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발명 - 사후 세계, 영생, 유토피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
마이클 셔머 지음, 김성훈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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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말 못 하는 친구이자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말한다.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한다. 사별하면 가장 안타까운 이는 반려동물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가족들이다. 그들은 궁금해한다. 떠나간 우리 아이 영혼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무지개다리는 천국(하늘나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다. ‘무지개다리는 사랑하는 동물과의 이별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단어이다. 누가 그랬던가. 자기를 보살핀 가족이 죽은 뒤 천국에 도착하면, 앞서간 반려동물이 반갑게 맞아준다고. 인간과 마찬가지로 반려동물 역시 죽은 후에도 그것으로 마지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되어 천국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며, 살아생전 함께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무지개다리와 천국을 상상하는 건 기분 좋아지는 일이다. 영원히 살고, 항상 기쁘기만 하고 즐거움만 가득한 곳. 말 그대로 꿈의 이상향이다. 그런데 영원히 사는 것과 항상 기쁜 것이 당연한 세상에 살면 행복하다고 느낄까? 천국은 낙원의 동의어일까? 분명 천국은 좋은 곳이기는 하나 지루하고 단조로울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가면 신을 믿으면 천국,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전도하는 신도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다. 전도사들의 논리대로 라면 나는 지옥행 열차표를 이미 예매한 사람이 된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돌연 신의 부름을 받아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면 지옥행 열차표를 취소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내세관도 믿지 않는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천국이자 지옥이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곧 천국일 수 있고, 지옥일 수 있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니 그것이 천국이요, 반대로 나쁜 일을 하면 불안하고 괴로우니 그것이 지옥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Sartre)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했다. 인간들끼리 서로 자아가 부딪혀 지옥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정의가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타인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주체가 지옥일 수 있다. 타인과 더불어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게 타인은 천국이다. 신을 믿든 신을 믿지 않든 간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다양하다.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천국의 발명의 원제는 지상의 천국들(Heavens on Earth)이다. 번역본 제목을 지상의 천국들이라고 정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사람은 천국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천국을 복수형으로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천국의 발명을 읽는다면 천국을 단수형으로 쓸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천국에 대한 믿음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발명은 이 다양한 믿음의 기원을 추적한 책이다. 회의주의자(Skeptics)인 저자는 천국이라는 심오한 주제에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다. 천국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저자는 죽음 너머 세계가 어딘지 이해하기에 앞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감정을 분석한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아직 겪어보지 못한 죽음과 사후 세계를 상상한다. 사람들이 생명 연장의 꿈을 꾸거나 천국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과 사후 세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떨쳐내기 위해 천국을 발명했다. 천국은 삶이 고달플수록 더욱더 생각나게 되는 달콤한 유토피아(utopia)가 됐다. 중세 가톨릭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면죄부를 판매하여 신도들을 유혹했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지상 어딘가에 있을 천국, 즉 신대륙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항해에 나섰다. 천국에 대한 인류의 강렬한 믿음은 자신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하는 사이비종교와 유사 과학(대표적인 예로 임사 체험이 있다)을 만들어냈다.

 

죽지 않고 계속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후자는 죽음 너머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서도 생이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천국을 발명하려는 인간의 심리는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게 되는 역설이다. 역설이 주는 죽음의 의미,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교훈을 곱씹으면서 인류는 무언가를 창작하는 데 힘쓴다. 죽기 전에 불후의 걸작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서 인류가 창작 활동에 매달린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창작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충실하게 보내는 것. 이게 바로 저자가 생각하는 지상의 천국들이다.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다.

