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논어 - 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한글 사서 시리즈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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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논어』를 읽고 있다. 『논어』를 읽으면 겸손과 베풂을, 나쁠 때는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가끔 『논어』의 본의를 왜곡하면서 읽을까봐 조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논어』는 동양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사랑받는 고전 중의 하나다. 그런 만큼 각종 해설서, 주석서, 입문서 등도 다양하게 나와 있는 편이다. 사람들은 『논어』 원전의 목차에 맞추어 일부를 조금씩 맛보거나 원전 전체의 해석서를 읽는 수밖에 없었다. 또는 아예 경제적인 입장에서, 경영자의 입장에서  등등 한쪽의 시각에 맞추어 잘리고 편집된 『논어』를 보았다. 전공자가 아닌 이상, 『논어』가 말하려고 하는 전체의 모습은 그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논어』는 공자가 생전에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 제자들이 모여 편찬한 어록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공자에 담긴 이야기 20편은 어찌 보면 ‘수수께끼 모음집’ 같은 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체계적인 구성 원리나 앞뒤 문장 간의 연관성도 부족하다. 심지어 앞쪽에서 말한 내용과 어긋나는 문장이 등장해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논어』는 일반인이 쉽게 도전하기엔 너무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고전이다. 인터넷 서점 웹사이트에 ‘논어’를 키워드로 입력하면 관련 내용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시판되고 있는 『논어』 해석본만 해도 100여종 정도는 넘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논어』를 재생산하고 소비하고, 수용한다는 방증이다.

 

고전은 잘 숙성된 음식처럼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난다. 논어를 읽은 중국의 정자(程子)라는 학자는 “17, 18세부터 논어를 읽었으니 당시에 이미 글뜻은 알았으나, 더욱 오래 읽고서야 의미심장한 줄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면서 공자의 발언과 행적을 통해 삶의 지혜가 되는 말들을 간결하고 함축성있게 싣고 있다.

 

『논어』를 쉽고 바르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과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없을 수 없다. 시대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달라지곤 한다. 책 속 공자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그가 권력자의 입장에서 민중을 억압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인간관계의 회복을 강조한 그의 가르침이 사회적 요구와 맞아떨어지면서 재평가되고 있다.

 

『논어』를 읽으면 다양한 역자가 해석한 내용을 같이 보는 편이다. 처음에 한 권만 쭉 읽다가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을 나오면 또 다른 역자의 『논어』를 읽어본다. A라는 학자는 『논어』의 어느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과연 B라는 학자는 이 문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했는지 서로 비교를 하는 것이다. 『논어』를 바라보는 역자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동일하면서도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논어』의 핵심사상을 한마디로 정의되는 ‘인’(仁)은 그 뜻이 무척 다양하다. ‘어질다’, ‘사랑’, ‘사람 구실’, ‘사람다움’ 등으로 규정된다. ‘인’은 천 가지의 얼굴을 가진 한자라고 보면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논어』 연구가들은 동양 사유와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의 개념을 둘러싸고 의미와 기원을 검토하고 해석했다.

 

다산 정약용의 『논어고금주』를 바탕으로 해석한 故 이을호 선생은 ‘인’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애, 형과 아우 사이의 우애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사람의 길’이라고 소개했다. 반면 성백효 교수는 다산의 해석을 반박하는 입장이다. 인과 효제(孝弟)를 동일시한 다산을 비판하고 이를 각각 내면의 본성과 외면의 실천으로 구별한 주자의 『집주』를 높이 평가한다. 관점에 따라 『논어』를 바라보는 방식과 해석에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논어』를 한 번 완독했다고 해서 100%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많은 번역서들 사이에서 딱 한 권만 읽고 독파하는 방식은 오독할 위험성이 있다.

 

『논어』를 이제 막 열심히 읽기 시작했을 뿐이고, 동양사상의 전반적인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초보자 수준이라서 괜히 공자 앞에서 『논어』라는 문자를 입에 담기가 조심스럽다. 시간을 내서라도 원문과 해석서를 같이 읽어 봐야 한다.

 

故 이을호 선생, 성백효 교수, 김원중 교수의 『논어』까지 세 권을 읽고 있다가 최근에 출간된 신창호 교수의 『한글논어』도 덤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자 원문 위주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독자나 청소년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사실 고등학생 때 한창 한자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을 때 겁 없이 독학으로『논어』한자 원문 중심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참고한 책이 바로 성백효 교수의 『논어집주』였는데 작심삼일이 되고 말았다. 고등학생이라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입시 준비와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한 우물을 깊게 파지 못하는 성격 탓에 무모한 도전으로 남게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논어』 읽기를 주저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한자’였다. 그 당시 교과목에도 ‘한문’이 있었고, 학교에서 실시하는 정기고사에서 만점을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좀 더 다양한 한자를 익히고, 한문으로 된 문장을 풀이하는 법을 공부할 때 적당한 텍스트로 『논어』를 추천하셨기에 나름 심화학습을 시도해본 것이다. 한문 원전을 그대로 직역하고, 풍부한 분량의 역주까지 국한문 혼용체를 된 성백효 교수의 『논어』를 동양사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일개 고등학생이 읽는다는 것은 맨 땅에 헤딩하는 격이다. 한자를 안다고 해서 한자로 된 『논어』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읽다가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찾아가면서 풀이했지만, 책을 읽어나가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당시 그렇게 여유롭게 한자 풀이를 하면서 『논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논어』가 번역이 잘 되었고, 공자 전문가가 공자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서 정리했더라도 일단 가독성이 떨어지면 독자는 부담이 생기고, 『논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 동양사상에 입문하는 초보 독자라면 『논어』의 핵심 사상이 최대한 훼손되지 않으면서 우리말로 쉽게 풀이된 것을 읽으면 좋다.

