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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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옮겨보기 전에는 체험을 완성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소설가 르 클레지오였다. 르 클레지오가 글을 쓰는 행위는 살아있는 사람(작가)의 몸을 석고로 떠내는 표현방식과 비슷하다. 이런 글은 체험에 묻어있는 거짓과 허위의 껍질이 벗겨져 있고 진실 된 삶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누군가의 생이 멈추었을 때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에 석고를 덧칠해 만드는 데스마스크(Death marsk)도 그렇다. 죽은 이의 얼굴을 보는 문화에 익숙지 않은 우리에겐 아무래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데스마스크는 딱히 특별한 용도는 없다. 죽은 사람의 무표정한 표정만 남아있을 뿐이다.

 

박범신의 소설 《소소한 풍경》이 시작되는 첫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소설가의 제자가 스승에게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를 본 적이 있느냐고 전화로 물어보는 장면.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혹시 문장으로 뜬 데스마스크를 본 적이 있느냐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본 적이 있다. 살아생전에 쓴 여러 가지 원고들을 모은 유고집이 작가의 데스마스크라고 생각한다. 유고집도 데스마스크처럼 작가가 죽은 뒤에 나온다. 또 유고집은 작가의 평소 모습을 오롯이 담겨 있다.

 

작년에 우리 곁을 갑자기 떠나버린 어느 뮤지션의 데스마스크가 나왔다. 신해철의 유고집, 제목은 《마왕 신해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해철은 이렇다. 음악과 사회에 대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다. 했다 하면 직격탄이다. 그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대마초 비범죄화를 주장했고, 급기야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연예인들과 비교해 심하게 튀는 그의 이런 행보들은 많은 안티 세력을 생겨나게 하였다. 그를 마왕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까칠하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신해철 스타일은 성향에 따라 심하게 거슬려 보일 수 있다.

 

과연 신해철은 어떤 사람인가? 마왕을 추종하는, 소위 ‘고스 식구’가 아닌 독자는 그의 정체가 무척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공포물을 읽는 것이 두려운 마냥 유고집을 펼치기 망설여진다. 책 표지 사진을 뚫고 나오는 신해철의 카리스마가 오버랩되어 ‘까칠한’ 글만 있을 거로 생각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이 유고집을 생전 신해철의 말투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해철의 쾌변독설》(지승호, 부엔리브로, 2008)과 같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 책의 카피처럼 신해철의 데스마스크는 세상을 씹어서 여러분에게 ‘퉤’ 뱉어내지 않는다. 그 대신, 신해철 자신이 세상을 불량스럽게 씹어대는 이유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사실 표현이 거칠 뿐이지 그렇다고 어리숙한 독자 앞에 감정의 배설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유고집을 읽는다고 해서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피해, 불면증, 정서불안, 과대망상, 인성변화, 귀차니즘, 대인기피, 왕따, 식욕감퇴, 발육부진, 성적하락, 가정불화, 업무능력 저하, 소득감소, 직장생활 부적응 같은 증상이 생기지 않으니 전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신해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 일으키고 혐오하는 독자가 있다면 ‘마왕’이라는 가면을 쓴 신해철에 너무 익숙해져서 생긴 이상 신호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신해철의 글은 자신의 안티를 배려하지 않는다. 고스트스테이션 오프닝에 나오는 경고 문구 비슷한 것도 없다. 신해철에 대한 악감정을 지울 수 없거나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면 저자나 출판사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마시라)

 

유고집의 제목이 아쉽다. 마왕 신해철이라니. 책의 제목은 그 책의 얼굴과 같다. 아무리 그가 카리스마의 대명사로 통한다고 해도 진짜 신해철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낸 신해철의 얼굴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건 아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마왕’이라는 수식어만 붙이면 고인의 삶이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것인가. 유고집은 ‘마왕’ 신해철이 아닌 ‘인간’ 신해철의 삶을 본뜬 데스마스크다. 제목만 보고 조건반사처럼 마왕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인간’ 신해철의 진짜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속에 새겨진 굴곡진 삶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차라리 책 제목을 이름 석 자만 놓고 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름만으로도 신해철이 어떤 존재인지 독자에게 보여주는 데 충분하다.

