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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역사 -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장영란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인들에게 '영혼' 이란...?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영혼' 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 수 있다.   

-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영혼의 역사> 장영란, 글항아리. pp 7 -

 

'영혼'   우리가 살아가는데 귀에 들리는 익숙한 단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작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최첨단 과학기술과 정보가 흘러넘치는 이 시대에 '영혼' 을 들먹거린다는 자체가 어떻게 보면 시대에 뛰떨어진 추상적인 관념을 논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혼' 이라고 하면 단지 죽은 사람의 넋이라는 일반적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보니 '영혼' 이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의미에만 국한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간혹 '영혼을 팔아서 OO를 이루겠다.' , '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인해 병든 도시인의 영혼들' 이라는 식으로 이 '영혼' 이라는 단어를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영혼' 은 그저 죽은 사람의 넋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형성되는 모든 정신활동을 함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영혼' 의 의미를 좀 더 확장시켜나간다면 '마음' 또는 '정신' 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병든 영혼' 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현대인의 정신은 그야말로 피폐해져만가고 신체 질환 못지 않게 마음과 정신의 병을 죽을 때까지 달고 살아가기도 한다. 아무리 시대가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남녀노소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높아지고 있으며 정신적인 고통을 견뎌내지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무엇이 현대인들의 '영혼' 을 병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정신상담 관련 카운셀러나 전문의들은 대체적으로 현대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현대인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차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우울증 문제는 단지 사회 구조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좁은 발상이며 실질적으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한계가 따른다.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영혼의 역사>를 쓴 그리스 신화 및 고대철학 전문가인 저자는 현대인들의 피폐한 삶을 치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고대 그리스로 대표되는 고대인들의 영혼 개념에서 찾고 있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림으로써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영혼을 고대의 선조들이 남긴 지혜, 즉 그리스 신화와 철학을 통해서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영혼의 개념  

'영혼' 은 '숨쉬다' 라는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 psycho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에는 '정신' 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영혼의 기능이 정신적인 의미로 자리잡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며 똑부러지게 한 가지의 의미로 특정짓기보다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혼' 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제시한 호메로스<일리아드><오뒷세이아>를 통해 다양한 표현으로 영혼의 기능을 설명해주었지만 매우 한정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혼의 어원이 '숨쉬다'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듯이 그저 죽은 자들에게만 사용되는 단어였으며 살아 숨쉬고 있는 사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즉, 신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은 바로 죽음이며 그것은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는 호메로스가 남긴 문헌들,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를 보게 되면 영혼을 생명의 원리로서 본절적 특성을 부여한 표현도 있지만 호메로스는 영혼의 본질적 의미에 심도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리스 철학이 등장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영혼의 개념이 철학적 사유로 분석되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밀레토스 학파의 시조인 탈레스는 모든 만물에는 그 자체 속에 생명을 갖추고 있다는 물활론을 확립하여 영혼을 통해서 만물이 스스로 운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후에도 초기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영혼의 개념을 내세우게 되었는데 아낙시메네스 는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야말로 영혼이라고 생각했으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 개념에 '인식' 능력을 덧붙였다.   

  

 

  오르페우스교 & 피타고라스 학파 :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두 학파의 입장 

영혼의 개념이 확립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의 불멸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자연히 인간의 신체가 죽음으로 소멸해도 영혼은 다른 신체에 들어가 윤회하게 된다고 여겼다.      

  

 

 카미유 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1861년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뤼디케가 있는 지하세계 하데스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뛰어난 리라 솜씨로 스튁스 강의 뱃사공 카론과 괴물 케베스(케로베로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까지 감동시켜 에우뤼디케의 영혼을 데리고 갈 것을 허락받는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아무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지하세계의 법칙을 어겼고, 결국 아내의 영혼을 헤르메스에 의해 이끌려 되돌아갔다.  오르페우스는 그녀 무덤 앞에서 슬픔을 감출 수 밖에 없었다.  

- 같은 책, pp 256 -

 

죽은 아내 에우뤼디케를 데려오기 위해서 죽은 자들만 갈 수 있는 지옥 세계에 도달한 그리스 신화 속 최고의 리라 연주가 오르페우스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오르페우스교는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영혼이 영적 존재로서 불멸의 행복을 얻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영적 불멸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는데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것이다.    

수학 시간에 배우게 되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주축으로 형성된 피타고라스 학파는 전생과 윤회를 믿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 학파에 가입된 학자나 사람들은 육식과 동물 살생을 금기시하였는데 인간의 영혼이 완전하게 정화될 때까지 다른 생물로 형체를 바꾸며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플라톤 : 영혼의 본성을 인식하기 위한 일상적인 방법  

플라톤은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형상, 즉 이데아(Idea)를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진실한 존재로서의 이데아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영원불멸한 진리를 인식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재판 이후 비극작가로의 꿈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선 플라톤은 그가 살아가는 초라하고 부적절한 세계보다는 마음속으로 더 순수하고 더 확실한 미래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은 육체보다 완벽하며, 이데아는 육체나 영혼보다 더 완벽하였다. 그에게는 배움마저도 태어나기 전부터 비자연적인 존재로부터 배웠던 것을 ‘상기’해 내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삶을 음미하는 행위 자체를 곧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주의 깊게 성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을 성찰하고 돌보기 위한 일상적인 행위로서 플라톤이 제시한 방법은 바로 '글쓰기' 다.  그러나 문자 자체로서의 의미만 파악한 채 정작 참된 의미의 지혜를 기억하지 않는 글쓰기 행위를 경계하였고 인간이 문자를 배워 글쓰기에만 신뢰한다면 지혜의 기억에 무관심해져 영혼이 더 쉽게 망각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단 한 편의 저서를 남기지 않았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대화편을 남긴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모습과 상반되는 사실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vs 스토아 학파 :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 형성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공통적으로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실천적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이 인생의 최고 목표이며 행복한 삶은 최대의 쾌락과 최소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가르친 반면, 스토아 학파는 행복을 정신과 영혼의 안정에서 찾았으며 욕망을 버리는 금욕주의를 행복을 달성하는 실천 윤리로 제시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옹호하면서도 그것을 동적 쾌락과 정적 쾌락, 두 가지로 분류했다. 전자는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형성되는 쾌락(아포니아, aponia)이다. 후자는 욕구가 충족된 뒤 더는 그것을 느끼지 않는, 그야말로 영혼이 동요되지 않는 평정한 마음 상태의 쾌락(아타락시아, ataraxia)이다.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감각적이며 순간적 쾌락으로 대표되는 아포니아를 부정하고,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쾌락인 아타락시아를 역설하여 쾌락의 질적 구별을 인정하였다.  에피쿠로스가 정적 쾌락을 중시한 것은 욕구의 충족보다는 그것의 제거가 인간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행복의 관건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쾌락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음과 신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곧 불멸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세네카의 죽음>  1773년 

여느 스토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세네카도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삶은 자연에 일치하여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세속에 물들면서도, 끝내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을 갖췄기 때문이며 유일의 선(善)인 덕(德)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중략) 

- 같은 책, pp 493 -

 

반대로 스토파 학파와 같은 경우에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면서도 괴로움에 빠지지 않고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쾌락에도 고통에도 무감각한 부동심의 마음을 강조했다.  변화무쌍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둘리지 않으려면 '이성' 에 따름으로써 분노, 슬픔 따위 감정의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자기보존 능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에만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 일어나게 될 상황들을 예측하고 상상함으로써 미리 영혼의 준비를 하는 훈련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고대인들의 지혜를 통한 잃어버린 영혼 되찾기  

고대 그리스 신화나 철학에서 언급되는 있는 '영혼'의 의미들은 수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관념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영혼' 의 의미보다는 한층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논어> 위정편에 '온고지신'(新)이라는 구절이 있다.  옛 것을 배움으로써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영혼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들 중에는 오늘날에도 현대인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내용도 있다.  

자신의 삶, 즉 영혼 그 자체를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쉬운 방법이 글쓰기임을 플라톤은 제시하였고,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 곧 삶의 욕망으로 발전하여 자신 스스로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봤다.    즉, 고대인의 지혜가 함축된 철학을 배움으로써 단순히 진리를 인식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더욱 고달퍼지고 퍽퍽해져나가는 세상 속에서 영혼이 병들지 않기 위해서는 굳이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상담 카운셀러와 전문의를 만나는 것보다는 자신 스스로 문제점을 파악해보고 이를 해결해나가 수 있는 영적 훈련을 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플라톤의 스승이 델포이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문구를 보고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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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9-0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아, 근데...진짜..무엇이 현대인들의 '영혼' 을 병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까요? 정말 궁금해요...저 책에는 나와있지 않은가요??

