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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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불행해졌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이 있다. 그는 버려진 것 같은 자신의 삶을 예수와 비교한다. 시골길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예수를 생각한다. 따뜻한 곳에 살았으며 십자가에 일찍 못 박힐 수 있었던 예수를 부러워한다. 살아갈 이유와 버틸 힘이 없음에도 목을 맬 노끈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인생길에서 그가 하는 일은 한가지다. 바로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그는 고도를 기다린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서사는 오직 ‘기다림’뿐이다.

 

한 그루의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와 블라디미르는 낡은 옷과 해진 중절모 외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닳아가는 신발은 작아 불편하다. 낡은 넥타이는 생에 대한 마지막 격식과 예의인 듯 끝까지 풀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는 이들은 세상 위에 내던져진 인간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한다. 이들의 말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목적이나 대상이 없기에 이들의 말은 하나의 축으로 집결되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나 사방에 흩어진다. 고독한 인간의 말은 맺히는 곳 없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이들의 대화는 질문과 답의 구조를 취하나 시종일관 소통이 불가능하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그럼에도 엉뚱한 대답만을 이어간다. 소통의 부재는 이들만의 특징이 아니다. 극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포조와 럭키 역시 자신의 말만을 뱉어내기에 바쁘다. 말을 하지 않던 럭키는 어느 순간 입을 연다. 그의 말은 해괴한 극의 상황을 패닉상태로 몰아넣는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힘으로 말리기 전까지 쏟아져 나온다. 결국 이들에게 완벽한 소통이란 불가능하며 더불어 자신과의 소통도 이루지 못한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고 꿈과 현실을 혼동한다.

 

고립되어 있는 고독한 인간이 세상과의 부조화 속에서 버티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뱉어낸다. 그 말은 무의미하고 그 무의미를 통해 의미를 이뤄나간다. 무의미와 의미는 끝까지 충돌한다.

 

이들이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끊임없이 기다리는 고도란 과연 무엇일까? 고도가 누구인지, 오기는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구원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한 가닥의 실마리가 있으나 그것 또한 확실치 않다. 독자(혹은 연극을 보는 관객)은 그들과 함께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가 끝나도 고도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까?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구원해줄 무언가, 이를테면 고도 같은 것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이들의 기다림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기다림의 시간과 장소가 확실한지조차 알 수 없다.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반복하는 '말놀이'는 고도가 실제로 온다면 끝날 터이다.

 

그러나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전갈을 알리는 소년만이 등장한다. 소년의 등장으로 1막이 끝나면 새로운 기다림이 시작되고, 2막의 마지막 역시 유예되는 기다림을 알리는 소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소년 또한 현실의 인물인지 환상속의 기대가 만들어낸 허상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소년은 기다림의 절망 속에서 고도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찾기 위한 블라미디르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림 자체가 아니라 기다리는 태도인 것이다. 이들은 어제를 잊고 꿈을 잊고 현실을 잊으면서도 자신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놓치지 않는다. 목을 매고 싶을 지라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고도를 기다리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대변한다.

 

어긋나는 이들의 대화와 망각은 관객들을 허무하게 만들면서도 웃음을 이끌어낸다.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알쏭달쏭하게 느껴지는 허소(虛笑). 그 웃음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든다.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결국 우리의 문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절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서 고도를 기다리는 독자나 관객들에게 그 기다림이 계속될 것이라는 무서운 메시지를 남긴다. 독자는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책을 붙들고 기다린다.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고서도 고도를 기다린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것을 모른다. 알고 있었다면 작품 속에 써 넣었을 것이다.” 작품을 매년 한번씩 또 읽어도 나는 고도를 모른다. 고도는 과연 올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올 것인지. 때로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로 아름답다고 하기도 한다. 전망도 없고 기대도 없는 상황에서 기다림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기다리지 않으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오기를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게 만드는 작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무하다고 해서 삶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삶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할수록 삶은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이 ‘말장난’이라는 유희를 발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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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4-05-0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7번째 단락에서 '디디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의 디디는 무엇을 말하는것인가요?!

cyrus 2014-05-05 09:31   좋아요 0 | URL
디디가 <고도를 기다리며> 우리나라 연극 버전의 블라디미르의 이름입니다. 예전에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공연의 감상까지 곁들이다보니 이름을 잘못 썼군요.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안나푸르나 2014-11-2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한동안 고도를 그렸던 기억이 있네요
아니 고도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요?

cyrus 2014-11-29 09: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읽을 때마다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장소] 2015-01-2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그 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