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펭귄클래식 13
허균 지음, 정하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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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좋아하는 슈퍼 히어로, 홍길동  

 


 

2008년, 40여 년만에 발굴되어 대중에게 선보였던  

신동헌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년 작)의 한 장면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홍길동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친숙한 고전소설 속 캐릭터다. 한번씩은 어린 시절에 동화로 접한 홍길동의 활동를 통해서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용기를 얻으면서 자랐다.   동화뿐만 아니라 만화 캐릭터로서 부활한 홍길동은 탐관오리의 재물을 훔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에다가 손오공 못지 않게 축지법과 변신술을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슈퍼 히어로이다. 

   

  

 

  #1 길동 아이덴티티 " - 홍길동의 눈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공자와 맹자를 본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방법이라도 익혀 대장인(大將印)을 허리춤에 비스듬히 차고 징벌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만대에 빛내는 것이 장부의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외롭고,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 허 균 <홍길동전> (경판 24장본), 펭귄클래식코리아, pp 8~9 - 

 

어린이들에게는 홍길동을 용맹스러운 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홍길동전>을 동화가 아닌 고전소설로 접해본 성인들은 재능은 있으나 조선 시대의 유교적, 봉건적 지배 체제의 벽에 막혀 사회 진출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으며 천비 소생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달밤에 혼자서 사회적 이중고에 울분을 삼키는 비운의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의기롭고 용맹스러울거 같은 호걸 홍길동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현실의 벽에 기인한 모호한 정체성 혼란으로 인해 아버지인 홍 판서 앞에서 통탄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공(*)이 듣고 보니 불쌍한 생각은 들었으나 그 마음을 위로하면 방자해질까 염려되어 크게 꾸짖었다.  

 " 재상가의 천한 자식이 너뿐이 아닌데, 네 어찌 이다지 방자하냐?  앞으로 다시 이런 말을 하    면 내 눈앞에 두지 않겠다. 

이렇게 꾸짖으니 길동은 한마디도 더 하지 못하고, 다만 땅에 엎드려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 같은 책,  pp 10 -  

 (*) 홍길동의 아버지 홍 판서

  

결국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만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한 방법이라고 스스로 깨닫게 되어 의적의 길을 걷게 된다.   길동에 대한 홍 판서의 충고는 적서 차별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관념을 따르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길동의 능력을 눈여겨 봤던 부정(父情)이 담긴 조언으로 볼 수 있다.   홍 판서의 충고가 소년 길동을 스스로 사회적 현실의 눈을 뜨게 하고 스스로 출가하여 험난한 세상에 뛰어들게 만드는 부차적인 동기인 것이다.  

그러나 홍 판서의 존재는 소설에서 전개될 길동의 활약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데,,, 

 

 

  #2 길동 슈프리머시 - " 영웅 홍길동의 일생 "   

고전소설로서의 <홍길동전>을 읽게 되면 홍길동의 생애가 우리가 어렸을 때 동화로 봤던 완전무결한 의적의 모습이 아닌 율도국을 건설하여 왕이 되기까지 산전수전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작과는 다르게 내용이 축약되는 동화 속 홍길동의 모습이 더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동화 속 홍길동은 탐관오리의 집을 습격하여 훔친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으로스의 모습이 부각된다.   하지만 원작은 전혀 다르다.  원작에서 길동이 재물을 훔치는 상세한 묘사는 길동이 도적들을 이끌고 합천 해인사를 습격하는 장면, 단 한 장면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영웅들은 고귀한 혈통에서 태어났으며 일반적인 인간과 차원이 다른 초인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비록 길동은 명문 거족의 후예가 아닌 소생 서자로 태어났지만 길동이 태어나기 전에 꾸게 된 홍 판서의 꿈은 비범한 영웅의 등장을 암시하는 태몽으로서 극적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길동을 낳기 전에 홍공이 잠을 자는데 갑자기 우레와 벽력이 진동하며 청룡이 수염을 거꾸로 세우고 공을 향하여 달려들기에 놀라 깨니 한바탕 꿈이었다. 마음속으로 크게 기뼈하여 생각하기를, 

 ' 내 이제 용꿈을 꾸었으니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으리라. ' 

 - 같은 책, pp 7 -  

  

길동은 어렸을 때부터 영웅호걸의 기상이 돋보였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육도삼략과 병법, 천문지리, 거기에다가 주역(周易)까지 꿰뚫고 있다(!) 

그의 등장에 시기심을 느낀 홍 판서의 또 다른 첩 초란은 자객을 시켜 길동을 해치려고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아닌 이상 길동의 운명을 막지 못한다.  능란한 호신술로 자객의 위협을 벗어나며 탁월한 무예와 재략으로 활빈당을 조직하여 우두머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홍길동전> 원작에는 울동(* 현존하는 <홍길동전> 판본은 여기서 소개하는 경판 24장본과 완판 36장본이 존재하는데 발간 시기기 다른만큼 내용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완판 36장에서는 '을동' 이라고 표기되고 있다)이라는 괴물에 잡힌 백룡 집안의 딸과 조철 집안의 딸을 구출하는 장면이 있다. 길동은 이에 대한 공로로 두 집안의 딸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게 된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두 부인을 삼은 홍길동의 모습을 통해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또 다른 영웅적인 면모를 암시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혹은 생전에 기생과 어울릴 정도로 자유분방한 허균의 모습이 투영되는 설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것 같은 길동에게도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게 된다.  

'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길동의 의적 활동으로 인해 수많은 관원들이 그를 잡지 못하게 되자 조정은 길동을 향한 진노의 화살을 홍 판서 가문으로 돌리게 된다.  조정은 홍길동이 홍 판서의 서자임을 알게 되어 국가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길동을 방관한 홍 판서를 문초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노쇠하여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홍 판서를 길동으로 인해 곤혹을 치르게 되자 홍 판서의 친아들이자 길동의 형은 길동을 자수하게 만드는 공문을 올린다.  

 

사람이 세상에 나면 오륜이 으뜸이요, 오륜이 있어 인의예지가 분명하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고 임금과 부모의 명을 거역해서 불충불효가 되면 어찌 세상에서 용납하겠느냐?  

 (중략) 

바라나니 아우 길동이 이를 생각하여 이를 자수하면 너의 죄도 줄어들 것이요, 우리 가문도 보존할 것이니 너는 만 번 생각하여 자수하라. 

 - pp 29~30 -

 

원작에서는 의적의 길을 계속 걷을 것인지 아니면 홍 씨 가문의 명예 유지과 자신 때문에 노년에 곤혹을 치르는 아버지 홍 판서에 대한 불효라는 상충된 입장에서 길동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묘사는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길동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선택을 햐느냐에 따라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입신양면의 결과가 좌지우지할 수 밖에 없는 심사숙고해야하는 선택적인 딜레마의 기로에 처했을 것이다.  

