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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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씨의 리뷰가 불량합니다. 저항기가 있군요. C급입니다.”[1]

    

 

 

인생 여정의 중간 혹은 종착점에 이르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달려온 길이 고통스러워도, 현재의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면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은 더욱 강렬하다. 부모님 세대는 청년기에 경험한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 지옥의 시간은 이미 소설이나 영화 속 과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런 시대를 얼마간 편안한 마음으로 보며 추억하고 있다. 50~70년대 시절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분산된 기억들을 끄집어내 영화와 소설이라는 문화적 메커니즘을 통해 조직하고, 그리하여 개인들의 체험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되고, 세대 차원의 공통된 기억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근대사는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없었던, 힘의 논리와 저항으로 일관됐던 부자(父子) 관계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향수(鄕愁)의 힘이 필요했다.

   

공터에서는 마씨 집안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마동수는 6 25전쟁 때 이도순을 만나 고생 끝에 가정을 이룬다. 그들이 낳은 자식 마장세와 마차세도 시대의 그림자에 벗어나지 않았다. 마장세는 복역 중에 월남전에 파병되었고, 제대한 후에 괌으로 건너가 사업을 한다. 그는 자신을 가족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산다. 장남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마차세가 이어받는다. 마차세는 아버지의 사망과 가난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다. 학업을 포기하고 신문기자로 취업했지만, 언론통폐합 조치로 펜을 내려놓게 되고 물류회사에 재취업하여 오토바이 배달을 한다. 고달픈 시련 속에서 마차세는 박상희의 내조에 힘입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착실하게 살아간다.

     

작가는 현대사의 주요 계기들 속에서 무기력했지만, 묵묵히 시대를 감내하며 살아온 부모님 세대에 대한, 쓸쓸하면서도 애정 어린 연민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그려진 아버지상은 그런 역사의 질곡을 다시 바라보려는 과정에서 나온 타협의 산물이다. 이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폭넓은 공감은 이 시대의 고통과 상처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공동의 기억을 토대로 세워지는 상상의 공동체는 모든 세대를 하나로 묶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과거에 대한 공동의 기억으로 더 잘, 더 쉽게 하나가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진부한 징후들 속에서 음습하게 스며 있는 구시대의 늙은 유령의 그림자를 함께 본다. 김훈은 소설을 통해 아버지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그리려 했다고 말한다.[2] 그 표면적 서사 밑에 독자들, 특히 중장년층 남자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흐름이 들어 있다.[3] 인내심과 책임감 그리고 힘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에 대한 매혹이 그것이다. 부모님 세대들의 영혼 깊은 곳에 유령처럼 스며들어 있는 건 전쟁의 공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향수는 현대에 들어 힘과 권위를 상실해가고 있는 중장년층 아버지들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환상의 그림자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의아한 장면이 있다. 마차세가 일자리를 잃어 백수로 지내고 있을 때, 박상희가 그에게 집안일을 맡겼다. 마차세는 아내의 요구를 순순히 응한다.

 

박상희는 마차세가 실직한 동안에 집안일의 일부를 남편에게 맡겼다. 마차세는 가끔씩 빨래를 널고 유리창을 닦고 싱크대를 청소했다. 박상희는 그 사소한 노동으로 남편의 마음이 일상에 정착하기를 바랐다. 마차세는 아내의 마음을 짐작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195)

 

박상희가 미대 출신이라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여성으로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은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착시에 가깝다. 그러나 국가가 가부장적 권위를 강요하던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해보시라. 1970년대의 여성은 보수적 분위기로 인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적 가치관을 등에 지고서 억척같이 밖에서 일했던 아버지들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볼지 무척 궁금하다. 아버지들은 집안일은 '아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존중하는 마차세의 배려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려지지만, 아무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에게 호되게 당한 적 있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여성성을 강조하고 싶은 걸까. 작가 입장에서는 이런 표현을 시도해볼 수 있지만, 조금은 생뚱맞게 느껴진다.

     

세대 갈등은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不和)’에 비유되곤 한다. 아버지 부정(否定)’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진통이다. 마차세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된다. 박상희는 산파가 산모의 출산 과정을 돕듯, 마차세의 마음을 옥죄이는 아버지의 존재감을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그녀의 역할은 마동수의 아내이자 마장세 · 마차세의 어머니 이도순의 존재감을 위축시킨다. 이도순은 숨 가쁘게 달려온 현대사의 그늘에서 인고와 희생으로 우리 가정과 사회를 지탱해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원형이다. 70년대엔 인내 · 순종 · 희생의 어머니상이 지배적이었다. 이도순은 마장세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고통을 언어로 호소한다.

