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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 우리 시각으로 다시 보는 서양미술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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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예술 분야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은 미술이다. 음악, 무용 같은 공연예술이 절대로 미술보다 못해서가 아니다. 미술품의 탁월한 보존성 때문이다. 수천 년 전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의 조각, 중세의 벽화는 아직도 남아 있지만, 당시 음악이나 무용은 재현할 수 없다. 소리나 몸동작은 후대에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 한 점에서 역사와 시대 문화를 해석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분석과 해설은 딱딱하고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특히 배경 지식 없이 그림을 보면 그것은 '페인팅'에 그칠 것이다. 예술이나 미술전시장이 어색한 사람들의 많은 고충은 도무지 미술품 앞에 서 있으면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양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서양미술사를 완파하지 못한 이는 자신의 지적 교양 수준을 반성하며 작품설명 기기를 목에 걸고 귀 기울여 듣기 바쁘다.

 

대부분 서양미술 관련 서적은 입문자에게 불친절하다. 진지하고 어려운 말만 골라서 하는 강의실의 교수님처럼 좀처럼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한쪽을 읽고 넘기면 앞의 내용이 벌써 가물거린다. 몇십 쪽을 넘기고 나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다. 개념어와 역사적 배경 사이에서 널뛰기하다 보면 어느새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사실 서양미술작품은 화가 개인의 생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서양 사람들의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양미술을 만든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친절한 서양미술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이주헌이라는 친절한 안내자를 동원해야 한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은 미술작품을 통해 지루함을 넘어 흥미 있는 미적 여행의 세계로 안내한다.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 1570년대

 
 
저자는 서양미술의 본질에 좀 더 쉽게 다가서기 위한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인간 중심적, 사실적, 감각적 특징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잘 살린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이다. 어린 헤라클레스가 잠자는 헤라에게 몰래 다가와 젖을 먹고 있는 장면이다. 헤라가 잠에서 깨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제우스는 얼른 어린 헤라클레스를 떼어놓지만, 헤라의 가슴에 나오는 젖방울은 하늘과 땅으로 향한다. 하늘로 간 젖은 은하수(Milky way)가 되었고, 땅에 흘린 젖은 순결한 꽃의 상징으로 알려진 백합이 되었다. 

 

틴토레토의 그림에 나오는 신은 인간의 모습과 같다. 이뿐만 아니라 종교화에 등장하는 예수나 천사 또한 인간의 형상을 띤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특징은 역사화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장르가 역사화다. 화가는 역사화를 통해서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 한가운데 있는 인간 그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며 그 속에서 역사적 상황에 마주친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서양미술에서는 시각적 재현 또는 모방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체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연마저도 똑같이 그리려고 했다. 원근법의 등장으로 눈으로 보는 듯한 풍경이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어졌고, 여기에 더 나아가 빛과 그림자를 묘사함으로써 완벽한 환영적 재현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다시 틴토레토의 그림을 살펴보면 벌거벗은 헤라의 몸에 그림자에 의한 음영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화사한 색채를 통해 시각이 촉각으로 환기하는 공감각적 표현을 구사하여 관객은 사실적인 느낌을 받는다.

 

 

 

 

 

김홍도  「씨름도」  1745년

 

 

저자는 서양미술의 세 가지 특징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동양미술과 직접 비교한다.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의 차이점은 우리가 서양미술을 이해하는 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동서양의 다양한 시대와 작가의 미술작품에서 발견한 차이점을 통해 서양미술에 접근하는 길을 터주고 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서 그림자 한 점이라도 나타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나면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동양미술은 그림자를 묘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적인 외양보다는 본질의 진실한 내면(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김홍도의 그림이나 정선의 풍경화를 처음 본다면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원근법이나 그림자 표현이 없어서 사실감이 떨어지는 어설픈 그림으로 오해하기 쉽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시각으로 다시 서양미술을 바라보는 접근방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참신한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17년 전부터 시작된 미술 특강에서 가르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대학교에서 교양 미술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게다가 서양미술을 보는 이 세 가지 시각은 고전미술(현대미술로 규정하는 20세기 이전 미술사조, 즉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인상주의까지)에서만 한정되어 있다. 서양미술을 독학하는 독자라면 유의해야 할 점이다. 이 책을 이해하고 난 뒤에 중상급 정도의 서양미술을 더 알고 싶으면 역시 동일 저자가 펴낸 『지식의 미술관』(아트북스, 2009년)과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 2011년)을 읽어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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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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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니?”

