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구분하고 정신만을 강조했던 이성 중심의 근대적 도그마(dogma)에서 벗어나려는 취지에서 생겨났다. 사람의 몸이 행위예술로 불리는 퍼포먼스(performance)의 표현물로 자주 등장하게 된 배경도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에 있다. 오늘날의 대량소비문화는 인간의 이성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만 확실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자아도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여성의 신체가 퍼포먼스의 단골 메뉴가 되는 것도 그런 현상과 무관치 않다. 여성이 더 이상 소외되고, 착취되고, 지배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페미니즘 담론까지 퍼포먼스에 내포되어 있다.

 

 

 

 

 

 

 

 

 

 

 

 

 

 

 

 

 

 

 

 

 

 

 

 

 

 

 

 

* 진동선 《현대사진가론》(태학원, 1998)

* 강태희 《현대미술의 또다른 지평》(시공사, 2000)

* 소피아 포카 《포스트페미니즘》(김영사, 2001)

* 정윤희 《젠더 몸 미술》(알렙, 2014)

 

 

신디 셔먼(Cindy Sherman)은 일찍이 여성의 신체에 주목한 사진작가이다. 특히 여성의 정체성을 욕망과 쾌락, 사랑과 고통, 소외와 고립 등의 측면에 집중 조명해 왔다. 이 같은 작업으로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 속에서 여성이 처한 억압 상황을 표출하는 것이 그녀의 관심사였다. 셔먼은 원래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그녀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사진을 이용한 퍼포먼스에 관심이 많았다.

 

셔먼은 1970년대 중반 이후 30여 년간 사진을 발표했다. 이 작가의 모델은 늘 작가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을 옛 명화 속 모델이나 영화배우 또는 주부처럼 정교하게 분장하고 치장해 촬영, 배우 겸 연출자처럼 여성을 재현한 500여 점의 사진을 발표해왔다. 사진의 작품명은 ‘무제(Untitled)’ 혹은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이며 각각의 작품에 일련번호가 있다. 『무제 필름 스틸』 연작은 작가 자신이 직접 영화 속의 배우처럼 자세를 취한 것이다. 셔먼은 할리우드나 산업 광고에 의해 묘사된 여성의 정체성을 차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과정에서 정형화된 성 역할과 성적 이미지의 사회화에 미디어의 영향이 어떤지를 탐구하고 있다.

 

 

 

『무제 필름 스틸 #21』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금발머리 여배우로 직접 분장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작품이다. 이 작품 뒷면에 ‘City Girl’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무제 필름 스틸 #21』을 1분 동안 가만히 주시하면 케이트 잠브레노(Kate Zambrano)의 소설에 등장하는 ‘Green Girl’의 얼굴이 떠오른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 출구》(동문선, 2004)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의 저자 록산 게이(Roxane Gay)는 여성성을 연기하는 여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케이트 잠브레노의 소설 《Green Girl》(국내 미번역)을 언급한다. ‘Green Girl’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햄릿》의 대사에 나오는 단어인데, ‘어리고 순수한 여자’를 뜻한다. 잠브레노의 《Green Girl》은 사회 속에 억압받는 여성이 연기하는 수동적 여성성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기차 안에서도, 패션쇼에서도 그들은 의식한다. 남자들은 언제나 여자들을 쳐다본다. 언제나 그 끈적한 눈길로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다. 쇼핑은 하지만 물건은 사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생활은 어렵다. 가끔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잠브레노의 《Green Girl》 중에서,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191쪽)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남성중심 문화가 만든 규범 아래서 행동을 반복하면서 젠더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즉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된 존재가 여성의 정체성을 수행(performance)하고 있다.

 

 

 

 

 

 

여성적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할수록 전통적 여성성이 강화된다. 그러면 자신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기보다는 주위 시선으로 ‘나’를 평가한다. 대대적인 억압의 시선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는 억압당한다. 남성 중심적 사회가 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따라가려는 노력은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 위한 고통스러운 수행이다. 엘렌 식수(Helene Cixous)는 여성 직접 여성성을 텍스트 안에 집어넣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eminine)’를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제 필름 스틸』 연작은 셔먼 자신을 사진 안에 집어넣은 작품이다. 그 속에는 셔먼은 ‘여성’이라는 불안정한 정체성을 연기하는 개인을 연기한다. 여성성을 연기하는 개인을 통해 왜곡된 여성상 이면에 가려진 정신의 그늘과 신체의 피곤까지 담아내며 과연 여성의 실제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억압되어 왔던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셔먼의 사진 작업은 아름답고 용감한 일이다. 그녀의 『역사 인물화』 연작은 여성 신체를 신비화하며 재현하는 남성 중심의 예술에 반기를 든 작품이다. 『무제 #230』은 어디선가 본 듯 친숙한 여성의 누드이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Raphael)의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를 패러디(parody)했다. 패러디는 원작을 똑같이 모방하는 수준에 그쳐선 안 된다. 그 원작에 드러나지 않았거나 은폐된 문제점을 폭로해야 한다. 라파엘로의 그림 속 여성의 왼팔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이름이 새겨진 팔찌가 채워져 있다. 셔먼은 ‘제빵사의 딸’이자 ‘화가 라파엘로의 애인’으로만 알려진 ‘이름 없는’ 여성으로 분장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분장하지 않았다. 자세만 똑같이 흉내 낼 뿐 지극히 현실적인 피부와 신체를 가진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신체는 처진 가슴과 볼록해진 배를 가진 임산부의 신체에 가깝다. 그래서 관객은 그 사진에서 눈요깃거리에서 해방하여 거짓이나 왜곡 없는 ‘그저 벗고 있는 몸’으로 바라본다.

 

 

 

 

 

『무제 #250』은 남성 관객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 준 누드 사진을 전복한 작품이다. 셔먼은 과장된 신체 묘사를 통해 여성에게 향했던 남성 중심의 관음증적 시선에 저항한다. 늙은 모델은 에로틱하기보다는 도발적인 표정이다. 남성 관객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예술이라는 이름 뒤로 은폐된 남성의 성적 욕망을 콕 짚어낸다.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이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65쪽)

 

포르노(porno)는 여성의 신체를 박제하여 전시의 대상으로 만든 영상이다. 포르노 속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 이름도, 표현도 없는 오로지 노골적인 성애를 드러내도록 수행하는 박제된 대상이다. 셔먼은 오랫동안 여성의 몸에 입혀진 사회적 억압의 관습을 과감히 벗은 채 몸만이 아닌 ‘사람’을 찍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은 단순히 모방에 불과한 박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녀의 사진은 다시 살아 꿈틀거린다. 그녀의 작업이 과감할수록 사진을 보는 관객들은 사진 속 인물이 분장한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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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6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7-04-27 02:23   좋아요 1 | URL
그, 글케 생각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님의 깊은 마음에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