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를 타고 5주간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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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먼족 마을 상공을 날던 비행기 조종사가 빈 콜라병을 던진다. 난생처음 보는 병을 보고 부시먼들은 고민한다. 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추장은 땅 끝에 가서 신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길을 떠난다. 부시먼은 영화(1980년에 개봉된 영화의 원제는 ‘The Gods Must Be Crazy’, 국내에 처음 개봉되었을 당시 제목은 ‘부시맨’이었다.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부기먼’이라 써야 한다) 속에서 콜라병을 들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미개인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콜라병을 든 부시먼은 추억의 영화에 나오는 장면일 뿐이다. 하늘에 떨어진 콜라병에 놀라는 부시먼은 없으니까. 무분별한 자연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에 쫓겨나다시피 사는 부시먼들은 칼라하리 사막에 찾아오는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맞아 전통춤을 추고, 사냥하는 장면을 재현하면서 살아간다.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 이 말은 문명을 인간의 오염원으로 간주하면서 그에 물들지 않은 순수 자연의 인간을 찬탄하는 문구 정도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이 말 속엔 이웃 부족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폭력적인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원시사회는 평화롭지 않다. 미국의 인류학자 니콜리언 섀그넌은 순수하고 서정적인 ‘고결한 야만인’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섀그넌은 최후의 원시 부족으로 알려진 아마존에 사는 야노마뫼족을 35년간 현지 조사를 했는데, 그가 목격한 야노마뫼 족은 이웃 부족과의 전쟁과 약탈이 만연한 삶을 살고 있었다. 원시사회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섀그넌의 책(《고결한 야만인》, 생각의힘, 2014)은 출간 당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명의 얼룩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원시 부족을 공개한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인상 깊게 본 사람이라면 섀그넌의 책에 반감을 보일 것이다.

 

지역적 환경에 따라 평화롭게 사는 부족이 있을 것이며 반대로 척박한 환경 속에 생존하기 위해서 폭력과 약탈이 불가피한 부족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야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점이 불편하다. 이 세 글자 속엔 세계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한 제국주의적 시선이 남아 있다. 고귀하고 야만적이라는 기준은 지극히 서구적인 개념이다. 쥘 베른의 처녀작이자 ‘경이의 여행’ 시리즈의 첫 작품인 《기구를 타고 5주간》은 19세기 문명인의 눈으로 바라본 아프리카가 펼쳐진다. 베른은 아프리카 원시사회의 양면적 세계를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지리학자 새뮤얼 퍼거슨 박사와 그의 친구 딕 케네디 그리고 하인인 조 윌슨은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는 아프리카 중앙부를 기구로 횡단하는 무모한 탐험에 나선다. 수많은 유럽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디뎠지만,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가까이 가보지 못했다. 야생에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부족들의 공격이나 풍토병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다. 기구를 처음 보는 부족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아프리카 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기구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아프리카 탐험 중에서 가장 큰 위기는 식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른의 소설이 늘 그랬듯이, 과학의 혜택(기구, 총)으로 무장한 인간은 자연(아프리카)의 무시무시한 위력 앞에 굴하지 않는다.

 

‘고결한 야만인’은 원시사회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면서도, 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여 문명인으로 교화시키려는 서양식 진보를 그럴싸하게 미화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조는 진보의 무한한 발전을 믿고, 문명과 야만을 구분한다. 아름다운 자연이 야만적인 아프리카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또 부족들의 미개함을 무시하기도 한다. 조는 빈 병을 땅으로 던지면 부족들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에 놀라는 영화 속 부시먼의 모습이 연상된다.

 

어떤 마을을 120미터 높이에서 지나가고 있을 때 조가 말했다. “이 빈 병을 놈들에게 던져도 될까요? 병이 깨지지 않으면 놈들은 이 병을 숭배할 겁니다. 깨져도 이 유리조각을 부적으로 삼겠지요.”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병을 던졌다. 병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오두막으로 달아났다. (198쪽)

 

퍼거슨 박사 일은 기구를 타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내려다본다. 세계를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은 원시 부족을 제압한다.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기구를 처음 본 원주민들은 도망가기에 바쁘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주술사가 기구의 닻에 걸려 공중에 매달리는 장면은 문명의 과학 앞에서 힘 한 번 제대로 못 쓰는 ‘고결한 야만인’을 보여준다. 그들의 순수함은 고결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문명의 혜택이 필요한 어수룩한 존재로 전락한다. 하지만 베른은 조처럼 진보의 힘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다. 퍼거슨 박사만이 ‘고결한 야만인’을 ‘고결한 문명인’로 만들려는 진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원시사회 그 자체를 보려고 한다. 퍼거슨 박사 일행은 식인 풍습이 있는 부족들의 학살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케네디와 조는 역겹다고 말한다. 이들은 잔인한 파괴를 일삼는 부족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불쾌하고 야만스럽게 느낀 것이다. 반면 퍼거슨은 잔인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야만적인 문화로 규정하는 인식을 지적한다. 케네디가 부족들의 싸움을 멈추기 위해 총을 꺼내들자 이를 퍼거슨이 막는다. 아무리 잔인한 풍습이라도 문명인이 개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구를 타고 5주간》은 선천적으로 착한 본성을 의미하는 ‘고결한 야만인’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련된 수사가 만들어 낸 문화적 환상에 도취한 제국주의는 ‘유럽의 의무’라는 자신들만의 사명감을 내걸고 식민지 정복을 원한다. 베른이 묘사한 아프리카 탐험은 낭만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담보로 내건 탐험가들의 ‘아프리카 러쉬’는 멈추지 않았다. 아프리카 탐험을 꿈꾸던 독자들은 아프리카로 떠나는 ‘경이의 여행’에 열광했다. 제국주의의 야욕을 경계하는 퍼거슨 박사의 걱정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기구를 타고 5주간》이 발표된 지 20여 년 후에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로 아프리카 종단 철도를 구상한 영국인 광산업자 세실 로즈는 케이프주 식민지 총독이 되어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착취했다.

 

 

 

※ 퍼거슨 박사의 모험 과제는 버턴과 스피크가 탐험한 아프리카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버턴을 빅토리아 호를 발견한 탐험가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번역가로서의 명성이 더 알려져 있다. 1885년에《아바리안나이트》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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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3-0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소설 맞나요? 논픽션처럼 보이네요. 고결한 야만인과 함께 꼭 읽겠습니다. ^^

cyrus 2015-03-02 10:52   좋아요 0 | URL
베른은 평생 영국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는데 오직 상상력으로만 여행 장소를 묘사했어요. 현실과 공상을 적절하게 조합한 이야기가 베른 소설의 특징이에요. 만병통치약님은 요즘 인류학 분야 책을 읽고 계시니 <고결한 야만인>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