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햇빛의 열기가 가을비에 식혀가던 8월의 마지막 날. 국립중앙박물관 ‘오르세미술관 전’을 보러 가기 위해 오랜만에 서울을 찾았다. 두 달 전에 알라딘으로 오르세미술관 전 도록을 주문했는데 책 안에 전시회 입장권도 있었다. 성인의 경우, 입장권 가격 12000원이다. 박물관 현장에서 도록, 특히 대형을 구입하면 정가 25000원을 지불해야 한다. 나는 전시회 보러 가면 꼭 대형 도록 한 권을 구입하는 편이다. 서울을 왕래하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지불하는 비용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다행히 알라딘에서 대형 도록을 1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고, 덤으로 도록을 구입하면 전시회 입장권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울에 가기 위한 비용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입장권으로 평일에만 사용하는 것인데 유효기간은 8월 29일까지였다. 몇 달 동안 시험 준비하고, 서울에 갈 여비를 마련할 상황이 아니라서 하마터면 도록을 구입해놓고 무료로 전시회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뻔했다. 그 유명한 오르세미술관의 그림들을 보지 못한다면 왠지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평일 입장권을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인 8월 29일 금요일에 서울에 가기로 결심했다.

 

오후 2시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했는데 평일이라서 관람객이 많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한 것보다 전시회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전시회가 종료되는 기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평일인데도 시간을 내서 관람객들이 찾아 온 것 같다. 전시회 내부에도 그림을 찬찬히 보는 관람객들이 많아서 여유롭게 그림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밤에 대구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보고 싶은 작품들만 보고 얼른 전시회 밖으로 나와야 했다.

 

달랑 전시회만 보고 다시 대구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깝다. 내가 서울에서 문화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비록 혼자지만 일단 서울에 오면 내가 최대한 즐겁게 느낄 수 있는 문화적 생활을 하기 위해 미리 계획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를 다 보고 나면 용산역 근처에 위치한 헌책방 뿌리서점에 갈 예정이었다.

 

뿌리서점이라면 헌책방마니아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헌책방의 성지(城地) 중 한 곳이다. 몇 년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뿌리서점을 알게 된 이후부터 언젠가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결심을 반복한 지 4년 만에 드디어 뿌리서점에 가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400, 502번 버스를 타면 20분 내로 뿌리서점이 위치하고 있는 ‘용사의 집’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요즘 구글, 네이버 지도의 성능이 무척 좋아서 간단하게 ‘뿌리서점’을 검색하면 위치를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만 봤던 뿌리서점 간판이 보였다. 간판 밑에 걸린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라는 저 문구가 무척 반가웠다. 그동안 나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던가. 입구 앞에 나이기 지긋이 든 어르신 세 분이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헌책방에 자주 방문하는 손님인 줄 알았는데 그 중 한 분이 뿌리서점을 운영하는 주인 어르신이었다.

 

 

 

 

 

 

역시 지하 헌책방 내부로 통하는 계단에서부터 수많은 책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좁은 공간 속에 책이 거대한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여기 헌책방에 있는 책들도 한때 주인의 손을 많이 타던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주인의 손길이 뚝 끊기는 순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오랫동안 잠든 화석(化石)이 되어버렸다. 헌책방에 찾는 손님은 헌책 화석이 가득한 지식의 지층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고고학자가 된다.

 

 

 

 

 

 

지식의 지층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는 상당히 비좁다. 바닥에 위치한 지층 밑을 관찰하기가 쉽지 않고, 서서 책 읽기가 불편하다. 하지만 헌책방 고고학자들에게는 최적의 장소다. 용산역 주변에 퍼지는 시끌벅적한 속세의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 책에 몰입할 수 있도록 집중력이 생긴다. 그리고 주인 어르신이 직접 타서 건네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을 읽는다면 북카페가 부럽지 않다.

 

주인 어르신은 헌책방에 처음 방문한 젊은 손님이 신기했던가 보다. 커피를 주면서 어디서 왔냐고 먼저 물어봤다. 대구에서 왔다고 말했다. 어르신은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온 사실에 무척 놀라워했다. 나는 평소에 헌책방 가는 것을 좋아해서 인터넷에서 뿌리서점의 명성을 알게 되어 여기 왔다고 하자 주인 어르신은 무척 쑥스러워했다. 그러자 옆에 책을 고르던, 연세가 꽤 있어 보이는 손님이 “여기 뿌리서점을 모르면 간첩이야.”라고 치켜세웠다. 헌책방을 자주 찾는 손님들은 주인 어르신보다 뿌리서점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주인 어르신과 몇 분 간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대구에도 헌책방이 많이 있는지 물어봤다. 내가 예전에 비해 많지 않다고 대답하자 주인 어르신은 헌책방이 점점 사라져만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대구에 살아남은 헌책방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대구시청 주변, 남문시장, 대구역 굴다리 밑. 이 세 군데뿐이다. 대구에 헌책방이 생기게 된 것은 한국전쟁 직후 좌판에서 헌책을 팔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1970~1980년대 전성기를 지나 대형 서점, 온라인 서점 등의 등장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전성기 때만 해도 헌책방 150여 곳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거의 10여 곳 정도만 남아있다.

 

 

 

 

원래 헌책방에 책 고르면 많아야 세 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그 날 대구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 때문에 책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었기에 책방 내부 하나하나 살펴봤고, 주인 어르신에게 직접 허락을 받고 사진으로 담았다. 시간이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책방 내부로 향하는 계단의 왼쪽 벽에 붙여 있는 故 장영희 교수의 글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다음에 여기 오게 되면 이 글을 꼭 읽어보리라.