나 자신을 알면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을지...근데, 이거...넘 어려운거 아닌지...ㅜㅜ

cyrus 2011-09-02 23:25   좋아요 0 | URL
제가 그 부분만큼은 글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네요.
자칫 읽는 분들이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겠습니다. ^^;;

참고로 이 책에서는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병에 대한 원인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고 있답니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현대인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단초로 고대인들의 신화나 철학 속에 등장하는
영혼 개념이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덧글로나마 글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현대인들이 정신적인 병에 생기는 이유가 스토아 학파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자신 스스로 병들게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이 책의 내용이 어렵기는 해요.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면 읽는데 수월할거 같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학파에 대해서 학창시절에 인상깊게 배운 적이
있어서 제가 최대한 소개할 수 있었던 내용이랍니다.

꽃도둑 2011-09-0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안농안농! 잘 지내시죠? 아, 여전하네요.. 보기 좋아요..^^
정말 오랜만에 알라딘에 들어왔네요.
그냥 인사차 들렀어요.. 잊을만 하면 또 올게요.
몸, 마음, 정신, 영혼 모두모두 건강하게 지내세요~~

cyrus 2011-09-02 23:26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네요. 꽃도둑님 ^^
잘 지내고 계시죠. 꽃도둑님도 건강하시고,, 제 생각이 나신다거나
심심하면 들려주세요 ^^
 
정신병과 심리학
미셸 푸코 지음, 박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이성은 자신이 현명한 줄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은 미친 것이다. 이성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성은 자신이 올바르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망상에 빠져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미셸 푸코 <정신병과 심리학> 중에서, pp 136 -

 

 

  젊은 푸코의 '광기' 에 대한 풋풋한(?) 학문적 탐구     

인간의 광기는 흔히 정상적인 것과는 대칭에 선 비정상의 개념쯤으로 통한다. 우울증과 죽음, 욕망, 폭력, 비판과 같은 광기의 양상은 위험하고 혐오되야 할 가치로 여겨지기 일쑤다. 그래서  광기는 정치와 철학, 역사의 범주에선 늘상 배제되고 억압받곤 한다. 그러면 광기는 정말 비정상적이고 배척해야만 할 주제일까.    

이성의 광기에 대한 배제와 억압의 역사를 담은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다가 독서 진도가 나아가지가 않아서 <광기의 역사>가 출간되기 전에 쓰여진 <정신병과 심리학>을 겸하여 읽게 되었다. 

푸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광기의 역사>는 1961년에 발간되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광기의 역사>가 푸코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려준 처녀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광기의 역사>를 읽기 전에는 그저 '푸코' 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던 터라 <광기의 역사>가 푸코의 처녀작인줄 알았다.    <정신병과 심리학>은 1954년에 푸코가 심리학과 조교수로 역임된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된 공식 저작물이다.   으레 푸코라고 하면 철학자라고 떠올리기 쉬운데 그가 처음으로 대학 강단에 오르면서 전공했던 학문이 심리학이다.  전통적인 철학의 학문적 범위에만 한정하지 않는 그의 광범위한 지식 편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신병과 심리학>에는 심리학을 통한 정신병에 대한 탐구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심리학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정신병에 대해서 프로이트의 이론 등과 같은 다양한 심리학 이론 등을 논지로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으며 2부에는 광기의 사회문화적 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1부는 심리학적 용어가 많이 언급되는데 사실 심리학적 지식이 빈약한 편이라 굳이 1부를 읽지 않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광기의 역사>를 읽고 있는 상황이라  '광기' 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2부만 따로 발췌해서 읽었다.

700여페이지나 되는 <광기의 역사>를 완독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병과 심리학> 2부는 훗날 <광기의 역사>로 집대성하기 전. '광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젊은 푸코의 풋풋한(?) 학문적 탐구를 볼 수 있었다.   <정신병과 심리학> 2부 '광기와 문화'가 푸코 사상의 청소년기라고 한다면 <광기의 역사>는 사상의 범위가 한층 더 광범위해지고 성숙되어진 청년기인 것이다.  

 

 

  서구문화적 관점이 만들어낸 광기의 정의

푸코는 하나의 사회집단 속에서 특정 개인이 '정신병 환자' 로 간주될 수 있는 원인을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과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분석에서 찾고 있다.   

뒤르켐은 '사회' 를 정치체계, 가족체계 및 그 밖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체계 등 여러 부분이 합성된 하나의 실체로 보고 있다.  즉, 사회 그 자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의 특징을 부분으로 한정지어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에서 과학적 조사를 실시한 최초의 사회학자이다.  그는 통계적인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이를 근거로 이론을 제시하였다.  사회집단에 속한 사회 구성원들은 유기적 연대를 강화하는데  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구성원의 욕구나 행위가 무규제 상태로 사회 내 도덕적 규범의 가치가 상실된다면 그 현상은 일탈 행동으로 보게 된다.     이를 푸코는 통계학적 시각의 관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 <미친 여인>  1822년 

 

우리 사회는 사회가 추방하거나 감금하는 정신적 환자 속에서 자신을 알아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질환을 진단하는 바로 그 순간, 환자를 축출한다.   

- 2부 광기와 문화 서론, pp 110 -

 

그리고 루스 베네딕트와 같은 미국 심리학자들의 관점 역시 뒤르켐의 통계학적 관점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같은 원시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원주민 집단은 대체로 옷을 입지 않은 채 벌거벗은 상태이며 신발 역시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생활한다.  그런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있는 50명의 원주민 중에서 단 한 명만이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다고 가정해보자.   평소에 벌거벗고 맨발로 다녔던 원주민들에게는 옷과 신발로 무장한 그 원주민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며 그동한 자신들이 생활했던 행동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는 원주민 집단의 고정된 문화적 유형에서 배제되는 행위이며 이는 곧 사회집단 내에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뒤르켐과 베네딕트의 분석과 같은 서구문화적 관점에는 공통적으로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양식, 도덕적 규범 등에 위반되는 행위는 비정상적, 또는 정신병자로 간주되어진다는 점이다.   

 

 

  광기의 역사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62년경  

 

15세기 말은 확실히 광기가 언어의 본질적 힘과 다시 관계를 맺게 된 세기들 중 하나다. 고딕 시대의 마지막 징표들은 차례차례, 그리고 연속적으로 죽음과 광기에 대한 강박관념에 지배받았다.  죄없는 자들의 묘지에 그려진 '죽음의 무도'(Dance macabre), 피사의 캄포 산토 벽에 새겨진 '즉음의 승리' 가 그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는 광인들의 수많은 춤과 축제가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럽이 그렇게 기꺼이 기념하던 광인 춤과 광인 축제가 존재했다.  

- 5장 정신질환과 역사적 형성 중에서, pp 116~117 -  

  

2부 '광기와 문화' 에는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광기라는 단어가 형성되어지는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광기는 일반인들에게는 혐오스러운 '비정상적' 행위이지만 15세기 때만 해도 어느 곳에나 광인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며 광인의 심리에 대한 저작물도 출판될 정도로 그 당시 대중들에게 광기는 친숙한 주제였다.   광기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이가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사회학적 대상이었다.

 

 

 윌리엄 호가스 <연작 '탕아의 편력' - 정신병원에서>  1732~1735년    

 

가난한 불구자들, 빈곤층 노인들, 고집 센 실업자들, 성병 환자들, 온갖 유형의 방탕아들, 가족이나 왕권이 가하는 공식 처벌을 기피하는 자들    (중략)     간단히 말해서 이성, 윤리 그리고 사회 질서에 비추어 볼 때, '문란' 의 신호를 보이는 모든 자들을 이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 5장 정신질환과 역사적 형성 중에서, pp 119~120 -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광기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광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생기게 되면서 광기는  개인적인 문제의 대상으로 그 범위가 변형되었다.   그리고 '광인' 에 포함되는 대상은 단순히 정신질환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7세기의 강제수용소는 단순히 의학적으로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을 수용하는 의학적인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다. 사회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가난한 부랑자에서부터 사회 질서에 어긋나고 부도덕적인 범죄자들까지 사회에서 인정될 수 없는 비이성적이면서도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강제수용소의 탄생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성' 을 통용하는 권력집단의 사회적 통제 수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이성을 감금하고, 광기라는 낙인을 붙여 치료의 대상으로 전환시킨 것은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이 등장한 근대 이후부터다.  그러나 사회적 일탈과 범죄 행위로 결부되는 광기의 시선은 변함없었다.