 

유사 종교가 주장하는 지옥행 열차표는 없다. 그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장 찢어버려야 한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지옥행 열차표를 손에 쥔 채 아등바등 살아가는 건 괴로운 일이다. 천국행 열차표도 없다. 천국행 열차표를 받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면서 신을 믿는 신앙생활은 종교에 귀의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천국행 열차표를 사라고 재촉하는 유사 종교는 신을 모욕하는 사이비다. 신과 천국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를 ()종교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무신론자와 회의주의자는 종교에 적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무신론자는 ()종교인이다. 회의주의자는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나 대상을 의심하는 사람이다. 비 종교인 중에서도 천국이나 무지개다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타인이 생각하는 천국을 믿지 않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타인이 믿는 천국을 틀렸다라고 강하게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우리 중에 천국이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천국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전제 없이 타인이 믿는 천국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은 아주 많다. 다만 우리는 그게 진짜로 있는지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천국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지옥이다.

 

셔머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mystery)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스터리를 즐기자라고 말한다. 천국은 미스터리한 세계이다. 내가 믿고 있는 천국도, 당신이 믿는 천국도. 열심히 그리고 즐기면서 살다가 때가 되면 편안하게 떠나자. 지구라는 천국에 소풍 와서 즐겁게 지내다가 돌아간다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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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보는 사람의 심리
사카이 준코 지음, 장현주 옮김 / 경향BP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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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중2병’이라는 은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일본의 개그맨이 만든 중2병은 말 그대로 중학교 2학년 청소년들의 정서를 의미하며, 그러한 정신세계를 ‘초딩’이라는 말처럼 비하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원래 중2병은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난 남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라고 생각하는 사춘기 청소년의 특성을 재미있게 표현한 은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해진 중2병은 허세를 부리면서 주위 사람들을 깔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게 됐다.

 

사람들은 누구나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그래서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부분에서든 크고 작게 우월감을 느낀다. 우리가 비교하는 대상은 매우 다양하다. 친구일 수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상사나 부하직원일 수 있고, 선배나 후배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비교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열의 개념이 자주 포함된다. 여러 대상을 비교한 후에는 아무리 비슷한 수준이어도 무조건 구분해서 서열을 매긴다. 물론 서열화가 필요한 때도 있지만, 철저하게 서열을 정하는 분위기에 익숙해진 사회 조직은 개인의 개성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위계질서가 만들어낸 권위 의식은 과도한 우월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깔본다. 또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라면 불합리한 명령도 서슴지 않는다.

 

《깔보는 사람의 심리》는 우리 일상에 만연한 ‘상대방을 깔보는 심리’를 규명하기 위한 시도로 쓰인 책이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사카이 준코(酒井順子)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경험들을 돌이켜보며 ‘깔보는 사람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과 타인을 수없이 비교하며 살아간다. 비교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우월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타인을 깔보게 된다. 따라서 경제적인 부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갑질’을 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깔보는 심리가 있는 건 아니다.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 흔히들 ‘약자’로 여기는 사람들도 타인을 깔보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 역시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의식한다.

 

저자는 타인을 깔보는 심리를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는 병’이라고 표현한다. 타인을 깔보는 사람들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나누는 극심한 서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깔보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우월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병을 치료할 수 없다면, 병의 심각성을 스스로 인식하되 겉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마음속에 일어난 우월감을 직설화법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그러니까 타인을 비교하면서 무시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로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타인과 비교하려는 심리적 습관을 완전히 떨쳐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위계 사회는 은밀하면서도 더욱 강력해진 우월감을 생산해낸다.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타인과 구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회가 평화로워질까? 저자는 머리말에서 타인을 깔보는 생각을 해도 말로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단순한 발상이다. 타인을 비교하면서 깔보려는 심리적인 병을 고치기 힘든 건 안다. 하지만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심리적인 병을 고치라는 식의 대안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대놓고 타인을 깔보는 ‘철면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속으로 타인을 깔보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익명의 가면 쓴 사람’이다. 익명성이 보장된 사이버 공간은 비뚤어진 우월감을 화산처럼 분출하는 장이다. 익명의 사람들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연예인이나 유명인 또는 사회적 약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일시적으로 짜릿한 만족감을 느낀다. 우월감을 느끼고 싶다는 것은 내재한 열등감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은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싶은 본능으로 발산하기 쉽다. 우월감과 타인을 깔보는 심리를 그러려니 하고 개인이 감내하는 건 일시적인 처방이다. 서로 비교하고, 깔보고, 물어뜯으면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사회를 바꿔내는 데 한계가 있다.

