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미술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14
노성두 지음 / 살림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그림의 기원은 그림자다

 

램프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는 방 안에서 옆모습의 여인이 남자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 반쯤 앉은 자세로 여인을 부둥켜안은 남자의 얼굴은 위로 젖혀져 있다. 오른쪽에 있는 램프 불빛으로 여인의 옷과 목덜미가 환하게 빛나고 있고, 여인의 옆얼굴과 남자의 몸은 절반가량 어둠에 잠겨 있다. 왼편 벽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여인은 연인의 등 너머로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이별을 앞두고 자기 애인을 그림으로나마 간직하기 위해 벽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그대로 따라 그리고 있는 여인은 고대 그리스의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보조물로 그림자를 잡아두는 여인의 이야기가 서양회화의 시초를 알리는 것이라고 전한다.

 

‘실제 대상-그림자-회화’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 속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림 그리기, 나아가 예술적 표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 표현은 사적 욕망의 구체화라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욕망의 대상에 다가가고자 하면 할수록 그 대상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간의 퇴적 속에서 예술적 표현의 방식이 보다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예술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그저 희미한 화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Scene #2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제욱시스의 포도 그림 주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묘사한 상상도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화가는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 즉 대상의 본질을 뽑아내 화폭 위로 끌어온다. 그리고 대상에 우연히 덧붙여진 부수적인 요인들을 걸러내 제거한다. 본질이 아니면,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한 것, 그것을 미메시스(mimesis)는 드러낸다. 무명으로 알려진 도공의 딸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 화가들은 가상의 공간 속에 현실을 옮겨놓는 예술적 미메시스를 시도했다.

 

플라톤은 예술적 미메시스가 현상을 모방해서 사람을 현혹하게 만든다고 부정했으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왜곡의 속임수로 여기지 않고, 미메시스의 원리 속에서 회화 창작의 본질을 밝혀주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림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추론하여 그림을 건너 대상 자체로 간다. 대상과 그림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순간, 감상자는 그림이 포착한 대상의 본질을 배우며, 그림에 대한 미학적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Scene #3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다

 

 

 

 

 

(왼쪽) 벨베데레의 아폴론 / (오른쪽) 폴리클레이토스  「큰 창을 든 남자」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걸작인 밀로의 비너스는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함께 이상적인 인체비례로 유명하다. 즉, 고전기의 걸출한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가 ‘카논(canon)’이라고 부른 황금비율(0.618:0.382)이 적용된 것이다. 이는 비너스 상의 머리에서 배꼽까지가 전체 신장의 0.382, 배꼽에서 발끝까지가 0.618에 이르는 비율이다.

 

초기 그리스 조각은 수직적이고 딱딱한 이집트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집트 조각은 지나치게 규칙이 엄격하고 자세가 경직돼 그리스 조각가들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이집트 조각도 인체의 수와 비례관계를 정해두고 설계도에 있는 그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가의 순수한 창작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없었다.

 

이집트식 카논대로 조각을 만들었던 그리스 조각가들이 입장에서는 더욱 답답했을 터. 그리스 조각가들이 원하는 것은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움직임과 생명’이었다. 그들은 여인의 조각상을 진짜 살아있는 여인이 되기를 비너스 여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갈라테이아가 되고 싶었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조각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자세의 조각상을 만들려고 했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크라테스는 조각가를 ‘조각에 살아숨쉬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리스 조각가의 능력을 넘어서 세계 미술의 진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식 카논을 높이 평하는데 적합한 최고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새와 사람을 속일 정도로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무명의 그리스 조각가들은 눈속임을 넘어서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알았다.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동시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스 조각가들은 끌과 망치를 가지고 자신의 확신을 이처럼 아름다운 조각 작품으로 실현했다. 후대의 미술가들이 밀로의 비너스를 보면서 닿지 못할 아름다움의 영원한 이상이 지상에 구현되었다고 찬사를 보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Scene #4  한 인간에게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그리스 미술을 빼놓고 서양미술사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예술가와 미술애호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 후대의 미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스 미술에 대한 숭배와 향수,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과 전복의 욕구야말로 서양미술사를 움직여온 원동력이다. 그리스 미술은 이처럼 서양미술사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미술은 근대 서양인에 의해 미화되고 왜곡된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체로 그리스 미술을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관찰되었다. 그러므로 비너스나 많은 여신의 나신상들은 단지 옷을 벗은 여인의 아름다운 조각상만으로 받아들여졌고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건축물들도 구조, 기둥모양, 비례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건축적인 요소만이 부각되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자국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의 말을 떠올려 보자. 도공의 딸이 연인의 그림자를 보고 따라 그린 것이 한 인간에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서양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큰 도약이다. 모방이라는 첫 발걸음을 시작해서 생동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카논까지 고대 그리스 미술은 작지만 큰 여러 번의 도약을 통해서 미술은 물론이고 뛰어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고대 그리스 미술 또한 그렇다. 무명의 예술가들은 단순히 상상력에 기대지 않고, 실제로 자연을 관찰하고 비교함으로써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리고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미술은 서양 미술 문명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