 

마법 거울은 참 신기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의 얼굴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준다. 거울로 인하여 백설공주는 계모 왕비에게 살해될 위험에 처한다. 계모 왕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기보다 어쩌면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시기심이 많은 여자인지 모른다. 그래서 왕비는 매일 같이 거울에다 대고 누가 예쁘냐고 연신 묻는다. 거울이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고 대답하길 원한다. 알고 보면 계모 왕비는 ‘답정녀’(답을 정해놓은 여자)의 원조이다. 그러니까 왕비 본인은 자신이 예쁘다는 착각에 빠졌다. 거울로부터 듣고 싶은 말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말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한다.

 

거울은 원본을 모방한다.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앨리스처럼 거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야릇한 충동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본 거울상은 진짜도 아니고 영원하지도 않다. 우리는 현란하게 치장한 자신을 비춘 거울상에 일종의 도취를 느낀다. 계모 왕비처럼 거울을 통해 주관적인 '아름다움'을 스스로 판결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미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타자를 배제할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사실을 은폐하고 '나쁜 것'으로 몰아세운다.

 

 


 Scene #2  서경식이 들여다본 ‘미술’ 거울들

 

서경식 선생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펴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미술을 ‘거울’로 비유한다. ‘나는 무엇인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미술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례를 시작한다. 과연 선생은 ‘미술’ 거울에서 무엇을 봤을까? 우리나라 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까? 일단 선생이 본 ‘미술’ 거울은 다음과 같다.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나탈리 르무안), 홍성담, 송현숙은 지금도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미술’ 거울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다간 화가 두 명,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과 월북 화가 이쾌대는 만든 지 오래된 ‘미술’ 거울이다.

 

그런데 선생이 보는 ‘미술’ 거울 중에 신윤복을 제외하면 나머진 우리에게 낯선 이름들이다. 심지어 우리는 이 ‘미술’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미술’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벨기에에 입양되어 지금도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한국계 화가 미희, 파독 간호사 출신의 재독 화가 송현숙 그리고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넘어가서 남한 땅에서 잊힌 이쾌대. 이들은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적이지 못한 미술로 배제되었다. 거울인데도 디자인이 조금 튄다는 이유만으로 거울들만 모아놓은 진열장에 놓이지 못한 채 하자품으로 분류되어 차가운 창고로 향하는 운명과 같다. 하자품 신세가 된 ‘미술’ 거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 즉 한국적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이 직접 보고, 만져본 이 ‘미술’ 거울들을 ‘우리 미술’로 포함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애초부터 이 책 제목을 ‘나의 우리 미술 순례’라고 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더 넓은 차원의 의미가 내포된 ‘조선미술’이라고 사용한다. 원래 선생은 ‘우리’와 ‘미술’ 사이에 빗금을 넣어 ‘우리/미술’이라고 정하고 싶었다. 배타적인 자의식이 강화되는 ‘우리 미술’이라는 언어의 권위성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Scene #3  역사의 흉터를 비추는 ‘미술’ 거울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 1980년 (왼쪽)

윤석남 「어머니 I : 열아홉 살」, 1993년 (오른쪽)

 

 

 

선생은 8개의 ‘미술’ 거울을 통해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것은 곧 정체성을 되묻는 성찰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속에 포함된 진짜 ‘나’를 찾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8개의 ‘미술’ 거울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진짜 ‘나’의 정체성을 보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의 흉터가 보기 싫어 일부러 거울을 피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는 슬픈 역사의 생채기로 인한 흉터가 많다. 일제 강점기,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남북 분열, 5월 18일 광주의 역사. 깊게 팬 역사의 흉터를 보는 것은 차마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외면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 몸에 남은 흉터도 ‘우리’ 몸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에게 분열과 고통, 공포를 줬던 아픈 과거도 ‘우리’ 역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의 흉터를 외면한다. 반면 아름다운 역사만 보려고 하며 자랑하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만 비춰주는 왜곡된 ‘미술’ 거울만 들여다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진다. 이런 ‘미술’ 거울들은 대상의 단점을 은근슬쩍 감추고, 장점만 부각해주는 계모 왕비의 마법 거울과 같다.