     

 

  광기 그리고 정신병에 대한 편견을 깨자

광기에 대한 편견의 출발점은 사회적 소수자와 그 대척점에 있는 기득권자들의 평가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후자만이 그 기준을 정하고 평가함으로써 비극을 낳고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이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광기에 대한 편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배척과 소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당연히 가져야 할 교육과 직업을 얻을 기회를 빼앗아 놓고 장애인을 사회적 무능력자로 낙인찍어 사회로부터 보호가 필요하거나 격리의 대상으로 삶을 규정해버리거나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병균체로 사회를 오염시키거나 격리가 필요한 정신병으로 치부하는 등의 사회적 판단이 여전히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다.

정신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사회, 문화적으로 여러 요인이 있지만, 영화나 언론매체에서의 정신과 환자에 대한 왜곡된 묘사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영화나 언론은 일반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것을 이용한다.   그리고 실제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일반인보다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확률이 높지 않은데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사건을 정신병 환자의 소행으로 모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편견으로 음지에서 고통받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또 한번의 고통을 준다.   

이제 정신병도 약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정신병은 더 이상 숨길 병도 아니다. 다른 질병처럼 주위 사람과 상의하고 감기를 치료하듯 스스럼없이 병원도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정신병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바뀌어야 한다. 이는 의료인들이 더 노력하고 연구할 문제이지만, 의료시스템을 포함한 사회제도적 측면에서도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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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6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사람의 상태를 둘로 나눌 수 있을까요... 살다보면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많거든요. 광기와 정상을 오가는 삶이랄까요.

cyrus 2011-08-27 13:11   좋아요 0 | URL
푸코가 이성의 헛점을 지적했듯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그런 착각 속에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비로그인 2011-08-2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었던 기억을 더듬으면 푸코의 <광기의 역사> 는 흥미진진하게 시작하다가 읽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다가 다시 빨라졌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서양의 역사를 다시 보게 만드는 책이자 현대 사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 책으로 도서관에서만 보다가 돈벌고 나서 거의 처음으로 구입하게 된 책인 듯 싶네요 ^^

푸코에 말한 판옵티콘의 구조를 갖고 있는 학교, 병원, 감옥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경고는 앞으로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1-08-27 13: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읽을 때 각 내용마다 속도가 달랐던거 같아요. 처음에
광인의 배에 대한 내용 때는 좀 흥미진진했었는데 그 뒤로는 진도가
잘 안 나갔어요. 그래서 좀 얇은 분량의 푸코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책의 1부는 너무 어려웠고요. ^^;;

2011-08-27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려움 때문 아닐까요?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얼마 전 버스에서 한 아이를 봤는데, 자리에 앉더니 머리를 앞뒤로 크게 흔들더군요.
몸을 감싸안고 박자에 맞추어 흔들흔들. 사람들이 다 그 아이를 보더군요. 그런데
한눈에 그 아이가 자폐증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과 자폐증이 어떤 유형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나니 무섭지 않더라구요.

아마 아이는 버스에서 자신의 불안을 견디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인거 같았거든요.
대견한거죠.

광기에서 많은 기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죠. 천재와 광기는 종이 한장 차이기도 하고.
결국 관용의 문제인데, 현 사회는 관용과 여유를 부리기에는 다들 너무 빡빡한거 같아 슬퍼요... ㅠ

cyrus 2011-08-27 13:21   좋아요 0 | URL
마고님 말씀대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푸코의 삶을 완전히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푸코가 학창 시절에
정신 발작을 경험했고 동성애자였다네요.
제가 읽은 <정신병과 심리학> 역자 후기에는 왜 푸코가
광기와 성이라는 주제의 연구에 매달렸는지 이애할 수 있었어요.
사회 내에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온 감시와 처벌, 그리고
광기와 이성으로 구분짓는 경계 때문에 고뇌하고 이를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7 13:26   좋아요 0 | URL
심리학이든 철학이든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었다 하잖아요. 그리고 특히 심리학은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적용 가능하지만, 원시 부족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말에... 그렇구나 싶어집니다.

아래 <지나가는 이>님의 댓글로 인해 생각이 많아져버렸어요.
지금 팽팽 돌아가는 중이예요,, 아하하.

cyrus 2011-08-27 13:33   좋아요 0 | URL
저의 부족한 글 때문에 괜히 마고님 머리 아프게 만들었네요 ^^;;


2011-08-27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1-08-27 23:09   좋아요 0 | URL
푸코가 에이즈땜시 사망했다죠..

지나가는이 2011-08-2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롭네요. 제가 알기에는 푸코가 제시한 문제제기는 설명할 수 없는 타자를 자폐증으로 재단하는 지식권력의 문제인데요. 이걸 관용이나 사회적 통념 또는 제도적 변화로 해결하자는 것은 정신병을 생산한 지식권력을 내재화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푸코가 가장 비판할만한 답변일 듯 싶은데요......

cyrus 2011-08-27 13: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제 글의 오류를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깐 정말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제 막 푸코의 사상을 접한 것이라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오류를 범했네요. 푸코를 읽은게 <정신병과 심리학> 그리고
현재 읽고 있는 중인 <광기의 역사>뿐이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푸코의 사상적 특징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텍스트에 접근하고 있는 식이라
아직은 제가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님이 언급하셨던 부분은
푸코의 사상을 읽는데 꼭 명심해야할 내용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좋은 내용의 댓글 남겨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좋은 주말 되셨으면 합니다. ^^

2011-08-27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30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토피아 펭귄클래식 1
토머스 모어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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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도 없는 장소,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1516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이래 늘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왔다. 이 책을 통해서 모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묘사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의와 평등에 기초하여 누구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사회였다. 모어는 토지 공유제를 기초로 한, 돈이 필요 없는, 자급자족의 소박한 생활방식이 구현된 사회로 묘사했다.   

이 사회에는 화폐가 없는 대신 공동물품저장고가 마련돼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생산한 것을 거기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필요한 생활물자가 모두 늘 거기에 있으므로 누구도 쓸데없는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불안에 쫓기는 일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어가 묘사하고자했던 ' 유토피아 ' 라는 단어에는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 어디에도 없는 장소 ' 라는 뜻으로 의도적으로 지명으로 쓰고 있다. 즉, 유토피아는 '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 ' 를 일컫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몽상에 불과하는 이상사회를 묘사한 이 책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읽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허구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들어 ' 소설 ' 로 분류되어 언급하기도 하며 유토피아 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히기도 하다.

 

 

  양이 ' 사람을 잡아먹었던 ' 15세기의 영국

그러나 뒤집어 보면, 소설과 같은 이 책은 단지 가공의 이상사회에 대한 몽상을 담아낸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니라 당대 영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겨냥했다고 할 수 있다. 

모어는 헨리 8세가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 교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멋대로 영국교회를 창립하여 스스로 그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을 때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처형을 당하기는 했으나 생애 말년까지 국왕을 측근에서 보좌한 지배층 인사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당대 지배층의 전횡과 탐욕에 끝없이 시달리는 백성들의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양심적인 인간이었다. 그 양심이 우회적으로 표현된 게 바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6~16세기 영국 사회에 볼 수 있었던 인클로저(Enclosure) 현상에 대한 모어의 비판의식이 담겨져 있다.  인클로저 현상이란 공동 이용이 가능한 공유지를 담이나 울타리 등의 경계선을 쳐서 남의 이용을 막고 사유지로 정하는 것을 말한다.   

15~16세기 영국에는 양모(羊毛) 생산을 이용한 산업이 발달했는데 자본가들은 양모생산이 더 유리한 데서 경지를 목장으로 전환하기 위해 공유지와 농민이 보유하고 있는 땅에 울타리를 쳐놓고 자신의 사유지로 만들어버렸다.  이로 인해서 힘 없는 농민들은 한순간에 실업자 신세로 처하게 되었고 빈곤에 빠진 하층민들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게 되면서 농토가 황폐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지배층은 양모 산업의 발흥에 편승하여 떼돈을 벌기 위해서 농민들의 전통적인 생활 근거지인 공유지를 사유화하여 양떼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런 모순의 사회상에 대해서 모어는 양이 ' 사람을 잡아먹는 ' 현실이라고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과거에 이 동물들(= 양)은 아주 적은 양의 먹이만 필요로 하던 동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물들이 지금은 노골적으로 맹렬한 식욕을 발달시키고 있고, 심지어 사람들까지 먹어치우는 동물들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중략) 

가장 훌륭하고 따라서 가장 비싼 양모가 생산되는 영국 각지에서 성직을 맡은 대수도원장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귀족들과 시골 신사들이 자신들의 전임자들이나 선조들이 사유지에서 얻어내던 수입에 점점 불만을 품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게으르고 안락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일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목초지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유지를 최대한 울타리로 에워싸 버리고 있습니다.  사회에 확실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류경희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p 69~70 -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는 영국 사회의 모순적인 현실과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무너져야만 했던 영국 국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사회적인 현실을 비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계수단을 강제로 빼앗아놓고 오히려 그 백성들을 무서운 형벌로 다스리는 지배층의 권력 오용에 대해서도 고발하고 있다.   

