세를 비방하는 시처럼 어떤 사람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퍼뜨리기도 한다. 신라의 진평왕은 대궐에까지 퍼진 서동의 노래에 노하여 선화 공주를 내쫓을 수 있었지만, 루이 15세는 속으로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미모와 재치를 겸비한 애첩이며 이미 왕정의 인사에 손 뻗칠 정도로 권세를 누리고 있는 퐁파두르 부인을 단번에 내쫓을 수 있었을까.

 

 루이 15세에게는 자신을 향한 조롱의 시와 노래가 유언비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 속에는 강력한 군주를 원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 어쩌면 무능한 왕이 폐위되기를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간절한 바람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왕의 귀에 전해질 거라 믿었다. 그들의 마음이 ‘매춘부 사생아’ 마지막 연에서 엿볼 수 있다.

 

거만한 검열관이 이 노래를 / 제멋대로 비판하고 반박할지도 모르지 / 그 비판의 화살이 실수를 들춰내고 / 왕좌까지 꿰뚫을지도 모르지. (‘매춘부 사생아’ 중에서, 180~181쪽)

 

결국 노래는 무능한 매춘부 사생아가 앉아 있는 왕좌를 꿰뚫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비판의 화살이 평범한 14인의 파리 시민들에게 엉뚱하게 향했다. 말 그대도 제멋대로 죄없는 시민을 체포하는데 그친 궁색한 반박이었다. 결과적으로 14인이 퍼뜨린 노래는 서동요처럼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실현된 셈이다.

 

만약에 루이 15세가 자신과 함께 모욕의 대상이 된, 아니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지탄받게 만든 주범인 퐁파두르 부인을 궁궐에서 쫓아냈다면 혼란스러운 국정이 회복되었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1764년에 죽을 때까지 퐁파두르 부인은 프랑스 정치를 좌우할 정도로 권력을 누렸다. 게다가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 이외에 또 다른 애첩을 맞을 정도로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실제로 왕이 사망했을 때 아무도 그를 애도하고 존경하지 않았다니, 그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경찰은 수사력을 총동원해 나라 안을 헤집었지만 시의 원작자는 잡지 못했다. 애초에 단 한명의 시인을 쫓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최초에는 한사람의 생각과 입을 통해 나온 시었을 지라도 결국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덧붙여지고 변형된 집단창작물의 성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게 여론이다. 권력자에게 여론이란 흐름을 파악해 대중의 생각을 읽어야 하는 것이지, 배후를 찾아 헤매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현대인의 눈은 스마트 기기에 향한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SNS에 들어가 소식을 주고받으며, 소셜 커머스에서 필요한 물건을 산다. 하지만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현대 사회만의 전유물일까.

 

스마트기기를 통해 언제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현대사회와는 달리 정보를 쪽지에 필사해 전하거나 암기해 전하기 때문에 정보의 확산 속도는 너무나도 느렸다. 그래도 18세기 중엽에도 국민들이 서로 의사소통하고 공통된 정보를 공유하는 정보사회라 부를 만한 구조는 갖추고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권력자를 괴롭히던 프랑스의 시와 노래는 오늘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이렇게 되풀이되고 있다. SNS 이전에 18세기 프랑스에 유행한 시와 노래는 오늘날의 SNS처럼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내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시민과 나란히 사회 변화의 주역이 되기도 한다.

 

작년 말에 대통령은 “SNS등을 통해 퍼져나가는 잘못된 유언비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팩트를 왜곡하는 유언비어가 떠도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진실을 외면하고, 갈등의 불에 기름을 붓는 유언비어나 비방적인 말은 올바른 비판 여론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모든 견해를 유언비어로 보고 이를 척결한다면 임기 초기 전에 많이 지적받았던 대통령 특유의 ‘불통 철학’이 반복될 수 있다. 정부 정책과 다른 비판 여론이 있다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홍보에 힘을 쏟으라는 지시를 내놓는 게 대통령의 역할이다. ‘14인 사건’에 대처하는 루이 15세의 ‘불통 태도’가 여론의 힘을 무시하는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을 희화화하고, 풍자하는 여론에 대통령 각하께서는 당황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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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2-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폐하께옵서는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을 듯 보여요.
자신이 연루된 일 임에도 마치 남의 일처럼 이리 무관심하시니 말예요.