 

 

 

 

 

※ Trivia

 

* 그러나 인터넷 시대가 되자 ‘약자의 집단 따돌림’ ‘선제공격’의 피해자였던 층이 괴롭히는 쪽이 된 것입니다. (17쪽)

 

→ “‘약자의 집단 따돌림’나”로 고쳐야 한다.

 

 

* 49, 50쪽

발렌타인데이밸런타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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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3-1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싫네요..;;;;

cyrus 2019-03-19 18:54   좋아요 0 | URL
‘발렌타인데이’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몇 명쯤 안보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 티 내지 않고 현명하게 멀어지는 법
젠 예거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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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사는 날까지

같이 가세 보약 같은 친구야

같이 가세 보약 같은 친구야~♬

 

 

 

 

5년 전까지만 해도 페이스북을 많이 이용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SNS 중독에 빠져서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 나 자신을 확인한 이후부터 로그인하지 않게 되었다. SNS 활동이 의미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페이스북 계정은 가지고 있지만, 휴면 계정으로 방치된 상태이다. 로그인을 자주 안 하게 되니까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내 페이스북 계정에 있는 ‘친구’ 중에 서너 명을 제외하면 요즘에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거나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페이스북 친구가 많다. 쓸데없이 인맥만 늘렸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친구’라는 이름으로 인맥을 늘리는 일에 집착하는 것 또한 중독이다. ‘친구 중독’이 있는 사람은 특별한 이유 없이 친구 수를 늘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심정으로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친구 중독자에게는 친구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있다. 친구 중독자는 친구들 앞에서 말 한마디 해놓고 실수한 게 있나 눈치를 본다. 친구들에게 늘 좋은 평가를 받으려 애쓰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이 서툴러진다. 친구 중독으로 가장 많이 혹사를 당하는 것은 친구 중독자 본인이다. 이들에게 친구는 ‘보약 같은 친구’가 아니라 ‘독약 같은 친구’이다.

 

인간관계 전문가 젠 예거(Jan Yager)는 친구와 우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미덕을 ‘신화’로 본다. 친구 중독자는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는 신화를 믿는다. 그리고 친구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렇다 보니 ‘친구’라고 보기 힘든 사람들(친밀감이라고 눈곱만큼 느껴지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늘 못된 짓을 하는 성질 고약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한다. 진 예거의 책 《몇 명쯤 안보고 살아도 괜찮습니다》친구 중독 때문에 혼자 끙끙 앓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을 인간관계를 현명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알려준다. 일단 기본적으로 친하게 지낼 필요 없는 친구, 관계를 망가뜨리는 친구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친구관계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저자는 우리가 멀리해야 할 친구를 21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1.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2. 다 가지려는 사람

 

3. 배신자

 

4. 위험한 사람: 불법적이거나 위태로운 행동으로 나를 위험에 빠지게 한다.

 

5. 자아도취가 심한 사람: 내게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다.

 

6. 속임수를 쓰는 사람

 

7. 폭로자: 내 신뢰를 배반한다.

 

8. 경쟁자: 나를 상대로 지나친 경쟁심을 느끼고 당신이 가진 것(인간관계, 일, 소유물)을 원한다.

 

9. 군림하는 사람

 

10. 라이벌: 내가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탐내고 당신에게서 앗아가려고 한다.

 

11. 흠 잡는 사람: 지나치게 비판적이다.

 

12. 축 처진 사람: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우울하며 나까지도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

 

13. 거부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실을 내게 알린다.

 

14. 학대자

 

15. 외톨이

 

16. 착취자: 지나치게 의존적이다.

 

17. 치료자: 모든 일을 분석하고 충고한다.

 

18. 침입자: 내 삶에 지나치게 간섭한다.

 

19. 모방자: 당신을 모방한다.