결국 길동은 홍씨 집안의 위태로움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조정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 자수를 하게 된다.   길동에게는 자신의 의적 활동이 자식의 도리로서 불효를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자수를 선택하지만 조선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부조리한 유교적 사회 체제를 인식하고 있던 그가 홍씨 가문의 유지라는 전형적인 유교적 인습만큼은 지키려고 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3 길동 얼티메이텀 - 길동이 마지막으로 왕에게 부탁한 것은?

길동은 당대 조선 사회의 모순을 척결하고 새로운 이상 사회를 세우고자 율도국을 건설하게 되지만 원작 곳곳에 여전히 유교적 인습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길동의 모습이 포착된다.  

제 아무리 자신의 능력으로 의적 활동과 여러 번 위기를 벗어나고 조선 사회을 타파하여 새로운 이상 사회인 율도국의 왕이 되지만 율도국을 건설하여 왕에 오르게 되는 과정만큼은 썩 석연치 않다.   

길동은 자신의 소원이 병조판서를 지내는 것이므로 제수(除授)받게 된다면 조선을 떠나겠다고 왕에게 최종 제안을 하게 된다.  왕은 길동의 제안을 허락하여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한다.  

병조판서는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병조의 우두머리 관직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부전자전이라고 하던가?   길동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판서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병조판서가 되고 싶어하는 길동의 소원에는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길동이 세운 율도국은 조선의 관리 체제와 유사하다.  율도국을 건설하는데 큰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삼는 장면, 그리고 원작의 결말에 길동이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삼년상을 하게 된다는 언급은 사회 개혁에 대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을 떠나 새로운 미지의 땅에 세운 율도국도 조선의 유교적 전통의 특성을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 개혁에 대한 개혁 의식을 허균은 이상향으로 도피시킴으로써 <홍길동전>의 결말은 그 당시로서는 신선한 문학적 장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이념에 다스려지는 중세적인 모습을 간직한 채 근대적인 발전으로 전향하지 못했다.  

 

 

  #4 길동 레거시 - 홍길동의 후예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지 400여 년이 지났지만 홍길동이 겪어야했던 사회의 모습은 시대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재벌가 및 권력자의 2세들 중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다른 거대한 저택에 살면서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값비싼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화려한 ' 로열 패밀리 ' 로써의 생활을 누린다.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경영 수업을 통해서 기업을 물려 받지만 기름으로 떼돈 버는 아랍 왕자들처럼 대기업을 손쉽게 거저 물려주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저소득층 집안에서 태어나 가까스로 전문대를 졸업하지만 취업하는데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재산이 가지고 있는 부유한 자와 반대로 재산이 턱없이 부족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자들 간의 사회적 빈부 격차가 나날이 커져만 가고 있다.  요즘은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지만 ' 개천에서 용 난다 ' 라는 속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적인 삶을 이루는 사람들도 있다.  가난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지만 끝내 온갖 노력 끝에 신분이 상승되기도 한다.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계급의 차별을 벗어나 상류 사회 진출하기 위해서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 수많은 이력서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형적인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한탄하면서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경쟁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 홍길동의 후예 ' 인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동화 속 홍길동을 보면서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을 교훈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변해버린 사회를 직접 피부로 체험하게 된 이상 노력만으로도 자신의 꿈을 이룬다는 것을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되고 부조리한 사회 구조 앞에서 좌절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홍길동전>을 원작으로 읽게 되면 홍길동은 애초부터 초인적인 조선의 호걸이 아니라 우리처럼 사회 현실 앞에 눈물을 흘리는 인간적인 호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홍길동도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슈퍼맨, 배트맨과 같은 서양의 영웅 못지 않게 한국적이면서도 인간적인 홍길동을 다른 조선 호걸들보다 많이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문서 작성할 때 예시 이름으로 ' 홍길동 ' 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홍길동은 우리에게 인간적이면서 친숙한 호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사진 출처

[한국 최초 장편 애니 ‘홍길동’ 40년만에 부활] 경향신문 2008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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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우치가 더 좋았어요, 어려서부터.
홍길동전을 읽으면 심란한거예요... ㅎㅎ. 특히 뒤로 갈수록.
다시 읽으면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것 같네요.
그러게요... 별반 다름없는 인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인게죠.
가장 크게, 부모님과 임금, 제일 중요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그런... 그렇네요.

cyrus 2011-07-04 21:03   좋아요 0 | URL
마고님 댓글 보면서 아마도 길동은 단순히 사회진출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록 소생 서자이지만
아버지로부터 친자처럼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거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 - 조선의 문학과 예술을 꽃피운 명문장가들의 뜨겁고도 매혹적인 인생예찬
이종묵 지음 / 김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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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내 서재 이름은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이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수레에 실을 만큼의 책을 읽어야 한다' 라는 뜻이다.  독서에 관한 좌우명 한 줄 적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일곱 글자를 쓸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실천하려는 독서에 대한 포부를 잘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겠다마는 서재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가 남성은 무조건 책을 읽어야 하고, 여성은 그 정도의 양으로 독서를 못 한다는 식으로 여성 차별적인 생각을 강조하는 뜻은 전혀 없다.  조선 시대 때에는 남자들로 구성된 선비, 양반들의 기세가 강했고 벼슬자리도 남자들이 차지했기에 책은 남성들이 소유할 수 있었고, 그 당시 여성들에게는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남아수독오거서' 라는 말이 남존여비가 강했던 유교 사회의 유언(流言)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올해 알라딘 서재 블로그을 시작하면서 서재 이름에 많은 고민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블로그라는 것을 알라딘을 통해서 처음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서재 블로그가 나에게는 유일한 공적이며 사적인 인터넷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cyrus의 서재' 라고 정하기에는 무언가 평범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고심 끝에 결국에는 '남아수독오거서' 로 정하기로 했다.  딱, 내가 생각하는 독서관과 맞아떨어지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 내가 올바른 독서를 하고 있는지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제 매버릭꾸랑님이 예전에 쓴 글에 댓글을 달았을 때 다시 한 번 그 글들을 읽게 되었다.   

어이쿠, 이런, , , , ,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채 막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 많이 보였다. 다시 읽어보니 문맥이 맞지 않은 부분도 수두룩하였다.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질보다는 양에 치중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러 모로 나의 독서에 대해서 반성을 할 수 있었다.  

