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헌책방에 관한 글을 썼을 때 이런 문장을 남긴 적이 있다. 헌책방으로 향하는 책들은 깊은 잠에 빠진 지식의 화석(化石)이다. 그러나 새 주인의 온기를 스치면, 책은 살아 숨 쉬는 화석(花石)으로 되살아난다. 지금도 죽어 있던 책들은 독자의 열렬한 기대에 응답하면서 부활한다. 그렇지만 소수의 책만 이 영광스러운 기적이 따른다. 독자의 관심이 멀어질수록 책의 온기는 점점 사그라진다. 더 이상 독자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책은 수명을 다한다. 그들의 최후는 조용하다. 누구도 책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책의 수명이 다한 지 얼마 세월이 지나서야 몇몇 독자는 그들의 부고 소식을 뒤늦게 확인한다. 절판.

 

독자는 그냥 떠내 보내기 아쉬워 서평을 남긴다. 책을 위한 근조(謹弔)다. 한 권의 책이 절판되어도 그 책을 거쳐 간 방문객, 즉 독자들이 남긴 서평들은 책의 묘비가 된다. 문장으로 이루어진 묘비는 책을 찾으려는 독자 나그네의 눈길을 멈추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절판서적의 서평 역시 중요하다. 책의 가치를 알아준 독자들이 남긴 소중한 기록이다. 한때 이런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서평 한 편 없이 조용히 절판되는 책들은 정말 불행하다. 분명 그 책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그 기억을 복원해줄 흔적 파편 하나 찾기 힘들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절판서적은 이름만 남았을 뿐 실체가 없다. 사람이든 책이든 잊힌다는 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그런 마음을 잘 알기에 절판서적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나면 무척 반갑다. 출판사의 소개 글을 읽다가 혼자 감동하여 울컥한 기분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측의 농간’은 절판서적의 생명을 불어넣는 출판사다. 출판사 이름이 독특하다. 이름 때문에 ‘주최 측의 농간’ 같은 시시껄렁한 말장난이 생각날 것이다. 여기 ‘최측의 농간’ 출판사 소개 글을 공유한다. 글의 분량이 A1 용지 한 장에 딱 들어맞는다. 영혼 없는 미사여구로 치장하면서 독자에게 아부 떠는 출판사 소개 글과 완전 차원이 다르다. 출판사 소개 글도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 명문(名文)이 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잊혀진 책들에 숨결을 불어넣는 일을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제 막 우리 독자들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는 ‘최측의 농간’ 출판사의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절판되었다는 이유로 잊혀져가는 책들이 많습니다. 독자들이 애타게 복간을 기다리는 절판서적들이 많지만 그런 복마저 누리지 못하는 책들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애태우며 잊혀져가는 책들의 복간을 통해, 그 책들의 은은한 빛사위가 조금은 더 멀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측의 농간은 출발합니다.

 

만들기보다, 우리는 읽고 싶었습니다. 조금은 낡은 판형, 약간은 답답한 편집으로 남아있는 책들을. 잘 팔리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책들은 실제로 대부분 1쇄를 넘기지 못한 채 절판되었습니다. 만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시도 끝에 만나게 된 절판된 책들에는 짧은 운명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생명력으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놀라웠고 다행이었습니다. 너무 진지했거나 순수했기 때문에 잊혀간 그 책들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고된 현실을 견뎌낸 그 책들에 눈물 보다는 웃음으로 손을 내밀어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고 싶었지만 읽을 수 없었던, 읽었으나 매우 힘들게 간신히 읽을 수밖에 없었던 책들부터 펴낼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책들을 통해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준다면 우리가 읽고 싶거나 쓰고 싶은 미래의 책들도 당신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방향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側)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갈라서거나 맞서는 ‘쪽’이 아닌 상대적인 다름으로서의 집합인 ‘측’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외부의 냉소가 아닌 내부의 한 의지로서 미세하지만 단단한 입자가 될 수 있도록 힘쓸 것입니다.

 

농간이라는 말로 우리는 시작하는 우리의 표정이 웃음임을 보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농간하거나 당신이 우리를 농간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농간하는 이들을 우리가 함께 농간하고 마침내는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우리들의 농간을.

 

우리의 최측에, 당신, 슬프거나 기뻤던 당신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는 꿈꿔봅니다. 당신, 종종 독자라고 불리는 당신, 당신이 오래전부터 거기에 서 있었노라고.

 

최측의 농간은 절판된 양서들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이 발견되고 널리 읽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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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3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2-03 08:24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에 일부러 장난치려고 만든 가짜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02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 최측의 농간이 되겠네요...
정말 절판됬지만 정말 좋은 책 많거든요.. 이런 전문 복간 출판사가 생기다니 응원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다가 최측의 농간에서 마태우스 출간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cyrus 2016-02-03 08:2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그런데 마태우스님이 복간 제안을 거절하실 겁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6-02-02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출판사 진정으로 응원합니다.

cyrus 2016-02-03 08:2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기대되는 출판사입니다.

yamoo 2016-02-04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출판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사이러스 님이 이 출판사를 알게 된 것도 신기합니다!

아주 인상 깊은 사명을 가진 출판사군요! 마음 속으로 응원합니다. 전문 복간 출판사의 성공을!

cyrus 2016-02-05 10:48   좋아요 0 | URL
올해는 초판본 복간 열풍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절판본이 다시 나오는 현상, 지금으로서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2016-02-04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