cyrus 2014-02-05 23:08   좋아요 0 | URL
무관심한 척하면서 내심 겁먹을 겁니다. 국민들의 자잘하고도 진실한 여론마저 외면하고 귀를 닫는다면, 임기 말 아니면 임기 끝나고 나서도 엄청 괴로워질거에요.
 
겹겹 -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안세홍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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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마음 아프고 슬픈 단어

 

듣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고 슬픈 단어들이 있다. ‘위안부’, 혹은 ‘위안부 할머니’는 그 중 슬픔의 강도가 아주 센 단어 중 하나다. 누군가를 위로해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말이 어떤 이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단어로 쓰인다. 일제 점령기, 전선으로 끌려가 일본 군인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른다. 실은 일본인 입장에서의 '위안부'보다 '성노예'라는 강제성을 담은 용어가 맞다. 흔히 쓰이는 '종군 위안부' 역시 자발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어 맞지 않은 표현이다.

 

위안부 소녀상이 만들어졌을 때, 연로한 할머니들의 얼굴 주름 하나하나에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이 까마득하게 겹쳐졌던 기억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일 것이다. 소녀상으로는 달래질 수도, 위로받을 수도 없는.

 

 

 

 

어디에 있는 지도,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일본군의 총칼에 떨던 그녀들, 일본 제국주의 야욕에 꽃다운 청춘을 약탈당한 그녀들, 만주에서 윈난,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전장 최전선의 위안소로 내몰렸던 그녀들. 70여 년 전 중일전쟁 당시 가족과 조국을 뒤로 하고 중국으로 떠난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이다.

 

여리고 순한 조선 소녀들을 전쟁터에 몰아넣었다. 대다수가 성인이 안 된 10대 소녀들이었고 총알이 빗발치는 험한 전쟁터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했다. 사람에게 속아 사람에게 유린당하는 삶은 비극적이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현실 밖에 보지 않는다” 카이사르가 『내전기』에서 언급했던 말이다. 같은 의미로,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또한 우리 보통 사람들인 것 같다. 오늘 우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그런 것이 아닐까? 불행한 역사를 만나서 한 평생 피맺힌 절규와 한스러운 세월을 지나왔고 그러고도 배상받지 못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이 너무 아프고 처절해 차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 같다.

 

핏물어린 눈빛과 증오의 몸짓을 그대로 받아내야 했던 꽃 같던 청춘들.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중국으로 끌려간 청춘들은 전쟁이 끝났어도 나고 자란 땅으로 회귀하지 못했다. 모국어를 잊었고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잃었다. 두 나라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던 이들은 지난했던 삶의 상처들을 홀로 쓰다듬으며, 마치 애초부터 윤기가 없었던 것처럼 메말라갔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낙인은 흠뻑 젖어도 썩지 않는 한(恨)이 되어 가슴 깊이 뿌리내렸다.

 

 

 

 Scene #2  할머니들에게 아직도 해방은 없었다 

 

 

 

 

 

 

고향마저 잃은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사진작가 안세홍씨가 발품을 팔며 온몸으로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아냈다. 깊게 파인 주름, 사방에 널브러진 손때 묻은 물건, 글썽이는 눈망울에서 할머니들의 분노와 회한, 슬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흑백사진들.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분들의 얼굴과 육체를 담은 사진은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그것을 보는 일은 숨이 멎는 경험이다. 무겁고 그늘진 무표정, 그 굵고 깊게 패인 주름, 야윈 육신이 취한 헝클어진 자세, 그럼에도 어떤 결기가 느껴지는 얼굴. 뿌리 잃은 사람들의 헛헛함을 사진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정물화마냥 서늘하게 전하고 있다.

