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나 북플을 이용하다 보면 종종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친구 관계를 맺은 분의 나쁜 소식을 접했을 때다.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려고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런 행위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 마치 나쁜 소식에 좋은 감정을 느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대신에 댓글에 위로의 말을 남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견해를 밝힌 글도 차마 ‘좋아요’를 누르지 못한다. 그 사람의 생각이 싫더라도 예의상 ‘좋아요’를 눌러줄 수는 있다. 그런데 꼭 그렇게까지 모순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 15일에 ‘싫어요’ 버튼 기능을 도입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나쁜 소식에 대한 공감을 ‘좋아요’ 버튼을 눌러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요구해 왔다. 주커버그는 이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좋아요’ 이외에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방안을 제시했다. 이 기능이 나온다면 특정인의 부고 소식, 가슴 아픈 이야기,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기분 나쁜 사건 등을 알리는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를 필요가 없어진다. 슬픔,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면 ‘싫어요’를 누르면 된다.
그런데 ‘싫어요’ 버튼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상황이 무조건 좋다고 볼 수 없다. 다수의 사람이 특정인을 겨냥한 반감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특정인을 비하하려고 악의적으로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이 많아지면,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선량한 사람이 쓴 게시물에 남아있는 ‘싫어요’ 개수는 그 사람의 일생을 파괴해버리는 낙인이 될 우려가 있다. 그 사람은 천 개나 넘는 ‘싫어요’ 개수 때문에 한순간에 ‘마녀’가 된다. 그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싫어요’ 누르기만 바쁘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싫어요’를 누르는 디지털 마녀사냥을 보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올린 한 장의 사진이 누군가가 잘못 소개하여 공유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생각해보라. ‘싫어요’ 개수가 1분에 수십 개 이상 올라가고, 욕설이 담긴 메시지와 댓글에 시달려야 한다. 감정이 집단으로 분출되어 동일시하는 심리적 현상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자신이 유리하게 만들도록 왜곡해서 쓴 잘못된 정보가 ‘좋아요’ 100개 넘어 받는다면, 누구나 그 사람의 정보를 믿는다. 그리고 ‘좋아요’를 많이 받기 위해서 남의 개인정보를 도용하여 자신이 직접 올리는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는 무조건 친한 사람의 글과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런데 이제는 ‘좋아요’ 하나 누르는 일에도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생각 없이 ‘좋아요’ 누르는 내 모습이 마치 자동차 전면 유리창에 알을 낳으려는 잠자리와 같아 보인다. 투명한 유리창이 물인 줄 알고, 거기에 알을 낳는 잠자리처럼 말이다. SNS 이용자 대부분은 깨끗하고 투명한 척하는 거짓이 진실인 줄 알고 ‘좋아요’를 누른다.
한동안 페이스북 접속을 멀리하고, 책에 관한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알라딘 서재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알라딘 서재가 ‘북플’로 변신하면서 이곳도 페이스북을 닮아간다. 자신의 일상을 알리는 사진을 공개하는 이웃이 있고, 책 소개를 짧게 알리는 이웃도 있다. 예전에 비하면 A4 1장 넘는 분량의 서평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이웃의 글은 ‘알라딘 서재’로 접속해서 읽는다. 하루에 읽는 이웃의 글은 보통 15~20편이다. 일부 글은 분량이 짧아서 정말 1초에 확인할 수 있고, 긴 내용의 글을 읽으면 3분 정도 걸린다. 진짜 꼼꼼하게 읽으면 5분 걸린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친구 관계’를 맺은 모든 분의 글을 일일이 다 읽는다거나, 꼼꼼하게 읽지 못한다. 나 또한 짧은 글과 사진이 주를 이루는 페이스북 환경에 오래 적응된 탓에 조금이라도 긴 내용의 글을 대충 읽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다 읽는다는 건 힘든 일이고, 관심 분야를 다룬 글 위주로 읽는다고 보면 된다. SNS 기능상 짧고 쓰는 글은 사람들이 읽기 편해서 좋긴 한데, 정작 책과 관련 없는 정보가 많아져서 아쉽다. 그래서 웬만하면 100자평, 일상을 공개한 사진이 있는 글에는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댓글도 달지 않는다. 글이 지나치게 긴 것도 읽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읽기 적당한 서평의 분량은 A4 용지 1장 반이다. 예전에 서평 한 편 쓰면 무조건 A4 용지 3장 정도 분량이 나왔다. 몇 년 전 모 언론사에 신문 칼럼을 쓰는 방법을 숙달하고 나면서부터 적당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새고 말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나 내 감정을 표현하기에 애매한 글이라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아도 된다. 이럴 때 필경사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I would prefer not to)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행위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극적 거절이다. ‘좋아요’를 누르는 행위와 그 개수만으로도 사람의 감정이 정직하게 표현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 다수가 열광하는 대상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사람을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좋아요’를 누르는 데에도 남의 시선에 의식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