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폴 고갱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향하는 해군 함정에 몸을 실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떠돌이 인간 고갱은 미지의 세계를 갈망했다. 작열하는 태양, 드넓은 쪽빛 바다, 물결 위로 부서져 내리는 은빛 햇살. 가장 오염되지 않은 섬이라고 생각했기에 원시와 야성을 화폭 안에 담아내고자 했던 소망이 실현될 것이라 여겼으리라. 하지만 타히티에 도착한 고갱은 얼마 동안 상상을 빗나간 광경에 실망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는 조그만 식민지 항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타히티에 정착한 지 2년 뒤인 1893년에 고갱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섬에서 그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는 많은 관람객을 몰렸으나 상업적으로는 대실패였다. 돈 한 푼 벌지 못했지만, 대중의 반응에 기운을 얻은 고갱은 타히티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목판화 시리즈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목판화 시리즈물의 제목은 《노아 노아》 . ‘노아 노아’는 타히티 어로 ‘향기’를 뜻한다. 고갱의 친구이자 상징주의 시인인 샤를 모리스가 《노아 노아》의 원고를 일부 다듬었다.

 

 

 

 

 

 

 

 

 

 

 

 

 

 

 

 

 

 

 

 

 

 

 

 

 

 

 

 

 

 

 

《노아 노아》는 열화당(1979년)을 통해서 처음 나왔고, 20년 뒤인 1999년에 서해문집 출판사에서 《고갱의 타히티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이 두 권의 책이 절판되는 바람에 《노아 노아》 원본에 실린 목판화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아쉽다. 고갱이 말년에 그린 대작 이름에서 따온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가람기획, 1999)《폴 고갱, 슬픈 열대》(예담, 2000)라는 책에서도 《노아 노아》에 있는 글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목판화 그림을 도판으로 수록하지 않았다. 고갱은 《노아 노아》 이외에도 자기 생각을 정리한 글을 많이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출간된 《전과 후》는 고갱과 반 고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반 고흐가 귀를 자르게 된 경위까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고갱의 증언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자해 사건의 내막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는 《전과 후》와 《노아 노아》를 같이 번역한 책인데 고갱의 책을 완역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를 비교해서 읽어본 결과,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있었으나 문장 일부가 누락된 것도 있었다. 고갱이 반 고흐보다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지 고갱의 글을 번역한 책들 전부 절판되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반 고흐의 편지가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오고 국내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상황이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대중에게 친숙한 유명 화가들을 소개하는 책은 잘 팔리고, 제아무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가 쓴 글이라고 해도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낮으면 외면받기 마련이다. 2013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갱 전이 열렸을 때 고갱의 글 모음집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기를 바랐건만 오히려 반 고흐에 관한 책만 더 나왔다.

 

 

 

 

 

 

 

 

 

 

 

 

 

 

사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를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는 글의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 글이 《전과 후》에 있는 건지 아니면 《노아 노아》에 있는 것인지 혼동이 될 정도로 글의 구성이 조악하다. 책 후반부에 고갱이 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글이 나온다. 그나마 《폴 고갱, 슬픈 열대》가 읽을 만하다. 글 하나하나에 출처가 적혀 있고, 고갱의 글을 시대순으로 엮었다. 또한 이 책에 고갱이 아내 메테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다. 비록 반 고흐의 편지와 비교하면 문학성은 떨어지지만, 가난과 무명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예술가의 절박하고도 솔직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아내에게 돈을 부쳐 달라고 조르기도 하며, 고갱의 그림을 판매한 화상이자 친구인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타히티에서 보고, 느끼고, 들은 것들을 상세하게 보고한다. 고갱은 아내뿐만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동지인 에밀 쉬펜네케, 에밀 베르나르, 말라르메, 샤를 모리스, 알베르 오리에(고갱을 ‘상징주의 예술가’로 소개한 비평가) 등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희귀한 편지글들은 《야만인의 절규》(창해, 2000)라는 제목의 책에 있다.

 

고갱이 쓴 편지 중에서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에게 보낸 것이 지금도 널리 회자하고 있다. 1차 타히티 여행을 마친 뒤 파리에 돌아온 고갱은 이 편지에 스트린드베리에게 자신의 전시회 도록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스트린드베리는 루소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극작가였다. 고갱 역시 루소의 책을 읽어서 원시를 향한 동경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요청을 거절하는 내용의 답장을 보낸다. 고갱의 원시 예술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 편지 때문에 고갱 관련 책에서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근시안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스트린드베리의 편지 전문을 읽어보면 그가 고갱의 재능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트린드베리가 고갱의 요청을 거절한 진짜 이유는 따로있었다.

 

 

“나 또한 선생을 분류하고, 사슬 속에 고리를 끼우듯이 선생을 끼워넣어 그 발전의 자취를 알아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중에서, 44쪽)

 

고갱의 예술은 당시에 유행하는 예술사조와 거리가 먼 독창적인 화풍이었다.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독창적인 예술이 언젠가는 제대로 인정받을 날이 오리라 확신했으나 자신의 수준으로는 시대를 앞서간 예술을 설명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면서도 고갱을 ‘창조주를 시샘하고, 늘 도전하는 예술가’라고 칭찬했다. 또한, 두 번째로 타히티로 향하는 고갱이 다시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예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우겠다고 약속했다. 스트린드베리의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갱은 자유를 갈망하는 영원한 보헤미안이자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화가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등지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입해야 스스로 존재감을 느꼈던 고갱 인생은 너무나 고독하고 외로운 느낌이다. 고갱의 타히티행과 방종에 빠지기 쉬운 그의 성격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스트린드베리의 말대로 고갱은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표출하는 ‘도전하는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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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5-08-0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메시스에서 소개된 `뭉크` 그래픽 노블을 보면 스트린드베리가 등장해요. 뭉크만크이나 인상적인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cyrus님 글속에 그를 만나니 왠지 반갑네요. ^^

cyrus 2015-08-02 11:53   좋아요 0 | URL
`뭉크` 그래픽 노블을 읽어보고 싶군요. 뭉크와 스트린드베리의 관계가 궁금해요. ^^

지금행복하자 2015-08-0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린느베리 익숙한 이름인데.. 미스 줄리의 작가인가 싶기도 하고~ 최근에 본 이름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나중에 알려주실거라 믿고 검색은 패스할께요~~
어디서 봤더라~~~ 만 반복하고 있어요~^^

cyrus 2015-08-02 11:5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혹시 ‘미스 줄리’를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08-03 11:05   좋아요 0 | URL
아니요~ 읽어보진 못 했어요. 최근 마스 줄리 영화가 개봉해서 찾아봤었어요. 연극계의 고전이라고 하더군요~~
영화에서는 묘한 매력의 줄리아가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