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에는 항상 권력관계가 존재해 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힘없고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피해자라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 권력관계에서 성적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피해자는 법적 권리를 보장받으며 가해자는 처벌된다’는 평범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 유명 자기계발서를 낸 ‘샘앤파커스’가 수습사원을 성추행한 일로 시작한 상무를 복직시킨 결정은 여전히 직장 내 여성노동자들이 성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문제의 상무는 업무력 테스트를 빙자해 정규직 전환을 앞둔 수습사원들에게 술자리를 요구했고, 심지어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려가 옷 벗을 것을 요구하면서 성추행을 저질렀다.

 

갑을관계의 부당성이 성범죄 영역에서 드러나는 것이 직장 내 성추행, 성폭행이다. 비정규직 여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이유는 지위 관계가 전제되는 직장의 특성상 갑과 을이 존재하고, 이들이 ‘을’이기 때문이다. 작년 온 나라를 들끓게 하였던 ‘윤창중 사태’를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직장에서 남성 상사들이 여성인 부하 직원들을 술을 핑계로 괴롭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국의 풍토에도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비정규직’과 ‘성범죄’는 어떠한 고용 구조와 환경에서 발생하느냐에 따라 해당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큰 차이가 있다. 비정규직은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차별적 조건에서 일해야 한다. 대개 이들에겐 노조라는 울타리가 없어서 부당한 일이 생겨도 호소할 곳이 없다.

 

직장 내의 갑은 비정규직의 ‘불안’을 볼모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들은 승진 혹은 정규적 전환 조건이라는 미끼를 내세워 부하 여직원들의 옷을 벗게 만든다. 그런데도 기업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눈 감아버린다. 정규직은 법에 호소할 안전장치라도 있지만 비정규직은 무방비 상태이다. 그들에겐 더 가혹하고 비열한 권력의 종속관계가 존재한다. ‘을’의 입장에 있는 피해자들은 문제 제기를 할 경우 바로 해고되거나 직장 내 진급이 어려워지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반면,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라고 협박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조리극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왜곡된 성의식 때문이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비상식적인 인식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재판부의 ‘성편향적인 객관성’에 근거한 판결은 용기 내어 고소하고, 고통스러운 수사와 재판 과정을 겪어낸 피해자들을 절망케 한다. 최근에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보는 판결들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폭행과 협박에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피해자가 증명해내야 하는 ‘최협의설’이 적용된다. 서울서부지검은 문제의 상무가 옷을 벗으라는 요구를 하고 키스를 한 점 등은 인정하지만, 피해자의 저항이 없어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런 판결은 반(反)성폭력 운동의 흐름에 역행하는 결과이다.

 

우리나라 법은 성폭력이라는 끔찍한 범죄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필사의 저항’을 요구한다. 저항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름에 불구하고, 법은 ‘목숨을 건 사투’ 아니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이분법으로 성범죄 여부를 판단한다.

 

어느 경우든 갑의 부당한 횡포와 우월적 지위의 남용에 의한 권력형 성범죄는 근절되어야 한다. 이 비인도적인 범죄를 침묵하는 출판사는 끔찍한 범죄를 묵인하고 있는 공범일 수밖에 없다. 사내 성폭력을 눈 감는 출판사에 나온 책을 불매 운동을 한다고 해서 끝날 일은 아니다. 언론에 노출되는 성범죄를 보면서 ‘나와는 상관없다’고 거리두기를 하는 우리의 인식이 바꿔야 한다. 성범죄는 상대적으로 권력 있는 사람이 약자에게 행사하는 성적 폭력이다. 우리가 성범죄에 둔감할수록 정당한 문제 제기도 어려운 비상식적인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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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9-1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만드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짓들인지...(책 만든다고 그렇게 크게 다를 바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요.)

올려주신 성명문을 읽어보니 가해자 당사자도 그렇고, 회사 전체적으로도 문제가 많군요. 어떤 책을 냈나 살펴보니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류의 책은 없지만 불매운동이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지..

cyrus 2014-09-18 22:21   좋아요 0 | URL
오늘 해당출판사가 자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어요. 그런데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은 올리지 않았어요. 어쨌든 출판사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데 여전히 반응은 썩 좋지 않더라고요. 동종업계 출판업자들도 실망스럽게 생각하고요.

올해 출판업계에 연이어 좋지 않은 소식이 터지네요. 사재기 의혹이 있는 출판사 몇 군데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까지 터졌으니 말이죠... 하필이면 문제의 출판사들이 자기계발서를 펴내는 곳입니다.

마태우스 2014-09-1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좋지만 무엇보다 제목이 멋지네요 자사 베스트셀러로 샘앤파커스의부도덕을 비판하는제목이라니요 마니배우고가요

cyrus 2014-09-20 23: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님.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4-09-2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와 관련된 조직이 항상 은폐하는것이 문제더군요.가정 정직하고 도덕적인줄 알았던 전교조의 성폭행 미수사건도 이를 은페하려다 문제가 된 케이스죠ㅡ.ㅡ

cyrus 2014-09-25 17:1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조직은 끔찍한 사건을 숨기거나 단순한 일로 무마하면 쉽게 넘어갈거라 생각하는데 나중에 밝혀지면 범죄에 동조하는 걸로 보여지게 됩니다. 비록 조직의 이미지가 좋지 않더라도 확실하게 사과하고 다음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방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