 

 

 

  토머스 모어 vs 헨리 8세  


 
 

(左) 토머스 모어    (右) 헨리 8세  

모어는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을 정도로 대법관에 임명되었지만  

왕의 영국 국교회 설립과 이혼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국왕과의 기나긴 갈등 끝에 그는 대법관을 사임하였고  

결국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토피아>는 그 당시 영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한 모어의 입장도 드러나고 있다.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자, 궁녀 앤 불린과 재혼하려고 하였으나 로마 교황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자신의 재혼을 성립되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와의 결벌을 선언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헨리 8세: 모어 경, 나 앤이랑 결혼하고 싶은데  

대법관인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다네.   

 모어: 폐하, 가톨릭적 교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혼을 할 수 없습니다.   

(영화 ' 사계절의 사나이 ' 장면)


 

자신의 재혼을 위한 종교 개혁의 단행으로 가톨릭를 탄압하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 당시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토머스 모어였다.  모어는 대법관의 자리를 사임하면서까지도 헨리 8세의 국교회 수립과 이혼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고수하여 왕과의 갈등 끝에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영국사에서 기억이 남을 왕과 대법관 간의 갈등은 절대군주로서 막강한 권력 앞에서 탄압받는 가톨릭의 부흥을 꾀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려는 종교인으로서의 모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에서는 결혼과 관련된 내용을 보게 되면 모어가 평소에 결혼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토피아 인들의 경우) 그들은 엄격할 정도로 일부일처주의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혼 부부는 오직 사별에 의해서만 헤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간통이나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학대 행위가 있을 시에는 예외입니다. 이런 경우 무책 배우자는 지역 담당관 협의회로부터 다른 사람과 재혼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유책 배우자는 망신을 당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라는 편결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아내가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간다는 단순한 이유(이것은 절대로 아내의 잘못이 아닙니다)만으로는 남편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이혼을 할 수가 없습니다. 

- 같은 책, p 175 -

  

아마도 모어는 앤과의 재혼을 바라는 헨리 8세의 끈질긴 회유에 맞서서 이렇게 대응했을지도 모른다.  왕이 되기 전 젋은 시절부터 여성 편력이 심했던 헨리 8세에게 모어는 올바른 결혼에 대해서 훈계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 헨리 8세는 두 번째로 결혼한 앤 불린마저 자신이 원했던 아들이 아닌 딸인 엘리자베스 1세를 낳게 되자 다시 이혼을 하게 되었고, 앤 불린은 처형당했다. 그 후로도 헨리 8세는 여러 번의 재혼과 이혼을 거듭했는데 여섯 번이나 결혼한 군주가 되었다)  

 

    

  유토피아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있다  

 


 

니콜라 푸생 <아르카디아의 목자들> 1650년경
 

  

서양에서 아르카디아(Arcadia)는 동양의 ' 무릉도원 '과 같이 '천국' 또는 '낙원' 을 가리킨다. 아르카디아를 축복과 풍요의 땅으로 묘사하고 있는 니콜라 푸생의 그림에는 양치기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 묘비에 새겨진 글을 읽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묘비에는 라틴어로 Et in Arcadia Ego(아르카디아에도 내가 있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 말에는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에도 죽음은 어김없이 존재한다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라틴어 명구를 빌어 표현하자면 인간이 간절히 원하면서도 이루어졌다고하는 좋은 세상에도 부정하고 싶은 갈등, 빈곤, 번민 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국격이 높아지고 세계 몇 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보도를 지겹도록 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사정은 조용할 날이 없다.  상품 생산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경상수지와 자본수지는 흑자를 기록하고 더불어 국민 소득도 증대한다는데 왜 사는 게 갈수록 힘들어진다는 사람만 자꾸 늘어나는 것일까?    

게다가 점차적으로 부조리한 사회로 치닫을수록 시회지도층리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개인의 물욕을 위해서 이용할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생활 터전과 생계수단마저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   반면에 이런 어지러운 세상 속에는 걱정, 근심이 없는 이상향인 유토피아적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고 이를 직접 실현시키려고 하는 ' 용자 ' 들도 나오기 마련이다. 

토머스 모어가 살았던 영국의 시대가 바로 그러했다.  절대군주를 강화하려는 헨리 8세의 시대 속에서의 모어는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목도하면서 주저없이 비판하였다.  비록 뿌리 깊은 영국 사회의 문제점이 사라진 완전한 이상사회를 실현시키려는 급진성을 가진 ' 용자 ' 가 되지는 못했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사상적인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 그리고 푸리에, 오언, 칼 마르크스보다 먼저 합리적인 이상사회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것을 보면 유토피아 문학의 고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혁명가절 기질을 가진 용자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를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유토피아>를 읽는다고해서 우리가 이상국가 ' 유토피아 ' 에 갈 수 없었듯이. 

그 곳에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의 현실도 존재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유토피아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우리 ' 인간 ' 의 나라다.  400여 년 전에 쓰여진 <유토피아>에는 토머스 모어가 고발한 부조리한 현실, 즉 사회지도층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사회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단순히 부조리한 사회를 잊기 위한 일종의 도피를 위한 독서가 아닌 사회의 문제점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선조의 생각으로부터 찾으려는 독서로서 일독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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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5-31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저 어제 저녁부터 <유토피아> 읽고 있었습니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이 글이 독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토머스 모어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유토피아 문학의 고전이라는 점에는 별 의심이 안가는 것 같아요. 여튼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1-06-01 16:40   좋아요 0 | URL
오랜간만이에요, 굿바이님 ^^

저도 모어의 입장에 대해서 간혹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굿바이님이 <유토피아>를 읽고 있는 목적이 궁금해지는데요. ^^


아이리시스 2011-05-3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유토피아 말고 세상의 유토피아가 있으면 좋겠어요. 에잇, 세상이 너무 지옥이예요. 지옥에서 꽃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아요. 우리가 다들. 저는 <인간 실격>, <황야의 이리>를 번갈아 읽고 있어요. 특이한 남주인공 둘이라 번갈아 읽으니 두사람이 한사람이 되고 있어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cyrus 2011-06-01 16:41   좋아요 0 | URL
요즘 우리나라 사회가 돌아가는거 보면,, ^^;;
저도 시간이 되면 두 책을 같이 읽어봐야겠어요, 지금은 안 읽어봐서
서로 연관되는 점이 떠올리지 않는데,, 님이 하고 있는 독서와 관련된
글이 나오겠군요. 기대가 됩니다 ^^

마녀고양이 2011-06-0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너무 잘 받았어요.
예상치 못 한 쿠키 선물에 너무너무 기뻤구요.
사진 찍어 올리려다, 결국 하루를 놓쳤어요.
진짜 길고 긴 리뷰를 쓰느라, 시루스님 페이퍼도 못 읽고 감사 댓글만 달아요.

좋은 날 되시구여, 내일 페이퍼 읽으러 다시 들릴게요~ 아줌마 뽀뽀 받아요, 쪽!

마녀고양이 2011-06-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감탄스럽고 부끄러워지는군요.
몇백년씩 계속 살아있는 책부터 읽어야 하는데,
요즘 소개하시는 책 중에 읽어본 책이 너무 적어요. 귀동냥이나 한 정도이고. ㅠㅠ

유토피아라, 오늘 날은 침침하고 머리가 아파요.
정말이지............. 훅 유토피아로 떠나고 싶군요. 시험 준비 열심히 하셔여~

cyrus 2011-06-01 16:43   좋아요 0 | URL
만족하셔서 다행입니다. <좁은 문>은 일주일 내에 마고님 집으로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저는 요즘 현실 사안과 관련된 책을 읽고 싶은데,, 읽는 시간도
부족하고 독서 여건도 마땅치가 않아서 너무 편식적으로 독서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고님도 열심히 준비 하셔서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

2011-06-01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2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6-0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토피아는 정말 제가 좋아하는 주제에요. 혹시나 유토피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가 박홍규 교수님의 번역으로 나와 있으니 참고 하셨으면 좋겠네요. ^^ 저도 재밌고 유익하게 읽은 책이에요.

cyrus 2011-06-02 23:40   좋아요 0 | URL
저두요, 토머스 모어 이외에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관련 책들이
많이 있죠. 루쉰님이 소개하신 책 읽어보겠습니다. ^^

starover 2011-06-09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토피아가 그런 곳이었군요. 결국 그 곳도 '사람'이 만드는 공간이니까요. 과연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을까요?
 
