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다니구치 지로의 『고독한 미식가』(이숲, 2010년)를 보면서 싱거운 음식을 먹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 음식의 맛을 음미하는 주인공 고로의 삶은 내 취향에 가까워서 공감은 했지만, 맛을 느끼는 고로의 표정이 단순하게 그려져서 그런지 음식들이 맛있게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식당들은 만화 원작자인 구스미 마사유키가 직접 가보고 음식을 먹어 본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부 식당들은 운영되고 있다. 드라마 에피소드 한 편 끝나면 원작자가 에피소드의 배경이 된 실제 식당에 가서 음식을 소개하는 내용의 방송코너가 나온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음식이 나오는 드라마 한 편이 끝난 뒤에 이어서 ‘찾아라! 맛있는 TV’가 방영되어 맛집을 소개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드라마에 나오는 진짜 음식들이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는 이야기가 있는 ‘먹방’이다.

 

 

 

 

 

고로 역을 맡은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는 정말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다. 그를 촬영하는 카메라 앵글은 배고픈 시청자를 유혹한다. 카메라는 음식을 먹는 고로의 모습을 최대한 가까이 촬영한다. 절대로 야식이 당기는 야심한 밤에 드라마를 보면 안 된다. 특히 일본에 오래 살아서 그곳 음식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생각하기에도 보는 사람의 미각을 자극하게 만드는 먹방을 가장 잘 표현한 만화를 꼽는다면, 오가와 에츠시의 『신 중화일미』(학산문화사, 2004년-절판)다. 1999년에 국내에 첫 선을 보인 TV 애니메이션 ‘요리왕 비룡’의 원작이다.

 

 

 

 

 

 

 

199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 만화를 알 것이다. 올해 스무 살인 친구들은 이 만화를 잘 모를 수도 있다. 이 만화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대 차이를 느끼게 된다. 당신이 요리왕 비룡 만화를 꼬박꼬박 챙겨봤고, 음식을 맛볼 때마다 흘러나오는 웅장한 중국풍 BGM를 콧소리로 낼 수 있다면 아저씨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아저씨 축에 들어간다. 만화 전문 케이블 채널에 질리도록 방영해준 재방송도 챙겨봤다. 

 

 

 

 

 

 

중국 음식이 나오는 만화가 이렇게 큰 인기를 얻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특히 중국무협영화에 나올법한 휘황찬란한 요리 기술과 음식 맛에 깜짝 놀라는 인물들의 과장된 묘사는 수많은 패러디와 유행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찮은 요리 재료마저 최상급의 별미 음식으로 만드는 비룡은 ‘사기캐’(흠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한 캐릭터를 뜻하는 은어)에 가깝다. 비룡은 절대미각의 소유자다. 음식을 한 번 맛을 보면 거기에 들어간 모든 재료, 심지어 조미료마저 다 맞춘다. 어렸을 때부터 비룡은 자신이 어머니이자 음식점 국화루의 주방장인 미령이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자랐는데,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만든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기억해 자신이 직접 만들기도 한다.

 

 

 

 

 

 

"아.. 아니! 맛이 살아있다!" (『신 중화일미』)

 

만화는 동네 중국집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화려한 중국 음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기술을 가진 주인공이 대결구도에 뛰어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런 만화를 어찌 안 볼 수가 없겠는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비룡의 요리 능력은 향상된다. 이제는 ‘전설의 요리 도구’까지 등장하면서 만화는 점점 산으로 간다. '요리 만화'가 점점 ‘요리 판타지 무협 만화’로 요상하게 변한다. 그리고 비룡이 만든 음식을 맛보면서 지나치게 감탄하거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인물들의 표정은 만화가의 신의 한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각을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다. 비룡이 만든 음식들이 상상 속에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먹음직스러운 느낌이 나는 것이다. 실제로 오가와 에츠시는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최대한 맛을 느끼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비록 우스꽝스러운 면은 있지만, 만화를 보는 독자는 자신도 만화 속 음식을 직접 맛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한다.

 

 

 

 

 

 

천하의 비룡도 뛰어난 맛에 굴복해서 나오는 과장된 표정 굴욕을 피하지 못했다.

(『신 중화일미』)

 

만약에 오가와 에츠시가『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처럼 음식을 평소대로 식사하듯이 먹는 인물들의 표정을 그렸다고 상상해보라. 음식을 한 입 씹으면서 맛을 음미할 때 나오는 대사도 인물의 표정에 어울려야 만화의 재미가 산다.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그냥 입 안에 음식물을 씹으면서 ‘음.., 이거 정말 맛있어!’라고 조용히 말하는 사람(『고독한 미식가』)과 손을 쥔 숟가락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우걱우걱 음식을 탐스럽게 먹으면서 “아니! 세상에 이런 맛은 처음이야. 마치 음식이 살아있는 것 같아. 정말 맛있어서 또 먹고 싶어!”라고 흥분하는 사람(『신 중화일미』). 두 사람의 대사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방금 전에 『고독한 미식가』를 싱거운 음식으로 비유했다면, 『신 중화일미』는 환상의 진수성찬이다. 천국에 가면 맛 볼 수 있는 환상의 음식이다. 여기서 다만 『고독한 미식가』의 작품성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싱거운 음식은 조미료가 팍팍 들어가고, 순전히 자극적인 맛이 감도는 음식보다 맛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서 싱거운 음식을 찾는다. 이런 음식도 자주 먹으면 소중한 맛을 느낀다. 그동안 자신이 짠맛에 길들여졌음을. 짠맛이 덜한 음식도 맛있어 보인다. 상대방이 맛 없다고 느껴지는 음식이 내 입맛에 맞을 수도 있다.

 

『신 중화일미』에 나오는 음식들이 입맛 까다로운 상류층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급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룡은 맛이 아닌 최상품의 재료와 화려한 장식으로만 내세우는 속물적인 요리를 싫어한다. 그리고 맛으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음식도 경계한다. 비룡의 목표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맛으로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비룡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초라한 재료로 훌륭한 맛을 내는 음식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값비싼 재료가 여러 가지 들어가고, 유능한 요리사의 손에 만든 음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맛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음식 중에는 먹는 사람의 건강을 망치는 것도 있다. 결국 『신 중화일미』도 결국 『고독한 미식가』처럼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서 잊고 있던 맛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소박한 음식도 맛이 있고,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연 2014-12-01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독한 애서가가 고독한 미식가를 만나셨네요ㅋㅋㅋ 멋진데요ㅎ

cyrus 2014-12-01 22:11   좋아요 0 | URL
혼자서 밥 잘 먹는 만화 주인공이 혼자서 독서하는 제 모습이 비슷해서 호칭을 지어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