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면 황금가지 출판사의 ‘환상문학전집’ 시리즈를 구입한다. 2002년에 환상문학전집 첫 번째 책인 E.T.A.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을 시작으로 고딕문학에서 현대 SF까지 총 40여 권 이상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초창기에 나온 시리즈 일부는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희귀본이라서 온라인 중고서점에 정가보다 엄청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고 있다. 정말 그 책을 읽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거금을 지르는 결단력을 내리기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고작 책 한 권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래서 아주 싼 가격에 책을 구입하게 되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이런 걸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개이득’이다.

 

 

 

 

 

 

 

 

 

 

 

 

 

 

 

 

 

 

(※ 왼쪽은 1998년에 나온 구판) 

 

 

 

환상문학전집 세 번째 작품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은 올해 구입한 책들 중에서 운이 많이 따라줬다. 두 달 전에 포의 단편 전집을 읽고 있을 때 알라딘 대구점에서 구입했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줄여서 ‘아서 고든 핌’)은 1838년에 발표한 포의 장편소설이다. 단편소설과 시를 많이 남긴 작가의 이력이 장편소설의 가치를 가리고 있지만, 단편소설에서 보여준 괴이한 공포 분위기와 그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물의 심리 묘사는 장편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간략한 작가 이력 소개에 보면 『아서 고든 핌』을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썼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1) 1840년에 포는 『The Journal of Julius Rodman』라는 잡지에 연재되는 모험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The Journal of Julius Rodman』은 1792년에 처음으로 로키 산맥을 넘어 미국 서부 황야 지역을 탐험한 Julius Rodman의 일기를 소설로 재구성한 내용이다.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어 오랫동안 잊히고 있었다가 1947년에 재출간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아서 고든 핌』은 환상소설의 특성을 가미한 모험소설이다. 1830~1840년대 모험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도전 정신을 고취시키는 통속적인 내용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포의 『아서 고든 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공포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남극으로 가는 긴 바닷길을 장시간 항해를 하면서 겪게 되는 불의의 재난 사고와 이성이 말살되는 끔찍한 살육 현장은 여행의 긍정적 호기심과 도전 정신에 감춰진 어두운 단면이다. 특히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파괴하는 거대한 폭풍과 파도 앞에서 두려워하는 핌의 심리는 『아서 고든 핌』발표 3년 후에 나온 단편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를 예고한다. 이 작품에 포는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파도의 위력을 묘사했다. 

 

여기에 『아서 고든 핌』의 간략한 줄거리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알라딘 책 소개에 아주 친절하게도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서 고든 핌과 나머지 생존한 동료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는 공포의 난파선이다. 어렸을 때 아동도서에서 많이 나오는 미스터리 에피소드인 ‘유령선’ 이야기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독자가 가장 몰입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죽음의 제비뽑기’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핌과 동료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자 제비뽑기로 ‘음식’이 될 희생자를 정하게 된다. 이 잔인한 장면은 비록 4쪽에 불과하지만 생존의 한계에 부닥치는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광기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렸을 때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미스터리 모음집을 즐겨 본 사람이라면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 장면을 떠올리는 실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884년에 영국의 미뇨넷 호라는 배가 희망봉 앞바다에서 난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살아남은 선원은 단 4명. 이들은 작은 구명보트에 탑승한 채 열흘 이상 표류하게 된다. 하루하루 구조를 기다리지만, 점점 식수와 비상식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구조선을 만나지 못하면 4명의 선원들도 굶어죽게 될 판이었다. 어느 날, 가장 나이가 어린 선원이 병에 걸려 몸이 약해지자 선장인 더들리는 나머지 두 명의 선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제비뽑기를 해서 한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선원은 선장의 제안을 거절한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어찌 동료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선장 더들리는 자신의 제안을 동의한 선원과 함께 어린 선원을 살해하고 그의 인육을 먹게 된다. 표류 24일 만에 더들리 선장과 두 명의 선원은 구조되었으나 영국으로 귀국한 후 그들은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그 후에 미뇨넷 호의 생존자들은 특사에 의해 6개월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생존자들은 단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항변했으나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은 것이 죄가 되는지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미뇨넷 호 사건이 흥미로운 화제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서 고든 핌』에 나오는 ‘죽음의 제비뽑기’ 내용과 아주 흡사한 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뇨넷 호에 희생된 어린 선원의 이름이 소설 속에서 희생된 인물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다.*2)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소설은 제비뽑기에 걸린 선원이 살해되었고, 미뇨넷 호 사건의 경우는 제비뽑기 제안이 거부당하자 병이 들어 생존할 가능성이 희박한 선원을 살해했다. 단지 희생자의 이름이 같다는 우연한 사실에 지금까지도 포의 소설과 미뇨넷 호 사건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뇨넷 호의 생존자들은 여태까지 『아서 고든 핌』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으며, 포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다.*3)

