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 - 근대 일본의 대중문화
미리엄 실버버그 지음, 강진석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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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은 삶과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면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돼 억압과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간의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감각의 제국>1930년대 일본의 성()의 망상과 강박에 의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남자의 성기를 잘라서 일주일 동안이나 손에 들고 다니던 여자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 낸 것, 이것이 <감각의 제국>이다. 영화는 한 남녀가 섹스에 탐닉하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음식점 종업원 아베 사다(阿部定)는 자신이 일하는 음식점 사장인 이시다 키치조(石田吉藏)를 사랑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불륜이었다. 집에 틀어박힌 두 사람은 애욕의 생활에 빠져들었다. 사다는 키치조를 자신의 영원한 남자로 만들기 위해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성기를 잘랐다. 언론들은 그녀가 저지른 엽기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놀랍게도 일본인들은 사다를 동정했다. 심지어 그녀를 칭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다 신드롬덕분인지 법원은 그녀에게 6년형을 선고했고, 복역 5년 만에 사면됐다. 아베 사다 사건은 일본 전역을 삼킨 그로테스크한 사건이다. 그로테스크는 괴기하거나 극도로 부자연한 것을 의미한다. 엽기적인 것은 그로테스크하다. 아베 사다 사건은 보는 사람에 따라 역겹거나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매우 엽기적인 살해를 저지르고, ‘변태성욕자로 판정받은 그녀에 열광했을까?

 

<감각의 제국>에서 제국은 그대로 1920~1930년대 일본을 겨냥하고 있다. ‘감각은 그 시대 일본에 유행했던 문화, 에로 그로를 상징한다. ‘에로 그로는 말 그대로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결합한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다. 여기에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난센스가 추가되면서 에로 그로 난센스라는 좀 더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 복합체가 탄생하게 됐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일본 대중문화의 뿌리는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에로 그로테스크 넌센스(미리엄 실버버그 저, 현실문화, 2014)1920~1930년대 일본을 관통한 에로 그로 난센스의 특징을 파헤친 책이다. 이 책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욕망과 금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발달한 에로 그로 난센스가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몽타주(montage, 모아서 조합하는) 형식으로 펼쳐 보인다.

 

저자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근대 문화 질서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엄청난 에너지’, ‘창조 욕구, 그리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도전이다. ‘에로 그로 난센스는 사회문화적 코드로서의 탈 전통사회,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근대적 기획 속에서 만들어진 문화 질서이다. 이러한 문화 질서 안에서 도발적인 에로티시즘과 기괴한 취향에 눈과 몸을 내맡기는 대중의 욕망이 분출되었다. 모던 걸, 카페 여급, 아사쿠사 공원의 프릭 쇼(freak show)등은 에로 그로 난센스열풍에 힘입어 주목받았다.

 

에로 그로 난센스는 전시(戰時) 일본의 근대 소비문화만이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제국의 권력에 저항하는 속성도 지녔다. 난센스는 권력의 통제를 비웃고 위협하는 수단이 되었다. 저자는 1920~1930년대 일본 대중의 양면성을 지적한다. 일본 대중은 자유로운 소비 주체이면서도 천황의 신민(新民)이었다. 저자가 새롭게 규정한 근대 일본의 에로 그로 난센스는 단순히 음란하고 엽기적인 것을 재현하는 하위문화가 아니다. ‘에로 그로 난센스문화를 누리는 소비 주체에는 거지, 부랑자 등과 같은 밑바닥 계층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에로 그로 난센스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소비 주체의 언어, 사고, 행동 등을 포괄하는 역동적인 문화이다. ‘에로 그로 난센스는 일본 대중의 억눌린 감각을 거침없이 자극했다. 국민을 검열하고 통제하는 제국의 권력은 일방적이었지만, 이에 맞서는 에로 그로 난센스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했다. 전운이 감도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했고, 신식 문화를 소개한 잡지를 보며 에로틱하고 엽기적인 사건에 열광했다.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대중적 삶과 문화적 감수성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근대성을 띠기 시작했다. 아무리 음침한 역사라고 해도 그 이면엔 자유에 대한 욕망’을 분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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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6: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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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30 17:59   좋아요 1 | URL
손가락은 다 나았습니다. 일부러 진통제를 안 먹었는데 통증이 4일 동안 지속되었어요. 처음에는 중지손가락에 통증이 시작됐어요. 이틀 지나니까 통증이 사라져서 안심했는데, 검지손가락에 통증이 생겼어요. 손가락에 힘을 줄 수 없어서 일하느라 힘들었어요. 회사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데 손가락이 뻣뻣해져서 컴퓨터 키보드를 치는 게 쉽지 않았어요.

