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해야 할 5월의 날씨답지 않게 어제는 보슬비가 온종일 지루하게 내렸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는 폭풍 주먹 제대로 날리지 않은 채 지루하게 경기를 끝냈다. 허무함만 남긴 먹튀 대결에 된 이 경기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사 가는 친구가 이삿짐 옮기는 일을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이 경기를 TV로 끝까지 봤을 것이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가 링 위에서 지루한 주먹 교환만 하고 있을 때 나는 친구의 짐을 새집에 옮기는 것을 도와줬다. 고등학생 때부터 처음으로 만나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는 10년 지기 친구의 부탁이라서 단번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 친구는 며칠 전에 여자 친구와 혼인 신고를 하고,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이제부터 그들은 부부가 된 것이다.

 

 

 

 

 

 

 

 

 

 

 

 

 

 

 

 

 

친구도 나처럼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다만, 즐겨 읽는 책은 다르다. 친구는 판타지소설을 즐겨 읽는다. 가지고 있는 판타지소설의 양은 많지 않지만, 시리즈 전권을 모은 것도 꽤 있다. 반면, 제수는 만화책을 좋아한다. 특히 일본 만화에 관심이 많다. 책을 읽고 사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100% 공감할 것이다. 이사를 할 때 많은 양의 책을 옮기기가 쉽지 않다. 집의 공간이 좁더라도 자신이 모은 책을 끝까지 보관하고 싶은 것이 애서가의 마음이다. 《장서의 괴로움》(정은문고, 2014)의 저자 오카자키 다케시는 이사야말로 책을 처분할 기회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책을 팔고 남은 돈으로 새 책을 산다. 이처럼 애서가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장서량이 어느 한도를 넘어서게 되면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은 넓고, 책은 많지만, 책장은 좁디좁기 때문이다. 특히 각각 다른 공간에서 생활했던 남녀가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질 때 책은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앤 패디먼의《서재 결혼 시키기》(지호, 2002)는 ‘책의 결혼’이 극적으로 성사되기까지 겪게 되는 갈등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앤과 남편 조지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결혼을 하면서 자신이 혼자 살 때 가지고 있었던 책을 모두 공동의 공간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문제는 장서를 보관하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앤은 자신이 정한 분류에 맞춰서 책을 꽂는 ‘세분파’라면, 조지는 분류에 신경 쓰지 않고 아무 곳이나 책을 꽂는 ‘병합파’다. 두 사람은 분류 방식을 통일하기 위해 합의를 봤고, 그 과정에 서로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는 것을 원하지만, 조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발표 연도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근거를 내세우면서 앤의 장서 보관 방식을 반대한다. 

 

어제 친구와 제수는 새 보금자리에서 ‘책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식 거행에 앞서 나는 주례사를 자처하여 두 사람의 서재를 축복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원하는 장서 보관 방식을 알아봤다. 친구와 제수가 원만하게 책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로 했다. 친구는 조지처럼 병합파다. 그가 가진 책들은 전부 다 판타지소설이라서 주제를 분류하면서까지 책을 꽂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제수의 생각은 달랐다. 세심파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만화책이 눈에 띌 수 있도록 꽂히기를 원했다. 보기 좋게 깔끔히 정리된 서재를 선호했다. 두 사람 다 고집이 센 편이라서 이들을 만족하게 해줄 타협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최대한 형수의 취향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책을 정리하기로 했고, 완결된 판타지소설과 만화책은 책장 맨 위 칸에 꽂을 것을 제안했다. 형수는 황미나의 《레드문》구판 시리즈 전권(2000년 서울문화사에서 나온 구판의 권수는 총 18권이며 애장판은 총 12권으로 이루어졌다)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만화에 문외한이지만, 황미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2004년에 나온 애장판마저 절판인 데다가 이미 오래전에 판이 끊긴 구판 전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만화를 정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으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레드문》 시리즈를 사람들의 눈에 많이 띌 수 있는 칸에 꽂고 싶었다. 책장 맨 위 칸의 높이는 보통 어른 키만 하므로 책장을 볼 때 시선이 가장 먼저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 옆에는 친구가 아끼는 판타지소설 시리즈를 꽂았다. 신기하게도 친구와 제수의 애장도서가 처음으로 만나서 합방한 맨 위 칸에 남은 공간이 생기지 않았다. 책들이 딱 맞게 꽂혔다.

 

제수는 《레드문》 18권을 첫 번째 칸에 보관하는 나의 제안에 무척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알고 보니 이 책에 두 사람 간의 애정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추억이 숨어 있었다. 친구와 제수가 한창 뜨겁게 연애를 하고 있던 시절에 제수는 《레드문》을 소장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녀의 소원을 알고 있었던 친구는 수소문 끝에 구하기 힘든 그 만화책을, 그것도 전권을 사는 데 성공했다. 제수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준 친구의 모습에 무척 감동했고, 지금도 이 《레드문》을 가장 아끼는 만화책으로 여기고 있다.