<사유의 악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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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Overture):  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사, 작곡 그리고 연주)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그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듣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듣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이해하는 것,
내 생각과 그대의 이해 사이에 이렇게 열 가지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의 의사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시도], <상상력 사전> 열린책들, p 5 -

 

 

 

  1악장: 로렌스 스턴 <신사 트리스트럼 샌디의 삶과 견해>   

     

 


로렌스 스턴 (1713~1768)
 

 

세계문학사상 가장 기이한 작품이라고 불리는 <신사 트리스트럼 샌디의 삷과 견해>(우리나라에서는 문지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에서 ' 트리스트럼 샌디 ' 라는 이름으로 국역되어 출간되었다)을 쓴 영국의 작가 로렌스 스턴.  영국의 평범한 신사였던 그는 이 유명한 소설을 집필했을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건강이 악화되어 몹시 고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턴은 소설의 첫 1권을 쓰기 시작한 1759년부터 1767년까지 총 8년동안 제9권까지 집필, 출판하였다.  이듬해 작가가 사망하게 되어 이 소설은 9권까지 마무리된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지만 후대의 문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트리스트럼 샌디> 못지 않게 기존의 소설 형식의 틀을 거부한 내용으로 독자들 사이에서는 난해함으로 가득찬 악명 높은 소설인 <율리시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백년 전에 이미 ' 의식의 흐름 ' 방식을 시도한 로렌스 스턴 덕분이다.  

스턴은 <트리스트럼 샌디> 출판 당시 영국의 수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윌리엄 피트 에게 진심어린 존경(?)이 담긴 헌정사를 썼는데 집필하는 동안 폐결핵이 선사한 신체적 고통을 웃음의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스턴의 낙천주의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이 헌정하는 작품에 대해 이처럼 절망을 느끼는 가엾은 헌정자도 없을 것이니, 그 까닭을 말씀드리자면 이 작품을 이 나라 한 귀퉁이 외딴 초가집에서, 병약한 육신과 질병과 그 외 인생의 해악을 웃음으로 이겨보려 애쓰며 저술했기 때문인데, 우리가 미소를 짓거나, - 더욱이 소리내어 웃을 때마다, 보잘것없는 삶의 단편에 무엇인가 더한다는 강한 신념 때문입니다.  

- <트리스트럼 샌디 1> [진심으로 존경하는 피트 경께] 로렌스 스턴, 문학과지성사, p 11 -

  

스턴은 서문격인 헌정사에서 영국의 수상 각하가자신이 쓴 소설을 읽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큰 영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소설의 평가에 대해서 은근히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 의식의 흐름 ' 기법을 사용하는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는 이 소설을 읽었겠지만 윌리엄 피트가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관심있게 읽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니, 안 읽었을 수도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 세계문학사상 가장 기이한 작품 ' 이라는 수식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벗어난 독특한 내용과 서술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탈선을 거듭할 정도라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파악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내용 도중에 또 다시 피트 경에게 보내는 작가의 서문이 나오는가 하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등 풍자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까지 사용하고 있어서 아무리 수많은 각주을 달고 있어도 소설의 형식을 거부한 이 소설을 국내 독자들이 읽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변주 : 평범한 대학생 cyrus의 일상과 <사유의 악보>에 대한 견해  

인간은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나 어떤 고통을 겪게 되었을 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피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트리스트럼 샌디> 단 한 편의 작품을 통해서 로렌스 스턴이 집필기간 동안 느꼈을 폐결핵의 고통을 말끔히 날릴 수 있었다.  <팡세>를 남긴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사상가인 블레즈 파스칼은 불의의 마차 사고를 겪게 되어 심하게 다치게 되었는데 한동안은 사고에 대한 후유증과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자신이 좋아하는 수학 연구, 훗날 자신의 수학적 업적 중의 하나가 된 사이클로이드(직선 위로 원을 굴렸을 때 원 위의 정점이 그리는 곡선) 연구를 통해서 후유증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의 일화 이외에도 인간에는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근심과 고통 혹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방법으로는 독서 또는 그냥 무심하게 잠드는 것이다.  그나마 독서는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안정제 역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 그리고 감정의 카타르시스을 느끼게 해주는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어서 왠만하면 독서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다.  

요즘에는 곧 다가올 시험에 대한 부담감에다가 상당한 분량의 내용을 요구하는 레포트 준비 때문에 이번 달은 거의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학교 가서 수업 받고 도서관에 가서 전공 책으로 공부하는, 이 반복적인 패턴의 일상이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복학할 때부터 예상했던 것이었지만 바쁜 학업 때문에 알라딘 블로그 활동도 뜸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읽어야 할 책은 많아지는 반면에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 전공책 네 다섯 권을 하루 종일 내내 보고 있으니 누런 황사가 내 마음 소을 덮인 것마냥 답답함이 느껴질 때도 많다.   그리고 이번 달에도 독서모임에 참석할 수 없어서(이번 달만해도 벌써 세 번째이다) 아쉬움을 억지로 삼켜내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하루 일상 중에서 편안함을 느껴보는 시간은 학교 갈 때 또는 집으로 돌아갈 때 타게 되는 버스 안에서이다.  버스를 타는 동안에는 책을 읽다거나 혹은 잠깐의 낮잠이라도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책 읽는다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버스 안에서 책 한 권 읽게 되면 30분 이상을 못 넘긴다.  그 이후로는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게 되며 바로 수면 모드로 들어가게 된다.   

어쩌면 버스 안에서 책 읽는 시간보다는 앉아서 잠 자는, 아니 꾸벅꾸벅 졸았는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요즘 버스 안에서 읽었던 책이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라면 . . .  

과연 이 책을 버스 안에서 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읽을 수 있는 독자가 있을 것인가,,, ?  

나는 지금까지 버스 안에서 네 번 정도 <사유의 악보>를 읽었는데 20분도 못 넘긴채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을 작정이다.  

이 책을 통해서 과연 인간의 사유라는 행위의 당위성에 대해서 한번쯤은 의문을 가져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 난해한 글 덕분에 그동안 나의 머리속에 맴돌고 있었던 ' 사유해야 한다 ' 라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들뢰즈가 무슨 말 하는지, 박상륭의 소설이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그것들은 중요하지가 않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불협화음의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지금까지 살면서 스트레스가 남기고 간 인생의 노곤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버스를 타면서 종착역에 도착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깊은 수면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요즘 든든한 수면제 역할(?)을 하고 있어서 참 좋다.      

만성 불면증에 시달렸던 카이저링크 백작을 위한 수면제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면 나의 수면제는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이다.  

 

   

 

 * * * * * * * * *  '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 사유의 악보  * * * * * * * * *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는 질 들뢰즈, 루이 알튀세르, 조르주 바타유 등과 선뜻 다가서고 싶은 엄두가 나지 않은 사상가들의 사유가 종합 선물 세트처럼 담아내고 있어서 읽기 힘든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서문 아니 서곡에서 '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 ' 이라고 자신의 글을 정의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 그의 독특한 사유 방식이 일반 독자들에게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을 뿐이다.  일정한 줄거리 형식이 없으며 밑도 끝도 없는 내용 전개로 이루어진 기형적인 소설인 <트리스트럼 샌디>를 처음 읽는 독자가 느끼게 되는 반응처럼 말이다. 

<트리스트럼 샌디>와 <율리시즈>를 만나게 되면 독자는 이 소설의 줄거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결말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소설 읽기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처럼 <사유의 악보>는 저자가 자신만의 사유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건지 또는 사유의 결과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문하는 방식을 요구하게 되는, 평소대로 인문학 도서를 읽는 것처럼 오목조목 따져 가면서 읽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읽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악보처럼 등장하고 있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가들의 광범위하게 축적된 사유의 결과물를 이해하면 불협화음의 악보를 한층 더 이해할 수 있으며 더욱이 들뢰즈나 바타유와 같은 난해한 사상들을 파편적으로나마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다면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질 거 같은 악보에 깊숙이 묻혀져 있는 아름다운 화음(?)의 소리를 찾는 의외의 성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곡에서 저자는 자신의 악보는 결코 음악이 아니며 단지 독자들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표기의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예 자신의 의도를 배반하고 마음껏 해석하기를 강력히 권하고 있다.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순전히 독자들의 선택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자신만의 독서, 즉 사유의 악보를 연주함으로써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사유 방식의 가능성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 

 

     

 

 

  2악장:  절대로 연주되어질 수 없는 것 :  

           칸딘스키와 존 스텀프의 악보 그리고 <사유의 악보>  

 

 


바실리 칸딘스키 <상호의 화음> 1942년   

  

러시아의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회화를 음악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표현의 사유 방식으로 시도하고 있다.   