 

20. 통제자: 나를 포함한 인간관계를 지배한다.

 

21. 보호자: 친구와 동등한 입장이라기보다는 친구의 보호자, 부모, 보모가 된다. 

 

 

21가지 유형은 친구관계를 탐색하는 데 도움 되는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좋은 친구’로 남고 싶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로도 사용할 수 있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고 하는 것보다 내가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내가 정말 좋은 친구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 점검해봐야 한다.

 

친구를 대하는 내 성격은 ‘치료자’ 유형에 가깝다. ‘좋은 친구’는 상대방이 표출하는 감정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치료자’는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면서, 상대방이 직면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치료자’ 입장에서는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상대방에게 정신적인 부담감을 짊어준다.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치료자는 언젠가는 ‘침입자’로 변할 수 있다. ‘치료자’와 ‘침입자’ 유형의 사람을 요즘 말로 하면 ‘오지라퍼’ 또는 ‘꼰대’다.

 

 

 

 

 

 

 

 

그렇다면 ‘독약 같은 친구’를 피하거나 헤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상대방과 더 이상 친구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으면 깔끔하게 포기하면 된다. 상대방 얼굴 앞에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절교 선언’을 하라는 건 아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미워도 묵혀 두었던 감정을 화산 폭발하듯이 분출하거나 악담을 퍼붓는 방식은 본인의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친구와의 갈등 없이 헤어지는 방법 중 하나는 ‘침묵’이다. 어차피 싫어하는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지 않거나 만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 관계는 사라진다. 온라인 공간의 친구관계도 마찬가지다. SMS 계정의 ‘친구 목록’을 정리하거나 익명의 상대방에게 아는 척하지 않으면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침묵으로 일관하면 상대방으로서는 기분이 언짢을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 생각해볼 수는 있어도 굳이 그 원인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알아봤자 상대방에 대한 악감정만 깊어질 뿐이다.

 

‘보약 같은 친구’는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친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친구야말로 나와 잘 맞는 ‘보약 같은 친구’다. 이런 친구들을 만나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우리는 친구관계가 주는 정신적 만족감과 행복을 찾기 위해서 잘못 비틀어진 관계를 다시 풀기보다는 과감하게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친구 중독’을 해독할 수 있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관계를 내 곁에 꽁꽁 묶어두어야 한다는 강박,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는 완벽주의에서 벗어난다면, 나 자신에게도 집중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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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19 12:06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온라인상에 만난 분들을 ‘이웃’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친구’라는 개념과 다른 의미로 쓰고 있어요. 제가 쓰는 ‘이웃’은 친해지다가 갑자기 사이가 나빠질 수 있는 사람, 친한 건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해요.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와 ‘이웃’을 같은 의미로 보지 않는 거죠.

요즘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타인에 대한 무시, 혐오를 대놓고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요... 그런 사람들이 내뱉는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생겨요... ^^;;

2019-03-18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19 12:08   좋아요 0 | URL
책을 더 많이 읽고 싶어서 SNS를 멀리한 것도 있지만, SNS을 피하게 된 이유는 많아요. 별로 관심이 없는, 알고 싶지 않는 타인의 글을 계속 보는 게 고역이었어요. ^^;;

yesgh0409 2021-02-0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이야기y 에서도 나왔지요. 본인이 괴롭히던 친구가
본인 페이스북 즉 SNS계정을 찻아서 연락처를 알아낸후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가 결혼해서 잘사는것이 못마땅해서
전화로 그 친구주소로 배달 수건 많게는 수십건에 달하는
배달시켜서 그 본인을 괴롭게 했던사건
절때로 페이스북 같은 SNS계정 하시면 안됩니다.
 
