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에서 케이트 잠브레노의 소설 《그린 걸》이 ‘여성성을 연기하는’ 인물을 ‘혹독하게’ 묘사한 소설이라고 호평했다. 잠브레노의 소설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린 걸(Green girl)’이란 어리고 순수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여자를 가리킨다. 소설에서 그린 걸로 상징하는 젊은 여성 루스는 세상이라는 무대 한가운데 서서 여성성을 연기하는 존재이다. 그린 걸은 대중 앞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전시한다. 그러므로 타인이 원하는 시선에 맞춰서 행동한다. 루스는 사랑받고 싶어서 자기도취와 허영의 가면을 쓴 채 여성성을 연기한다. 그러나 루스는 매일 가면을 쓰고 벗기를 반복하면서 연기하는 삶에 점점 지쳐간다. 그녀는 남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향한 낯선 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록산 게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스는 ‘희망 없는 곤경 속에 처한 그린 걸’이다. 록산 게이는 그린 걸이 처한 상황을 예리하게 묘사한 소설 속 문장을 인용, 소개했다.

 

“기차 안에서도, 패션쇼에서도 그들은 의식한다. 남자들은 언제나 여자들을 쳐다본다. 언제나 그 끈적한 눈길로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다. 쇼핑은 하지만 물건은 사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생활은 어렵다. 가끔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쁜 페미니스트》 191쪽)

 

록산 게이는 잠브레노의 소설을 분석하기 위해서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Performance)’ 개념을 들고 왔다. 1990년에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에서 주장한 젠더 이론의 핵심은 사람의 정체성은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구성, 반복되는 행위이다. 어려운 문장으로 독자를 괴롭히기로 악명 높은 그녀의 주장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민족, 계급, 성별 등의 정체성은 확정된 소속이 아니라 일상의 퍼포먼스와 담론으로 매번 구성된다는 것이다. 곧, 인간의 본질은 없으며 그것은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남성성과 여성성은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사회 권력의 규정 및 반복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적 산물이다.

 

남성과 여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학습하면서 성장한다. 예를 들어 남성은 어릴 때부터 슬픈 일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배운다. 장난기가 발동한 어른은 남자가 울면 ‘고추’를 떼어 내야 한다고 겁을 주기도 한다. 이때부터 소년은 눈물 흘리는 건 남자로서 수치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항상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지 순결을 지켜야 한다. 순결을 잃은 여성은 여성성이 상실된 무례한 여성이 된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성성과 여성성을 몸에 배면서 살아간다. 이는 남녀 모두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은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회 집단 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되기도 한다. 불합리한 모순이 있어도 개선될 여지가 없다. 집단 구성원은 따로 노는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으려고 문화적 규정을 순종한다. 이렇게 남성성과 여성성은 오랫동안 반복되고 대물림되는 ‘고정성(stereotype)’으로 자리 잡는다. 

 

 

 

 

 

 

 

 

 

 

 

 

 

 

 

 

 

고정성은 문제가 많다. 고정성에 갇힌 사람은 어떤 현상이나 존재를 획일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사회 집단 구성원 모두 고정성에 순종하도록 은근히 강요한다. 여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강제로 밀어 불이듯이 가르친다. 이러한 훈육 방식은 자녀의 인간성과 자존심을 억압할 우려가 있다.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는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우리가 남자들에게 저지르는 몹쓸 짓 중에서도 가장 몹쓸 짓은, 남자는 모름지기 강인해야 한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아를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낄수록 사실 그 자아는 더 취약해집니다. 또한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대단히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남자의 그 취약한 자아에 요령껏 맞춰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31쪽)

 

지금도 ‘몹쓸 짓’을 배웠던 마음의 기억을 잊지 못해서 고생하는 남자와 여자가 많다. 여성성을 연기하느라 애쓰는 여성을 ‘그린 걸’이라 하면, 잘못된 남성성을 고집하는 남성은 ‘그레이 맨’(gray man)이다. ‘gray’는 회색만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평범한 중년 남자, 보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레이 맨은 집에 들어가면 왕이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오래전에 죽고 사라진 가부장제의 환상에 푹 빠져 있다. 그레이 맨도 그린 걸처럼 남성성을 연기하려고 애쓴다. 자존심이 강하고, 여자들 앞에 기죽지 않는 당당한 가장으로 말이다. 아내가 남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딜 감히, 아내가 하늘 같은 남편한테 대드느냐!” 그레이 맨은 아내에게 지고 싶지 않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남자다움의 중요성을 배웠고, 어머니를 꼼짝 못 하게 만든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보면서 자랐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견이 어긋나는 상황을 마치 이기고 지는 전쟁처럼 생각하는 태도는 유아적 사고방식이다. 그레이 맨은 연기하는 척하는 남성성이 잘못된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마저 스스로 인정하면 그동안 쌓인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기 때문이다.
 
‘gray’가 형용사로 사용하면 ‘외로운’, ‘어두운’이라는 뜻이 된다.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그레이 맨의 말년은 외롭다. 집안의 외로운 왕이다. 하지만 아내와 자식은 왕의 기분을 맞춰주는 신하가 아니다. 가족들은 고집불통 왕을 싫어한다. 하나 둘씩 왕의 곁을 떠난다. 왕의 연기는 끝났다. 허전함이 그레이 맨의 가슴을 짓누른다. 헛된 연기를 일찍 그만두었으면, 이런 자업자득의 불행한 비극은 찾아오지 않았다. 남을 의식하면서 퍼포먼스로 자신을 드높이려는 그린 걸, 그레이 맨의 삶의 방식은 ‘몹쓸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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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6-05-25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트 잠브레노의 <그린걸>이 몹시 당기네요.

cyrus 2016-05-25 14:57   좋아요 0 | URL
<나쁜 페미니스트>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린 걸>이 버지니아 울프, 진 리스의 소설분위기와 비슷하다고 소개했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5-25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지만 님의 독서지평은 깊이나 양이나 정말 대단하신 듯.ㅎㅎ

cyrus 2016-05-25 14:59   좋아요 0 | URL
아직 안 읽어본 책이 많습니다. 특히 주디스 버틀러의 책은 안 읽어봤습니다. 문장이 난해해서 읽기 어렵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