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나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포크송으로 편곡된 얼굴의 노랫말이다. 얼굴은 추억 저편에 간직해뒀던 과거의 기억을 톡톡 건드리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 아스라이 마음에 그리운 이의 얼굴이 스친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노랫말이 그림 그리기의 시작점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그 점에서 모든 사람은 타고 날 때부터 잠재적 화가이다. 붓과 물감이 없어도 우린 마음이라는 캔버스에 추억을 그린다. 따라서 나는 그림은 눈으로 보면서 감지하는 외적 형상보다는 슬픔이나 고통, 그리움과 같은 내적 정서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 김형구 르동(서문당, 2004)

* 오광수, 박서보 감수 르동(재원, 2004)

* 질 장티 외 상징주의와 아르누보(창해, 2002)

* 모리스 세륄라즈 인상주의(열화당, 2000)

* 이연식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이봄, 2013)

    

 

 

실제로 상징주의 미술(symbolism art)을 전개한 화가들은 눈은 마음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생각했다. 상징주의 미술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충실히 표현하기보다 생각, , 무의식 등의 소재를 이용해 관념과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미술 사조다. 프랑스의 비평가 조르주 알베르 오리에(Georges-Albert Aurier)는 처음으로 상징주의 미술의 시작을 선포한 인물이다. 그는 그림은 관념적이고 주관적이어야 하며 초월적인 감수성이 없는 화가는 학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상징주의 화가가 바로 오딜론 르동(Odilon Redon)이다. 르동의 그림은 몽환적이다.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르동은 내면적 생활의 권리를 실천한다.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현실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르동은 자신의 일기 A soi-même에서 내면세계를 가시적인 현실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썼다.

 

 

예술가는 삶의 두 가지 세계, 즉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두 세계를 분리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들의 예술은 보다 감소되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고상함과 탁월함은 사라지게 된다.”[1]

     

 

르동은 외면적 현실 묘사에 치중하는 인상주의 미술을 사고(思考)와 영감(靈感)’을 떼어내는 미술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즐겨 그린 그림 소재는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미생물, 잘린 목, 괴물, 신화 등이다. 이들은 불가사의하고, 현실에서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는 괴기스러운 소재에 접근하는 자신의 방식을 불가능한 존재에 인간적인 형식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일[2]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르동이 묘사한 괴물은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렇다 보니 르동을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상상의 세계에만 탐닉한 화가로 평가받기 마련인데 그의 회화적 기량마저 비판 대상이 된다. 그러나 르동이 추구하는 환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르동은 동시대 화가들과 다른 개성적인 화풍을 유지했다. 르동은 눈으로 보는 현실을 보지 못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너머의 세계(상상의 세계)’를 정확히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가진 장님이다.

 

르동은 어린 시절부터 고독을 맛보면서 성장했다. 그는 보르도(Bordeaux)에 있는 지방인 페일르버드(Peyrelebade)에서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외삼촌이 운영하는 농장은 어린 르동에 회화적 영양분을 제공한 토양이었다. 르동은 풀과 나무만 있는 농장을 캔버스 삼아 상상의 세계를 그려나갔다. 그래서 그는 눈으로 보는 즐거움보다는 마음으로 보는 즐거움, 즉 상상력이 깃든 아름다움에 일찍 눈을 뜨게 된다. 르동 친척이 페일르버드의 농장을 매각했을 때 르동은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에게 페일르버드 농장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소중한 곳이고, 외롭고 말 없는 자신을 화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준 제2의 고향이었다. 르동은 일기에서 농장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나는 지난 날 그렸던 저 슬퍼 보이는 내 예술의 근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있으면 나 자신밖에 없다는 고독한 유배지이며 수도원이나 다를 바 없었던 페일르버드의 대지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막막하고 황폐했던지…‥ 내가 그곳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은 아예 박탈당하고 없었던 그곳에서는 정신력과 상상력이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3]

    

 

 

           

          

 

 

 

             

 

 

 

 

르동은 초기에 렘브란트(Rembrandt)고야(Goya)의 영향을 받아 목탄화와 석판화를 제작했다. 그는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매력을 끌어내는 애매모호한 어둠의 세계[4]를 묘사했다.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르동은 유화와 파스텔(Pastel)화에 전념하여 부드러우면서도 환상적인 풍경, , 사색에 빠진 인물 등을 그렸다.

 

 

 

 

              

 

 

     

 

특히 감은 눈은 어딘지 모르게 영적이고 숭고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담백하다. 이 사람은 눈을 감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깊은 마음속 보이지 않는 관념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건 르동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이 그림은 르동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 모리스 세륄라즈 인상주의1991년 구판, 170

 

[2]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상징주의 미술(열화당, 1987), 83

 

[3] 오광수, 박서보 감수르동, 재원, 10

 

[4]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상징주의 미술(열화당, 1987), 78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7-09-2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김건모가 리메이크한<얼굴>이란 노래가 떠오르네요^^

˝누구의 얼굴인지 나는 모르겠어.
술취한 내손이 누구를 그려놓은건지.
새하얀 종이위에 흔들리듯 그려진
낯익은 소녀의 얼굴~˝

cyrus 2017-09-21 16:57   좋아요 1 | URL
제 글을 보는 분들은 눈치 챘을 겁니다. 지난 주 일요일 <서프라이즈>에서 가곡 ‘얼굴’의 탄생 비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저 그 방송을 보고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얼굴 노래’로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왔던 검색 결과가 김건모의 ‘얼굴’이었습니다.. ^^;;

임모르텔 2017-10-14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 , 어릴적 엄마가 늘 불러주셔서 오래도록 남는 노래인데 잊었다가, ..그리움이 밀려오네요. 그러다가 르동의 그림보고 반했어요! 블러그보는내내 무기력한 일상의미로에서 반딧불이를 따라가는 느낌입니다..ㅎ

cyrus 2017-10-14 16:10   좋아요 0 | URL
<서프라이즈>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이 만들어진 사연이 소개됐어요. 그 방송 덕분에 노래 제목을 알게 됐어요. 아주 오래 전에 라디오에 흘러나온 ‘얼굴’을 한 번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목을 몰라서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는 노래가 될 뻔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