 

너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슨 헛것이 씌었는지 도통 밖으로만 싸지르고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데, 왜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인간하고 살을 섞고 살아서 너희들을 내지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서 벌레가 끓고 들불이 인다. 너는 힘들고 쓸쓸하면 너보다 더 쓸쓸한 이 어미를 생각해라.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다. (170)

 

가부장제의 큰 피해자는 아내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여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개인이 되지 못했고, 자기 언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여성을 무겁게 짓누르는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하고, 반항하는 소수의 목소리들도 있었다.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의 압력 앞에서 개인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목소리이다. 그런데 박상희는 힘들고 쓸쓸한이도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소설 속 박상희는 마차세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보여줄 뿐이다.

 

박상희 : “어머니는 어땠어?”

마차세 : “그저 그래. 잠든 거 보고 왔어.”

박상희 : “어머니보다 당신이 더 가엾어.”

 

(245)

 

박상희는 치매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홀로 돌보는 남편의 정신적 부담감을 이해한다. 그녀는 마차세를 어머니보다 더 가엾은 남편(아들)’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은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가족을 충실히 돌보는 가장의 고통을 부각할 뿐, 어머니의 고통을 외면한다. 이러한 박상희의 시선은 사회적 가부장제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됨을 의미한다. 박상희는 무의식적으로 가부장제 유지의 정당성에 가담하고 있다.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가부장제 위계구조는 아들들을 또 다른 가부장으로 만든다. 마차세는 빈약한 물적 토대를 세워야하는 가부장이 된다.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니는[4] 마동수와 마차세는 지금 현실에서 강력한 권위를 가진 가부장을 갈망하는 중년 남성들의 무의식의 초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40대 남성 독자들이 김훈의 소설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터에서는 모든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한 소설이다. 김훈은 과거 가부장제의 환상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는 이번 신작 소설을 통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지만, ‘여성도 슬퍼했고, 아팠다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1] 원문은 김훈 공터에서193쪽

 

[2] <소설가 김훈, 장편 공터에서출간 “70년간 갑질의 시대아버지와 내가 살아온 야만의 시대를 그렸다”> 경향신문, 201726일자

 

[3] <김훈 공터에서베스트셀러 종합 1“40대 남성 독자 지지”> 아시아경제, 2017224

 

[4]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작가 후기, 공터에서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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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8 13:05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소설처럼 과거를 이해하면서, 희망을 발견했음을 암시하는 전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전개는 단순하고, 뻔합니다.

이 소설의 독자서평을 다 읽어봤는데요, ‘아버지‘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평이 많았어요. ‘어머니‘ 이도순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한 독자서평은 알라딘에 1편뿐이었습니다. 이도순도 마동수 못지 않게 힘들게 살아왔고, 개인적 상처가 깊은 인물입니다. 박상희가 마차세에게 ‘어머니보다 당신이 더 가엾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황당했습니다. 박상희를 제외한 마씨 집안 사람들 모두 가엾은 인물입니다.

레삭매냐 2017-02-28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 왜 독재자가 죽은 기미년
으로 잡았을까 궁금해집니다.

그 뒤의 등장할 격동의 현대사를 다룰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작은 의구심이 듭니다.

cyrus 2017-02-28 13:06   좋아요 0 | URL
그렇게 볼 수 있군요. 저는 시대적 배경과 이야기 전개 구조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

스윗듀 2017-02-28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cyrus님 문학동네이벤트 당첨되셨던데.... 50권이라니요..! 이거야말로 책심은데 책나고 가진 자가 더 가지는 상황 아닙니까? 에잇 ㅋㅋㅋㅋㅋㅋ 축하드려요!!

cyrus 2017-02-28 16:30   좋아요 1 | URL
이벤트 당첨 사실을 알리지 않는 성격이라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걸 보셨군요.. ㅎㅎㅎ 축하 인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knulp 2017-03-01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하게 분석하셨네요. 저 역시도 김훈의 글에 열광하는 1인. 뭐 가부장제에 딱히 동의하진 않지만 그의 문체가 좋습니다. 무겁고 무거운. ㅎㅎ 그래서 읽어요. 시대 의식도 강하고. 서평이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cyrus 2017-03-02 13:49   좋아요 0 | URL
저도 김훈 작가의 문체, 특히 그 문체의 매력이 많이 발산되는 산문을 좋아합니다. 이번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체가 미장세가 초콜릿 한 입 베어 먹는 순간을 묘사한 내용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