P.S 감사합니다. 매버릭꾸랑님   

 

   

Scene #1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는 독서, 자연, 술, 등 자신들이 좋아했던 취향을 즐기면서 세상을 재미있게 살다 간 조선 선비들의 글을 발췌한 것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글에 대해서 책의 저자인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글에 대한 설명과 짤막한 단상들을 덧붙였다. 우리나라 옛 문장들을 소개하는 이 책 역시 정민 교수가 쓰고 있는 글 스타일과 비슷하다.  책 말미에는 이종묵 교수가 엄선한 문장들의 원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정민 교수의 글 스타일을 그래도 답습했다고는 볼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학자들의 명문만 수록된 것이 아니라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지금은 잊혀진 인물들, 생전에 벼슬자리 문턱에 가보지 못했다거나 자신만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면서 은둔 생활을 한 선비들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나마 소개하는 유명한 인물이라면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 영조 시대 때 망나니나 다름 없었던 사도세자에 대한 처벌을 반대했던 채제공(많은 이들에게는 체제공이 생소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전에 많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이산]에서 조정의 양대 당파 세력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로 등장했었다) 그리고 율곡 이이, 단 네 사람뿐이다.   

  

 

Scene #2  

이 책에는 장혼(1759~1828)이라는 선비가 독서에 대한 쓴 글이 소개되어 있다. 장혼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자면 글와 독서를 좋아했던 가난한 선비였고 아마추어 문장가로 활동했다. 그는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리하는 하급 관리로 일하면서 자신들과 취향이 비슷한 선비들과 사귀어 함께 시를 짓곤 하였다.  비록 세상은 자신의 문장을 알아주지는 않았지만 후세에 '시인' 장혼이라는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시 쓰기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가 시만 좋아해서 평생 시만 쓴 것이 아니었다. 책을 좋아해서 문학과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책을 쓰고 스스로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벗에게는 시보다는 책을 더욱 사랑하라는 충고를 했는데 이 책에서 소개된 편지에서 말해주고 있다. 시 쓰는 것은 잠깐이나마 마음을 즐겁게 해줄 뿐이며 독서의 즐거움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이 편지에서 독서의 장점을 아주 멋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저 금과 옥은 보배고, 문장도 또한 보배지요. 백근이나 되는 묵직한 물건은 보통사람이라면 감당하지 어렵겠지만, 다섯 수레의 책도 돌돌 말면 가슴속안에 넣어 간직해둘 수 있을 것이요, 이를 쓰면 조화에 참여하고, 우주에 충만하게 되겠지요.  

 - <김용재에게 주는 편지> 중에서, 장혼, 책 p 180 재인용 - 

 

 
   

 

장혼에게 독서는 다섯 수레에 담은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가슴속안에 간직할 수 있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은 사유의 활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책을 가슴속안에 간직한다 , , , , ,   문장이 멋지면서도 한편으로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과연 내가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한 독서가 내 머릿속, 그리고 내 가슴속에 제대로 간직하면서 읽었는지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그 아무리 다섯 수레 안을 꽉 채울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도 머리와 마음 속에 하나라도 사유에 대한 응집물이 간직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빈 수레나 다름 없는 것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라는 속담처럼 결국에는 글만 읽은 실속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Epilogue  

한 달하고도 3주 정도 지나면 2011년이 다가온다. 내년이 되면 나는 다시 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그 때도 독서를 즐겨 하겠지만 지금만큼의 정도는 못 할 것이다. 하루하루 수많은 과제와 취업 준비 때문에 이리저리 활동하는 양이 많아지고, 학점관리도 잘 해야 한다.  

12월달이 되면 지금까지의 독서들을 결산해봐야겠다. 2010년, 7개월동안의 독서의 기록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도 또 읽어보려고 한다. 예전에 남긴 과거의 기록물들을 본다고 해서 장혼의 말처럼 가슴속에 간직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은 다 내가 읽고 싶었고, 내가 책을 무척 좋아해서 읽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장혼의 독서처럼 가슴속에 나에게 유익한 책들을 담을 수 있는, 그런 독서를 해야겠다. 그럴러면 내년에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서재 블로그의 이름을 바꿔야 하는데,  

'남아수독심저서' (男兒須讀心貯書) 라고 해야 되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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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1-0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듣고 먹고 하는 것들이 모두 '나'를 이룬다고 합니다. 확인할 수 없지만 사이러스님의 몸에 다 저장되어있으리라 믿습니다. 복학하시기까지 읽고싶은 책과 함께하는 시간이시길...

cyrus 2010-11-07 22:28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의 댓글이 멋집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딧불이님^^

다이조부 2010-11-0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저는 얼마전에 어떤 알라딘 유저한테 밀도있는 글 좀 쓰라고 쿠사리 먹었는데요.

근데 저는 앞으로 살면서 다섯 수레의 책은 불가능한 작전같군요.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야심이 별로 없어요. 책 을 많이 보는게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는 책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책 속에

빠져서 현실감각을 잃을수도 있다고 봐요.


stella.K 2010-11-08 18:51   좋아요 0 | URL
ㅎㅎ 매버님~~~! 이거 원...제가 그랬다고 할 수도 없고.ㅋㅋ
암튼 분명 그뜻은 아닐 것이고, 다 응원의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매버님 밀도있게 쓸 수 있도록 도와드릴까요?ㅋ

cyrus 2010-11-08 20:23   좋아요 0 | URL
꾸랑님 말이 맞습니다. 너무 책 속의 길을 찾게 되면,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의 길에는 헤멜 수 있게 되겠죠.
저도 가끔 그러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답니다.
뼈 있는 댓글, 감사합니다.^^


stella.K 2010-11-0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를 이렇게도 쓰는군요. 멋지내요!^^
근데 사이러스 뜻이 뭐죠?
저는 그냥 세례명에 영구를 쓰고 있습니다.


cyrus 2010-11-08 20: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stella09님^^
댓글상에서 닉네임의 유래에 적기 제한이 되지만, stella09님을 위해서
댓글로 남깁니다.

예전에 초등학생 때 <말하는 백과사전 시루스>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터라
그 책에 나오는 똑똑한 박사처럼 똑똑하고 인텔리(?)하게 보이기 위해서
cyrus이라고 했는데, 제가 영어 실력이 딸린(?) 편이라, , ,
알고보니 cyrus을 시루스라고 발음하는 것이 아니었더라고요.
뭐, 온라인상에서는 발음이 중요치 않아서, stella09님처럼
사이러스라고 부르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사이러스라고 부르는게 듣기 좋습니다. ^^

stella.K 2010-11-09 12:1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글치 않아도 한글로 어떻게 불러드려야 하나
약간 난감했어요. 시루스. 그게 맞는 표현 같기도 해요. 시루스님.^^


다이조부 2010-11-08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은 세례명이었군요. 저는 어렸을때 좋아하는 차종이 스텔라였나 했는데,

전 초딩때 어른이 되면 프라이드를 몰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주인장이 이야기하는 말하는 백과사전 시루스 라는 책은 처음 들어보네요. ㅋ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제 닉네임은 매버릭은 다들 잘 아시겠지만 괴짜 이 정도로

