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또 만났군요.” 올해 들어 기형도의 시집을 자주 꺼내 든다. 김현의 해설을 잠깐 펼친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개인적인 것-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김현, 《입 속의 검은 잎》 해설 152~153쪽)

 

이어 검은색 표지의 《이연주 시전집》을 꺼내 든다. 김현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1990년대적 변용을 이 시집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연주의 세계는 한층 극단적으로 조정된 이미지의 대비, ‘구역질’이라고 일컬을만한 비틀림과 부조화의 잔인성을 드러낸다. 이연주는 어둠을 '어둠'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바람난 에미가 도망치고 애비가 땅을 치고 울고

 

애비가 섰다판에서 날을 세고
그 애비의 아이가
애비를 찾아 섰다판 방문을 두드리고

 

본드 마신 누이가 찢어진 속옷을 뒤집어 입고
지하상가 쓰레기장 옆에서
면도날로 팔목을 긋고

 

세 살 난 막내가 절룩, 절룩 자라가고
에미 애비와 누이의 일들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오늘,
밤마다 도시가 하나씩 함몰되고, 나는
등불에서
등심지를 싹둑, 싹둑 잘라내고

 

 

(이연주 「가족사진」, 26쪽)

 

 

그녀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한 마디의 주제라 할 수 있을 '죽음'은 이렇게 자신도 잘 기억하지 못했던 유년시절부터 공기처럼 주위에 있었던 셈이다. 왜 죽음일까. 그것은 수수께끼 같은 삶의 의미를 해독하려는 시인의 몸짓일 것이다. 죽음을 통해 거꾸로 삶을 보는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90년대를 지금보다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었다. 절망의 구석도 많았고 그것을 헤집고 나서지 못한 젊은이들도 많았다. 자꾸만 물질로 기우는 의식들. 그래서일까.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은 그 자체가 일종의 테러리즘이었다. 이연주는 이를 박차고 나가기가 힘들었을까. 그의 시는 내내 이런 구석들을 철저하게 파헤쳐 있다.

 

 

이제, 용기 있는 이별 앞에
석유는 준비되었느냐?
성냥이 찬이슬에 젖어버리진 않았겠지?
노숙하는 이의 쓰라린 밤잠을 불러오너라
우리 함께,
다 같이 나도 말이지
 
살아 남아 슬프지 않은 나라,
옳거니, 기쁜 일이다, 가자.

 

 

(이연주 「방화범」 중에서, 50쪽)

 

 

마치 자기 죽음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구절들이 엄숙하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완숙함. 읽을수록 시인의 단호한 어조가 사납게 느껴진다. 시인은 어둠의 저편에서 내뿜는 죽음의 습기를 지켜보는 자이다. 「매음녀 6」은 어머니를 매개로 두터운 망각의 지층 속으로 사라질 뻔한 자아와 죽음을 응시한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젖이 없어 울으셨다.
어머니 숨 거두시며
마음 착한 남자, 등짝 맞대 살으라 이르셨다.
나는 부둣가에서
선술집 문짝에 내걸린 초라한 등불 곁에서
매발톱 손톱을 키워 도회지로 흘러왔다.
눈 붙이면 꿈속에서 어머니
이 버러지 같은 년아,
아침까지 흑흑 느껴 우신다.
내 심장 차가운 핏톨, 썩은 물 흐르는 소리.
나는 살 속 깊은 데서 손톱을 꺼내
무덤을 더 깊이 판다.
하나의 몫을 치르기 위해 삶이 있다면
맨몸으로 던지는 돌 앞에 서서 사는
이 몫의 삶은......
희미한 전등불 꺼질 듯 끄물거린다.

 

 

(이연주 「매음녀 6」, 46쪽)

 

 

시인은 죽음으로 끝난 어머니의 삶을 대신 이어가려는 어느 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불확실하지만, ‘희미한 전등불 꺼질 듯 끄물거린다’에서 볼 수 있듯이 벼랑 끝에서 시인의 몸을 던져버리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이연주 시인이 말하는 죽음은 이런 개인적 죽음의 응시만은 아니다. 90년대는 도시의 빌딩이나 인간, 어느 쪽도 순수함을 간직하지 못하고, 더럽혀진 욕망에 노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새로운 세상을 앞둔 세기말이 다가오는 이 시대에 적어도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죽음이라는 주제에 자유로울 수 없다. 시인은 상실감에 주저앉거나 탈속과 초월의 세계로 숨어들기보다 혼곤한 정신을 깨우는 절규를 노래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다. 그녀는 가슴에 끓어오르는 격정을 머뭇거리지 않고 단숨에 토해내고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상처받고 찢기면서 마음의 쓸쓸함을 견디려는 시인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시인은 쓸쓸한 삶의 풍경 속에서 희망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란 가정일 뿐이며 이 세상 바깥은 온통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세상에 없는 그녀를 사람들이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뒤흔드는 허무와 절망에서 솟음치는 진실한 회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시를 쓰는 행위는 불가능에 이르는 도정(道程)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지긋지긋한 죽음의 과정이다. 이연주의 시는 그 죽음의 도정의 기록이다. 지상에서의 삶의 헛됨과 추악함을 우의적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시가 밝은 면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불편한 구석이 분명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시커먼 욕망으로 지배되어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이 세상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11-08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전에 < 속죄양, 유다 > 에 대해서 평점 별 4를 부과했는데..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연주의 고통과 남성 시인이 자기 연민에 빠져서 징징거리는 것을 혼동한 까닭입니다.
비교가 안 되죠.. 사실은. 이 시집 저도 곧 조만간 살 계획입니다만.... 좋은 시집을 농간 측에서 출간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cyrus 2016-11-09 14:00   좋아요 0 | URL
시인의 남동생 분과 생전에 시인이 활동했던 문학 동인지 소속 회원들이 아니었으면 시전집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시인의 재능이 제대로 활짝 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yureka01 2016-11-08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장바구니 넣도록 하겠습니다...아픔의 언어가 곳곳에 베어져 있어요..면도날처럼...

cyrus 2016-11-09 14:00   좋아요 0 | URL
기형도 시집만 계속 팠던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이연주 시인이 재평가받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