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에서의 죽음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 더크 보가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예술이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 (토마스 만)

 

 

 

 

 Scene #1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예술가, 아셴바흐

 

 

            

 

G. Mahler / Symphony No. 5  Mov. IV. Adagietto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미에 사로잡힌 자는 달콤한 질식에 숨통이 조여 오는 줄도 모르고 그저 헐떡거릴 뿐이다.

 

마치 죽은 자가 지상과 저승의 경계를 이루는 스틱스 강을 건너듯 안개 낀 베니스를 건너가는 장면이 음울한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의 느린 4악장을 배경으로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자기통제야말로 한 인간이 발전해 가는 일종의 운명이라 믿고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누리며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 아셴바흐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작품에 열렬한 유희적 흥취가 결여됐다는 자각과 함께 ‘이국적인 바람’과 ‘새로운 피를 솟구치게 할 무엇’을 좇아 베니스로 향하게 된다.

 

 

 

 

 Scene #2  예술가의 정체성

 

 

 

 

 

 

언뜻 들으면 ‘열정에 우롱당해 사랑에 빠진 늙은 남자가 가당치도 않은 희망을 품은 채’ 혼란스러워 하는 감정의 때늦은 모험이야기 같다.

 

 

 

늙음과 젊음의 대비, 삶과 죽음의 대립을 테마로 예술가와 시민성, 예술적인 삶,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무질서, 절대성의 지향 등을 내포한 이 소설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늘 고민한 토마스 만의 다른 소설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 감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소설과 영화의 다른 점을 두 가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는 소설 속의 작가인 아센바흐는 영화에서는 음악가가 된다. 영화는 문인보다는 음악가를 그리는 것이 훨씬 수월함에서이다. 음악가로부터는 그의 음악을 듣게 할 수 있는 반면 문인은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간접적으로 표현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 아센바흐가 작곡가로 등장하면서 음악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두번째는 소설의 서사구조를 삭제하고 또 덧붙이는데 있다. 영화는 소설의 1, 2장을 삭제했고 3장에서 시작하여 소설 줄거리를 쫓아가면서 원작에는 없는 7번의 회상 장면을 삽입한다.

 

영화는 아센바흐가 오직 미소년을 보려는 감정의 격량속에 휘말릴 때마다 말은 사라지고 음악이 깔리면서 보고자 하는 시선의 욕망을 부각시킨다. 토마스 만이 언어를 매개로 빼어난 산문 예술을 창조했다면 비스콘티는 시각과 말러의 음악을 매개로 탁월한 영상 예술을 만들어내었다.

 

음악은 이야기를 따라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후에 진행될 복잡하고 다의적인 표현을 암시한다. 아센바흐가 타치오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소년에 대한 감정의 변화, 이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그를 동반한다. 음악은 타치오에게 결코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아센바하의 감정을 선취하여 알려준다. 이 순간부터 아센바흐는 언제나 아름다운 소년을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음악에 깊이 압도되는 장면은 아센바흐의 죽음에서이다. 그가 죽어가면서 쓰러지기 직전 관광객들이 거의 떠난 쓸쓸한 해변에서 아카펠라로 이어지는 자장가를 들으며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갈 때 뒤이어 아다지에토가 비통한 시간의 파동이 되어 죽음의 길에까지 동반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감각을 완전하게 지배하게 될 때만 성취할 수 있다. 예술이란 그렇게 고양된 정신을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은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이 하나로 겹친 미소년 타치오를 통해 신체성에 깃든 충동적이고, 감각적인 관능들은 정말 극복되고 배제되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Scene #3  결국 그는 죽어야 했다  

 

예술가는 어떤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좇아 채집하는가. 아름다움의 심연은 결코 살짝 외접해 지나가는 방식으로는 들여다 볼 수 없다. 예술가가 절대미라는 실체의 겻불이나마 쪼이려면 광기와 혼돈의 염천 아수라를 돌파해 비밀의 불씨 하나라도 챙겨 와야 한다. 그 영감의 불씨로 비로소 창작의 열탕을 끓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극단까지, 끝까지 간다는 것에는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그렇기에 제정신을 잃고 미에 침 흘리는 탐미적 예술가들은 시나브로 죽음의 향에 도취되기까지 한다. 그들은 경련적 혼돈을 일으키는 이 황홀의 느낌을 따라 죽음의 불길로 뛰어드는 부나비들이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에서 아센바흐는 예술의 불온한 광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탐미에 도사리고 있는 혼돈과 광기어린 열정은 명철한 조형적 기율의식으로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건강하고 건전한 교육적 예술을 신봉한다. 그의 신분이 이제는 창작혼이 시들해진 대학교수로 나오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던 그가 한없이 무너진다. 휴양차 방문한 베니스에서 ‘완벽하게 신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타치오를 그만 목격하고 만 것이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정체모를 돌연한 설렘의 물살이 인 바로 그 순간, 그는 아름다움의 심연에 위험한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존재를 흔드는 치명적 아름다움은 가장 오래 기다린 자를 위해 오는 건 아니다. 아름다움의 섬광은 이처럼 매복과 기습에 능하다.

 

아센바흐의 이성은 에로스의 신에 무릎 끓었다. 베니스에 콜레라가 창궐해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 와도 무감각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정열의 노예가 돼 버렸다. 관광객은 하나 둘씩 떠나거나 죽어가고, 화장기 걷힌 베니스는 썩은 내 나는 폐허로 변해 있다. 결국 그는 죽어야 했다. 콜레라에 전염된 듯 신열에 떨며, 식은땀을 흘리며, 바닷가 의자에 앉아 타치오를 바라보며 그렇게 쓰러져가야 했다.

 

 

 

 

 

 Scene #4  같지만 다른 아셴바흐의 죽음 

 

원작이 ‘예술가에 대한 성찰’이였다면, 영화는 ‘예술가를 위한 변명’이다. 따라서 똑같은 아센바흐의 죽음도 그 성격은 다를 것이며 토마스 만이 보는 아셴바흐와 루이스 비스콘티가 보는 아셴바흐는 동명이인일 것이다.

 

먼저 원작과 영화 초반부에 설정된 아센바흐의 심리적 처지부터가 다르다. 원작에서의 시인 아센바흐는 엄격하고 조화로운 고전적 예술로 이미 성공한 인물이다. 즉 그는 베니스에 올 때부터 아폴론적 요소로 자족해 있는 예술가이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쇼크로 그 자족 상태가 무너져간다.

 

이에 비해 영화에서의 음악가 아센바흐는 당초 탐미 없는 예술로 쓰디쓴 실패를 맛본 처지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결핍으로 한계를 느끼던 차였다. 베니스에서 그는 미의 충격적 광기를 접하며 이 결핍 상태가 점차 채워져 감을 느낀다. 니체가 “인간은 자기 운명이 자기를 어디로 더 데려갈지를 모를 때 가장 높이 솟는다”고 했던 바로 그 디오니소스적 고양의 황홀감을 맛보며 죽어간다. 따라서 원작의 죽음이 돌연사라면 영화의 죽음은 안락사이다. 전자가 비참한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행복한 죽음의 향을 피워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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