요즘 성문화, 섹슈얼리티손가락은 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까 일본의 성문화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일본이 AV 산업이 발달한다고 해도 일본의 성문화를 ‘개방적’이라고 규정하기 힘들어요. 일본 역사나 일본의 문화사를 더 공부해야겠지만, 일본에도 특정 문화를 규제하고 검열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일본의 성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
 
조선의 퀴어 -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
박차민정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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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일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그것과 관련된 편견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사회가 점차 개방적이고 다양화되면서 이러한 편견을 풀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는 ‘퀴어(Queer)가 대표적인 예이다. 퀴어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동성애는 정신 질환이 아니라 ‘성적 지향’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다르거나 다수의 의견에 위배되는 말과 행동을 인정하지 못한다. 동성애를 향한 편견은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에이즈(AIDS)의 확산 원인으로 동성애자들이 그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 편견의 논리는 이렇다. 동성애자는 변태 성욕자이고, 문란한 성행위를 즐긴다. 에이즈는 문란한 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성적 지향은 단일한 주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거나 유전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젠더퀴어(genderqueer)는 변태성욕자, 성도착증, 비정상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존재이다. 그런데 이성애 중심 젠더 이분법은 젠더퀴어를 변태로 여기게 만든다. 젠더퀴어를 질병으로 여겨 교정하려는 사회의 압박은 건강한 사람을 정신적 · 신체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조선의 퀴어》는 누락되고 묻혀왔던 1920~30년대 조선의 ‘퀴어한’ 존재들의 역사를 보여준다. 1920~30년대 조선은 일제의 식민 통치가 더욱 강화된 암흑기로 불리지만, 잡지 등 활자매체의 활성화와 서구문화의 대량 유입으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시기였다. 이 시기에 서구의 성과학 지식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미 서구의 성과학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입했고,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번역된 성과학 관련 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조선의 신문과 잡지는 ‘변태성욕’, ‘반음양(半陰陽: 인터섹스), ‘동성연애’와 관련된 사례들을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1920~30년대 조선은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전통적인 성 도덕의 금기 사항이 무너지고, 동성애,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 남장 또는 여장), 키스 등 다양한 성 문화가 범람하고 있었다.

 

하지만 1920~30년대 조선은 ‘퀴어한 시대’가 아니었고, ‘변태성욕자의 시대’였다. 당시 ‘변태성욕’ 기사는 대중의 관음증적 욕망을 부추기는 추측성 가십이었다. 신문은 남색과 범죄를 연결 짓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조선의 퀴어》의 저자 박차민정은 변태성욕을 범죄로 규정하는 선정적인 기사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속에 반영된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 즉 퀴어를 ‘위험한 성적 타자’로 취급하는 담론의 형성 과정을 조명한다. 조선 말기에 남색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지 않았으며 남색 풍습이 있었다. 남색은 남성들의 출세를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출셋길이 없는 자는 미동(美童)이 되면 손쉽게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부터 남색은 ‘불법 성행위’로 간주하였다.