 

신경호, 윤석남, 미희, 송현숙은 역사의 흉터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화가들이다. 그들은 역사의 흉터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진짜 ‘미술’ 거울이다. 신경호는 광주 사람으로서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예술적으로 증언하고자 노력한다. 지금도 극우로부터 공격받고, 왜곡되는 가슴 아픈 역사를 예술을 통해 구출함으로써 잊고 여전히 역사 하나로 인해 분열된 ‘우리’의 본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윤석남은 위안부 문제에 ‘어머니’와 관련된 아련한 기억을 접목해 공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미희와 송현숙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6261번째 해외 입양인인 미희는 자신의 처지를 ‘한국 경제성장의 산업폐기물’이라고 과격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 말 속에 고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세계의 투명 인간들,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서려 있다.

 

 


 Scene #4  우리가 ‘우리/미술’을 ‘우리 미술’로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선생은 8개의 ‘미술’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보다는 끊임없는 타자와 대화하는 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일단 계모 왕비처럼 ‘미술’ 거울들 앞에서 질문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보고 싶고 익숙한 것들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 대신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을 향해 물어본다. ‘거울아, 거울아!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선생의 미술 순례는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빗금을 쳐놓은 ‘우리 미술’의 환상을 의심한다.

 

과연 우리가 ‘우리/미술’을 ‘우리 미술’로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일단 현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우리’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자아도취에서 벗어나야 한다. 환상의 거울만 자꾸 들여다본다면 어떤 대상의 진실을 숨기는 데 급급하고 삐딱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을 보게 될까. 진실한 내면이 오롯이 남아있는 정체성일까 아니면 타자의 눈에 맞춘 거짓된 아름다움만 뽐내는 가짜 정체성일까. 진짜 나를 보았을 때, 한 점 부끄럼이 느껴져서 괴롭더라도 전자의 거울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거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마주 볼 수 있는 진실한 물건이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하다. 진실을 외면하고 환영에 가까운 아름다움만 보여주려는 미술은 계모 왕비처럼 착각에 빠진 대중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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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4-12-25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책 보고 있는 중인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어렴풋하게 잡히던 것들이 cyrus님의 리뷰덕분에 더 명확해지네요.

cyrus 2014-12-26 00:14   좋아요 0 | URL
긴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서중인데 제 글이 의도치 않게 바람님에게 스포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바람돌이 2014-12-26 00:42   좋아요 0 | URL
지금 3분의 2쯤 읽었으니까 스포는 아니구요. ㅎㅎ

stella.K 2014-12-2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책 벌써 읽었네.
그렇지 않아도 서평단 신청 왜 안하지 했는데.
난 그저께 도착해서 아직 시작 안하고 있어.
서경식이야 워낙...!

cyrus 2014-12-26 14:01   좋아요 0 | URL
신청하고 싶었는데 그 책에 신청자가 너무 많았어요. ㅎㅎㅎ 운 좋게도 지난주에 도서관 신간코너에 서경식 선생의 책이 있어서 읽게 되었어요.
 
칼데콧 컬렉션 칼데콧 컬렉션 1
랜돌프 칼데콧 지음, 이종욱 옮김 / 아일랜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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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의 쓸데없는 궁금증 하나. 부모는 자녀를 위한 그림책을 어떤 기준으로 고를까? 그림만으로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러운 책? 아니면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책? 그림도 좋지만, 교훈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감동으로 다가오는 책을 고를 수도 있다. 요즘 아빠와 엄마도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외국 작가의 그림책이 많아졌다. 내가 어렸을 때 외국 작가의 그림책을 읽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고작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외국 그림책이라면 디즈니 만화뿐이다. 미키 마우스, 아기사슴 밤비, 곰돌이 푸, 신데렐라 등 디즈니가 만든 고전만화의 일부 장면을 그림책으로 옮겨 만든 것이다.

 

그림책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이유가 또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책의 재미에 푹 빠졌다. 그러자 글자 대신 그림만 있는 책만 읽었다. 어머니는 한글을 완전히 뗀 아들이 그림책만 읽는 것이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 싶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글자가 많은 아동 문고나 위인전을 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사준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처음에 그림이 없는 책을 읽는 것이 힘들었다. 그림만 보는 독서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어머니는 반강제적으로 글자로 된 책을 읽게 했다. 어머니가 강요하는 독서 때문에 잠시 독서의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림에 집착하는 습관을 잊지 못해 엉뚱하게 오락실의 게임에 빠졌다. 거의 밤늦게까지 오락실에 친구들과 게임을 했다. 거대한 화면에 가득 채운 역동적인 그림과 눈을 자극하는 색채는 책의 존재를 완전히 잊게 해줄 정도로 나를 유혹했다.