 

사진 속 10여명 할머니들은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6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낸 한 맺힌 절규를 소리 없이 쏟아낸다. 할머니들은 국적은 중국이나 북한으로 돼 있지만 남북한은 물론 중국으로부터 모두 외면당한 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천황이 연합군에 패배를 선언하고 태극기 물결이 전국 곳곳에 넘실거리던 그 기쁨의 순간에도 중국 내 위안부 할머니들은 소련군을 피해, 중국인의 보복을 피해 숨어 다녀야 했다. 중국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의지할 데도 없던 이들은 ‘그저 살기 위해’ 중국인과의 결혼을 택했지만 대부분은 불행으로 끝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어쩌면 이리도 악운의 연속일 수 있을까’ 싶은데, 안세홍 씨의 사진은 이들의 고통을 현재의 단면으로 잘라 보여준다. 거울 안에 비친 한숨 섞인 얼굴, 누추한 문을 나서는 구부정한 뒷모습 등 일상의 틀 안에 잠겨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은 20대의 아픔이 70대, 80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의 오지 마을 양로원에서 만난 이수단 할머니는 신문지에 담뱃잎을 말아 피운다. 연기 속에 시름이 한 가득이다. 평안남도 숙천의 열아홉 살 처녀는 1940년 선금 480원을 받고 만주 벌판으로 왔다. 허드렛일을 하는 줄만 알았는데 일본군 위안소였고 ‘히도리’로 불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족 남자와 결혼해 살았다. 성병 때문인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카메라 앞에서 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조선말 잊어버린 게 가장 가슴 아파.”

 

경남 하동군 화개면이 고향인 배삼엽 할머니는 열세 살, 월경도 하기 전에 네이멍구(內蒙古) 바오터우(包頭)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왔다. ‘5번 방의 게이코’가 됐다. 일주일 동안 거기서 피가 났다. 북한 국적을 가지고 살다 1999년 한국 방문을 위해 국적을 중국으로 옮겨 고향에 왔더니 오래전에 사망신고가 돼 있었다. 베이징에 사는 할머니는 한국말을 잊지 않으려고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입에서 힘없이 흘러나오는 구슬픈 노랫말은 뿌리 뽑힌 생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한 마지막 사투이다.

 

 

 

 Scene #3  '할머니들의 기억'을 계속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많이 아는 듯하지만, 중·일전쟁 때 중국으로 끌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심지어 일본군에 의해 고향에서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간 분도 있다. 그 분들은 일제에 의해 청춘을 짓밟혔고, 지금도 가난과 외로움에 타국에서 고통 받고 있다.

 

우리가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 할머니들 피해사례에도 관심을 가져야 될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피해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여성들의 삶의 존엄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양한 여성들의 삶에 주목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은 조선뿐 아니라 대만, 중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 거주하고 있다. 위안부 사죄는 한일 역사관계로만 치부할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전쟁이 멈춘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의 추악한 기억과 고통은 지금도 생존한 할머니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그 무거운 어깨가 언제쯤 가벼워질까? 과연 그렇게 될 수는 있겠는가? 잿더미 속에서 떨고 있는 인간 앞에서라면 자신의 가장 치욕적인 기억조차 잠시 내려놓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국내에 있는 할머니들은 신고만 하면 정부차원의 생활지원금이나 기타 시민단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중국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중국과 북한 당국 모두 아무런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존재에 대해 알면서도 지원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할머니들의 증언이 부정당할 때, 겨우 열어준 그들의 입을 다시 닫히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그리고 피해여성들의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저자가 중국에서 만난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는 모두 12명. 그 가운데 벌써 8명이 세상을 떠났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대부분 90살 전후이기 때문에 아마 몇 년 후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주인공들이 모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이 분들도 눈 감기 전에 진실한 배상, 아니 진실한 관심과 위로를 들을 수 있을까?