 

『아서 고든 핌』의 초반부는 갑판 밑 창고에 숨은 핌이 밀실 공포와 악몽에 시달리고, 배가 난파되어 표류되는 상황을 그렸다면, 후반부는 영국 리버풀의 제인 가이 호에 구출되어 살랄 섬이라는 신비스러운 곳에서 겪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살람 섬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에서 포의 상상력이 가장 돋보이는 내용이다. 핌은 살랄 섬 해안 부근에 정체불명의 육지 동물의 시체를 발견하고, 여러 가지 빛깔을 띠는 특이한 물을 신기하게 여긴다. 이에 대한 묘사는 문학작품 속 환상적인 장면을 모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까치, 1994년-절판)에도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호손 나무처럼 붉은 열매가 달린 관목도 건져 올렸으며, 이상하게 생긴 육지 동물의 시체도 건져 올렸다. 길이는 90센티미터였지만 키는 180센티미터였고, 아주 짧은 네 다리가 있었는데, 발은 산호같이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몸은 곧고 순백색의 비단 같은 털에 덮여 있었다. 꼬리는 쥐처럼 서 있었고 45센티미터 정도였다. 머리는 귀를 제외하고는 고양이를 닮았는데, 귀는 마치 개의 귀처럼 꺾여 있었다. 그리고 이빨은 발과 마찬가지로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 중에서, 175쪽)

 

 

『아서 고든 핌』의 결말은 이야기가 도중에 끊겨버리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끝나버리고 만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포다운 결말이다. 포는 결말마저도 수수께끼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방식은 주인공이 미지를 개척하는데 성공하게 된다는 기존의 모험소설 결론과 차별화되는 시도이다. 포가 어떤 수수께끼를 남겨두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포의 수수께끼 결말은 수많은 모험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쥘 베른(1828~1905)을 매혹시켰다. 포에 의해 사라진『아서 고든 핌』의 결말을 상상하여 ‘빙원의 스핑크스’라는 제목의 속편을 썼다. ‘빙원의 스핑크스’는 황금가지에 나온 『아서 고든 핌』에 수록되었다. 황금가지 판본이 희귀본이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장편을 주로 쓴 베른의 짧은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다른 책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황금가지판『아서 고든 핌』이 다시 서점에 등장할 확률은 희박하지만, 혜원출판사 세계문학전집 21번째 책인 『검은 고양이』에 ‘아서 고든 빔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왜 ‘핌’ 아닌 ‘빔’이라고 표기했을까? 원어명은 ‘Pym’이기 때문에 ‘핌’이라고 해야 한다.

 

 

 

 

*1) 한국판 위키피디아의 ‘에드거 앨런 포’ 항목에 나오는 작품 목록에 보면 ‘The Unparalleled Adventures of One Hans Pfall’를 장편소설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한스 팔의 환상 여행’이다. 『우울과 몽상』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분량은 50쪽도 채 되지 않는다.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2)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에서 희생된 인물 그리고 미뇨넷 호에 희생된 실제 인물의 이름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에 이름을 언급했다면 책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1권 서문에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와 미뇨넷 호 사건에 관한 미스터리 에피소드가 언급된다. 저자는 꿈을 글로 기록해서 시각화하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사례로 이 미스터리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포가 미래의 어떤 사건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듯 생생하게 꿈꾸면서 그것을 글로 적었다”(9쪽)라고 썼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은 좋으나, 사실인 것처럼 쓴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소설 속 장면과 미뇨넷 호 사건에서 어느 부분 일치한 점은 있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다. 포라는 인물 자체가 특이한 기행(奇行)에,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을 구사하는 위대한 작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포가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예언하듯이 소설을 썼다는 저자의 주장은 과장에 가깝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설 속 희생자와 미뇨넷 호의 희생자의 이름만 같을 뿐이지 살해되는 과정은 다르다. 이지성은 미뇨넷 호의 희생자가 소설의 내용처럼 제비뽑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썼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심지어 소설 제목도 ‘아서 고든 빔’으로 잘못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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