 

첫째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순한 형태에 종속되는 단순한 구성으로, 나는 이를 선율적 구성이라 부른다.  둘째는 복합화된 구성으로서, 이는 ......  주요 형태에 여러 형태들이 종속된 구성이다.  ......  이 복합화된 구성을 나는 교향악적 구성이라 부른다. 

- 칸딘스키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중에서,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 p 39 재인용 -

 

그가 남긴 추상화는 교향악적이고도 역동적인 추상표현을 관철한 뒤 점차 기하학적 형태로 배열되는 것이 특징인데 칸딘스키는 자신이 그린 그림 아니 회화의 악보에서 음악의 선율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점, 선, 면 라는 회화의 세 가지 요소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자신의 그림에서 음악을 듣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칸딘스키의 친절한(?) 부연 설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각기 각색의 알록달록한 무수한 원형들 그리고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한 그의 그림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이 화가가 도대체 무엇을 그리고자 했는지 의문을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캔버스를 오랫동안 뚫어져라 쳐다봤자 결국에는 추상화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일반적인 그림처럼 형태와 색채로 이루어진 특정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의도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추상화를 통해서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형태 배열이 만들어낸 선율적 구성의 아름다움을 예술화하여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것도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눈으로!  

칸딘스키가 회화를 음악에 접근했다면, 최정우는 사유의 텍스트를 음악에 접근하고 있다.

이론, 예술, 철학 등 다양한 사유의 형태들이 조합하여 만들어낸 ' 사유의 악보 ' 역시 칸딘스키의 그림처럼 사유를 하나의 ' 음악 ' 으로 둔갑한 ' 예술화 ' 한 하나의 형태다.  비록 저자는 독자들에게 기형적인 형태 배열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서 일말의 참고사항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독자들은 사유의 텍스트를 장난감 블록을 조립하듯이 접붙임과 해체를 반복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사유의 텍스트에서의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

 


 

존 스텀프 <요정의 아리아와 죽음의 왈츠> 악보 일부

 

그리고 운이 좋으면(책을 읽게 된 독자가 저자가 말하고 있는 ' 소수의 독자 ' 중의 한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기형적인 텍스트에 매료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나온 <사유의 악보> 표지 이미지는 존 스텀프의 <요정의 아리아와 죽음의 왈츠> 악보 중 일부에서 따온 것이다.  국내에서는 ' 죽음의 왈츠 ' 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무시무시한 이름 덕분에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이 곡을 연주를 하게 되면 죽게 된다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괴담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곡은 작곡가 존 스텀프가 친구들과 자신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만든 것일뿐 악마가 만든 음악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존 스텀프의 <죽음의 왈츠>는 단순히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연주되는 왈츠풍의 ' 음악 ' 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악보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텀프가 만든 악보는 절대로 연주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기괴한 악보를 만들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존 스텀프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음표로 이루어진 악보 자체를 ' 형태 ' 의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새로운 구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 형태 ' 의 악보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스텀프의 친구들은 기존의 상식의 틀을 거부함에서 나오는 독특한 재미를 느꼈겠지만 반대로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악마가 만든 저주 받은 음악의 악보라고 생각하면서 벌벌 떨어야만 했다. 

이렇듯, 어떻게 접근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악보의 형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탄생물들이 나오는 것이다.  <사유의 악보> 역시 읽는 독자들마다 각기 다른 해석들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3악장: 또 다시 <사유의 악보>에 대한 견해   

 

시대는 폭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획득해가고 있는 것은 불충분한 폭발뿐이다. 혁명은 계획 단계에서 제거되거나, 아니며 너무 일찍 성공한다.  격정은 순식간에 고갈되어 버린다.  

- 헨리 밀러 <북회귀선> 문학세계사, p 22 -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서 독자들은 사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지게 된다.  사유하는 행위는 단순히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이성적이면서도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우리 스스로 현상에 대한 질문을 구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는 능동적인 방식인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식의 명제는 참된 진리로 이루어져있을지 몰라도, 그 명제들로 이루어진 지식 체계 전체는 무의미한 내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버트런트 러셀은 오직 ' 참 ' (True)으로 이루어진 확실성의 세계의 토대를 찾기 위해서 시도를 했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갔지 않은가.  다만 러셀은 복잡해져가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사고(思考)할 것을 권하였다.  여기서 사고는 결국에는 사유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기에 어느 대상과 현상 또는 그러한 것들의 측면을 지각(知覺)의 작용에 직접 의존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사유의 악보>, 이 책이야말로 그전까지 절대불변의 진리만 찾아 헤매던 기존의 사유 방식에서 탈피하여 ' 혁명 ' 처럼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능동적인 사유 방식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있다.  좀 과한 비유일수도 있지만 이 책의 등장은  ' 사유의 혁명 ' 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저자가 겨냥하고 있는 독자들은 ' 소수 ' 로 한정되어 있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은 항상 소수의 힘에 의해서 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헨리 밀러의 말처럼 새로운 시대를 찾기 위한 혁명에 대한 격한 갈망과 요구 그리고 열정은 너무 뜨겁다보면 한순간에 식어버릴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단순히 ' 알라디너 ' 가 쓴 책이라는 단순한 호기심적 관심이 아닌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책으로 읽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이 한 권의 책이 전염병처럼 창궐하기를 소망하듯이 이 책이 그동안 위기론으로 암울하기만했던 우리나라 인문학의 판도를 확 뒤집어질 수 있는 진짜 제대로 된 사유의 ' 혁명 ' 이 되기를 소망한다.

   

  

 

  종곡(finale):  트리스트럼 샌디 Ver. 의 헌정사   

 

 람혼님. 

 " 주제, 내용, 형식의 3대 요소가 좀 특이하긴 하지만, 저는 이것을 감히 서평이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니 람혼님의 발 앞에, 정중함과 겸손함으로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간청드리는 바이며. -  당신께서 여가가 있으실 때.  -  람혼님, 기회가 있다면, 또한, 선의를 위해 - 이대로 받아주시기를 소원하는 바입니다.   

 

신간도서평가 활동을 통해서  

람혼님의 음악을 공짜로(?) 듣게 되는 영광을 누리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독자, 

cyrus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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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4-1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리뷰라니요.... 전 책을 아직 받지 못했는데 이 어인 일일까요?..ㅡ.ㅡ
전체적으로 읽기에 만만한 책은 아닌가보네요..
아 근데 리뷰는 근사해요..^^

cyrus 2011-04-11 15:4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아직 안 받았어요. 지난주에 운 좋게도 도서관에
이 책을 발견해서 읽고 있었던거 뿐이랍니다. ^^;;
책이 언제 올까요? ㅎㅎ

책 구성이 하나의 음악처럼 여러 개의 악장과 몇 곡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내용도 들뢰즈, 에드워드 사이드, 바타유,
박상륭, 탈근대성 등 다양한 주제가 정말 기형적이라고 할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

맥거핀 2011-04-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가 스스로 택스트를 해체, 재조립하고 보아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에 참 어울리는 리뷰네요.^^ 그 사유의 악보를 보고, 어떤 음악을 스스로 만들어내는지는 읽는이에게 달려있겠지요. 좋은 음악 잘 들었습니다. (근데, 저도 책은 못 받았음..짤린거임?-_-)

cyrus 2011-04-11 15:56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이 책 못 받았어요. 위의 꽃도둑님 답글에서도
밝혔지만 도서관에 대출해서 읽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요즘 시험 공부 기간이라서 책 읽고 서평 쓸
시간이 없어서 다른 평가단원분들보다 먼저 얼른 읽고 서평 올리게
되었네요.. ^^;;

책의 서문(서곡)에서 저자는 자신의 텍스트를 자유롭게 해석하고 사유할 것을
권하고 있더라구요. 물론 저도 아직 이 책의 80% 정도는 이해를
못했지만 계속 읽다보니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하는 나름의 성과도 있었구요. 특히 ' 나르시스트를 구별하기 위한 자기진단법 ' 이라는
내용을 강추합니다. 자서전 읽기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사유 방식이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

굿바이 2011-04-1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이런 독특하고 훌륭한 리뷰를 이리 빨리 올리시다니요^^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이라는 표현은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거나, 절대로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라고 읽히기도 하네요. 아직 책을 읽지 않아서 그저 넘겨짚었지만 말이죠.

