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 나라를 발칵 뒤집은 소동이 있었다. 그 소동이란 고령의 노인이 방북한 것이었다. 노인의 나이는 망백(望百)을 훌쩍 넘긴 93세. 노인은 통일원(현재는 통일부)의 방북 허가를 받지 않고 대종교 종무원장 김선적과 함께 중국 북경을 경유해 북한으로 갔다.

 

 

 

 

 

 

동아일보 1995년 4월 12일 1면

 

 

북한은 단군 탄생일로 지정된 4월 14일(어천절)에 열리는 단군릉 기념행사에 노인을 초청했다. 노인은 통일원에 방북 허가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당시 경수로 협상 때문에 남북 간의 갈등상태가 고조되었고, 4월 15일이 김일성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통일원은 노인의 방북 허가 요구를 받아줄 수 없었다. 그 대신, 방북 날짜를 5월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노인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밀입북하게 되었다. 노인은 7박 8일 일정으로 어천절 행사에 참석했고, 단군릉을 방문했다. 이들이 종교행사 참가 목적으로 방북을 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를 받는다. 판문점을 건너서 남한으로 돌아온 노인과 김선적은 재판을 받았다. 노인이 고령의 나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그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에 처한 반면에, 김선적은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김선적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나이가 많고(당시 김선적의 나이는 69세), 종교 활동 외에 친북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정부를 무시하고 북한으로 건너간 노인은 대종교 총전교였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하는 우리나라 교유의 민족종교다. 총전교는 대종교에서 최고 책임자를 이르는 말이다. 노인은 1999년 97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회장은 국가와 사회에 공적을 남긴 유명 인사가 사망했을 때 지내는 장례이다. 노인이 국가의 예우를 갖춘 장례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늘날 교육부의 시초인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과거에 교육과 관련된 국가사업의 굵직굵직한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초대 문교부 장관, 대종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헤겔을 공부한 철학 박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그는 ‘파시스트’, ‘반공주의자’로 비판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어째서 반공주의자가 고령의 나이가 돼서야 북한을 밀입북하게 되었을까. 노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인의 이름은 안호상. 호는 한뫼. 1902년 경남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젊은 나이에 대종교에 입문했고,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독일 유학 시절에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조선으로 돌아와 한국철학연구회 초대 회장에 역임했으며 이광수의 소개로 여류 시인 모윤숙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다. 독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때부터 안호상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골수 반공주의자였다. 국토가 갈라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가 내세운 것이 바로 일민주의였다. 일민주의는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사상이었다. 안호상은 일민주의를 통해 민족 자존심을 드높이고, 민족을 단결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일민주의의 사상적 뿌리를 홍익인간 정신과 화랑도 정신에서 찾았다.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안호상의 일민주의가 국민 대중을 ‘반공’으로 무장시키는 적합한 사상적 도구였다. 안호상이 문교부 장관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일민주의 사상을 체계화한 서적들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일민출판사’가 설립되었다. 안호상은 일민주의야말로 평화,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면서까지 ‘일민주의’에 깊이 매료되었다. 일민주의가 단군 시절의 정치적 원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사상적 전통이 신라에 이어져서 ‘신라직 민주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신라적 민주주의’는 유럽과 아메리카에 전해졌고, 이를 거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일민주의’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은 안호상의 의견이다. 그의 의견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문명보다 앞서갔다고 헛소리하는 환빠 냄새가 살짝 난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내세운 반공주의로 극우반공체제를 공고하게 하면서 반일운동과 유교문화를 강조했다. 안호상의 일민주의는 이승만 정부 찬양에 악용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일민주의로 국가주의 및 반공 이데올로기를 대중에게 심었으며, 1949년에 전국의 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호국단을 발족했다.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파시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각 학교에 장교가 배치되었고, 학도호국단에 소속된 학생들은 군사교육을 받았다. 안호상은 초대 학도호국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는 안호상에게 ‘유겐트가 왔다’라고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유겐트는 독일 나치 시절에 설립된 청년단이다. 안호상은 무초의 농담에 반박했다. 학도호국단은 유겐트에 본뜬 만든 것이 아니라 신라 화랑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안호상의 민족주의는 자신이 직접 초안을 마련한 국민교육헌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국민교육헌장은 학생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의 총화단결을 요구했다. 국가와 민족 발전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논리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사회의식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국민교육헌장 아래 개인이나 인권은 실종됐다. 정부 정책에 대한 어떤 비판도 역적으로 몰수 있는 근거가 됐으며, 장기집권을 합리화하는 최고의 도구였다. 국민교육헌장의 선포를 시작으로 학교의 병영화도 진행됐다. 1969년에 고등학교 군사훈련이 의무화됐다. 이어서 75년에는 전국의 학생을 군대조직화 하는 중앙학도호국단이 발단식을 갖기도 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부는 학생들에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함으로써 이들을 정권이 요구하는 ‘국민’으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안호상이 있었다.