 

바로잡지 않은 역사는 책속에 글자 몇 줄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 그대로 사람들의 뇌리와 삶에 선명하게 남아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불치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역사가 상처와 흉터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선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위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해방의 응달 속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전 세계 곳곳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기억해야 한다. 거대한 역사의 상처가 아닌 그 분들의 한 맺힌 가슴을 이 한 권의 사진집으로나마 오랫동안 기억되고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렀으면 좋겠다. 우리의 작은 관심이 겹겹이 모이면 겹겹이 쌓인 할머니들의 한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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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미하엘 유르크스 지음, 김수은 옮김 / 예지(Wisdom)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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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평화를 위한 간절함이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마법을 부려도 좋다. 환상도 상관없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연속이면 또 어떠랴. 그것으로 가슴이 따뜻해지고, ‘거짓’임을 알망정 잠시나마 우리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가 있는 이맘때 한번쯤은 ‘기적’이 일어나도 괜찮다. 내가 아니라도 좋다. 거창하게 세상이 뒤바뀌는 것이 아닌 작은 만남, 성공, 사랑, 기쁨이라도 좋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기적’ 얘기를 꺼낸다면 황당무계하게 여겨지고 코웃음 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본 경험이 있었을까.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처럼 기적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삶의 특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기적을 바라고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비주의자들에게 어울릴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비록 짧지만 실제로 한 사람의 사소한 간절함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마저 커다란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 기적으로 만든 일이 있었으니까.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24일 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서부전선 어디선가 낯선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불과 50m 떨어진 독일군 참호에서 흘러나온 크리스마스 캐럴에 영국군은 당황했다. 처음엔 독일군의 심리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난 뒤 건너편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곧이어 어둠 저편에서 독일 병사 한 명이 일어나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바짝 긴장한 영국군은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이 병사는 촛불을 켠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를 양측 참호 사이 무인지대에 놓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외침이 들려왔다 “서로 총을 쏘기보다는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또다시 캐럴이 이어지고 이번엔 영국군도 따라 합창했다. 삭막한 전선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트리를 중심으로 양측 병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한 병사들은 곧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은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에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낸 시간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양측 병사들은 자신의 심장에 총알이 언제 박힐지도 모르는 살벌한 공포의 참호 속에서도 전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독일군 병사는 간절히 원하는 소망을 담아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을 것이다.

 

전선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찾아왔다. 양측은 크리스마스 전후에 그동안 무인지대에 방치됐던 시체를 거둬 장례식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시체를 수습하는 동안 서로 일손을 나누고 장례식에서 기도해주는 등 친교를 쌓았다. 시체를 치운 자리에선 축구 시합이 열리고 군수품과 음식물이 교환됐다. 더 이상 전장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Scene #2  ‘전쟁의 개’들이 망쳐놓은 크리스마스의 기적

 

감동이 느껴지는 한 편의 영화 같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기적이 서부전선 서북단 예페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자발적 평화운동은 서부전선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주도한 사람은 없었지만 동참하는 사람은 많았다. 병사들이 만든 평화는 크리스마스를 넘어 연말까지 이어졌고 일부에선 수개월간 지속됐다. 타의에 의해 전장에 내몰린 대부분 병사들은 살생을 싫어했고 인간을 사랑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병사들이 만든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의 개’들이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각국 지도자들은 전장의 친교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들은 평화가 자신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그들은 평화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친교를 막기 위해 참호를 떠나는 행동을 금지했고, 이를 어기면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전투가 독려됐다. 어제까지 같이 공을 차던 친구에게 총을 쏘고 담배를 나눠 피우던 이웃의 등에 칼을 꽂았다. 참호는 다시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됐고, 무인지대는 다시 시체로 뒤덮였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밀려 휴전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전쟁은 이후 44개월이나 더 계속됐고 9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이 책에 나온 위대한 휴전의 주인공들 상당수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들이 무의미한 참호전 속에 목숨을 놓은 날에도 전선의 지휘소에서 본국 대본영에 보낸 전문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쓰여 있었을 것이다.