 

요즘 아이들의 눈은 책보다 기계 속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많아졌다. 내가 어렸을 때 독서를 방해했던 것이 TV, 오락, 비디오뿐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성능이 좋은 기기들이 하나씩 우리 일상에 파고들기 시작했는데 가장 친숙한 것이 스마트폰이다. TV를 많이 보는 아이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스마트폰만 온종일 보는 아이다. 고사리 같은 조그만 손보다 큰 스마트폰을 꼭 쥐면서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카톡을 한다. 아이들은 집에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간다고 아이들을 집에 혼자 놔두고 갈 수 있다. 예전 아이들이라면 집에 혼자 있다는 공포감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혼자 집에서 놀 수 있다. 오히려 집에 어머니가 없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한편으로 그림책을 읽어야 할 아이들이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수록 순수한 동심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그림책 몇 권만 읽어도 전혀 무섭지 않고,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림책으로 집에서 혼자 노는 재미를 알고 있을라나.

 

만약에 내가 부모라면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자식이 책을 좋아하도록 어떻게 가르칠까? 정답이 없겠지만, 우선 그림책을 읽도록 권할 것이다.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걸로. 그리고 아이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더 좋을 것 같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의 행동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부모처럼 똑같이 따라 한다.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아이 앞에서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제일 좋은 방법이 부모와 자식이 한 권의 책을 같이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부모와 자식 간의 친밀감이 더욱 향상되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독서의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내가 미래의 자식과 함께 읽게 될 그림책을 장만하게 된다면 『칼데콧 컬렉션』을 꼭 살 것이다. 랜돌프 칼데콧은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활동한 그림책 삽화가이다. 칼데콧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한해 동안 뛰어난 그림책 작가에게 ‘칼데콧 상’을 수여하고 있다. 칼데콧의 그림책은 ‘글 없는 그림책’의 모범이다. 그림 한 컷에 달랑 글자 한 두 줄만 있거나 아예 글자가 없는 것도 있다. 글자가 없는 책이라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칼데콧은 오직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칼데콧의 그림은 누구나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려고 그림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묘사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자칫 단순하게 느껴지는 선 하나만으로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케치를 많이 했던 경험 덕분에 선으로 그려진 그림을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었다. 칼데콧 상을 받았고, ‘그림책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모리스 센닥은 칼데콧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책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칼데콧의 그림책이 “글이 없는 곳에서는 그림이 말하고, 그림이 없는 곳에서는 글이 말한다. 마치 튀어 오르는 공과 같다”고 평가했다.

 

 

 

 

 

 

 

칼데콧의 그림책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더 읽고 싶어진다. 그림 한 장 한 장 읽을수록 다음 장면에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무척 궁금하게 만든다. 예스러운 그림 속에 세련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칼데콧이 묘사한 동물과 인물의 표정은 생생하다. 그림책을 펼치는 순간, 그 속에 있는 동물과 인물은 독자 앞에서 살아서 숨을 쉰다. 한 편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 위협하는 개가 무서워서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운 채 겁에 질린 고양이의 표정을 보라. 이런 재미있는 묘사는 그림책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눈웃음 짓는 강아지의 표정만 봐도 강아지의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칼데콧은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드는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아이가 읽을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의 눈에 최대한 맞추도록 했다. 글자에 익숙하지 않아 그림이 편한 아이부터 글자를 전혀 모르는 아이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영국에 자란 아이들의 귀에 익숙한 전래동요, 구전민요, 동시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짧고 반복되는 문장이 많은 편이다. 단순한 이야기와 단순한 그림의 만남. 이런 단순한 조합은 그림책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빽빽한 활자로 이루어진 책만 읽어서 색다른 독서를 원하는 독자라면 칼데콧의 그림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이 무겁고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애서가라면 이런 책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이다. 심심할 때 가끔 읽어 볼 수 있다. 아니면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같이 읽어도 좋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에 익숙한 아이들의 눈에는 이런 그림책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영국 전래동요를 낯설게 느껴진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지만, 너무나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이 요즘 아이들의 취향에 맞을지 의문이다. 유명한 외국 그림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것만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폴 아잘은 “어린 시절에 처음 읽은 책과 처음 본 그림에 의해서 자기 나라의 지난 역사와 전통의 훌륭함을 알고 강한 조국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책과 그림의 추억은 가슴 깊은 곳에 차고 들어 일생 동안 간직하게 된다”고 말했다. 외국 그림책이 넘쳐나고, 아이들이 접하는 그림책이 외국 작품이 훨씬 많은 현실에서 한 번쯤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아이와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른도 그림책을 읽어야 한다. 아직도 다 큰 어른이 그림책을 읽는 모습이 수준 낮게 보이는가. 가끔 어른도 그림책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속에 소중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부모와 아이가 그림책을 같이 읽으면 그 추억이 공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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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4-12-21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대는 분명 멋진 아빠가 될 거야~
우리집에는 칼데콧 그림책 딱 한권인데 찔린다;; 근데 지민이가 많이 좋아해. 요 시리즈 장바구니에 쏘옥 담아놔야지. :)