포스트바디 : 레고인간이 온다 - 한국과학창의재단 2019년 우수과학도서 선정작 포스트휴먼 총서 2
몸문화연구소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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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이보그(cyborg)다.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사이보그’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수긍이 될 것이다. 사이보그는 인공 두뇌학을 뜻하는 ‘cybernetic’과 생명체를 뜻하는 ‘organism’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195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극한 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 인공 장기를 연구했다. 따라서 사이보그는 한마디로 말하면 인공 생명체이다. 모든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 생명체를 ‘인조인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안드로이드(Android)가 인조인간에 가장 근접한 개념이다. 사이보그는 신체나 장기의 일부만 기계와 결합한 인간을 뜻한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심각한 근시라서 안경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다. 내게 안경은 ‘인공 안구’이다. 나는 평생 ‘인공 안구’를 쓰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이보그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신체에 인공 장기나 기계를 장착하는 기술은 상상 속에 나올 법한 미래 기술이 아니다. 미래학자들은 생명공학의 발달과 인공 장기 연구 개발이 인간과 기계의 급속한 융합을 불러올 것으로 예측한다. 인간 속에 기계가 들어오는 것을 ‘기계의 역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감탄하면서 무병장수를 향한 기대를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인간 속에 기계가 들어오고 기계가 인간과 유사한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는 지금,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해체되고 있다. 현재 인간은 ‘트랜스휴먼(transhuman) 혹은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트랜스휴먼은 과학 기술을 이용해 정신적, 육체적 성질과 능력이 개선된 인간이다. 트랜스휴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과학과 신생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약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유전자 조작, 줄기세포 연구, 인공지능 같은 부문이 트랜스휴먼의 연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트랜스휴먼도 인간 이외의 존재를 타자화하는 인간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것을 보완한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 주목받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인간의 욕망을 꺾기 힘들어 보인다. 결국 첨단 과학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시대를 열어젖힐 것이다. 트랜스휴먼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 즉 포스트휴먼의 탄생은 멀지 않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포스트휴먼 시대가 새 질서를 창조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최근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논의에 인문학자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방관하다간 자칫 인간이 소외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다. 또 삶과 죽음,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새로운 존재론, 가치관, 윤리관 정립을 위해 인문학이 나서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몸문화연구소’가 기획한 《포스트바디》포스트휴먼 시대에 구현될 몸에 대해서 현실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몸문화연구소는 2007년에 설립된 연구 단체로, 과학 기술 및 문화의 변화 속도에 대응하는 ‘몸 담론’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무지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이제 포스트휴먼에 대한 열풍을 보면서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 ‘내 몸을 알라.’ 왜 내 몸을 알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 몸도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튼튼하고, 균형 잡힌 ‘이상적인 몸’을 갈망한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완벽한 인간을 꿈꾼다. 그렇다면 과연 미래에 모든 이들은 완벽한 몸을 가질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의 몸으로 살아가는 게 진정 우리가 원하는 삶인가? 《포스트바디》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비관적인 두려움 대신 지금 포스트휴머니즘이 우리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 포스트휴먼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성찰할 수 있을지를 논의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다시 몸, 삶, 인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몸, 삶, 인간상은 무엇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거나 우리 스스로 질문 자체를 회피한다면 포스트휴먼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 기술과 ‘이상적인 삶(또는 몸)’에 종속되는 삶에 살게 된다. 뛰어난 지능과 신체 능력, 외모 향상 등을 통해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와 과학 기술이 만나면 인간의 몸과 삶의 다양성이 사라진다. 모든 사람이 ‘완벽한 몸’인 포스트바디로 살아간다면, ‘진짜 나’, ‘진짜 삶’이라는 게 있을까? 이렇게 살면 정말 행복할까? ‘내가 원하는 몸,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포스트휴먼 시대로 들어서는 우리가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 숙제를 무시한 채 과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면, 포스트바디는 축복의 몸이 아니라 저주의 몸이 될 수 있다.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몸으로 말이다.

 

 

 

 

※ Trivia

 

 

* 13쪽에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를 잘못 적은 ‘로버트 프루스트가 있다. 예전에 프로스트를 ‘프루스트’로 적은 책을 본 적이 있다. 두 개 성(姓)의 철자가 다르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의 철자는 ‘Proust’이다.

