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속담에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라는 말이 있다. 행복했던 우리의 삶에도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으로 고통이 찾아올 때가 더러 있다. 키르케고르는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고통은 결코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평균 수명은 45세였고 사람들은 살면서 자주 죽음을 의식해야 했다. 죽음은 그저 전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보일 뿐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잊고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고 싶어 한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현대인이 죽음을 숨기고 회피하는 모습의 원인을 문명의 혜택에서 찾는다. 고대 사람들은 살아있음과 죽음을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의학기술과 건강 식단이 발달한 오늘날 죽음을 떠올리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한다. ‘푸드 포르노먹방 열풍은 일단 먹고 즐기자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현대인들은 톱니바퀴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듯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 죽어가는 자는 쓸쓸한 중환자실로 격리된다. 그는 일상으로부터 멀어진 고독한 존재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눈을 감는 날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데 주력해야 할까?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하버드 의대 교수 아툴 가완디는 노화와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삶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들은 노화 과정을 삶의 일부로 보기보다는 고쳐야 할 질환으로 인식한다. 의사들은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것이 의사들의 의무이다. 하지만 환자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심정을 읽지 못한다. 아툴 가완디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의사 폴 칼라니티는 환자가 여생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수명연장보다 자신에게 부여된 수명을 항시 건강하게 유지하고 긍정적인 죽음에 도달하면 성공적인 노화로 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공적인 노화를 맞을 수 없다.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절대적 고독이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전혀 쉽지는 않다. 자신의 과거 인생이 후회스럽거나 인생을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죽음을 분노와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프로이트, 수잔 손탁 같은 유명 인사들도 죽음이 코앞에 둔 상황 속에 죽음을 타협할 것인지 말 것인지 스스로 결정했다. 프로이트는 구강암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진통제를 거부했다. 손탁은 유언장 작성을 거부함으로써 끝까지 죽음 앞에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들처럼 거역할 수 없는 죽음에 항거할 수 있다. 폴 칼라니티처럼 놀라운 참을성을 보이며 차분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만, 자기 인생에 미진한 부분이 남았거나 질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 종종 죽음을 부인한다. 살아있는 자들의 눈에는 죽어가는 자의 고군분투하는 저항이 집착으로 보이겠지만, 이러한 행위 역시 인간답게 사는 모습의 일부이다.

 

세상이 더 좋아질수록 우리는 죽음의 강박관념으로 점점 내몰게 될 것이다. 인간은 개별적 주체가 되어 고독에 쉽게 휩싸인다. 불안과 허무주의가 개인을 집단으로부터 단절시킨다. 개인의 죽음이 일상의 배후로 밀려나면서 고독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가벼운 대화 소재로 삼아서 쉽게 얘기하는 성향이 있다.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에 눈먼 상태다. 죽음에 대한 무심함은 타인의 죽음을 비하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다 갈 권리를 주는데 너무 인색하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을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단지 조금 늦게 죽는다는 이유 하나로 정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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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05 2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산다고 사는 기계처럼 습관적으로 사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부단하게 삶도 비워야죠. 다만 할일이 있고 의무가 남아 있을때 가버리면 무책임한 거니까요.

요즘 자살이 너무 많아서요,,죽음이 도피가 되는 걸 보면 사는 것도 죽는것도 쉽지가 않죠.

cyrus 2016-10-06 13:10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죽음으로 도피하는 선택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게 합니다.

달걀부인 2016-10-06 0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죽음도 개인적 죽음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적 상황은 더욱 그렇죠. ..인간답게 살 권리도 주지않는데.. 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주지 않은 현실. 그래서 제목을 바꿔서 읽어봅니다. 시대의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로요.

cyrus 2016-10-06 13:16   좋아요 0 | URL
우리 사회가 타인의 죽음을 너무 가볍게 봅니다. 인간답게 죽지 못하면 온전히 죽은 자의 문제로 돌립니다.

안녕반짝 2016-10-14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툴가완디는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읽고 팬이되어서 책은 다 샀는데 요즘 신간중에서 바람이 숨결이 될때가 가장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cyrus 2016-10-17 11:22   좋아요 0 | URL
폴 칼라니티의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 해부학실에서의 경험담이었습니다. 끔찍하다기 보다는 숙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