재미있고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1-04-13 00:22   좋아요 0 | URL
얼른 책이 와야할텐데 말이죠,, 직접 읽어보시면 또 다른 사유의 방식을
찾으실 수 있을거에요. 하지만 내용이 쉽지 않으니 읽기 전에 마음
단단히 먹어야합니다. ^^;;

양철나무꾼 2011-04-12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하면 한니발이 생각난다는~
저도 이 책 끼고 앉았는데 말이죠, 끼고만 앉았어요.
이 책 갈피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는데, 님의 리뷰를 보니 길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칸딘스키...제법 잘 어울리는걸요~^^



cyrus 2011-04-13 00:24   좋아요 0 | URL
한니발이라면 살인마 나오는 영화를 말하는거죠?
제가 이 유명한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요,, ^^;;
무리해서 읽아나가기보다는 생각나는대로 관심 있는 부분부터
읽어나가는 것이 좋을거 같습니다 ^^

starover 2011-04-12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직접 작사한 노래가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cyrus 2011-04-13 00:26   좋아요 0 | URL
아,, 일부러 작사 작곡 연주라고 적은거였는데,, 이프리트님에게
오해를 주고 말았네요.

<사유의 악보> 제목 속에 있는 ' 악보 ' 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책 내용 속 비평문들의 부제가 한 장의 악보처럼 '~ 악장 ' , ' 변주 ' 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쓴 서평도 일부러 책의 구성방식을
패러디한거랍니다. 그래서 일부러 베르나르 베르베르 인용문을
작사, 작곡, 연주라고 적은겁니다. 사실 저 인용문은
이번에 나온 <상상력 사전> 첫 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죠. ^^

starover 2011-04-22 19:5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rainmaker_1201 2011-04-1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아마 이렇게 정성스러운, 그리고 일종의 '수면독서(!)'에 기반한 리뷰는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약간 (먼저) 읽고 있는데, 어쩌면 최정우씨는 인문학이라는 시대의 코드 대신 그 자리에 '사유'라는 들뢰즈적 의미를 도입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ㅎ

cyrus 2011-04-15 00:3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yjk7228님^^

이 책,, 사실 읽기에 좀 어려운 면이 있었지만 님이 언급하신
들뢰즈적 의미의 사유라는 의미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으면
읽어볼만한 인문학 책인거 같습니다. ^^

람혼 2011-04-1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소중한 서평은 저자인 저에게 너무나 과분한 음악, 또 다른 축복의 악보가 아닐까 합니다. 소중하고 세심하게 잘 읽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cyrus님! ^^ 분석적인 서평이라기보다는 저의 악보를 변주하신 또 다른 악보 같이 느껴져서 말 그대로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cyrus 2011-04-20 08:0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람혼님, 요즘 시험기간이라 바빠서 답변이 늦었네요 ^^;;
저야말로 람호님의 악보 덕분에 의미 있는 독서를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람혼님의 다음 글도 기대가 됩니다. ^^

람혼 2011-05-03 16:46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다음 책도 결연한 의지로 치열하게 써보겠습니다. 함께 파이팅! ^^

루쉰P 2011-04-17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독자에게 강력하게 마음껏 사유할 것을 권유하는 철학책이라고 하니 마음에 와 닿네요. 게다가 버스에서 불철주야 독서에 매진하며 수면제 역할을 하는 이 책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시는 것도 마음에 팍팍 와 닿네요.

독서나 잠드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신다니 저와 비슷하신 듯, 파스칼처럼 고통을 공부나 연구로 이겨내기에는 연약한 갈대와 같은 인간이라서 힘들고, 저도 독서를 통한 광기 어린 스트레스를 풀고 있죠. 푸훗.

암튼 좋은 리뷰 덕분에 많이 느끼고 가요. 시험 잘 보내세요. 학교의 용자가 되세요!

cyrus 2011-04-20 08:05   좋아요 0 | URL
시험이 끝나면 잠 제대로 푹 잤으면 좋겠네요, 밤 새면서 책은 읽을
수 있는데 공부만큼은 정말 밤 새가면서 하는게 힘드네요 ^^:;

아이리시스 2011-04-19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잘 지내신 거예요? 아직 중간고사 전이죠? 이건 너무 어려워서 읽기가 힘들어요. 책이 어려워 보이니까 리뷰도 어려워 보여서 겁먹었어요. 위에 람혼님이 저자이신 거구나. 저도 트리스트럼 샌디는 대학 때부터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퍼낸 출판사가 여전히 대산 뿐인 거예요? 역시 시루스님 부지런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아요. 봄날 맘껏 즐기시고 중간고사도 완전 화이팅!^^

cyrus 2011-04-20 08:09   좋아요 0 | URL
이번주부터 시험기간이에요, 지금까지 시험친게 고작 한 과목뿐이에요,,-_-;;
아이리시스님도 잘 지내고 계시는거죠? ^^ 저도 처음에는 읽기 전부터
두려움을 가졌었는데 편안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 읽어보시면 어렵지
않아요,, ^^;;

아이리시스님 댓글 보고나니 힘이 마구마구 솟네요, 남은 시험기간동안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1-04-26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밤을 같이 지새던 동지로서, 오랜만이라 안부 인사 차 들렸어요~
시험 완전 대박 나세요~^^

cyrus 2011-04-28 14:44   좋아요 0 | URL
이틀전에 시험이 끝났어요. 열심히 한만큼 시험이 잘 쳤어요,, 아직
중간시험 성적도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ㅎㅎ;;
 
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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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자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 배운다.  

- 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중에서 -  

  

 

    

  니체, 생애 마지막 10년  

한 중년의 남자가 마부로부터 가혹하게 채찍을 맞는 말을 끌어안고 광장 한가운데서 오열하고 있었다. 마부의 눈초리도, 웅성거리는 군중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친구들에 의해 정신병 요양소로 옮겨진다.  

정신병 요양소로 가게 된 그 중년 남자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 신은 죽었다 " 고 외친 남자는 이렇게 속세로부터 멀어져 갔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통해서 신에 의지했던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주인공, 즉 ' 위버멘쉬 ' (Uebermensch)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 위버멘쉬 ' 는 가치의 창조자로서 풍부하고 강력한 생(生)을 실현할 수 있는 ' 힘에의 의지 ' 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가 살았던 19세기에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살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 신 ' 이라는 하나의 관념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시도를 해내게 된다.  니체에게서 신의 존재 부정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의지를 앗아가버린 모든 억압과 우상도 부정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 같은 선언은 인간의 개별적 주체성을 근간으로 한 20세기 실존철학의 전범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니체는 생애 마지막 10년은 자신을 둘러싼 두려움과 허무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했다.  평생을 질병에 시달렸고, 정신분열증에 걸려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았다.  10대 때부터 지독한 편두통을 호소했으며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던 3, 40대에는 극심한 조울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고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이나 과학에 의존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지식의 토대를 파고든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때로 정신적인 부작용에 시달리곤 하였다.    

 

 

 

  러셀은 왜 미쳐버렸는가?  

현대 수학의 금자탑이라고 불리고 있는 <수학원리>를 집필한 논리학자 버트런드 러셀 역시 정신분열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치열했던 지적 여정을 만화로 소개하고 있는 <로지코믹스>의 서론에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 왜 유독 논리학자는 정신병에 잘 걸릴까? ” 

앞에서 언급한 니체를 ' 논리학자 ' 로 규정되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 논리학 ' 이라는 학문 자체를 '철학 ' 과 비교해서 따져놓고 본다면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이 진리인 것 같은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의 경로나 그 형태를 이성적으로 연구한다는 점은 철학과 논리학은 서로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논리학은 애초부터 철학에서 떨어져나온 한 핏줄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로부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논리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의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으며 그 후로 뛰어난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적 인식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논리학 대신 모두 제각기의 입장에서 특징있는 인식론적 논리학을 설정하였다.  

어쨌든 논리학자들이 보여주는 광기에 대한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줄 아는 논리학자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 논리학자 ' 에 대한 인식과 정반대라서 흥미롭다.     

특히 ' 러셀 ' 이라고 하면 대중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손꼽히고 있다.  <수학 원리>를 31살에 쓴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며 평생에 걸쳐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1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등을 반대한 반전 평화운동가이자 사회학자였다.  그런 그가 정신분열증의 고통에 남몰래 시달려야만 했던 것일까?    

 

   

 

  ' 확실성 ' 이라는 이상과 모순된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러셀은 논리학을 통해 완전무결한 수학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처음에는 수학을 통해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 했던 러셀의 지적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따분한 계산에만 열중하는 수학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그 당시의 수학에 만족하지 못한 러셀은 본격적으로 철학에 열중하게 되고, 자신은 수학자가 아닌 논리학자라는 자각을 갖게 된다. 