알고 있어요. 꾸랑은 인도네시아어 입니다 ㅎㅎㅎ

cyrus 2010-11-08 23:40   좋아요 0 | URL
ㅎㅎ 꾸랑님은 참 독특하신 분 같네요^^

stella.K 2010-11-09 12:10   좋아요 0 | URL
ㅎㅎ 매버님 전 차도 차지만 여드름 치료제를 생각해요.
지금은 없어진 것 같긴 합니다만.
매버릭꾸랑이 그런 뜻이었군요. 글치 않아도 궁금했는데...^^


양철나무꾼 2010-11-0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는 사람은,책만 읽지는 않을거예요.
수레를 어떻게든 구워먹던지 삶아 먹던지 할테니까 말이죠.^^

다이조부 2010-11-09 15:09   좋아요 0 | URL


아~ 댓글이 무슨 말인지 왜 감을 잡을수가 없는거죠..나만 이해 못하는건가

책을 많이 읽어서 지식을 습득해서 유용하게 쓴다는 그런거는 아닐테고....

여드름 치료제 중에 스텔라 라는게 있었군요. 여드름 따위로 한 번도 고심

해 본적이 없어서요 ^^ 몰랐네요. 한 분쯤은 꾸랑은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볼 줄 알았는데 다들 무심하네요 ㅋ 아무도 묻지 않으니 대답을 하면

인기연예인 노홍철의 별명이 뜻이랍니다 헐

cyrus 2010-11-09 20:15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말씀은 책을 읽어서 유용하게 쓴다는 뜻으로 말한걸겁니다.^^
저도 여드름 고민한 적도 없답니다.ㅎㅎ
죄송해요. 매버릭 뜻만 봐서 꾸랑은 못 물어봤네요^^;;

stella.K 2010-11-10 11:24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묻고 싶었습니다.
근데 꾸랑님이 귀찮아 하실 것 같아 못 물어 봤다능...
그럼 꾸랑님은 괴짜 노홍철 같은 분이신가 봅니다.^^

꽃도둑 2010-11-1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안그래도 하루에 한 번 꼴로 올리는 리뷰가 어떻게 가능한지 신기해 하고 있었는데
다섯 수레를 채우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었군요...^^
그런데 책의 무게로 봐서 얼마 안가서 채우겠는데요?...(흠,,부러벙..)

cyrus 2010-11-12 21:14   좋아요 0 | URL
다섯수레를 채우기보다는 이제 얼마 안 남지 않은 자유의 시간에
필사적으로 독서를 하는거랍니다.^^;; 내년에 복학하면
이렇게 읽을 시간이 없으니까요. 내년에는 이보다 많이 읽을 수는
없지만, 한 달에 5권 정도는 읽으려고 합니다.

꽃도둑 2010-11-1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일 년에 100권을 목표로 세워두지만 매번 참패 당하죠...
한 달에 5권 정도 읽을 때도 읽고 아닐 때도 있고 하니.. 그래서 하루에 한 번 꼴로 올라오는 리뷰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요...^^
아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ㅎㅎㅎ 근데 복학해도 열심히 할 것 같아요.

cyrus 2010-11-17 13:19   좋아요 0 | URL
그랬으면 좋겠네요. ^^
내년에 장학금을 위해서 열공하고, 알바도 계속 해야되니
올해보다는 못하지만 한 달에 5권 정도 읽는 생활방식로 전환해야겠습니다.
 
셔동지젼 지만지 고전선집 554
작자 미상 지음, 최진형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디케의 말 못하는 고충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우리나라에 매년 270명이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270명이 어떠한 사연이 있길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야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떡하다 보니 자신이 범죄자로 몰릴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TV속 드라마나 문학 작품들에는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려 옥에 갇힌 인물이 등장하곤 한다. 대부분동료의 거짓된 밀고나 비윤리적인 인물의 뇌물 혹은 증인의 엉터리 증언 때문에 한순간에 범죄자로 지목받게 된다. 그리고 단지 인상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다 보니, 범죄에 대해서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재판관들에게는 이런 복잡한 상황들 속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오죽했으면 정의의 여신 디케(Dike)가 눈을 가리고 있겠는가?  눈을 가림으로써 하나의 사건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정의롭게 법을 집행하겠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완벽할 수가 없다. 정말 불행하게도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혀 수십년을 감옥에 살아야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뇌물을 받아서 올바르지 못한 판결을 내린다거나 부당한 집단들과 손을 잡아서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사건을 처리하는 비윤리적인 재판관들이 있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에 반국가단체 인사로 몰아 넣어 사형 판결을 내린 '인혁당 사건' 이 그 예이다. 8명의 인혁당원들은 사형 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이 사형당한지, 무려 32년 만에 사법부는 인혁당 사건의 재판 결과는 잘못된 판결이었으며 8명을 무죄로 선고하였다.  

2년 전에 베스트셀러였던 <디케의 눈>에서 저자이자 변호사인 금태섭 씨는 디케가 눈을 가린 이유가 실제 현장에서 법이 진실을 찾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아무리 뛰어난 신이라 할지라도 디케는 현실 앞에서 진실다운 판결을 내리는데 말 못하는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동물판 '실화 극장, 죄와 벌'

하지만, 악의 세력에 맞서서 힘 없는 선의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금태섭 씨가 말하고자 한 것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재판관은 진실다운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런 디케의 진리는 동서고금 모든 재판관들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도 지금처럼 부당한 재판 때문에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야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서동지전>은 흥미롭게도 이솝 우화처럼 동물들이 등장하는 고전소설이면서도 내용은 오늘날의 재판처럼 억울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즉, 올바른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서동지전>은 조선 후기 때 쓰여져서 작품 속 인물들도 시대상의 인물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전소설에는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서로 구도적인 캐릭터가 있듯이 <서동지전>에는 성격이 착하나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는 쥐 '서대주' 와 그를 모함하는 다람쥐가 등장한다. 다람쥐는 예전에 서대주로부터 양식을 빌려 큰 은혜를 입었으나, 또 한 번 그에게 양식을 구걸하다가 퇴짜를 맞게 되자, 이에 원한을 품고 재판관인 호랑이 '백호산군' 에게 거짓으로 소송을 건다. 그러나 슬기로운 재판관인 백호산군은 서대주와 다람쥐의 말을 들어보고 다람쥐가 허위로 고발하였음을 알게 된다. 결국, 자신이 세운 계략에 의해서 궁지에 몰린 다람쥐는 그 허위 신고라는 죄목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착한 서대주는 백호산군에게 다람쥐에게 선처해 줄 것을 간청한다. 이에 탄복한 백호산군은 서대주의 간청대로 다람쥐를 용서해주었고, 이에 다람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서대주에게 사과를 한다. 그러자 서대주는 쿨하게 다람쥐에게 황금을 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작품에서 서대주는 과거에 큰 공을 세워 벼락부자가 된 인물이며, 다람쥐는 살림이 부유했으나 성격이 무능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인물이다.  작품 배경을 비추어 보면 서대주는 조선 후기 때 새롭게 부상한 신흥 상공인 계층이며 다람쥐는 허위 의식에 젖어 있는 몰락한 양반층을 상징하고 있다.  유교적 조선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하는 줄 알았던 양반층들에게는 갑자기 등장한 신흥 상공인 계층들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자신들의 유지 체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 챈 양반층들은 유교 사상의 이념과 자신들의 권위를 앞세워 이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넘보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공정히 사건을 처리해야 할 관리들이 그 부정적인 수단에 눈이 먼 나머지 제멋대로 판결을 내렸을 것이다. 이런 악의 연결 고리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상공인 계층 또는 힘 없고 가난한 서민들은 부당한 양반들이 지배하는 세력 앞에서 억울하게 죄값을 대신 치뤄야 했다.   