 

가부장 ·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일탈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난받아 왔고 비난받고 있다. 기생 출신의 강향란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기 위해 짧은 머리로 남자 행세를 했다. 당시 남성 지식인들은 전통을 파괴하고 근대화를 추종하는 몰지각한 행위라며 그녀에게 비난을 쏟아부었다. 식민지 정부는 생물학적 성별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나 크로스드레싱을 식별하고 처벌하는 법을 제정하여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감시했다. 국가가 가장 싫어하는 존재는 기이하고 낯설고, 사회적 질서에 벗어난 ‘퀴어한 존재’들이다. 퀴어를 처벌하는 통치 권력, 그리고 퀴어를 바라보는 근대 조선인들의 관음증적 시선은 ‘권력의 판옵티콘’[주]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퀴어를 성도착증 환자나 범죄자로 만드는 ‘투명한 권력’이다. 감시하고 통제하는 ‘투명한 권력’은 신문, 병원(성과학)이라는 거대한 감시망을 만들었고, 이 강압적인 거대 권력은 퀴어를 ‘이방인’처럼 감시하고 처벌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조선을 기점으로써 퀴어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구조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퀴어의 사소한 몸짓도 ‘변태’,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차별을 감수하며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의 퀴어》는 철저히 잊힌 ‘변태들’을 조명하여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사회에서 오롯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야기한다. 신문에 남게 된 ‘변태들’은 오해받고 소외된 소수자의 진실한 욕망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주]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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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7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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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27 16:27   좋아요 0 | URL
하필 요즘같이 더운 날에 외근이 잦아져서 며칠은 바쁘게 지냈어요. 너무 더워서 에어컨 바람을 많이 쐬었더니 손가락에 통증이 생겼어요. 에어컨 찬바람 많이 맞으면 관절에 통증이 생긴다네요... ㅠㅠ 그래서 한동안 북플에 접속하지 못했어요. 오늘은 금요일이라서 한결 여유롭네요.

매년 제 생일을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책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작년에 제가 책 선물을 드리지 못했잖아요. 다음 달에 적립금 받으면 바로 기프티북 보내 드릴 테니 읽고 싶은 책 한 권 미리 정해두세요. ^^

2018-07-27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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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27 16:44   좋아요 0 | URL
네. 이번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ㅎㅎㅎ 올해 여름은 시험 공부하기가 힘든 계절인 것 같아요. 너무 더워도 건강이 안 좋아지고, 찬바람을 많이 쐬어도 건강이 안 좋아지니까요. 이러면 컨디션 조절하기 힘들겠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

2018-07-27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8-07-28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영향도 크겠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LGBT에 대한 가장 극렬한 혐오를 조장하는 건 교회같습니다. 가장 전근대적이고 가장 보수적인 것이 주류개신교잖아요..
예전에 한국사를 읽다가 몸종과 애인관계가 되었던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 봉씨에 대한 에피소드를 보고 조선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남한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성적취향은 자기 결정이죠. 성적취향보다 개인의 인성이 문제인데 일이 터지면 늘 일반화를 해서 더더욱 혐오를 조장하는 것 같아요.

cyrus 2018-07-29 21:06   좋아요 0 | URL
‘특이한 성적 취향=비정상=성소수자‘로 연상되는 편견의 논리가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을 조장합니다.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게이의 항문 섹스가 에이즈 전염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성애자의 항문 섹스에 대해선 침묵해요.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매춘부에 관한 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처음 나온 시기는 19세기 중반이다. 19세기 이전까지 포르노그래피는 종교 · 정치적 권위를 비판하기 위해 은밀하게 만들어진 매체였다. 포르노그래피는 18세기에 이르러 인쇄 문화의 발달로 독자층이 확대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하나의 독자적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왕족과 성직자, 귀족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묘사한 포르노 팸플릿은 왕권과 교회를 희화화시키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타파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린 헌트 엮음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알마, 2016)

* 로버트 단턴 《책과 혁명》 (알마, 2014)

 

 

 

 

 

 

 

 

 

 

 

 

 

 

* 주명철 《계몽과 쾌락》 (소나무, 2014)

* [절판] 주명철 《서양 금서의 문화사》 (길, 2006)

 

 

 

 

 

 

 

 

 

 

 

 

 

 

 

 