 

애서가에게 책은 ‘사랑’의 대상이다. 애인 다루듯 소중하게 읽고 간직해야 한다. ‘책을 사랑한다’는 것은 책의 내용이나 독서 행위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넘어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사랑한다. 그러나 책에 대한 취향만큼은 모든 애서가가 다 똑같을 순 없다. 책을 다루는 습관이 서로 다르면 갈등이 드러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독서 취향을 존중하고 반영할 수 있도록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상대방의 독서 취향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불경의 표시를 보이면서 무시하는 반응은 애서가가 경계해야 할 자세다. 상대방의 독서 취향을 포용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책을 사랑하는 방법일 수 있다. 당신이 애서가라면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나는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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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0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대필작가가 4명이란 소리도 있던데, 작품 진위여부까지 따지는 부부가 있다면 서재이혼소송까지 갈지도요ㅎㅎ
그러니까 이삿짐 옮기는 것보다 책정리 전문가로? 이거 괜찮은 직업일수도ㅎ

cyrus 2015-05-05 15:33   좋아요 0 | URL
책을 좋아서 그런지 책정리는 귀찮게 생각하지 않아요. ㅋㅋㅋ

북다이제스터 2015-05-04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다른 독서 취향의 존중... 깊게 공감합니다. 하지만 독서를 하는 그 날이 먼저 오길 기대해 봅니다.

cyrus 2015-05-05 15:39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요즘 책이 많은 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에이바 2015-05-0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패디먼 글에서 책을 다룰 때 궁정파 연인이랑 육체파 연인으로 나누는 것도 감명 깊었어요. 전 궁정파인데 싸이러스님은 어떤 연인이신가요 ㅎㅎ

cyrus 2015-05-05 15:41   좋아요 0 | URL
저도 궁정파입니다. 책에 조금이라도 접히는 걸 싫어합니다. ^^;;

게으른독서가 2015-05-04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결혼식이라, 책을 다루는 습관이 달라 생길 수 있는 갈등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정말 그러네요. 합의점을 찾는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4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란 말을 들을지도... ㅎ

cyrus 2015-05-05 15:45   좋아요 0 | URL
<서재 결혼 시키기>의 저자 앤 패디먼도 남편과 장서 보관 방식에 대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해서 부부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고백했어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결혼할 때 앤의 경험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

수이 2015-05-0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기 보지 못했는데 어쩐지 승리한 기분이라니 ㅋㅋ 음 좋은 일 했는데_ 결혼해서 책 처음 뒤섞고 정리할 때 생각나서 잠깐 짜릿했어. 신혼 기분을 만끽해주는 이 페이퍼 아주 굿이오!

cyrus 2015-05-05 15:48   좋아요 0 | URL
누님은 형님이랑 책 보관 때문에 싸운 적 없어요? 형님도 책 엄청 좋아하잖아요. 지민이도 두 분처럼 책 좋아하면 이거 행복한 고민에 빠지겠어요. 앞으로 책 정리하기가 힘들어질 거예요. ㅎㅎㅎ

수이 2015-05-05 23:42   좋아요 0 | URL
지민이도 책 욕심은 많아_ 아직까지는 괜찮은데_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는 책이 그다지 많지 않아, 다만 난 다시 읽을 책이 아니다 싶으면 선물도 하고 중고서점에도 잘 갖다 파는데 비해 남편은 일단 자기 품에 들어온 책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조차 싫어하는 소장파? 그래서 이번에 이사할 때도 내 책은 많이 처분했지_ 네 매형이 알면 난리법석 피울 거 알아서 조용히 팔았는데 눈치챈듯_ 책이 왜 이렇게 조금이야? 하더라고 ㅋ

transient-guest 2015-05-05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메이웨더-파퀴아오 경기를 재미있게 봤어요. 다만 메이웨더가 너무 도망다니기 바쁘고, 둘 다 뚜렷산 우세가 없었기 때문에 UFC였다면 아마 무승부로 처리되었을 것 같습니다. 6년전, 파퀴아오가 전성기 때 싸웠다면 메이웨더는 KO패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분 부부의 이야기는 사람과 서재가 모두 각각의 상대와 결혼하는 듯해서 재미있습니다.ㅎㅎ 그걸 도운 님도 대단한 듯..

붉은돼지 2015-05-05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결혼식의 주례(?)를 보시다니 정말 멋지고 보람찬 일입니다 ㅋㅋㅋ
레드문도 빨리 재출간되었으면 좋겠어요^^

cyrus 2015-05-05 15:53   좋아요 0 | URL
게스트님은 복싱 경기를 보는 것을 좋아하시는군요. 사실 저는 세기의 대결이라는 광고에 혹해서 무척 궁금해서 경기를 보려고 했던 복싱 문외한입니다. ^^;;

저는 그 날 이삿짐 정리를 얼른 끝내고 집에서 푹 쉬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됐어요. 저뿐만 아니라 두 사람도 이 날을 잊지 못할 겁니다.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05-05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문 저렇게 귀한 책인줄 모르고 20년지기 친구한테 선물로 줘버렸죠~ 오래되서 누렇게 변했는데도 주라고 계속 졸라대서 ㅎㅎ

cyrus 2015-05-05 15:5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후회 많이 했겠어요. 귀한 책이라서 중고가도 높아졌을 겁니다.

2015-05-05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5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5-06-20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던 두 권입니다. cyrus님의 글을 통해 보니 더 반갑네요.

cyrus 2015-06-20 22:54   좋아요 0 | URL
두 권의 책은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읽어봤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