    

 

  뇌물이 오고가는 사회

그러나, 여기서 소개된 줄거리만 가지고 서대주를 올바른 인물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작품을 읽는 독자에 따라서 한 인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서대주는 자신이 처한 억울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뇌물을 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서대주라는 인물은 갑자기 찿아온 예상 밖의 상황에 대해 민첩하게 대응할 줄 아는 명민한 성격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억울한 누명을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다보니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뇌물을 이용하는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서동지전>을 읽게 되면 서대주의 이런 행동은 당연히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게 된다. 서대주가 다람쥐가 모함한 거짓된 죄목을 받았다하더라도 공명정대한 사회에서는 뇌물은 부정적인 방법이다.  어차피 백호산군의 명판결로 서대주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서대주가 뇌물을 주는 행동만큼은 옳은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서대주의 이런 모습은 비단 조선 후기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뇌물은 판결의 형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부정한 거래도 오래 가지 못한 채 발각되기는 하지만, 이런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뇌물의 위력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뇌물이 오고 가는 현상이 줄어들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뇌물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동지전>에서도 뇌물의 위력을 맛 본 인물이 등장하는데, 평소에 서대주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오소리는 백호산군의 명령에 따라 서대주를 체포하러 가는데, 자신의 동료인 너구리에게 서대주로 하여금 뇌물을 요구할 것을 결탁을 꾀하기도 한다.  서대주의 죄를 따지기 전에 뇌물부터 챙기려는 속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서대주와 오소리를 통해서 뇌물이 사회를 지배하여 점점 부패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풍자하고 있다.  조선 후기나 100년 뒤의 지금의 모습이나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은 여전하기만 하다.

 

  

  백호산군다운 호질(虎叱)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서대주, 다람쥐, 오소리는 부정적인 인물이라고 치더라도, 그나마 긍정적인 인물은 다람쥐의 아내인 계집 다람쥐와 백호산군 뿐이다. 

자신의 남편이 서대주를 위시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집 다람쥐는 남편을 충고하다가 도리어 모욕을 당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고는 그 모욕감에 분하여 집을 뛰쳐나가는 모습은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계집 다람쥐의 행동 역시 지금의 현실을 비추어 보면 눈 앞의 부당한 행동을 막으려는 바람직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계략을 막지 못한 채 훌쩍 남편 곁을 떠나고 만다. 이를 통해 부당한 행동에 맞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더라도 그 힘이 미미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정한 사회 현실 속에서도 백호산군 같은 훌륭한 재판관들이 존재하고 있다. 중국 고전 속 일화를 예를 들어 공정한 판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백호산군의 말은 부정부패와 비리에 물들인 법조계 인사들에게 일침을 가할만하다.   

   
 

 " 대개 만물이 가볍고 무거움을 알고자 할진대 저울을 사용하는 것만 같음이 없고, 송사의 바르고 그릇됨을 아는 데는 양쪽의 말을 듣는 것만 같음이 없나니, 한편의 말만 듣고 좋고 나쁨을 경솔하게 판결치 못하리라. " 

 - <셔동지전> 최진형 역, 지만지고전천줄, p 89 -  

 
   

백호산군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판결할 때에는 일방적으로 한쪽의 이야기만 듣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공정한 판결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법조계 인사들에게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당연히 알고 있는 진리이지만 일부는 이 진리를 실제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디케가 '공정한 판결' 을 상징하는 서양의 인물이라면, 아마도 우리나라에는 <서동지전>의 백호산군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공정한 디케의 눈을 가진 미래의 재판관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법을 공부하고 있는 법학도들은 백호산군의 호질(虎叱)은 한 번쯤은 새겨 들어야할 것이다.            

 

  

P.S   

이 소설을 원문 그래도 직역하다보니, 너무나 많은 한문과 중국 고사들이 등장한다. 비록 얇은 분량에다가 독자들을 위해서 수많은 각주들을 달았지만 이 작품을 가볍게 읽기에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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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2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펭귄 클래식이랑은 할말이 없는데,
지만지는 좀 애정해요~

근데,고전을 두루 섭렵하시는군요~

양철나무꾼 2010-10-29 20:54   좋아요 0 | URL
제가 서가여서,저 서동지전 애착이 가요~^^

2010-10-30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0-31 11:50   좋아요 0 | URL
네,제가 徐가 라는 얘기였어요~^^
 
도산에 사는 즐거움 - 이황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8
이황 지음, 김대중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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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퇴계 이황 
 

퇴계 이황과 관련된 것 중에서 뭐가 떠오르는가? 1000원짜리 지폐 속에 간지 나는 소지섭 

눈빛을 발산하는 할아버지라고 맨 처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조선 유학자, 도산서원이라고 

떠올렸다면 학창 시절 헛되이 보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만약에 이기호발(理氣互發) 

,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다. 고등학생  

시절, 윤리 시간에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에 대해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서양 철학 사상에는 막힘이 없었고 이해를 했었으나 동양  

철학 사상 쪽에는 유독 약했었다. 특히 이황과 이이의 사상은 ‘이(理)’‘기(氣)’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모의고사에는 항상 이런 문제가 출제되곤 했었다. 

간략하게 두 이론을 설명하자면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인간과 자연은 각각 이의 발현과  

기의 발현으로 구분되어 이루어져 있는데 ‘이’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반면 이이는 이는  

하나로 통해 있지만 기는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이는 ‘기’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공부했을 때는 이 두 사람의 사상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차이점이 

무엇인지 이해를 했지만 막상 모의고사 시험 문제를 풀면 가끔 틀리기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또 다음 모의고사 문제를 풀다보면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이이가 주장한 설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몇 몇 사람들 중에서도 1000원짜리  

지폐 속 인물이 이이인지 이황인지 구분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이황과 이이에 

대해서 헷갈려한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면서도 얼핏 이름도 서로 엇비슷하다 

보니 한 번은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황이 단순한 성리학자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벼슬을 지낸 정치가였으며, 시인이면서도 인문주의자였다.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 하리라

우리나라 문학 교과서나 각종 문제집에 그나마 많이 실려 있는 퇴계의 작품이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이다. 참고로 과거 수능 시험 지문으로 출제되기도 했었다.  