 

안호상은 공직에 물러난 뒤에도 자신의 사상을 교육에 주입시키려고 했다. 1978년에 안호상은 8명의 학자들과 함께 문교부가 만든 국사 교과서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국사 교과서가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만 소개하고, 고조선의 영역을 축소시켰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문교부에 낸 안호상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류 국사학자들은 안호상의 입장이 <산해경> 같은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책을 근거로 주장하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1981년에 다시 공동 명의로 정부에게 교과서 개정 청원을 요구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안호상은 자신의 시도가 뜻대로 되지 않자, 단군을 신화로 취급하는 국사 교과서를 식민사관의 잔재라고 주장했다. 즉 상고사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일본의 역사는 바로 동이족의 역사인데도 우리 교과서 어디에도 이와 같은 흔적이 보이지 않고 식민사관에 근거한 역사로만 가득 차 있다는 것. 그러나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국사 교과서를 상대로 서적발매 금지 등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도 했다. 국사학계는 안호상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식으로 무시했지만, 안호상의 활동 덕분에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재야사학자들이 점점 사회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안호상은 홍익인간을 내세우는 대종교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에 헌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반공주의를 관철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동원했고, 정부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토대를 놓았다. 문교부 장관 시절 안호상은 학교에 있는 좌익계를 잡기 위해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그랬던 사람이 북한의 국가적 행사에 참석하려고 밀입북을 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단군릉 발굴 업적을 강조했고, 평양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설정했다. 김일성은 실제로 있지도 않은 단군릉을 만들면서까지 자신의 주체사상을 강화했다. 이런 모습은 정권의 막강한 힘을 유지하려고 역사를 이용했던 남한 지도자들의 행보와 비슷하다. 이승만 정부는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일민주의를 찾았고, 박정희 정부는 군부독재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을 이순신의 영웅적 모습과 연결시켰다. 김일성이 단군을 역사적 실재로 만들어 대대적으로 알리게 되자, 안호상은 그를 찬양하기도 했다. 좌익 척결에 앞장섰던 그가 북한의 지도자를 찬양하는 모습은 두 얼굴의 아수라 백작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에 이십년 전의 밀입북 사태가 오늘날에 일어난다면, 안호상은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을까. 종교 활동을 위한 북한 방문이라고 해도 김일성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을 것이다. 고령이 아니었으면 안호상은 반국가활동으로 처벌받은 장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력을 추가할 뻔 했다. 평화를 선도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종교인도 ‘종북’으로 규정하는 세상에 살아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안호상은 자신의 신념이 완벽하다고 믿었다. 그것이 애국하는 마음이라고 여겼다. 그는 정부의 꼭두각시가 되어 모든 국민이 국가의 목적을 위해 철저하게 희생해야 한다는 외치는 파시스트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오랜 세월 개인들에게 자신의 의지나 행복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고 배워왔다. 국가의 위기에선 희생함이 당연하고,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정권의 비리쯤은 참아야 했다. 파시즘은 모든 인간관계와 생활양식까지도 규율하고 통제하는 기제가 되어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침투한다. 개인보다는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死地)로 몰고 갔다. 안호상은 민족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극단적 민족주의를 불사하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유겐트라도 좋으니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존 무초 대사의 '유겐트' 농담을 듣고 안호상이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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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11-2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념이라기 보다는 그 때 그 때 자신의 위치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네요. 순수해서 좋네요 ㅋㅋ

cyrus 2015-11-22 19:30   좋아요 0 | URL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

yureka01 2015-11-21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이나 북한이나 비슷하죠.체제가 다르더라도..이렇게 닮았을까..
지식인은 그저 권력자들의 권력의 도구역할이라니..에흐 ㅠㅠ

cyrus 2015-11-22 19:36   좋아요 0 | URL
독일의 나치 시절, 이탈리아 파쇼 정권 시절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자 밑에는 이성을 잃은 지식인들이 활개를 쳤어요.

오쌩 2015-11-2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민주의,대일통 정말 답이없네요.
전 정말 사상이라는게 무섭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상체계에 매몰되면 그것을 부정하기가 쉽지않아요.
부정하는 순간 자기존재이유를 상실하기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5-11-22 19:3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위에 만병통치약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선택하기 위해서 평소답지 않게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죠.

soando79 2015-11-2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맹목적으로 만드는 걸까요??

cyrus 2015-11-22 19:40   좋아요 0 | URL
자신이 믿고 싶은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게 되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