*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등으로 대표되는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원리를 제공하고 근대 서구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한 가치다. 그러나 린 헌트, 로버트 단턴 등 역사학자들은 고도로 조직화한 지식 엘리트가 활약했던 계몽주의 시대가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다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포르노 팸플릿은 루소의 《사회계약론》보다 훨씬 많이 읽혔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난잡한 성생활을 풍자한 포르노 팸플릿은 금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금서의 유통은 교묘하다. 아무리 출판사를 단속하거나 유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해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정보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당시 금서들은 ‘철학 서적’이라는 은어로 불렸고, 가격이 저렴해서 노동자들도 사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포르노 팸플릿이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구체제를 무너뜨리게 한 '평등한 포르노'라 할 수 있을까? 프랑스 혁명 시대의 포르노그래피는 치명적인 함정을 깔고 있다. 혁명가들은 왕비의 성적 추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왕권의 권위를 흔들었다. 왕비의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대중의 환상은 일종의 성적 판타지이며 대중의 집단적 관음증을 부추겼다. 포르노 팸플릿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부분 남성에 의해 소비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끝나면서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쾌락 자체를 위한 매체로 변질하였다. 포르노그래피가 영화라는 매체와 만나자 그것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더욱더 값싸고 상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숱한 포르노 영화에 ‘강간’ 장면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포르노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줄거리는 전혀 모르는 남성과 여성이 만나 우연히 서로의 몸을 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성이 처음에는 남성을 거부하지만 결국에는 성행위 자체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포르노 영화 제작자들은 성폭력이 남성들을 자극하는 성적 판타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남성이 성에 눈뜨는 시절에 포르노를 접한다. 나도 성적 호기심이 솟구치던 사춘기에 포르노를 봤다. 포르노는 호기심에 볼 수 있다. 하지만 포르노 영화에 묘사된 성관계는 ‘가짜’이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왜곡하는 위험한 묘사’다. 포르노가 만든 성적 판타지 때문에 남성들은 단지 성행위 자체에만 집착하는 왜곡된 사고를 하게 된다. 또 포르노는 폭력적인 관계에 무감각해지는 위험성도 있다.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 속의 성폭력은 소위 ‘야한 것’이다. 포르노를 즐겨보는 남성들은 ‘성적으로 대상화’시킨 여성의 몸을 눈요깃감으로 바라보면서 감상한다.

 

 

 

 

 

 

 

 

 

 

 

 

 

 

 

 

* 수전 손택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현대미학사, 2004)

* [안 읽었어요!] 조르주 바타유 《눈 이야기》 (비채, 2017)

 

 

 

수전 손택은 포르노가 예술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 《눈 이야기》(비채, 2017)를 옹호한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수록)이라는 글에서 독자에게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킨 포르노그래피의 효과가 저자의 의도든 아니든 간에 그것은 문학적 결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적인 단어로 포르노의 성적 판타지를 축소하거나 미화해선 안 된다. 순진한 관점으로 포르노를 접근하면 포르노가 사회에 끼치는 끔찍한 폭력성을 외면하게 된다.

 

 

 외설적 즐거움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평등한’ 포르노도, 기존의 포르노에 상응하는 여성 포르노도, 반전도 불가능하다. 포르노그래피는 강간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비인간화하고 성적으로 접근할 대상으로만 환원하도록 설계된 남성의 발명품이다. 이건이 도덕주의나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관능을 추구하는 일로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포르노가 파는 주된 품목은 언제나 여성의 벌거벗은 몸, 여성의 노출된 가슴과 성기일 수밖에 없다.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617쪽)

 

 

포르노와 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은 작가의 의도와 보는 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따라서 이게 포르노이고, 이게 예술이라고 구분하기 어렵다. 예술이 된 포르노 또는 젠더,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정체성 범주를 포용하는 포르노 즉 모든 사람이 수긍하는 ‘평등한 포르노’는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 포르노는 성차별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성소수자 차별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했듯이 오늘날의 포르노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또는 성 상품화하여 만들어진 ‘남성을 위한, 남성이 만든 발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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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6 13:38   좋아요 0 | URL
그런데 모든 페미니스트가 포르노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반 포르노 규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그 페미니스트의 책을 아직 안 읽었어요. 곧 읽을 예정입니다. ^^
 

 

 