도산십이곡은 퇴계가 도산서원 주변의 자연 경관을 보고 감상한 것을 적은 총 12곡의  

시조로 구성된 작품이다. 전반부를 이루고 있는 6곡은 도산 서원 주변의 경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도산십이곡의 시작을 알리는 1곡은 자연에 대한 퇴계의 지극한 사랑이  

엿보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렇게 산다고 해서 어떠하랴 
  하물며 자연을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고쳐 무엇하랴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도산십이곡> 제1곡 전문, p 69 -  


퇴계는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 속에 사는 삶을 권유하지만 그들은 

그런 퇴계를 시골에 묻혀사는 어리석은 사람 (초야우생)이라고 무시한다. 하지만  

퇴계는 주눅이 들지 않는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고질병(천석고황)이라고 말하면 

 세속적인 삶에 물든 그들에게 굳이 정신적으로 좋은 병을 고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한다. 
 

후반부를 이루는 나머지 6곡은 학문과 수양에 임하는 의지와 자세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전반 6곡에서는 자연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다가 후반부의 시작인 7곡부터는  

학자로서의 퇴계의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1곡은 후반 6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이다. 전반에서 강조한 자연에 대한 예찬과 후반에서 강조하고 있는 학문  

수양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도산십이곡> 제11곡 전문, p 80 -

푸른 산은 오랜 세월(만고)동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밤낮(주야)을 가리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즉, 청산과 유수는 자연의 영원성을 뜻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는 그런 자연의 

영원성을 본받아 학문 수양에 정진함으로써 영원히 푸른 존재(만고상청)가 되겠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11곡에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간 세상에도 자연의 영원한 질서와 

조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퇴계의 도학(道學)적 이상을 볼 수 있다.   

 

 

 

 퇴계의 한시를 읽는 3대 키워드, 매(梅). 송(松). 죽(竹)

퇴계의 생애 전반에는 학문적 칭송을 얻음과 동시에 왕도 인정할 성공적인 정치 생활을  

누려왔지만 말년은 전반과 비교하면 어두운 시절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퇴계의 

몸은 약해져만 가고 결국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병든 몸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벼슬자리에 물러나게 되었다. 왕은 퇴계의 능력은 높이 사고 있어서 그의 은퇴를  

만류하였지만 퇴계는 왕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홀로 속세와 떨어져
있는 자연이 있는 곳에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속세에서 지내면서 가지고 있었던 왕에  

대한 충신(忠臣)적인 마음은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퇴계는 자신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명(命)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왕에게 어필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이 

었다. 이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세상의 태도에 퇴계로서는 무척 섭섭하면서도 외롭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퇴계는 한시를 읊으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하였는데 대부분  

매화(梅), 소나무(松), 대나무(竹)를 주제로 한 작품이 남겼다. 퇴계가 자연을 좋아하는 

성격인 만큼 한시에서도 매화, 소나무, 대나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드러나 있다. 이 세  

가지 자연물 중에서 퇴계는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에게 매화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벗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매화를 통해서 속으로 담아두고 있었던  

왕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였다.  


   매화가 봄을 맞아 찬 기운 좀 띠었기에
  꺾어다 마주했네 옥창(玉窓) 사이로
  천산(天山) 밖 벗님이 길이 그리워
  향기가 축나는 것 못 견디겠네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매화가지 꺾어두고(원제: 折梅揷置案上  

     절매삽치안상)> 전문, p 41 -  

 

시 속의 화자는 ‘벗님’을 향한 정(情)이 담은 매화를 꺾어 사랑하는 벗님에게 바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벗님은 ‘천산 밖’에 있다. 화자와 벗님이 천산으로 인해서 서로 단절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벗님’은 한양에 살고 있는 왕이며 화자는 퇴계인 것이다.  

벗님에게 바치지 못한 채 풍기는 매화의 향기는 왕에 대한 그리움이다. 퇴계는 자신에게  

힘든 시련이 찾아오거나 고독감을 느끼게 되면 소나무와 대나무를 통해서 고통을  

이겨내려삶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꾼은 쑥대처럼 천시하지만  

   산옹(山翁)은 계수나무처럼 사랑하누나. 
  푸른 하늘까지 우뚝 솟아오르려면 
  풍상을 몇 번이나 겪어야 할지.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소나무를 심으며(원제: 種松 종송)> 전문, p 34 - 

 

작품 속 산옹은 화자, 곧 퇴계 자신을 뜻한다. 나무꾼으로 표현되는 속세 사람들은 소나무 

를 무시하지만 오히려 퇴계는 오랜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계속 자라는 소나무를 사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퇴계와 소나무는 동등한 존재로 부각시키게 된다. 퇴계는 자신과  

소나무가 겪어야 할 미래의 시련(풍상)에 대해서 걱정한다. 결국 퇴계의  걱정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퇴계에게 찾아온 첫 번째 시련은 병이었던 것이다.    

 

 

  사흘 동안 한양에 눈이 내려서               
  찾아오는 사람 발길 뚝 끊겼지.              
  얼마나 쌓였나 병석에서 물으니
  싸늘한 이불이 쇠붙이 같네.

  (중략)
  나무 끝이 눈에 묻혀 보이질 않고
  가지마다 꾹꾹 눌러 꺾이려 하네.
  참으로 기특하네 한두 줄기가
  천길 높이 솟아올라 꼿꼿함 보여주니.