cyrus 2014-12-21 10:29   좋아요 0 | URL
누나도 이 그림책을 만족스러워 할거예요. ^^

바람돌이 2014-12-21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모든 종류의 그림책들을 다같이 읽었는데 어른이 좋아하는 그림책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 딱히 일치하진 않더군요. 그리고 딸랑 둘뿐인 녀석들 역시 그림책 취향이 전혀 다르더이다. ^^

cyrus 2014-12-22 20:46   좋아요 0 | URL
역시 경험자의 말씀은 유익합니다. 아이의 취향이 부모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는데도 무조건 부모 취향이 따른 책을 아이에게 권한다면, 아이들이 책을 멀리할 것 같습니다. ^^


해피북 2014-12-21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며 대단한 내공이 느껴지신다 했더니 역시그랬네요 ^^ 저는 동화책을 고를때 그림의 조화로움 과 색채를 주로 보는거 같아요. 조금 날카롭거나 어두운 색깔보다는 밝고 화사한 그림책을 선호하는데 아이들에게 읽어줄때도 시각적 효과가 있고 집중력이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덕분에 이런 동화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들과 복사해서 색칠놀이도 하고 이야기도 만들고 해도 좋을거 같네요^^ 더불어 야나님 말씀처럼 좋은 부모님이 되실거 같다는데 공감합니다^^

cyrus 2014-12-22 20:50   좋아요 0 | URL
그저 책을 좋아하지 알고 보면 헛똑똑인데요. 내공이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늘 독서를 통해서 많이 생각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서재 이웃분들의 건전한 비판과 의견도 귀 기울이려고 합니다. 해피북님 말씀도 잘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저는 아직 미혼이라서 그림책을 고르는 부모의 심정이 무척 궁금했어요. 사실 이런 궁금증을 가진 미혼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

 

 

 

 

 

 

 

 

 

 

 

 

 

 

 

 

 

살바도르 달리와 앤디 워홀.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살아있는 동안 돈과 명성 모두를 움켜쥔 예술가다. 예술 활동과 상업 활동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작품을 여럿 남겼다. 이들은 예술계의 셀리브리티(celebrity, 유명인사)였다. 대니얼 부어스틴의 표현처럼 셀리브리티는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큰 이름’(big name)이다. (『The Image』, 1961년) 달리와 워홀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셀리브리티들과 교류하고 대중문화를 화폭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지금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큰 이름’으로 거론되고 있다.

 

달리는 셀리브리티나 스타와의 만남을 집착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천재이자 위대한 왕이라고 생각했다. 허세 가득했던 화가는 자신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요구했다. 이런 달리의 태도에 그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달리의 초현실주의 회화에 큰 영감을 준 프로이트는 달리를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다.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달리의 ‘연예인병’은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스페인의 포르트 리가트에 위치한 달리의 자택에 그를 흠모하거나 추종하는 유명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나 그를 만나보고 싶었으면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은 달리가 자주 드나들던 식당까지 찾아갔을 정도였다. 아마도 달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보러 오는 순례객들을 만나는 시간에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놀랍게도 달리와 워홀도 ‘스타 대 스타’로서 만난 적이 있었다. 말년의 달리는 겨울을 뉴욕에서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워홀의 명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달리가 워홀에게도선물을 달라고 요구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워홀은 달리와의 만남을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달리 덕분에 다신 한번 자신이 대중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해줄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1966년에 워홀은 뉴욕의 유명한 미술상 레오 카스텔리의 갤러리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여기서 전시됐던 설치물은 워홀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갤러리 안에 있는 것은 바로 헬륨 가스를 빵빵하게 채운 여러 개의 은빛 풍선들. 거대한 베개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은빛 풍선들은 ‘은빛 구름’(Sliver Clouds)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갤러리에 떠다니는 은빛 풍선, 아니 은빛 구름들은 관람객들도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된 설치작품이었다. 관람객들은 은빛 구름을 마음껏 던지고, 공중에 띄울 수 있다. 자연스럽게 놀이공원에서 보던 헬륨 풍선이 떠올린다. 관람객들의 동심을 자극한다. 그렇지만 풍선은 언젠가 터지게 되어 있다. 공기가 빠지거나 터진 풍선은 덧없는 인생을 의미한다. 워홀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색다른 ‘바니타스’(Vanitas)를 선보였다. 이 재미있는 설치작품 덕분에 워홀은 다시 한 번 모든 사람에게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워홀은 달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카스텔리 전시회가 있기 1년 전에 워홀은 달리가 머문 호텔 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방 안을 떠다니는 은색 풍선들을 보게 되었다.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을법한 헬륨 풍선을 방 안에 놔두는 생각은 달리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 워홀의 헬륨 풍선 아이디어는 달리의 호텔 방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고,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독특한 패션과 돌발 행동. 두 사람은 서로 자신들의 천재성을 알아봤을 것이다. 달리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처럼 그의 콧수염도 동반 상승했다. 양 끝이 위로 올라간 특이한 콧수염은 달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지만, 원조는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다. ‘카이저(Kaiser)수염’이라는 콧수염 스타일까지 유행했을 정도였는데, 독일의 남자들은 황제의 콧수염에서 위풍당당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황제의 콧수염은 권위적인 남성미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세상의 왕이 되고 싶었던 달리가 카이저수염을 길렀던 것도 이유가 있었다. 역시 달리는 자신을 유명하게 돋보이게 만들 줄 아는 뛰어난 전략가다.