 

 

* 148쪽

  우리가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나, 영화 <퍼시픽림>에서 보아왔듯이, 인간과 로봇, 인간과 무기를 한 몸처럼 연결해서 전투 능력을 극대화하는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

 

‘시리즈나’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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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3-05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년대에 나왔던 미드 600만불의 사나이나 소모즈란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전형적인 사이보그라고 할수 있죠.당시에는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현재는 실제 팔이 잘린 아이가 기계의수(동영상을 보니 거의 실제손과 같이 사용하더군요)를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입니다@.@

cyrus 2019-03-05 17:47   좋아요 0 | URL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영화 속 세계는 현실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 ^^;;

얄라알라 2019-03-1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새로나온 책 검색하다가 이 책 제목에 꽂혀서^^
˝몸문화연구소˝ 회원분들이 궁금하네요^^

cyrus 2019-03-18 16:14   좋아요 0 | URL
몸문화연구소가 기획해서 출간된 책이 꽤 많아요. 요즘 몸을 바라보는 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다른 책들도 보려고 해요. ^^
 
위험한 책읽기 - 세상을 이해하는 깊고 꼼꼼한 읽기의 힘
로버트 P. 왁슬러 지음, 김민영 외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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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것은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은 읽어도 남는 게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설은 유용한 정보를 주는 책이 아니다. 소설 속에도 지식이 있지만, 전문 분야를 다룬 책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도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소설은 누군가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인생의 정답이 없다. 그래서 소설 한 권 읽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읽기의 가장 큰 목적은 소설 속 상황에 부닥친 등장인물을 로 설정한 후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인물과 더불어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한다. 때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소설을 읽을 때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공감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소설 속 인물에게 깊이 감정이입을 할수록 재미있고, 그렇지 못할수록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지와 영상, 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소설 속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낯설어한다. 그래서 그런가? 이제 사람들은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아예 책을 멀리하고 인터넷이 있는 스마트폰을 더 좋아한다.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책은 아무도 찾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쾌락을 찾는 데 점점 더 익숙해져 간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끈질기게 책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책의 매력을 느끼려면,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위험한 책읽기언어로 빚어진 이야기(linguistic narrative)를 이해하기 위해 깊이 읽기(deep reading)를 강조한다. 언어로 빚어진 이야기는 종이책 속에 있다. 위험한 책읽기에 언급되는 깊이 읽기종이책을 느리게 읽으면서 사색하는 방식이다. 위험한 책읽기의 저자가 깊이 읽기를 강조하는 것은 작가의 화려한 문체를 익혀 좋은 문장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 자신과 타자를 둘러싼 미지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책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 누구이며 내가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이다.

 

깊이 읽기는 산책(散策)으로 비유될 수 있다. 산책은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의 언어를 읽는 일이다. 산책은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 흙냄새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언어에 집중하는 깊이 읽기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독자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여덟 가지 산()코스를 공개하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들려준다. 코스는 다양하다. 창세기 1~3, 프랑켄슈타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암흑의 핵심, 노인과 바다, 호밀밭의 파수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파이트 클럽,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등이 있다. 코스의 순서에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대로 가면(읽으면)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책 읽기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까. 왜냐하면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줄거리가 아닌 이야기로 표현된 유한한 인간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조우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 우리에게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은 무엇인지 상기시켜준다.

 

(27)

 

 

  우리는 상황을 용이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와 정보를 수집한다. 그러나 내러티브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질문으로 몰아넣는데, 중요한 것은 질문 자체이다.

  이야기는 무엇이 인간 세계에서 지속되며 무엇이 이 세상의 인간을 만들어내는지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이 가진 불안정함,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과 평범함이다.