 

 

 

 

 

 

 

뿌리서점에서 처음 고른 책은 콜린 윌슨의 <우주의 역사>(범우사) 1986년판, 2007년 국내에 사진전을 열리기도 했던 프랑스의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랑의 방>(마음산책, 2003년, 품절),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열린책들, 2001년, 절판)이다. 생각보다 책 상태가 좋았다.

 

콜린 윌슨은 예전 독서모임에서 만난 헌책방 마니아로부터 알게 된 저자다. 처녀작 <아웃사이더>로 무척 젊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고, 문학 이외에 미스터리, 살인 등 어두운 지식의 분야까지 섭렵하여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하다가 작년 12월 5일에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우주의 역사>는 요즘에 나오는 이런 비슷한 분야의 도서와 비교하면 전혀 새롭지 않는 낡은 정보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요즘 콜린 윌슨의 책들이 절판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어서 <우주의 역사>가 아직 절판된 지 않은 게 신기하다. 읽다 보면 책 속에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머지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집, 폴 오스터의 영화 시나리오는 이제 구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책값을 계산하면서 주인 어르신은 책을 많이 읽는 내가 대통령(!)이 될 것 같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변변치 않은 서점을 찾아줘서 너무나도 고맙다고 했다.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만큼 리더십은 없지만, 독서 문화가 널리 알려져서 정착될 수 있도록 기여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뿌리서점과 같은 헌책방이 절대로 사라져서 안 되며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이 지식의 보고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야 한다. 헌책방 속에 잠들어 있는 지식의 화석(化石)은 새로운 주인에 의해 만나는 순간, 책표지 속에 갇힌 지식이 활짝 열리면서 살아있는 화석(花石)으로 다시 태어난다. 오늘도 살아있는 화석(花石)을 찾기 위해 지식의 지층이 가득한 헌책방으로 향한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4-09-0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는 대륙서점이라는 아름다운 헌책방도 있고,
경북대 뒷문에 합동서적도 있지요

cyrus 2014-09-03 23:1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함께살기님. 사실 뿌리서점 주인 어르신과 대화하면서 대륙서점, 합동서적을 언급했습니다. 이 두 곳은 제가 많이 들리는 헌책방이거든요. 함께살기님의 블로그에 있는 책방에 관한 글,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9-03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콜린 윌슨 아웃사이더는 제 애독서입니다.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앙리 바르뷔스 항목을 정독하는 편이죠.

2.폴 오스터에 관심이 많으시더니 절판본을 구했네요.

3.타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광주 헌책방 골목은 1990년대 중반부터 없어지기 시작해 2000년대 중반 경까지 집중적으로 없어졌습니다.그 후에도 나이 드신 주인들은 돌아가시기도 하고...제가 자주 가던 곳들도 없어진 곳이 몇 개 있죠.

cyrus 2014-09-04 12:39   좋아요 0 | URL
1. 그렇군요.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땐 내용이 어려웠어요.. ^^;;
2. 폴 오스터도 국내에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고,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 다음으로 내세우는 작가라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3. 혹시 광주에 가볼만한 헌책방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2014-09-0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4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09-04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가 대통령 같이 생겼구나.ㅎㅎ
콜린 윌슨은 참 안 알려진 작가야. 그 명성에 비하면 말이지.
내가 10대 때 아웃사이더란 책을 범우사에서 샀는데
어려워서이기도 했지만 이 책을 과연 읽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군. 출판사의 입담만으로는 잘 모르겠더라구.
주위에서 읽었다는 사람도 드물고.

뿌리서점이 유명한 줄은 알지만 강남역만 나가도 중고샵이 있으니
나 같은 귀차니스트는 일부러는 안 가게되는 것 같아.
중고샵은 싸게 매입해서 매입한 가격에 비하면 넘 비싸게
판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게 장사겠지만.
헌책방도 그럴까? ㅋ

cyrus 2014-09-05 23:29   좋아요 0 | URL
누님, 답글을 길게 썼는데 이상하게 입력이 안 되네요.. ^^;; 헌책방 가격은 주인 맘대로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헌책방이 어떻게 매입하고, 책에 가격을 매기는지 잘 몰라요. 헌책방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헌책방 주인이랑 친해지면 거래 방식을 꿰뚫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렇고 싶지 않아요. 괜히 가격 때문에 주인이랑 얼굴 붉히기 싫고, 제가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4-09-04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인시장에서 광주고등학교 가는 도로변에 헌책방들이 있는데 이제 10개도 안 남았죠.1킬로미터 정도 걸어가면서 들르면 됩니다.

요즘엔 알라딘헌책방과 아름다운 가게의 헌책방도 가끔 가는 편입니다.1000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책들을 구입하는 편이죠.찾아만 보면 그런 책들이 꽤 있어요.

cyrus 2014-09-05 23:30   좋아요 0 | URL
대구의 헌책방 수와 거의 같군요. 그래도 헌책방이 모여 있는 그 곳에 가보고 싶어요.

카스피 2014-09-2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리서점에 다녀오셨군요.서울에도 헌책방이 많이 없어지는데 이곳은 아직까지 건재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헌책방따라 전국을 유랑하던 시절 대구에도 가봤는데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진것 같더군요^^;;;

cyrus 2014-09-25 17:11   좋아요 0 | URL
네, 대구도 서울만큼 헌책방이 몇 군데 많으면 참 좋을텐데 말이지요. 가끔 책 읽다가 서울에 있는 헌책방 순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듭니다. 학생이였을 때 한 번 시도해볼 걸 그랬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