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 내 젊음의 자서전 다빈치 art 17
마르크 샤갈 지음, 최영숙 옮김 / 다빈치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11년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를 읊어보면 막연한 이국의 마을 풍경이 떠올린다. 김춘수의 시에 영감을 준 모티브는 1911년에 그려진 「나와 마을」이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화면 분할로 인한 시각적 분리가 아니다. 나와 마을의 거리를 친근하게 보여주는 그만의 독특한 예술적 질서일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래서 그에게 ’눈 내리는 마을‘은 그가 떠나온 고향이자, 아득한 희망이었으며 끝내 갖지 못한 낭만이 됐다. 재현불가능한 꿈을 샤갈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마르크 샤갈 「마을 위로」  1915년

 

 

오늘이 바로 샤갈이 태어난 날이다. 7월 7일. 지금쯤 그는 벨라와 함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비테프스크 위로 훨훨 날다가 파리의 에펠 탑 꼭대기에서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와 벨라의 영혼은 지금도 그림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샤갈의 그림을 보면 행복해진다.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그림들과 달리 샤갈은 원초적이고 감성적인 색체 그 자체로, 우리의 영혼을 파고든다. 달콤하고도 몽환적인 사랑의 꿈. 우리를 꿈꾸게 하는 이 행복한 그림들은, 이방의 삶을 살았던 샤갈의 어두운 현실에서 퍼 올린 것이다. 예술이 너무 안락한 삶속에서는 꽃 피우지 못한다는 새로울 것도 없는 진리가 샤갈의 경우에도 딱 맞아떨어진다.

 

샤갈은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화가 중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샤갈은 한 번도 어떤 주의, 주장, 단체에 머문 적이 없다. 샤갈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고 설명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정규 교육도 별로 받지 않았고, 유대인이면서도 종교에 집착하지 않았고, 파리 뉴욕 등지에서 숱한 예술인들과 교류했지만 어느 유파에도 가담한 적이 없다. 이런 변경의 삶은 그의 작품 세계에 그대로 녹아 있다.

 

특이하게도 샤갈은 자서전을 이제 막 이름이 알리기 시작되는 젊은 시절에 자서전을 썼다. 제목도 거창하다. 나의 삶. 이 때 샤갈의 나이는 서른 초반이었다. 자서전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마무리된다. 샤갈은 98세로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후반기를 담을 수 있는 자서전 2부를 쓰지 않았다. 서른 초반에 자서전을 쓰기고 결심한 샤갈은 60년 인생 더 살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샤갈에 관한 책을 쓴 미술사가 모니카 봄 두첸은 자서전이 과장되고 거짓으로 가득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림에 비해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자서전의 제목은 사뭇 낭만적이다.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부제는 ‘내 젊음의 자서전’  사실 인생 전반을 소개하는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유년 시절과 화가로 데뷔한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서전은 샤갈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헌이다.

 

샤갈의 마을, 그리스 정교회당과 유대교 예배당이 자리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비테프스크. 유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그 마을은 샤갈의 기억 중추에 굳게 자리하며 평생의 테마가 된다.

 

샤갈은 러시아 초등학교로 편입하여,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면서 상처를 받아 말더듬이가 될 정도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가수, 바이올리니스트, 무용수, 시인이 되고 싶은 꿈 많은 아이였지만, 샤갈은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의심치 않았다. 그 아이는 자라서 파리로 가 화가가 되어, 버리고 온 초라한 마을 비테프스크를 떠올린다. 그의 마음 한 켠에 따뜻하게 자리 잡은 그곳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중력을 무시하고 우주 유영을 하듯 날아다니는 꽃, 사람, 동물, 집들은 ‘떠나 있지만, 매이지 않는, 그러기에 떠돌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외국인으로, 유대인으로, 방랑자로 신산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분노가 없다. 삶의 즐거움과 행복한 꿈이 가득하다.

 

 

 

 

 

 

마르크 샤갈 「비테프스크 위로」  1914년

 

가엾은 고향 마을이여, 나를 용서해 다오. 현기증이 날만큼 그토록 높은 곳에 나는 너를 혼자 남겨 두었구나. 슬프고 기쁜 내 고향 마을이여! (10쪽)

 

눈이 하얗게 비테프스크를 덮고 있는 황량한 겨울, 어깨에 자루를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쥔 남자가 허공을 날고 있다. 「비테프스크 위로」는 ‘아이의 눈’으로 비테프스크를 바라봤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샤갈이 환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린 샤갈은 자신의 집 다락방에 엎드려서 마을 풍경을 바라봤다. 창문으로 보이지 않으면 할아버지와 함께 지붕 위로 올라가 마을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그 곳에 가면 사랑스러운 하늘과 별들이 호기심 많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에서 하늘을 둥둥 나는 노인은 ‘아이의 눈’을 가진 샤갈 본인 혹은 그의 할아버지일 것이다. 

 

샤갈에게서 비테프스크와 그의 뮤즈 벨라를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 자서전에 샤갈과 벨라의 운명적인 만남이 묘사되어 있다. 샤갈은 벨라의 친구 테아라는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인데 샤갈은 진찰실에 있는 긴 의자에 누워서 테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누군가가 진찰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테아가 아닌 벨라였다. 샤갈은 그녀의 방문에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샤갈의 심장은 벨라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뜀박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장이 샤갈에게 말한다. 저 여자가 바로 너의 아내라고.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샤갈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임을 예감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눈. 그녀의 검은 눈은 얼마나 둥글고 큰가! 그것이 바로 나의 눈, 나의 영혼이다. (71쪽)

 

샤갈을 색채의 마술사라기보다는 ‘꿈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더 어울린다. 우리는 꿈을 꾸면 형상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흐릿한 형체만 느낄 뿐이다. 꿈의 장면을 컬러 TV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없다. 그래서 꿈을 묘사한 샤갈의 색채는 강렬하다. 그것은 샤갈 고유의 색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의 영향에서 받은 강렬한 빨강, 깊은 심연의 파랑, 3월의 보리밭처럼 짙푸른 초록으로 자기화하고 형상화된 색채다. 파랗게 물든 파리의 하늘에서 꿈꾸는 암소를 통해서 샤갈은 시적 감성으로 자신이 꿈 꾼 세상으로 우리를 부른다. 샤갈의 그림은 양식과 유파를 뛰어넘어 세계인들에게 서정과 꿈, 순수성과 영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4-07-08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오래 전, 강남역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란
카페가 있던 기억이나. 이름이 특이해서 친구들이랑 몇 번 다녔었지.
커피맛도 괜찮았고. 결국 그것도 세월 속에 묻히고 말았지만.
10년 전쯤엔 샤갈전도 보러간 기억도 나네. 그림이 몽환적이고, 독특하지만
참 괜찮은데 말야. 책은 또 그렇지 않는가 보군.^^

cyrus 2014-07-09 15:18   좋아요 0 | URL
샤갈의 자서전이라고 해서 특별할 줄 알았는데 특별하기보다는 특이했어요. 자서전이 자신의 삶을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글쓰기라고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편집 없이 나열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간혹 샤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