 

워홀은 수염을 기르는 대신에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시도했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가죽 재킷, 부츠를 선호했다. 그리고 파티에 참석할 때 가발을 착용했다. 달리처럼 워홀도 자신을 따르는 그루피(groupie, 열광적인 팬)들을 만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자신감이 카이저수염만큼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달리와 정반대로 워홀은 은근히 소심한 성격이다. 자신과 관련된 과거를 밝히는 것을 거부했고, 심지어 성장 과정을 일부러 왜곡할 정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싫어했다. 워홀의 스튜디오인 실버 팩토리(silver factory)에 그를 만나고 싶은 그루피와 셀리브리티들이 매일 드나들 정도로 워홀의 인지도는 거의 유명 연예인급이었다. 그가 늘 착용하는 선글라스는 단순히 연예인처럼 보이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면서도 자신을 알고 싶은 대중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었다. 워홀은 늘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화려한 뉴욕과 셀리브리티들을 사진으로 찍어댔지만, 정작 자신은 카메라에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사진이 자신을 향해 있으면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달리와 워홀은 한 발 먼저 세상을 앞서갔고, 세상이 원하는 아이콘이 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들의 명성은 회자되고 있다. 죽어서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큰 이름'으로 남기는 데 성공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을 돈을 밝히는 속물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특히 달리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문제의 인물이다. 그들이 그린 그림만큼이나 이 두 사람의 성격도 무척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 프리랜서 미술사가 캐서린 잉그램이 썼고, 앤드류 레이가 그린 달리와 워홀의 그래픽 평전은 분량은 가벼워 보여도 난해한 현대미술가 두 사람의 작품세계를 재미있고 쉽게 소개하고 있다. 영국 Laurence King 출판사의 'This is' 시리즈는 현재까지 달리, 워홀, 잭슨 폴록, 반 고흐, 폴 고갱, 프랜시스 베이컨, 앙리 마티스 편이 나왔다. 어젠다 출판사에서 고갱 편이 나올 예정이다. 현대미술 입문자라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지만, 아티스트의 개인적 삶보다는 작품 세계에 심도 있게 파고들고 싶은 독자에게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

 

 

 

 

 

 

특히 『디스 이즈 워홀』에 바스키아에 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21세기의 검은 피카소'라고 불릴 정도로 낙서화를 현대미술의 한 주류로 끌어올린 바스키아는 워홀과 친분을 맺고 같이 작업을 했다. 워홀의 일기에 바스키아가 언급될 정도로 워홀을 언급할 때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다. 워홀과 바스키아와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알려면 『바스키아의 미망인』(제니퍼 클레멘트, 자음과모음, 2003년-품절)과 Taschen 베이직 아트 시리즈에서 나온 『장 미셸 바스키아』(레온하르트 에머를링, 2008년, 마로니에북스)를 참고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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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정원 2014-12-16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책들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그 열정부럽습니다.