세계박람회는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3대 국제 행사로 꼽힌다. 세계박람회를 개최할 경우 국가 위상을 높일 뿐 아니라 경제적 파급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에 세계 각국이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인다. 흔히 엑스포(EXPO)라고 불리는 세계박람회는 세계박람회기구(BIE)가 공식 인정한 공인 엑스포와 비공인 엑스포로 나뉜다. 비공인 엑스포는 전시 수준이나 규모가 공인 엑스포에 비교해 훨씬 규모가 작은 편이다. 참가국의 국가 명칭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지역 행사로 치러진다. 우리나라는 공인 엑스포를 두 차례 개최했다. 1993년 대전 엑스포, 2012년 여수 엑스포다.

 

 

 

 

 

 

 

 

 

 

 

 

 

 

 

 

 

* 안나 잭슨 《엑스포, 1851-2010년 세계박람회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 [절판] 오룡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 (다우출판사, 2012)

* 이민식 《세계박람회 100장면》 (이담북스, 2012)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 엑스포는 1851년 영국 런던 박람회[1]이다. 산업 혁명 이후 기술과 산업 분야에서 급성장한 영국은 이 성과를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싶었다.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전시관인 수정궁(crystal palace)이 세워져 경탄을 자아냈다. 박람회는 최첨단 상품과 기술 외에 보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대중오락을 갖춘 전시행사다. 런던 박람회를 시작으로 대중들은 다양한 볼거리를 접하기 위해 지정된 장소로 옮겨 다니며 관람이란 문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 [절판] 권혁희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민음사, 2005)

* [절판] 요시미 순야 《박람회 : 근대의 시선》 (논형, 2004)

 

 

 

그런데 근대 박람회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우월감을 교묘히 드러내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돈으로 값이 매겨지는 자본주의 체제인 만큼 사람도 돈의 힘에 밀려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근대 박람회는 산업혁명의 성과물과 식민지에서 얻은 재화를 전시하고 여기에 새로운 상품과 소비, 오락을 더해 대중의 욕망을 재현한 ‘스펙터클한 공간’이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람회는 상품뿐만 아니라 인간도 전시했다. 1851년 런던 박람회에서 수정궁을 선보이자, 이에 질세라 프랑스는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 에펠탑을 공개했다. 당시 에펠탑이 세워졌을 때 이 건축물은 파리지앵의 혐오 대상이었다. 문화 · 예술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은 에펠탑을 파리의 우아함을 헤치는 철골 덩어리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프랑스 지식인들은 ‘인종 전시장’을 만든 파리 박람회의 부끄러운 전시계획에 대해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파리 박람회는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식민지 원주민들을 모아놓고 전시했다. 가슴 아픈 일지만, 우리나라 사람도 세계박람회 전시대상이 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1889년 파리 박람회에 최초로 참가했다. 대한제국으로 국명이 바뀐 이후에도 박람회에 참가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세계의 주변인으로 전락했다. 1907년 일본 도쿄에 열린 비공인 박람회(도쿄권업박람회)에서 조선인 남성과 여성 두 명이 유리관에 전시되었다.

 

 

 

 

 

 

 

 

 

 

 

 

 

 

 

 

 

*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갈무리, 2014)

* 장 메이에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시공사, 1998)

 

 

 

근대 박람회의 인종 전시장은 인종주의만 재생산되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가 서로 맞물리면서 작동하는 복잡하고도 강력한 억압 이데올로기가 재현되어 왔다. 16~17세기에 유럽은 중간무역과 식민지 정복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여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구조를 분석한 마리아 미즈는 이 시기를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노예무역 상인들은 아프리카 민족을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었다. 마리아 미즈는 무역이 발전하면서 노예제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남성이 가부장 권력과 무기를 독점하는 ‘전사-사냥꾼’이 되면서부터 이미 나타났다고 본다. 노예사냥꾼, 노예무역상인 그리고 노예를 사고파는 자본가들은 아프리카 여성(흑인여성)‘야만인’ 또는 ‘성적 동물’로 취급하여 착취했다.