 

(291)

 

글꼴을 굵게 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작가와 독자 모두 인간이며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나약한 면모를 이야기를 통해 노골적으로 전하고, 독자도 자신 또한 초라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앞서 언급했듯이 소설에는 인생의 정답이 없다. 인간은 날마다 인생은 무엇이다라고 여러 번 정의를 내리면서 살아간다. 독자는 그러한 정의를 수차례 번복하면서까지 소설을 읽는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독서는 내가 누구인지, 나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아가는 지적인 여정이다.

 

저자는 깊이 읽기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 불능이다. 갈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데 인색해진다. 그들은 타인이 겪는 삶의 고통이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데 독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책을 접할 때 비로소 독자는 자신과 타인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발견한다. 그렇게 받아들인 타인의 이야기는 독자의 자아를 성장시킨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비로소 책은 따분하고 위험한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이 될 것이며 평생 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Trivia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말을 인용한 문장에 큰따옴표(”) 한 개가 없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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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2-11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는 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전보다 조금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cyrus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cyrus 2019-02-12 16:20   좋아요 1 | URL
소설도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많이 주죠. 그래서 소설은 절대로 저평가해선 안 되는 장르입니다. ^^

레삭매냐 2019-02-11 1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로 소설을 읽습니다만.

소설읽기를 통한 내재화의 쾌락
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습니다.

단언코.

cyrus 2019-02-12 16:22   좋아요 0 | URL
요즘 소설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솟아나고 있습니다. 독서모임을 통해서 만나는 분들이 소설을 즐겨 읽어서 제가 이분들 덕분에 편식 독서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뒷북소녀 2019-02-14 1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전 소설을 재미로 읽는데, 사람들도 만나고...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회사에 보고서 제출할 때도 훨씬 빠르고 쉽게 작성하는 것 같구요... 소설도 도움이 되는데... 왜 ㅠㅠ

cyrus 2019-02-14 17:20   좋아요 1 | URL
대부분 사람은 소설을 ‘시간 때울 때 읽는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이라는 장르를 가볍게 보는 거죠. ^^;;

카알벨루치 2019-02-14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은 위대합니다!!!

cyrus 2019-02-14 17: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소설이 위대한 이유는 그 속에 다양한 사람들의 서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뒷북소녀 2019-02-1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문학의 깊이를 알면 좋을텐데요. 킬링타임용 소설만 있는게 아닌데, 안타까워요. 저도 예전에 대표님께 소설책 나부랭이 읽는다고 여러 말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갑자기 울컥하네요ㅠㅠ

cyrus 2019-02-18 15:28   좋아요 0 | URL
상대방이 어떤 장르의 책을 읽느냐에 따라 시선과 반응이 다르죠. 상대방이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면 ‘재미있는 책을 읽는구나’ 정도로 생각하지만, 인문학 책 같이 생소하고 어렵고 분량이 많은 책을 ‘들고 있기만 해도’ 그 사람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

페크pek0501 2019-02-14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알기까지 여러 권을 읽어야 합니다. 수십 권 정도?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해 알게 된다고 느낍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을 읽었는데 그런 게 나와요. 큰 농장을 가진 주인이 나이가 들어 자신은
늙었고 언젠가는 죽게 될 텐데, 하면서 자기 대신 농장을 경영할 사람이 없나, 하고 고민합니다.
딸이 대신 농장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딸은 그곳 좁은 지역에서 사는 게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큰 도시로 가고 싶어도 아버지의 농장 때문에 갈 수도 없고... 결국 많이 가진 아버지와 딸은 불행한 사람인 거죠. 소설 주제는 다른 거예요. 그런데 주제보다 저는 주제와 관련 없는 이런 이야기 - 부자들은 근심이 많다, 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소설로 배웁니다. 소설을 읽어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면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지 생생하게 느끼게 되지요.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가 보지 않아도 소설을 통해 그 느낌을 공유하게 되어요. 이런 게 소설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합니다.

cyrus 2019-02-18 15:33   좋아요 0 | URL
소설을 많이 읽으면 다양한 삶을 살고,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비록 가상 인물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했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종이 위에 살아 숨쉬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페크님의 말씀처럼 소설을 읽어야 인물을 이해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