 

‘마왕’의 가면을 벗은 신해철의 모습은 자아가 매우 강한 편이다. 그러나 경거망동과 거리가 멀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듯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그의 말과 글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뼈대가 세워져 있고, 직설적인 그의 카리스마가 입혀진 것이다. 물론, 그의 생각에 무조건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그를 생각해서 신해철의 생각을 건전하게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신이 만약 신해철 팬이라고 자처한다면 그 생각을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 한다. 신해철의 눈에는 그런 당신을 본인의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 비판을 하고 싶다면, 신해철의 팬임을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신해철이 생각하는 팬이란 누군가를 남이 아닌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좋으면, 그냥 좋아하면 된다. 스타를 열렬히 좋아하는 이 맹목적 반응은 곧 가장 원초적인 팬심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이면서도 맹목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신해철은 팬을 가족의 일원처럼 여긴다. 그래서 그의 팬들은 새벽에도 잠 못 들고 ‘고스트스테이션’이 시작하는 시간대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고스트스테이션’은 단순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넘어서서 신해철과 팬들이 함께 떠들고 놀 수 있는 유일한 만남의 장소였다. 오랜 시간 그와 교감하면서 나눈 그 지나간 시간이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기에 지금도 그를 그리워한다.

 

신해철은 노래를 통해 팬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고, 그저 자신의 노래를 기억해주는 팬들이 무척 고마워했을 사람이다. 그의 까칠한 성깔에 카타르시스를 느껴 그를 좋아하는 팬들이 있었기에 그는 마왕이 되었다. 하지만 신해철 본인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면이었을 것이다. 신해철 팬이든 그의 팬이 아니든 관계없이 《마왕 신해철》을 읽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팬민정음」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한다. 신해철이 대중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마왕’의 가면을 쓰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왜곡된 이미지를 벗어내 ‘가수’에서 더 나아가 ‘인간’ 신해철로서 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다.

 

‘마왕’ 신해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 신해철은 살아 있다. 데스마스크로 남은 유고집 속에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혹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진짜 신해철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신해철의 삶을 신해철이 직접 손으로 글로 옮긴 유고집은 대중이 만들어 낸 낡은 허물을 완전히 벗겨내어 완성된 신해철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떠난 빈자리가 커다랗게 느껴지고, 그가 남긴 수많은 노래만으로도 깊은 슬픔을 달래지 못하는 지금에서야 우리는 진짜 ‘인간’ 신해철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진작 인간 신해철을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니 제발 양심이 있다면 유고집을 읽고 난 뒤에 ‘나, 이제부터 신해철 팬이다’ 하면서 법석을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당신의 모습을 신해철이라면 침 같은 독설 한 마디 뱉어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를 가족처럼 여기고 노래를 좋아했던 팬들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살아있다」라는 짧은 글 마지막 문장이 자꾸 팬들의 귓가에 메아리가 되어 맴돈다. “있을 때 잘하라고. 나는 여러분의 곁에 영원히 있지 못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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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5-01-23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한 상식의 의문, 그 상식이 과연 상식적인가에 대한 신해철의 독설, 솔직히 공감이 컸지요. 진중권 교수의 후기글을 보면서 마음이 찡했습니다. 신해철 동급의 독설가인 진중권 교수의 글은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보니 말이죠. 노무현 대통령 서거 기념 공연에서 삭발하던 그가 ˝그대에게˝를 부르기 전에 내뱉은 말이 가슴이 아리네요. 진짜 2달동안 술에 찌들린 그의 고통....

이젠 그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사실이 참 착찹하네요

cyrus 2015-01-23 19:4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만화애니비평님, 신해철의 진정한 팬이시군요. 사실 저는 신해철의 음악을 듣곤 했지만, 제 입으로 신해철 팬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어요. 생전 신해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유고집을 읽고 나서야 그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되었어요. 진작 이 글이 생전에 나왔더라면 신해철을 좋아했었을 것입니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yamoo 2015-01-2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이 언제나 저보다 한 발 빠르군요. <군주론>포스트도 그렇고, <올재 클래식> 포스트도 그렇고 이 포스트도 그렇고...매번 한 발 늦어 글 올리기를 포기하게 됩니다..ㅎㅎ

cyrus 2015-01-23 19:49   좋아요 0 | URL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글에 허점이 있을 겁니다. 수박 겉핥기 수준이에요. 이 허점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글을 올려주세요. 기대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