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새끼 고양이가 힘없이 쓰러져 있더라.”
지나가 버린 수요일. 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내게 고양이 얘기를 들려줬다. 어머니는 내가 오기를 엄청 기다렸는지 한동안 입에 꾹 담았던 말을 꺼냈다.
우리 집 건너편에 어린이집이 있다. 그 날 오후에 어머니가 어린이집 앞을 지나가다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머니가 소리 나는 곳을 가봤더니 봉고차가 세워진 어린이집 울타리 쪽에 축 늘어진 새끼 고양이를 발견했다. 다리 부분만 하얗고, 몸 전체가 검은색 빛깔을 띤 고양이였다. 어미를 애절하게 부르는 새끼 고양이가 불쌍해서 어머니는 우유를 담은 작은 접시를 내놓았다. 새끼 고양이를 처음 발견한 지 한 시간 후에 어머니는 고양이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확인해봤다. 새끼는 우유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새끼 고양이의 상태로 봐서는 곧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농담으로 새끼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서 건강하게 키우자고 말했다. 내가 새끼를 직접 보니까 몸 상태가 생각보다 아주 심각했다. 새끼 크기가 남성 성인의 주먹만 했다. 새끼는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햇살과 공기를 마음껏 느끼는 듯한 자세였다. 그렇게 처절하게 바짝 올리던 고양이의 머리가 점점 바닥 쪽으로 내려갔다. 새까만 털 색깔 때문에 새끼가 눈 뜬 건지 감은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살짝 새끼의 머리를 건드려봤다. 새끼는 내가 가까이 오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새끼에게 더 이상 머리를 들 정도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받으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새끼를 살리고 싶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죽어가는 새끼를 그대로 놔두고 갈 수 없었다. 그래도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찾으러 다시 올 거로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제발 어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 집은 1층이다. 생각날 때마다 발코니 창문 쪽으로 가서 새끼 고양이가 발견된 장소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저녁에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봉고차 밑으로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그 고양이가 새끼를 찾으러 온 어미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에 불과했다. 새끼 고양이는 내가 마지막에 봤던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새끼 머리 주변에 개미 몇 마리가 기어 다녔다. 아마도 어미는 병든 새끼를 키울 수 없어서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전날 내가 봤던 얼룩무늬 고양이가 새끼의 진짜 어미라면, 새끼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그곳을 다시 찾아왔을 수 있다.
나는 새끼 고양이 사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120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콜센터 상담원에게 사체를 수거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길거리에 로드킬당한 개, 고양이 사체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지역 번호+120’으로 전화하면 된다. 사체가 있는 장소 위치나 주소를 정확히 알려주면 상담원이 해당 구청으로 바로 접수한다. 그러면 구청 소속 담당 직원들이 사체를 수거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물을 각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직접 사체를 땅에 묻기도 한다. 그런데 동물 사체를 땅에 묻는 일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적발될 경우, 벌금을 내야 한다. 사체에 질병을 유발하는 세균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사체에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
산속에 동물 사체를 발견하면, 그대로 놔두면 된다. ‘자연의 장의사’들이 사체 부패를 돕는 역할을 한다. 사체는 송장벌레, 딱정벌레, 구더기가 좋아하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 우리는 사체 주변에 달라붙은 구더기나 동물들을 혐오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동물들에게는 즐거운 생명의 축제다. 다른 생명의 죽음은 살아있는 생명을 위한 ‘삶의 영양분’이 된다. 만약에 송장벌레와 구더기가 너무 싫어서 모조리 박멸하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과연 우리는 구더기 없는 깨끗한 세상을 살게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썩지 않은 동물 사체 그리고 인간의 시체가 많아진다. 사실 인간은 구더기, 송장벌레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남긴 쓰레기, 그리고 죽으면 남게 될 육신을 그들이 뒤처리해주니까.
인간도 언젠가 죽는다. 죽음 앞에 마주치면 보잘것없는 존재다. 그래서 세월의 힘을 받으면서 생긴 신체 변화를 느끼면 한숨을 푹 쉬거나 애써 잊으려고 한다. 자신의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타인의 약점마저 불편하게 느낀다. 이는 차별과 억압, 그리고 혐오라는 감정으로 형성된다. 옛날 의학 교수는 인체 해부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옛날 고대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가 발견한 해부학 지식이 완벽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갈레노스 해부학 지식의 결함이 많았다. 동물 해부를 바탕으로 만든 엉터리 지식을 의학 교수는 답습하고,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기독교 중심의 유럽 사회에서 인체 해부는 종교 규율을 어기는 금기 행위였다. 합법적으로 시체에 손을 대고 해부하는 일은 비천한 미용사들의 몫이었다. 미용사가 시체의 배를 가르면, 의학 교수는 해부한 시신에 지휘봉을 가리키면서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인체 해부를 혐오하는 의학교수의 마음속에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역겨움이 컸을 것이다. 의학교수의 원초적 혐오는 차별이 되어 시체를 해부하는 일을 맡은 미용사의 존재를 배제했다. 이로 인해 해부 경험이 많은 미용사가 외과 의사가 되는 일이 드물었다. 의사들은 의사 일을 겸하는 미용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혐오가 차별로 변형되는 위험한 감정은 생각보다 우리 삶 속에 깊게 내재화되어 있다. 시체를 대할 때, 그리고 시체를 처리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시체 앞에 벌벌 떨면서 공포심을 느끼는 자는 시체를 정면으로 대하는 자를 혐오하고 차별한다. 사람들은 직원들이 동물 사체를 보신용으로 해먹거나 식당에서 판매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편견이다. 현행법상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 사체는 생활폐기물로 분류된다. 동물 사체 수거 직원들이 폐기물을 보신용으로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근거 없는 편견은 궂은일을 하는 직원들에 대한 모욕이다. 이처럼 인간은 혐오라는 감정에 쉽게 휘둘려서 비합리적인 기준으로 타자를 차별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믿는다. 혐오는 차별을 만들어내는 위험한 감정의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