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소리 없이 가버렸다
김향아 지음 / 책과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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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윤동주 시인은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부끄러워했다. 삶의 어려움과 엄숙함에 쓰인 자신의 시가 진실한 것인지 자아 반성을 통해 얻은 시인의 결론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는 지금도 우리 가슴을 뛰게 할 정도로 순수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이타적인 시인의 시선은 언제나 주변인을 향한 연민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시는 쉽게 써져서 나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세상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감성이 아니면 이런 주옥같은 시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김향아 시인의 제1시집 『세월이 소리 없이 가버렸다』은 인생 살기 어려운 시대에 나온 쉽게 쓰인 시다. 시는 대체로 단조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이 긴 시는 많아야 두 쪽 이상 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집에 시적 감정을 질질 끌면서 길게 쓴 시가 없다. (이 시집에서 제일 긴 내용으로 이루어진 시가「울 오빠」이다) 그리고 시인은 난해하면서도 추상적인 단어를 쓰지 않는다. 시구 한 줄 한 줄에 여성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 있어 독자의 눈과 마음에 단숨에 박혀 버리게 만든다.

 

 

그냥 당신이 좋아요
왜냐고 묻지 마세요
이유가 없거든요

 

그래도 알고 싶다면
지나가는 바람에게
살며시 물어보세요

 

혼자 하는 독백을
스치던 바람이
들었을 것 같군요

 

당신이 보고플 땐
하늘을 보았어요
떠 있는 뭉게구름이
알려 주겠군요

 

당신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묻는다면
"그냥"이라 말하겠어요

 

 

(「당신이 좋은 이유」, 76쪽)

 

 

김향아 시인의 시는 원태연, 용혜원, 이정하의 사랑시처럼 독자에게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그리워하는 대상 또는 그와 함께한 시간을 그리워한다. 대상을 향한 보고 싶은 감정을 절제하지 않는다. 시에 드러나는 주제는 단순하고, 어디에서 본 듯한 상투적인 표현이 많이 보이게 된다. 시는 쉽게 읽혀지더라도 시인의 개성이 돋보이지 않는다.

 

시를 즐겨 읽고, 시 작문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이 시집을 야박하게 평가했을 것이다. 이게 과연 정말 시라고 쓴 것이며 독자에게 떳떳하게 보여줄 수 있을 수준이 되는지 시인의 능력에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대한문인협회에 등단했다. 하지만 시를 냉정하게 문학성 위주로 평가한다면, 기교와 표현력이 부족한 ‘아마추어’ 수준에 벗어나지 못한다. 시를 너무 쉽게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리는 날」은 감수성이 충만한 독자라면 매력적인 시로 보겠지만, 비가 내리면서 느끼게 되는 센티멘털을 전달하는 비유가 새롭지 못하다.

 

 

비가 내린다
마음에도 내린다

 

창문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이내 사라지지만

 

마음으로 내리는 비는
차곡차곡 쌓인다

 

쌓이고 쌓여 강을 이루면
그대 내게 올 수 있도록
작은 종이배 하나 띄우렵니다

 

 

(「비가 내리는 날」, 21쪽)

 

 

비는 하늘에서 뚝뚝 떨어진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울해지고, 잊고 있던 감성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갑자기 울고 싶어진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얼굴에 내리는 슬픈 감정의 눈물로 대치되는 비유법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러한 비유는 시를 쓰지 않는 사람도 생각할 수 있다. 참신한 비유도 너무 흔하게 사용되면 독자의 딱딱한 마음을 녹이는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시를 쓰게 되면 다양한 비유법을 알아야 하고, 기존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시는 모든 감정을 문장으로 술술 풀리듯이 써내려가는 쉬운 글이 아니다.

 

시인의 첫 시집은 문학적인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많이 받지 못할 만큼 부끄럽다. 그렇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쉽게 썼다는 점에서 시인의 노력을 높게 사고 싶다. 약간 오글거리는 면은 있으나, 대체로 시가 귀여우면서도 순수하다. 반면에 슬픈 여운이 느껴지는 시도 있다. 시집에 병으로 쓰러진 오빠를 걱정하는 각별한 애정(「울 오빠」) 그리고 어머니의 따듯한 품을 그리워한다(「늦은 눈」).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없든 같이 있든 그를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지고지순한 사랑 감정을 과감하게 표출하기도 한다(「당신이 좋은 이유」「님이시여!」「기다림 2」「그거 알아요?」「꿈」)

 

 

어디쯤 와 있을까?
지금 나의 위치는
세월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잠시 뒤돌아본 나의 삶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들이 빌딩처럼 서 있구나!

 

행복했던 시절들
멈추고 싶었던 순간들
너무나 슬펐던 기억들
지우고 싶은 시간들

 

내 곁에 머물렀던 그리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갔을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버린
보고 싶은 사람들......

 

 

(「삶」, 116쪽)

 

 

하지만 시인은 그들을 그리워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했던, 이제는 소리 없이 지나가버린  세월의 흔적을 만나고 싶어 한다. 시인에게 시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추억의 대상(어머니,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 등)들을 다시 불러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시인의 마음으로 되돌아온 것들은 문장으로 형성되어 독자들 앞에서 복원된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산 건 아닌지 자아 반성을 한다.

 

평범한 시를 읽었다고 해서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혹시 시인이 첫 시집이 흡족하지 않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점점 더 인생 살기 어려워지는 요즘, 이런 쉽게 쓰인 시가 나는 더 반갑다. 쉽게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표현을 구사하는 시인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 순수한 감정 그대로 다음 시집에서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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