 

 

 

 Scene #3  ‘평화’라는 절박함이 총 대신 사랑으로 무장하다

 

예수가 마법과 상상, 환상과 우연을 아무리 동원한들 기적에 관한한 양국 병사들의 공통된 간절함에서 비롯된 평화로운 시간의 기록을 따를 자가 있을까. 물론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사에 축도 들지 못하는 소사(小史)도, 예수의 기적도 다 환상이고 우연일 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기적이란 없는지 모른다.

 

아름다웠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버린 몇 개월간의 평화. 이 이야기가 어쩌면 완충지대의 평화가 단 하루의 몽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암시할 수도 있겠다. 크리스마스의 휴전과 그 이후로 잠깐으로나마 지속된 평화의 시간이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기록한 전쟁이라는 참혹한 서사와 비교하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적이라고 하는 것도 ‘불가능의 가능’이 아니라, 단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의 실현.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눈물과 정성 그리고 사랑이 쌓여 이뤄진 결과일 수 있다. ‘기적’에도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간절함. 성서에서도 ‘간절히 원하면 주신다’고 했다. 간절함이란 모든 마음과 노력을 쏟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방점을 찍는 부분은 이 현실적 결말이 아닌 환상적 화해의 공간이다. 병사들의 감각을 얼어붙게 만드는 거대한 포탄 소리와 총소리가 가득하고, 앞날을 기약하지 못하는 적막한 전선의 기운은 ‘가족’과 ‘사랑’, ‘신의 은총’이라는 대의 명제 앞에서 휘발된다. 총과 군모 대신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사랑으로 무장했다. 양국 병사들은 서로 적을 향해 총구를 겨냥해야 자신들이 원하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이들은 단순히 총을 내려놓고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기고 싶었을까. ‘평화’라는 절박한 마음이 ‘살인병기’였던 군인들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게 만들었다. 만약에 전쟁이 좀 더 일찍 끝냈더라면 전쟁이 만든 명분 없는 증오가 아닌 사랑이 승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보는 이들의 내면적 갈등을 잠재운다. 사람이란 욕망과 윤리, 당위와 선택 가운데서 흔들리는 존재라는 것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상흔은 거시적 담론의 폭력으로 전도되고 그 가운데 개인들은 선량한 피해자로 채색된다.

 

책 마지막 장 소제목으로 인용된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좋은 전쟁은 없다. 그리고 나쁜 평화도 역시 없다. 평화를 위해 반드시 거창한 이론이나 조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작은 행동만으로 충분하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북프랑스 전선에서 살벌하게 대치하던 독일, 프랑스,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진영논리나 국수주의,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순식간에 녹인 것은 의외로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독일군 참호에서 흘러나온 캐럴은 전선에서 오래전에 죽어버린 감정을 일깨웠다. 그가 부른 노래에는 유럽 젊은이들의 공통적 문화와 가치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공감대가 이루어지면서 적국임에도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거룩한 밤에 깊은 어둠을 뚫고 들려온 평화의 노래는 일시 전쟁의 위력을 잃게 만들었다.

 

어느 역사가는 진정한 20세기의 시작은 1914년 12월 14일이라고 말했다. 제국주의의 광기가 유럽 대륙을 휘몰아치던 시기, 유럽의 어느 들판에서 전쟁의 당사자인 젊은 병사들이 맺은 이 작은 휴전은 우리들로 하여금 전쟁과 평화의 의미에 대해서 곱씹어보게 한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소사일 수도 있겠지만 전쟁의 험상궂은 표정을 드러내 전쟁을 혐오하게 만드는 대신, 잠시나마 세상에 강림한 평화를 보여줬다. 이를 갈망하게 만드는 짧지만, 강렬했던 역사의 한 장면이다. 프로이트와 전쟁을 주제로 서신을 교환하던 아인슈타인이 남긴 다음의 말처럼. “우리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나머지 인류도 평화주의자가 될까요?”

 

‘Freedom and peace are not free.’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평화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꼭 무기에 의지한 희생에 의해서 평화를 얻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담대한 용기와 증오의 벽을 스스로 허무는 노력만 있다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희생 없는 평화가 단지 현실 불가능한 이상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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