cyrus 2014-12-16 23:1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북플에 저보다 책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

yamoo 2014-12-19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그렇군요...달리와 워홀은 살아있을 시 유명세를 탄 화가들이었죠. 전 워홀보단 달리를 더 좋아합니다.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는 건 정말 환상적이거든요~

근데, 사이러스님은 어떤 화가를 제일 좋아하시는지...전 에셔나 피터 브뢰겔 그림을 좋아합니다만..

cyrus 2014-12-19 23:19   좋아요 0 | URL
야무님은 저랑 미적 취향이 비슷하군요. 저도 초현실주의 미술을 좋아하고, 심지어 에셔와 브뢰겔도 좋아합니다. 브뢰겔 좋아하는 분은 여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가까이 있었군요. ^^
 
This is Dali 디스 이즈 달리 This is 시리즈
캐서린 잉그램 지음, 앤드류 레이 그림, 문희경 옮김 / 어젠다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Beenzino - Dalí Van Picasso (Youtube)

 


 

 

 

 Scene #1  "I am a genius artist"  

 

한 예술가에게 ‘천재’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다소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만은 예외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니, 달리 본인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달리는 자서전의 서문을 “나는 천재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전 방위 예술가. 현대예술의 혁명적 전환점이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을 시각언어로 구체화한 대표적 화가. 무의식의 세계를 회화에 도입하고 회화를 통해 정신분석학을 탐구한 미술의 프로이트. 보통 사람에게 서라면 곧장 광기로 치달았을 내밀한 정신적 모순들과 신경증을 예술로 승화시킨 미치광이. 순수미술에서부터 영화, 패션, 광고, 보석디자인, 심지어 전 세계인들의 혀에 추파를 던지는 추파춥스 사탕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삶을 넘나든 창조적 광기가 그를 그렇게 불리도록 했다. (추파춥스 로고를 달리가 만들었다)

 

왜 달리는 뻔뻔할 정도로 자신을 천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특이한 천재의 삶과 미술 세계를 알아야 한다. 『This is Dali』는 달리에 대해 자상한 안내서 역할을 하는 책이다. 책표지에 두 눈을 부릅뜬 채 멋지게 말려 올라간 콧수염을 뽐내는 달리가 독자들을 노려본다. 달리의 눈동자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뿜어내는 천재의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는 눈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This is Dali!". 이것이 바로 ‘천재’ 달리다! 그 자체가 'Paranoia'(편집증적 망상)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달리의 표정 때문인지 책 제목이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Scene #2  “죽은 형을 보며 난 자랐어.”

 

 

 

 

 

이 책은 우선 재미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달리의 도발적인 행동과 기상천외한 일화들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데다 그래픽 노블을 보는 느낌이 나는 일러스트가 정말 재미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초현실주의 화가, 혹은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미술의 ‘미’ 자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세뇌시키려는 달리의 표정에 기죽을 필요 없다.

 

어렸을 때부터 달리는 남달랐다. 그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장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슬픔을 잊기 위해 둘째 아들 달리를 귀하게 보살폈다. 그렇게 달리는 장남 아닌 장남처럼 키워졌다. 형은 죽어서 이 세상에 없었지만, 여전히 동생을 늘 괴롭히는 존재였다. 형의 그림자는 늘 달리 곁을 따라다녔다. 마치 두 사람이 한 몸으로 붙어 있는 샴쌍둥이처럼. 부모는 달리가 죽은 장남처럼 커 주길 바랐다. 어린 달리는 강제적으로 죽은 형 코스프레를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부모님은 달리라는 이름의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무덤으로 들어가 영원히 잠들어 있는 형을 더 사랑하는 것일까? 그냥 형이 아닌 살바도르 달리, 오로지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해주면 안 될까?’ 이때부터 달리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 ‘살바도르 달리’가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달리’라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것. 달리는 ‘세상의 배꼽’(중심)이 되고 싶었다. 일단 달리는 집안의 왕이 되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했다.

 

달리는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느끼기 위해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상대방을 향한 ‘돌직구’ 같은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프랑스 인상파를 강조하는 예술원의 교육에 반기를 들거나 자신을 가르치고 작품을 평가하는 신임 교수의 자질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예술원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결국, 자신감이 충만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던 예술원의 시한폭탄은 자폭하고 말았다. 달리는 퇴학 처분을 받아 예술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Scene #3  “콧수염 한 올, 결국엔 이런 게 돈이 될지 몰라”
 
기묘하고 유별난 달리의 행동은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입하여 화가로서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할수록 점점 심해졌다. 특히 초현실주의 그룹의 우두머리이자 작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달리의 행보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브르통은 자신이 흠모하는 공산주의 지도자 레닌을 비하하고, 히틀러를 지지하는 그림을 그릴 정도로 파시스트에 가까운 가치관을 가진 달리를 무척 싫어했고, 정면으로 비난했다.