  (하략)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눈 속의 대나무(원제: 雪竹歌 설죽가)> 중에서,  

     p 28 -   

 

 

이 작품을 쓰고 있을 당시 퇴계는 병을 앓고 있었다. 하필이면 전국적으로 눈이 내리게 되어서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에 눈이 많이 쌓이다보니 육체적인 고통에 혼자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노학자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나보다. 병 져 누워있는 퇴계의 방은 병문안 찾아오는 사람들의 

따뜻한 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차디찬 공간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퇴계는 ‘싸늘한 이불’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 정말 아프면 서럽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시의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퇴계의 마음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그는 눈에 쌓여 반쯤 뒤덮인 대나무를 보게  

된다. 가지에도 눈이 쌓이다보니 꺾일 우려가 있지만 줄기는 쌓인 눈 사이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음으로써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략에 생략되어 있지만 퇴계는 그런 눈 속의 대나무를 

통해서 강인한 삶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지연합일의 세상을 꿈꾸다

 

퇴계가 남긴 글들은 400여 년 전에 쓰여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글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르침들은 현재까지도 그 가치가 유효하다.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는 바다 건너 일본 

과 중국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퇴계에 대한 이미지가 깊이 인식되어 

있다 보니 문학적 가치는 많이 가려져 있다. 대부분 자연을 예찬하는 작품들은 단순히 혼자 

서 자연 경관을 즐기려고만 하는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있다. 하지만 퇴계는 현실을 도피하 

기 위해서 자연을 혼자 즐기지 않았다.『도산십이곡』에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을  

즐길 것임을 권하기도 하였으며 자연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깨우침을 얻으려고 하였다. 중국의 유학자 왕양명은 지식 획득에는 행위를 합일 

되어야 이루어진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사상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퇴계의 도학적 이상인 지연합일 

(知然合一) 은 유학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지행합일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도산십이곡』뿐만 아니라 자연을 노래한 한시들도 진일보된 퇴계의 유학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연구 대상이다. 한시와 시조 작품들이 퇴계의 유학 사상에  

대한 연구 자료에 활용을 하는 것은 퇴계의 문학적 가치를 한층 더 빛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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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0
송성욱 풀어 옮김,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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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性) 춘향, 팜 파탈로 변신하다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 중에서 좋은 흥행성적을 기록하면서도 개봉 내내 논란의  

화살을 맞아야 했던 영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6월에 개봉했던 <방자전>이다.  

영화 제목만 봐도 이 영화가 우리나라 고전소설 <춘향전>을 모티프를 한 영화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원작은 다 알다시피 기생 집안의 성춘향과 벼슬 집안의  

이몽룡과의 사랑을 그린 애정소설이다. 하지만 영화 <방자전>에서는
<춘향전>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몽룡의 몸종인 방자가 춘향에게  

한 눈에 반해 버려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방자전>를 관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 속 춘향은 두 남자 주인공 방자와 이몽룡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을 휘어잡는  

팜 파탈로 나온다.  <방자전> 포스터를 보게 되면 ‘춘향, 두 남자에게 덫을 놓다’라는  

카피와 함께 춘향 역을 맡은 조여정의 포즈가 인상적이다. 한국적인 미를 발산하는  

아리따운 한복을 입고  단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아한 춘향의 얼굴이 아니다. 카피처럼 방자와 이몽룡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들에게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유혹의 덫을 놓겠다는 눈빛이다.  

그리고 남녀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과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방자와 춘향의 모습이 있는   

포스터도 있다 . 영화는 전통적인 정절녀 춘향을 두 남자의 애간장을 타들어가게 만드는  

요부로 표현하면서 원전을 비틀어놓았다.

그래서 춘향문화선양회라는 단체가 원작 속의 춘향을 모독한 이유를 들어 영화 제작사를 

상대로 상영금지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영화 제작사를 향한 규탄 궐기 대회도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영화 제작사 측은 단체에게 사과 의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단체가 일으킨 상영금지 해프닝은 오히려 영화 관람객 기록 수만  

늘리게 되는 홍보효과가 되었다. 의도하지 않게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된 셈이다. 
 

  

 미스 춘향은 있고 성춘향은 없다?

리뷰 작성을 계기로 인하여 알게 된 춘향문화선양회에 대해서 좀 도 알아보기 위해서

홈페이지를 열람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춘향을 기리기 위한 제사와 전북 남원에서  

개최하는 미스 춘향 선발대회를 주최하고 있었다. 홈페이지 공지사항에는  

영화 <방자전>과 관련된 규탄 성명과 궐기 대회를 알리는 글이 있다.   
그리고 ‘춘향 선양 제안’이라는 코너도 있는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보다 다양한  

글들이 올려져 있었다. <방자전> 상영금지와 관련된 의견들이 많았는데 영화에 대해서  

찬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영화는 엉터리 내용이며 춘향을 모독했다는 등 상영금지  

찬성이 있는 반면에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면서 오히려 상영금지 요청은 유교사상에  

젖은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찬반 게시문은 으레 자유게시판에 있기  

마련인데 자유게시판은 생각보다 너무 조용하였다. 게시판이라기보다는 춘향 관련  

행사를 공고하는 글만 있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던 것은 춘향연구논문자료라는 코너였다.
이 자료실에는 진짜로 소설 <춘향전>에 관한 문학적, 역사적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큰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클릭하여 들어 가보니 제목은 그럴싸하게 춘향과 관련된  

연구논문 자료라고 해놓고는 내용은 글은 고작 두 개 밖에 없었다. 두 개의 글은  

어이없게도 역대 춘향, 이몽룡 선발대회 수상자 명단이었다. 단체의 홈페이지에는  

미스 춘향만 있었지 정작 소설 속의 성춘향은 없었던 것이다.  

이 단체가 정말로 춘향을 기리고 있는지 의혹만 느껴졌다. 그리고 큰 실망감을 느꼈다.

<방자전> 규탄 성명서에는 <춘향전>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견하여
10여개의 나라에 번역이 되었으며 120여개의 판본을 갖고 있는 명작이라고 손꼽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춘향을 위한 홈페이지에는 춘향전의 판본의 수와 비교가 안 되는  

원작과 관련된 자료가 없으니, <춘향전>의 문학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성명서 속의 말이 무색하게만 느껴졌다. 
 

 

 왜곡된 ‘정절’의 의미

춘향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절녀라고 생각하는 것은 춘양문화선양회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어린 시절부터 어린이용 전래 동화로 <춘향전>을 접했기 때문에
춘향을 정절을 지킬 줄 아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성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춘향은 정절녀가 맞긴 맞다. 하지만 우리는 춘향이를 수식하고 있는
‘정절’의 의미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그 ‘정절’이라는 단어를
조선 시대부터 지배하고 있던 유교 사상에서 유래된 남존여비의 시선으로  

읽고 있다.

국어사전에는 ‘정절’의 의미를 여자의 곧은 절개라고 말하고 있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한 평생 사랑하는 남자와의 정(情)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정절은 꼭 굳이 한 사람에만 지켜야 하는 것일까?
사전에는 정절은 꼭 사랑하는 딱 한 사람에만 지켜야한다는 말도 없지 않은가.
조선 시대에는 삼종지덕(三從之德)이라는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시집을 가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 시대의 여성은 연애의 선택권이 없었다. 좋든 싫든 한 남자와 혼인이  

성사되면 한 평생 살아야만 했다. 지금의 여성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연하남과  

연애를 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결혼한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하고 다른 배우자와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이혼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만약 부녀자가 다른 남자와 정분을 맺는 것이 발각된다면 정절을 지키지 못한  

죄로 가혹한 벌을 받게 되고 평생 주위 사람들에게 화냥년 취급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반면 한 평생 남편을 섬긴 여자들은 죽은 뒤에 나라로부터 ‘열녀’라는 칭호를 하사하였고
후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여자가 살았던 마을에 열녀문을 세웠다. 
이는 조선 시대의 여자들에게 정절을 강조하기 위한 국가적인 훈계책이기도 하였다. 
 