 

신창호 교수의 『논어』는 일단 가독성이 좋다. 오래전부터 『논어』를 해석할 때 많이 사용된 텍스트인 주자의 『논어집주』를 한글로 풀이했으며 각각 문장에 대한 해설을 붙였다. 저자의 목표는 한글로 풀이된 『논어』를 통해 한국적으로 사유하려는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논어』의 주요 개념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풀이했다. 성인군자(聖人君子)를 문장의 상황에 따라 ‘지도자’, ‘착한 사람’ 등으로 표현을 다르게 했고, ‘사’(士)를 기존의 ‘선비’라는 번역 대신에 ‘하급 관리’로 풀이했다. ‘인’은 ‘열린 마음’, ‘포용력’, ‘사랑’ 등으로 풀이했다. 한자 원문은 부록으로 따로 묶어 책 뒤편에 수록했다. 

 

故 이을호 선생도 경전의 한글화를 시도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다산의 『논어』해석을 따랐다. 주자의 해석을 따른 ‘한글로 된 『논어』’와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을호 선생의 『한글논어』의 특징은 공자가 제자에게 직접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동감 있게 문장을 풀이했다는 점이다. 또한 문장이 대체적으로 간결하다. 이을호 선생도 일반적인 『논어』역서처럼 각각 구절마다 ‘한자로 된 원문-풀이-해설’ 방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 신창호 교수의 『한글논어』는 ‘풀이-해설’ 방식이다. 원문의 묘미를 느끼면서 읽고 싶은 독자라면 ‘선(先) 원문 후(後) 풀이’의 『논어』가 적합하지만, 한자를 잘 모르거나, 공자의 사상을 좀 더 가까이 알고 싶은 독자는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를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는 책의 1부로 공자의 일생과 역사적 배경을 먼저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논어』를 좀 더 수월하게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다. 옥편을 찾아가면서 『논어』를 번거롭게 읽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도 가독성이 좋은데 이전까지 풀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논어』해석의 차별성을 두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쓰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논어』의 첫 문장 ‘학이’(學而)의 유명한 문장을 풀이한 것을 비교해본다.

 

선생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벗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부루퉁하지 않는다면 참된 인간이 아닐까!” (이을호 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동지(同志)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성백효 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김원중 역)

 

공자는 배움을 통해 성취하려는 삶의 전모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삶에 필요한 기예를 배우고 익혀라.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알아주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올 때, 이보다 반가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해 나갈 때, 참된 사람은 그 진면목이 드러나리라!” (신창호 역)

 

『논어』는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계속 재해석되고 번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동양철학이나 관련 경전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읽은 사람이 여러 명이 모이면 『논어』를 읽고 난 뒤의 소견과 해석에 제각각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역자의 해석이 지나치면 공자의 사상이 왜곡될 수도 있다.

 

하지만 『논어』의 문장 해석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집착한다면 배움의 단계가 무너지고,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신뢰가 사라진다.

 

“공자가 말하였다.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똑같이 길을 갈 수는 없다. 함께 길을 갈 수는 있어도 똑같이 설 수는 없다. 함께 설 수는 있을지라도 똑같이 법도에 맞게 실천할 수는 없다.” (자한(子罕)편 중에서, 252쪽)

 

『논어』는 언어에 갇힌 낡은 지식 모음집이 아니다. 일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윤리적 지침서이다. 신창호 교수는 서문에서 『논어』를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일상의 미학, 삶의 예술’이라고 밝혔다. 『한글논어』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누구나 읽는 고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 단지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책 속에 있는 그 훌륭한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지 못한다면 일상과 동떨어진 학문을 집대성한 책이 되고 만다. 『논어』에 관한 오해 중 하나가 바로 ‘유교 경전’에서 느껴지는 근엄한 분위기다. 『논어』를 읽기 전에 왠지 증조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 공손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읽어야하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선입견 때문에 요즘 같은 시대에 『논어』읽기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어른들 말씀이 잔소리처럼 여겨지고 귀담아 듣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처럼 말이다 . 하지만 어른들 말씀에 틀린 말이 없는 것처럼  『논어』는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본적 인간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오래 읽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뜻밖에도 자주  『논어』속의 구절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우연한 만안남을 통해 읽었던 구절을 상시키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일상의 미학, 삶의 예술’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따라서 공자의 일상적 삶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논어』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증조할아버지의 꾸지람과 잔소리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덕담을 전하는 것이다. 『논어』도 그렇다. 그 안에는 꼭 알아야 할 삶의 윤리와 일상의 지혜가 있다. 자꾸 생각하려는 두뇌에 힘을 빼고 읽는다면 『논어』가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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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2-0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 서평을 찾아보다가 cyrus님 서재에 또 왔네요.
저도 성백효 <논어집주> 읽다가 멘붕 왔었기 때문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ㅋㅋㅋ
참 좋은 서평입니다.

cyrus 2015-02-02 21:17   좋아요 0 | URL
제가 논어를 읽은 지 얼마 안 됐고, 꾸준히 열독하지 않아서 깊이 알지 못합니다. 뭣도 모르고 자비로 <논어집주>를 사서 읽었는데 한자가 너무나 많아서 결국 중고서점에 팔았습니다. 아예 보지도 않는 책을 계속 책장에 방치해둘 수가 없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