러셀에게 논리학자라는 자각을 심어준 결정적인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라이프니츠였다.    

 

유클리드와의 첫 만남은 내 안에 씨가 뿌려진 것과 같았고 ,,,  라이프니츠의 꿈에 대해서 듣는 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았다.  

- <로지코믹스> p 100 -

 

어린시절 러셀은 세상의 확실성을 부여하고 증명해줄 수 있는 학문을 유클리드의 기하학이라고 반견하게 되지만 점차적으로 수학의 확실성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되면서부터 라이프니츠의 논리학에 심취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러셀보다 수백년 전부터 이미 철학에 확고한 토대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서 탐구하였다.    

러셀에게 라이프니츠의 만남은 유년시절의 유클리드의 만남 못지 않게 자신의 지적 영역을 한층 더 확장될 수 있었던 전환점이 되었다.  젊은 니체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게 되면서 ' 생(生)의 의지 ' 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부여되는,  예전부터 확신하고 지배하고 있었던 가치와 신념을 자신 스스로 타파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러셀은 수학을 연구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 곤경 ' 을 처하게 되는데 마음 속 깊이 품은 목표, 즉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예전부터 확고히 서 있는 토대의 기본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적의 여정 속에는  ' 정신적인 ' 위험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러셀이 활동하던 당시 ' 무한 ' 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수학자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셀은 수학에서 위치하고 있는 무한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지만 무한이라는 개념 역시 수학의 허약한 내면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 관념 ' 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로지코믹스> p 143 

러셀의 꿈 속에서 ' 수학의 왕 ' 가우스가 나타나  

무한의 수학적인 토대를 무너뜨렸다고 꾸짖고 있다.
 

 

 


 

<로지코믹스> p 144,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은 오랫동안 확고히 세워져 있었던 하나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가 러셀의 꿈 속에 나타나는 장면은 관념적인 존재를 부정하려는 러셀이 겪게 되는 내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상의 믿음, 가치 등이 한순간에 변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예측불가능한 변화의 시류 속에 자신이 직접 동참하고 주도하는 것 역시 쉽지가 않은 일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이 학계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기까지 이 두 사람은 생전에 종교적인 핍박에 시달려야 했으며 니체 역시 신을 부정한다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종교로부터 배척과 오해를 받아야만 했다.  러셀 역시 당시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학문적 신념의 틀을 깨부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 스스로도 그런 시도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하고 있던 ' 정신적인 '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나서야 화이트헤드와의 기나긴 공동 연구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는 <수학원리>를 완성하게 된다.  러셀은 평생 바치게 될 학문적 시도의 본격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일생 동안 천착해 온 무결점의 수학 원리는 끝내 도출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확실성의 진리에 이르는 왕도는 없다

학문의 가장 완벽한 기초, 토대를 찾기 위해서 수년동안에 걸쳐 오로지 수와 식, 기호로 가득찬 공식을 집착했던 러셀의 입장에서는 확실성의 토대에 대한 불확실성이라는 미제의 결론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여겼을 것이다.  영원하며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이루어진 진리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러셀에게 오랜 논리학 연구를 통해서 남게 된 것은 정신적인 후유증, 그것이 바로 ' 확실하게 증명하고자 했던 ' 완벽한 실체에 대한 증명이 도출되지 못함에 대한 허무와 회의감뿐이었다.  그런 정신적인 공허감과 회의감 때문에 논리학자들은 정신분열증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러셀뿐만 아니라 확실한 토대의 논리를 추구하기 위해 시도했던 수학자, 논리학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프레게칸토어는 미쳐버렸고, 괴델은 우울증에 걸렸다. 그리고 러셀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이들 논리학자들의 광기를 향해서 손가락질할 이유가 없으며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남게 된 논리학의 토대에 대해서 쓸모 없는 연구에 불과한 실패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우리는 논리학자들의 말 못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다나오스의 딸들> 1904년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다나오스의 딸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혼 첫날밤에 남편의 목을 베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서 지옥에서   

구멍 뚫린 물통에다 물을 부어 채워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논리학자들의 고통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다나오스의 딸들처럼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다.  ' 토대를 이루는 체계에 토대가 없는 ' 아이러니한 상황을 견디면서 혹은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 스스로 논리학의 광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자처하였다. 

러셀은 ' 인간사에서의 논리의 역할 ' 이라는 강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강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진리에 이르는 왕도는 없다. "  

그리고 논리학에 완벽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오늘날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한 세상에서도 완벽한 확실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국에는 확실성의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수많은 현실의 딜레마에 마주하게 되는 우리 인간들이 요구되어지는 것은 최소한 두 세번,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사에서 논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기도 하다.

이성적으로 여러번 판단하고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의 행동은 수많은 고민 끝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 행동하는 자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 라고 말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의 격언처럼 우리는 사유를 통한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을 이해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창조적인 생의 의지이다.  

러셀과 수많은 논리학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과 비교하면 우리가 그동안 고수하고 있었던 삶의 가치와 신념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느끼게 되는 고통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결국 러셀은 확실성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토대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 행동 ' 했으며 이를 위해서 ' 광기 ' 라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려면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하고,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펭귄클래식코리아, p 159 -  


러셀이 추구했던 논리학의 토대 구축은 확실성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무모하면서도 감히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지성사에서 영원히 남게 될 도전이었다.  어떻게 보면 러셀이야말로 니체가 수백년 안에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 ' 위버멘쉬 ' , 자기 손으로 자기가 믿고 있던 가치를 스스로 극복할 줄 아는 초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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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4-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마녀고양이님 밑 댓글을 보고 한 번 들어와 봤는데 너무 재밌게 읽고 가네요. 니체도 그렇고 미쳐버린 사람들에게 유독 관심이 많은데 인간의 사유 끝에 결국 해결하지 못해 그런 광기 속으로 간다는 사실이 참 납득이 가네요. 독서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확실성이란 것을 찾기 위해 필연적으로 광기로 간다는 말은 참 무섭네요. 자주 자주 들려서 많이 읽고 배우고 가겠습니다. 너무 감사해요. ^^

cyrus 2011-04-05 07: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루쉰님 ^^

노이에자이트님 서재에서 종종 보곤 했었는데 저야말로 아직 많이
배울게 많답니다. ^^;; 저도 님 서재 자주 들리겠습니다.

루쉰P 2011-04-05 13:00   좋아요 0 | URL
하하^^ 너무 겸손하시네요. 전 이렇게 꽉꽉 차 있는 리뷰를 너무나 좋아해요. 정말 생각하시며 리뷰를 쓰신다고 느껴요. 아! 전 언제쯤 그렇게 책과 나를 몰아일체로 만들 수 있을 지 고민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4-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역시나 생각거리가 많은 좋은 리뷰네요.
제가 한때 "세상에 정답이다, 누군가 이것은 정답이니 이 길로 가야한다'고 납득할만한 진리를 알려주면 좋겠다고 소원한 적이 있었어요. 정말 절실했죠. 아마 러셀이나 니체 모두 그런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우리는 다들 생의 의미를 찾는 방랑자가 아닐까요?

로지테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 역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자살하고 말아요. 나치 수용소에서 힘들게 살아남고서 말이예요. 저는 요즘 들어 실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답니다.

cyrus 2011-04-05 07:54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라는 소설가 역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는데 끝내
자살했다죠,, 예전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실존에 대한 고민,, 쉽지 않은거 같아요. ^^;;

루쉰P 2011-04-05 12:59   좋아요 0 | URL
빅터 프랭클도 자살했군요. 프리모 레비의 경우 다 늙어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을 했는데 그 끔직한 상황을 이겨내고 죽은 것은 서경식 교수의 책을 읽은 저로서는 수용소보다 더 끔직한 것이 현실의 사람들 이었다는 점인 것 같은데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암튼 실존의 고민은 저도 쉽지가 않습니다.

blanca 2011-04-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지코믹스가 만화였던 거예요! 어마나. 그리고 저 러셀이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것도 몰랐네요. 너무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군요. 니체는 참 개인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cyrus 2011-04-06 09:18   좋아요 0 | URL
러셀의 사상과 무한론에 대한 소개의 내용은 좀 어려웠지만 그래도
만화라서 철학적인 내용을 소개한 도서치고는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좀 약간 과장한 감도 있었지만 정신분열증이라기보다는
정신이 불안정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

2011-04-07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8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undcake 2021-11-2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터 프랭클 자살하지 않았습니다.휴

poundcake 2021-11-24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로지테라피도 아니고 로고테라피입니다. 혹시나 제가 다른 사람을 말하고 있다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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