 

 

 

 

 

 

 

 

 

 

 

 

 

 

 

 

 

 

 

* [절판] 레이철 홈스 《사르키 바트만》 (문학동네, 2011)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지평을 연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흑인여성의 몸이 포르노그래피적 취급을 받았다고 분석한다. 노예가 된 흑인여성은 백인 남성 노예주의 쾌락을 채워주는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았다. 특히 흑인여성의 몸은 ‘관음의 대상’으로 전시 · 소비되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로 알려진 사르키 바트만(사라 바트만)[2]인종주의와 성차별이 만들어 낸 포르노그래피의 희생양이다. 그녀는 런던 피커딜리 거리에 전시되었다. 피커딜리 거리는 신체 이형을 가진 사람들을 전시하는 프릭 쇼(freak show)의 본거지였다. 호텐토트(Hottentot)는 남아프리카 코이코이 족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다. 사르키 바트만은 엄청나게 큰 가슴과 특이한 엉덩이를 드러낸 반나체로 프릭 쇼와 서커스에 끌려다녔다. 백인들은 사르키 바트만을 야만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섹슈얼리티를 가진 벌거벗은 동물로 취급했다.

 

사르키 바트만 쇼는 ‘관람하는 포르노그래피’이며 박람회 인종 전시장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인종적 · 문화적 우월감으로 무장한 유럽인들은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식민지인들을 구경했다. ‘야만인’의 전시를 통해 식민지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 박람회는 인간의 과시욕과 무지, 편견, 그리고 차별이 뒤섞인 장소였다. 박람회를 개최한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여 그녀들을 ‘비인간화’시키고, 오직 성적 대상으로만 재현 · 소비했다. 근대 박람회 인종 전시장과 사르키 바트만 쇼는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현대의 포르노그래피를 닮았다. 근대 박람회는 ‘EXPORNO’ 또는 ‘XXXPO’[3].

 

 

 

 

 

[1] 흔히 ‘런던 만국박람회’로 알려졌으나 ‘만국박람회’는 일본식 표현이다. ‘만국박람회’ 대신에 ‘세계박람회’ 또는 ‘엑스포’라고 쓰자.

 

[2] ‘사르키’는 크리올어(아프리카 원주민 언어) 이름으로 바트만을 자신의 이름을 ‘사르키’라고 칭했다. ‘사라’는 영국식 이름이다. (레이철 홈스 《사르키 바트만》 14~16쪽)

 

[3] ‘EXPORNO’는 ‘EXPO’와 ‘Porno’의 합성어다. ‘XXXPO’는 ‘XXX(포르노그래피 도메인)’와 ‘EXPO’의 합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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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전쟁 - 숨겨진 맛의 역사
톰 닐론 지음, 신유진 옮김 / 루아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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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교단의 회칙은, 수도사의 식사는 검약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수도사들에게 필요한 음식의 양을 원장이 정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우리 수도원에서도 수도사들은 식탁의 즐거움을, 탐닉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잖게 누리는 편이다. [중략] 참회와 덕행의 모범을 좇는 수도원들도 힘겨운 지적 노동을 하는 수도사들에게,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실질적인 식사를 제공한다. 그러나 수도원장의 식탁은 늘 기름지다. 귀한 손님이 거기에 앉기 때문인데, 원장은 이로써 수도원 땅의 소출과 요리사의 솜씨를 과시하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상권, 134쪽)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 중세 연구가들조차도 탄복할 정도로 시대 고증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박학다식한 에코가 고증하지 못한 것 있다. 그것은 바로 수도사들이 식사하는 장면(소설 상권 134쪽 참조)이다. 소설 속 수도사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수도원장이 손님에게 자랑하는 ‘기름진 음식’의 정체도 궁금하다. 수도사들의 식탁을 묘사한 내용 중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음식의 수는 단 두 가지뿐이다. 꼬챙이에 꿰어 구운 돼지고기와 닭 요리다.