 

 춘향은 착한 여자?

정절을 지킨 여자들은 성격이 바르며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품행이 단정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설 속 춘향은 매사에 자상하며 여성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춘향전>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아서 생각하게 되는  

착각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춘향은 전래동화 속의 인물이다. <춘향전>은  

다양한 판본이 있는데 통상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판본은 <열녀춘향수절가>이다. 
이 판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전래동화 속의 춘향과는 차이가 난다.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이몽룡이 서울로 떠난다는  

소리를 들은 춘향의 표정과 대사를 주목해보자. 
 

 

  춘향이 이 말을 듣더니 별안간 얼굴색을 바꾸며 안절부절이라. 붉으락푸르락  

  눈을 가늘게 뜨고 눈썹이 꼿꼿하여지면서 코가 벌렁벌렁하며 이를 뽀드득  

  뽀드득 갈며, 온몸을 수수잎 틀 듯하고 매가 꿩을 꿰 차는 듯하고 앉더니, 
    "허허 이게 웬 말이오.”
  왈칵 뛰어 달려들며 치맛자락도 와드득 좌르륵 찢어 버리고 머리도 와드득  

  쥐어뜯어 싹싹 비며 도련님 앞에다 던지면서, 
    "무엇이 어쩌고 어째요? 이것도 쓸데없다!” 
 

                                                                      - <춘향전> 송성욱 역, p 75 -  

 

이몽룡이 서울로 가게 되어 이별을 고하자, 춘향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분노의  

표출을 서슴지 않는 정열을 지니고 있다. 분을 억누르지 못해 치맛자락을 찢어 버리는  

춘향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의 모습과 비교하면 무척 생소하다.

그리고 춘향은 이몽룡에 대해서는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변학도에 대해서는  

저항적이고 도덕적인 열녀의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그녀의 두 얼굴은 단순히 이몽룡에  

대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이중적인 행동을 했던 것일까?

   전라도 남원에는 월매라는 기생이 있으니 삼남에서 이름난 기생이었다.  

  일찍이 기생을 그만두고 성가라고 하는 양반과 더불어 살았는데 나이  

  사십이 되도록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었다. 
                                                    

                                                      - <춘향전> 송성욱 역, p 11~12 - 
  

<열녀춘향수절가>의 시작에 춘향의 어머니인 월매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춘향은 단순히 기생 집안의 딸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녀의 아버지는  

양반이다. 그래서 양반과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양면적인 신분 상태이다.  

춘향은 신분적 양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원 부사의 아들인 이몽룡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끈질긴 저항과 인내심으로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도덕성을  

지향함으로써, 사회의 인습을 극복하고 결말에 이몽룡과 재회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킨다. 결국 춘향의 정절은 조선 시대의 신분 사회 메커니즘이 낳은 것이다.  

춘향의 사랑은 기생 신분을 벗어나 사대부가의 일원이 되겠다는 신분 상승의
성취 동기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니 춘향이 이몽룡이 서울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 속 춘향은 현대의 여성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 때 취업난으로 인하여 유행했던 신조어 중에서 ‘취집’이라는 말이 있다.
취직을 하지 못한 대학 졸업 여성들이 취직 대신에 시집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냉정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대안으로 선택하고 돈 많고 괜찮은  

신랑감을 찾는 요즘 여성들의 모습은 신분을 상승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춘향과 비교하면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독자성이 결여된 우리의 대중문화

춘향이를 둘러싼 <방자전> 영화 제작사와 춘향문화선양회 간의 대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만의 시위는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해프닝을 통해서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암맹(暗盲)과 우리나라 고전에 대한  

관심 부족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문화의 어두운 현실이기도 하다.  

춘향문화선양회의 사례를 보여주듯이 <방자전>이 고전 소설 <춘향전>의 모티프를  

두고 있다고 해서 영화의 내용을 원작과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작품은 일단 원작자의 손에서 벗어나면 원작이 아닌  

그 작품 내에 주어진 정보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창작의 모티프나 동기를 일일이  

설명해 주어야만 하며 꼭 원작 내용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독립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결국 독창성이 없는 복제된 작품일 뿐이다 

 

반면 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예술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문화적 코드를  

이용해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 컨텐츠를 창출한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출간 50여 년을 지나서 피터 잭슨의 손에 의해서 현대적이면서도 원전의 맛을 살린  

영화로 재탄생했다. 코난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즈>에 등장하는 왓슨 박사는 자신의  

추리력 부재로 인해 주인공 셜록 홈즈를 부각시키는 인물이었지만
작년에 개봉한 리메이크 동명 영화 속 왓슨 박사는 주인공 셜록 홈즈 앞에서 꿀리지 않는  

호기로운 인물로 등장하였다. 결국 외국의 사례들처럼 독창적인 블록버스터 급 작품이  

우리나라에도 탄생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적 암맹에서  

벗어나야 하며 우리나라 고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대중들이 <춘향전>의 원전을 조금이라도 읽거나 이해를 하고 있었더라면
두 남자를 사로잡으려하는 영화 속 팜 파탈로 나오는 춘향에 대해서
그리 놀라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언급한 외국 유명 영화들은 고전을 읽은
독서 문화가 낳은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읽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전 읽기에 대한 역효과일뿐이다. 우리나라 고전의 대중적인 보급을 위해서는 

우리나라 전통 고전에 현대적인 감각의 옷을 입혀야 한다. 그러면 독자들이  

고전에 대해서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춘향문화선양회와 같은 고전을 알리기 위한 단체 설립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우리나라 고전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  

설립 단체의 유지와 홍보 활동의 이익에 급급하다가는 정작 단체 설립 목적은 

잃게 된다. 그러면 고전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는 알리기는커녕 더욱 더 대중들의  

왜곡된 인식을 낳게될 뿐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나라 고전은  

외국에서 온 고전과 다양한 문화에 의해서 사장(死藏)될지도 모른다. 
 

서양의 고전들도 읽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자기 나라의 고전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  작품 속의 과거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현상들도 새롭게 보이게 되며  옛날의 고전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관련 인용기사 출처 및 링크 

 

['하녀'가 못한 일 '방자전'이 해냈다] 머니투데이 7월 19일 입력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7190057

[화난 춘향문화선양회, “영화 ‘방자전’이 춘향 모독했다”] 일간스포츠 6월 4일자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405287

[춘향문화선양회] http://www.nwchunhy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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