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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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책에 대해 물을 수 있을까

그걸 정말 내가 썼는지? [1]

 

- 파블로 네루다 -

 

 

 

인터넷의 바다에 떠도는 정보는 내 것이 되기 힘들지만, 내가 읽은 책에 있는 정보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2]가 된다. 꽁꽁 얼어버린 생각의 바다 한가운데 서서 책을 읽으며 도끼질을 해야 한다. 그 얼음을 깨고 나온 펄떡이는 글은 우리에게 삶의 자양분을 선사한다. 그런데 뚜렷한 목표 없이 섣부르게 도끼질을 해대면 허송세월할 수 있다.

 

 

 

 

 

 

생각의 바다를 깨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책 속에 나열된 얼어붙은 단어들을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 무조건 읽는다고 해서 종이에 얼어붙은 단어들이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서 흘러나온 냉기는 우리의 생각마저 얼어붙게 한다. 냉기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독자의 ‘입김’이 더욱 세져야 한다. 우리는 입김을 뿜으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잘 정리된 현자의 생각보다 단순한 질문이 진리에 한층 더 가까울 때가 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원론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해 김대식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통해 자신만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입김을 불어대면서 읽었던 책들을 소개한다. 저자의 입김에 사르르 녹아내린 종이 속 단어들은 더욱 유용하고 의미 있는 해박한 통찰력이 되어 살아 숨 쉰다. 그는 책 읽기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질문’을 강조한다.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중요한 말은 그가 읽은 배철현의 책 속에 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며,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 주는 안내자다.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 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다.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38쪽)

 

질문으로 진실한 자신을 발견하는 일. 이것이 독서의 근본적인 목적이다. 질문은 한 걸음 멈추어 서서 나를 바라보게 한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종이만 보며 뛰었던 삶의 열기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종이로 만든 공간에서 얽히고설킨 생각을 가다듬는다. 계속 행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며, 잘라내야 할 낡은 지식은 어떤 것인지 간추리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어쩌면 그만큼 버거운 짐도 없다. 태어나고, 공부하고, 그리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나 자신이라는 존재와의 전쟁은 계속된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살아가는 것, 존재하는 것, 호흡하는 일상적인 반복적 삶의 모습에서 나를 또다시 발견하는 질문은 우리 머리와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건 뇌과학자에게도 만만치 않은 질문이다. 인간의 문제는 수많은 문제와 얽히는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 책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에 자기 생각을 덧붙여 해답을 찾기보다는 본질적인 질문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를 종합해서 인생의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건 불가능한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질문하는 행위는 미래로 향하면서 통과해야 하는 분기점을 발견한 사람에게 중대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미래란 늘 장밋빛이거나 잿빛이다. 턱없는 낙관주의가 유토피아(Utopia)의 환상을 부풀린다면, 근거 없는 비관주의가 디스토피아(dystopia)의 절망을 퍼뜨린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 후손들의 ‘현재’가 될 ‘미래’는 낙관과 비관 사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리란 사실이다. 그 지점이 어디쯤 될 것인지를 질문으로 조망할 수 있다. 그러면 일방적인 낙관도, 편협한 비관을 뛰어넘는 균형 감각이 유지된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인간과 신의 결합을 뜻하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라는 책에서 인류의 미래를 제시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가 바로 생각의 분기점이다! 이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김대식은 갈 길 바쁜 독자들의 손을 잡으면서 질문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나보다 먼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읽은 당신이 정말 중요한 질문을 지나치고 책을 덮었다면 321쪽을 다시 펼쳐보길 바란다. 당신이 무심코 읽은 321쪽의 단어들은 아직 깨지지 않은 검은 얼음이다. 그 얼음을 깨뜨려야 아직 오지 않은, 낯선 미래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읽고, 거기에 인생의 지침을 찾는다는 건 낭패 보는 일이다. 남들이 다 발견한 것들을 눈으로 보기만 하는 독서는 ‘설거지’ 독서[3]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꽤 많은 책들을 독파한 저자의 능력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읽었던 책들이 생소하다고 해서 불평할 이유도 없다. 그가 읽었던 책들을 따라 읽으려고 한다면, ‘설거지’ 독서를 할 가능성이 있다. 누가 읽든 간에 우리 손에 쥐어진 책은 차가운 냉동 상태다. 평범한 독자들이 ‘설거지’ 독서를 피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얼려진 책이 녹을 수 있도록 ‘입김’으로 불어야 한다. 책이 완전히 녹으면 매끄럽고 날이 선 도끼로 변신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서늘한 사유가 된다.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읽고, 제대로 질문하는 일이다. 매번 다 읽고 나서 책을 덮기만 하던 나는 이제 정색을 하고 스스로 묻는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그걸 정말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 새로운 유행의 새로운 책을 찾아 두리번거릴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책 속에서 새로운 인식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 세상을 마감하는 날이 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신 앞에 설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책 읽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할 순 없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신의 질문이 무엇인지 아는가. “세상에 있을 때 넌 뭘 했느냐?”이다.

 

 

 

 

[1] 《질문의 책》 49쪽 (정현종 역, 문학동네, 2013)

[2]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이어야만 한다.” (프란츠 카프카)

[3] ‘설거지’ 연구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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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7-04-0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늘 궁금 했거든요 ㅋ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도 알겠고 다양한 지식을 정리하는 방법도 알겠는데 그 질문 하는 방법에 대한 ‘어떻게‘란 무엇인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1인 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어떻게‘ 란 부름에 명료한 확답이 페이지 321에 있단 말씀이시죠 ㅋㅂㅋ ~당장 달려가서 펴보고 싶네요 ㅋ

cyrus 2017-04-01 10:24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명료한 확답’이 없어요. 제가 321쪽을 다시 보라는 이유는 저자가 간접적으로 제제시한 ‘질문’을 확인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은 우리 독자가 찾아내야 합니다. ^^

stella.K 2017-04-0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읽었구나. 이 책 좀 평점 주기가 애매했어.
별 넷 주기엔 많은 것 같고, 3주기엔 적고.
반 개짜리 있으면 3개 반이 적당할 듯도 한데...
이 책 여백이 너무 많다고 까는 사람도 많던데
나도 좀 그점은 아쉽더군.

cyrus 2017-04-01 21:27   좋아요 1 | URL
사실 내용도 딱히 특별한 것이 없었어요. 처음 이 책을 직접 봤었을 때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조금 당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