 

소설을 쓸 때 고증이 어려운 묘사를 구상할 경우, 상상력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거 사람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느라 여념이 없어서 자신들이 뭘 먹었는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독 먹는 모습과 장면을 집중해서 보는 ‘먹방’‘쿡방(요리 방송)에 환호한다. 음식 관련 방송에 열광하는 주요 원인이 심리적 공허함, 1인 가족화와 경기불황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현대인들은 먹는 것 또는 먹방을 시청함으로써 일종의 대리 만족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먹방과 쿡방은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푸드 포르노’의 사례로 비판받고 있지만, 사람들이 선호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반영한 영상 텍스트이다. 그러므로 먼 훗날에 먹방 및 쿡방 유행이 시들어져도(과연 이런 날이 올까?) 후세 사람들은 과거의 기록으로 남게 된 먹방을 보면서 당대 사람들이 선호했던 음식을 확인하면서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유튜브와 TV가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옛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과거에 유행했던 숱한 요리법과 음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음식 문화는 시대에 따라 주어진 재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음식을 어떻게 만들고 어떤 재료를 사용하면 어떤 변화과정이 일어나는지 등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역사학적인 자료나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음식과 전쟁》(루아크, 2018)은 거대 역사 속에 가려진 음식 문화를 복원한 책이다. 저자는 음식에 관한 희귀 고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저자는 고대 요리책, 고문서, 삽화 등 오래된 자료에 기록된 음식, 식사 장면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우리가 잊고 있었던 ‘맛의 역사’를 추적해나간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들은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과거 식문화에 대한 훌륭한 단서가 되어준다.

 

맨발의 은자(隱者) 피에르는 당나귀를 타고 거리를 쏘다니며 이슬람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에르는 1차 십자군 원정에 앞서 ‘민중 십자군’을 결성하여 원정길에 올랐다. 말이 십자군이었지 농민, 범죄자 등이 많이 섞인 오합지졸이었다. 민중 십자군의 패배가 눈앞에 드리우기 전에 피에르는 고향으로 피신했고, 그곳에 유대인의 잉어 양식 법을 전파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피에르 앞에 나타나 두 가지 중대한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하나는 십자군 원정, 또 하나는 잉어 양식 법을 고향에 전파할 것.

 

유럽에 흑사병이 퍼지면서 프랑스 아미앵에서만 3만 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인근 도시에 발생한 엄청난 사망자에 비교해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상대적으로 큰 화를 입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흑사병이 창궐할 시기에 유행했던 레모네이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레모네이드는 세계 최초의 청량음료다. 레모네이드에 들어있는 구연산은 살균력을 지녔다. 레모네이드를 즐겨 마신 사람들도 모르는 사이 몸속으로 들어온 구연산이 잠복해 있던 전염병 세균을 없앴던 것으로 보인다.

 

루이 14세는 교활한 대식가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다양한 연회를 열었는데, 당시에는 ‘무엇을 먹는가’보다 ‘많이 먹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는 많이 먹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참석하는 루이 14세의 연회는 밤 10시에서 밤 10시 45분까지 정확히 45분 동안 진행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음해하는 귀족세력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매일 저녁에 만찬을 열었다. 왕의 저녁 만찬에 참석한 귀족들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귀족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루이 14세는 마음껏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맛보면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식인(食人)이다. 식인 행위 자체를 금기로 여겼기 때문에 식인 풍습을 역사적이고 문화적으로 접근한 자료가 희박하다. 유럽인은 식인 풍습을 ‘야만적인 문화’라고 비판했고, 식인 행위를 정신병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조너선 스위프트, 대니얼 디포, 허먼 멜빌 등의 작가들은 식인 행위를 묘사한 작품을 썼다. 특히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는 식인 행위를 암시하는 묘사가 많다. 저자는 디킨스가 인육을 먹고 싶어 하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음식과 전쟁》은 인류의 발전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먹고 마시는 일에 밀접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수천 년을 이어져 오며 많은 이의 피와 살이 됐던 음식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글쓰기는 인간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한다. 음식은 단순히 맛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 또는 역사로 남게 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음식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생존 수단일 뿐만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 이상의 큰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모르고 음식 문화를 이야기할 수 없고, 음식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음식의 가치를 설명할 수 없다. 음식이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왔고, 그 속에 문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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