 

 

 

 

 

살바도르 달리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 내전의 고통」 1936년

 

 

달리가 1936년에 완성한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 내전의 고통」은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더불어 스페인 내전의 공포와 비극을 묘사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달리는 이미 스페인 내전을 예감하고 「내전의 고통」을 그리기 시작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스페인은 달리의 작품 설명대로 ‘괴기스러운 혹 모양의 팔다리로 제 목을 졸라 죽이는 망상에 빠져 서로를 잡아 뜯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달리가 스페인을 잡아 뜯는 파시스트 정권에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기회주의자였다. 처음에 혁명군을 옹호했지만, 돌연 파시스트 정권 편으로 돌아섰다. 이런 달리의 태도는 스페인 미술계와 초현실주의 그룹 동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세상의 왕답지 않은 달리의 굴복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세상의 왕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본 갈라가 있었다. 달리가 ‘세상의 왕’이라면 갈라는 여왕이다. 아니, 그 누구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이 괴짜 왕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가지고 노는 ‘킹왕짱’이다. 달리보다 열 살 연상인 갈라는 그를 어린애 취급했고, 마치 어린 아들을 키우는 것처럼 대해줬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왕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 갈라는 달리의 상징인 콧수염 한 올을 30만 달러(우리 돈으로 3억 3450만 원 정도)로 책정하기도 했다. 달리 못지않게 돈을 엄청 밝혔다. 달리는 자신의 작품으로 얻은 수익을 무조건 갈라에게 바쳤다. 달리는 갈라를 위해 성(城)을 사주었는데 갈라가 이곳에서 마음껏 애인을 만날 수 있었다. 반면 달리는 함부로 갈라가 사는 성에 방문할 수 없었다. 여왕님의 초대장을 받아야 했다. 또 달리는 매번 성에 찾아가면 갈라를 위한 선물을 챙겼다. 

 

 


 Scene #4  "아마 누군간 나를 미쳤다고 보겠지만

                  난 그런 걸 상관 안 하는 성격이지." 

 

 

 

 

 

 

달리가 고안한 초현실주의적 물건

 

달리는 자신이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정의내리기는 엄청 좋아하는 것 같다) 달리 자신이 직접 내린 정의인 ‘나는 천재다’, ‘나는 세상의 배꼽이다’와 함께 ‘망언 3종 세트’를 이룬다. 궤변으로 들리지만, 정말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가였고, 살아가는 방식 또한 초현실주의였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거짓(과대망상)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살았다. 달리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달리는 무의식과 의식세계의 육체적 장벽을 허물었다. 말(馬)이 여인의 나체로 보인다든가, 하나의 풍경이 여러 개의 얼굴로 비친다든가 하는 기상천외한 다중 이미지를 좋아했다.

 

『This is Dali』는 독자들에게 그동안 달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단편 지식과 다양한 이미지들이 완전히 틀렸음을 보여준다. 책에 달러의 전반적인 삶에 대한 내용이 작품 설명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달리의 단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제목이 『This is Dali』가 아니라 달리를 은근히 비판하는 ‘Diss(디스) is Dali’가 어울린다. 예컨대 열정적인 예술가적 기질의 사랑으로 이어진 달리와 갈라의 관계는 낭만과 거리가 멀다. 두 사람 다 정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연애를 했다. 그냥 아예 대놓고 바람을 피운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이름 앞에서만 연인이었을 뿐이다. 틀에 박힌 달리의 그림 서명처럼(달리는 항상 작품에 ‘갈라 살바도르 달리’라고 서명했다) 말이다.

 

달리는 그림으로 세상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와 더불어 ‘20세기의 천재’로 인정했다. 달리는 특이한 천재이다. 괴팍한 취향과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닌 ‘20세기의 돌아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해줄 것을 원했다. 달리는 ‘Famous artist’이자 ‘Fuckin artist’였다. 당신은 이 괴짜 예술가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누구든 『This is Dali』을 읽는다면 놀라겠지. 흠칫

 

 

 

 

 

※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 내전의 고통」의 영문 원어명은 ‘Soft Construction with Boiled Beans: Premonition of Civil War’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은 원어명을 그대로 번역한 ‘내전의 예감’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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