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내다본 창 밖 풍경은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었다. 괜히 가슴이 설렜다. 그래서였을까? 문득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네는 살면서 사랑을 많이 해봤나?”

 

원칙주의자로 일만 알고 살아온 항공 책임자 리비에르는 상대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는다. “자네도 나랑 같군. 시간이 없었단 말이지.” 이 작품 속에서 리비에르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 됐을 것이다.

 

그래, 그도 나처럼 즐겁고 달콤한 것들을 언젠가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미뤄 왔을 것이다. 그러나 늙어서 삶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그런 여유를 얻는다면 그때는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랑도 있는데.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난 그녀의 미소 때문에, 그녀의 모습 때문에,

그녀의 상냥한 말씨 때문에, 그녀의 사고방식이

나와 잘 어울리기 때문에, 언젠가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런 것들을 스스로 변하거나,

당신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맺은 사랑은 또 그렇게 풀릴지 모르니,

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그대의 애정 어린 연민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도 마세요. 그대의 위로를 오래 받은 나의 사랑이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로써 그대의 사랑을 잃을 수도 있으니.

그러니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대가 영원한 사랑으로 나는 늘 사랑할 수 있도록.

 

 

-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20쪽) - 

 

 

이 시를 쓴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8세 때 호메로스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읽고, 14세 때 서사시 『마라톤의 전쟁』을 쓸 만큼 조숙한 소녀였다. 그러나 소아마비에 척추병, 동맥파열 등이 겹쳐 늘 자리에 누워 지내야 했다. 유일한 즐거움은 독서와 시 쓰기. 그녀가 두 권의 시집을 펴낸 뒤,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당신의 시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시집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당신을.’ 여섯 살 연하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보낸 연서였다.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다.

 

이들은 주위의 반대 때문에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가서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그곳에서 사랑의 힘으로 병을 극복한 그녀는 네 번의 유산 끝에 훗날 조각가로 활약하는 아들까지 낳았다. 15년 동안 ‘옛 슬픔에 쏟았던 정열’과 ‘어릴 적 믿음’을 아우르는 행복 속에 살다가 남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헤아려 보죠. 존재와 은총을 베푸는

이상적인 존재의 끝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느낄 때,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햇빛과 촛불 곁에서,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용한 필요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사람들이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이, 나는 그대를 자유로이 사랑해요.

사람들이 칭찬으로부터 돌아서듯이, 나는 그대를 순수하게 사랑해요.

옛날에 내가 슬픔에 쏟았던 정열로, 내 어린 시절의 신앙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내가 잃어버린 성자들과 함께

내가 잃어버린 것 같은 사랑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내 평생의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그리고 만일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죽은 후에도 오로지 그대를 더욱더 사랑할 거예요.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58쪽)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는 그녀가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온전히 사랑한 남편에게 바친 연애시다. 병석에 누워 지내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준 남편을 통해 ‘잃은 줄만 여겼던’ 열정을 되찾고 한없이 큰 사랑 속에서 삶을 마감한 그녀의 생애를 생각하면 더욱 애틋하다.

 

 

 

 

 

 

 

 

 

 

 

 

 

 

 

사랑은 꼭 이렇게 해피엔드로 끝나지 않더라도 아름답다. 『시라노』는 주인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사랑처럼 말이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무적의 검술가인 시라노는 재기 넘치는 록산느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만 흉물스러운 코를 가진 추남이라는 생각에 선뜻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못한다. 반면 록산느는 그저 잘생겼을 뿐인 크리스티앙에게 반한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열정적인 연애편지를 써주고, 그의 영혼을 담아낸 편지 덕분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은 곧 전쟁터에 나가 죽고 록산은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시라노는 그 후 14년간 매주 록산을 찾아가 위로해준다. 괴한의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은 날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모자를 눌러쓴 채 록산느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읽어준다. “록산느, 부디 안녕히, 난 곧 죽을 것이오! 내 마음은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지금도, 저 세상에 가서도 당신을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당신을….”

 

어느새 황혼의 어둠이 짙게 깔리지만 시라노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나간다. 록산느는 시라노가 지켜 왔던 숭고한 침묵의 진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죠, 이렇게 어두운데? 아! 너무나 많은 것들이 죽고 태어나는군요! 왜 지난 14년 동안 입을 다무셨나요? 이 편지에 남은 이 눈물은 당신이 흘린 것이었나요?”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항상 너무 늦게 온다. 시라노는 칼을 치켜든 채 죽음의 여신을 향해 마지막 대사를 외친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고?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늘 성공할 거라는 희망으로 싸우는 건 아냐! 헛된 명분을 위해 의미 없는 싸움을 해왔으니까!”

 

에드몽 로스탕은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이 주인공에게 기형적으로 거대한 코라는 외적 장애를 준 대신 더욱 헌신적인 사랑을 구현토록 했다. 게다가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당당한 정신은 시라노를 더욱 멋진 인물로 만들어 준다. 처음부터 록산느가 사랑했던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고귀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에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라는 구절처럼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절대적 사랑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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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도 코가 큰 것이 컴플렉스였다고 하더라구요.
시도 잘 쓰고, 칼도 잘 쓰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니~ 부럽네요.
저도 한때는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부질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cyrus 2014-03-05 21:52   좋아요 0 | URL
저도 건강을 위해서 운동 하나쯤은 해봐야하는데.. 엄청 돌아다니면서 사람 만나는 것은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몸 움직이는 운동은 하기 싫은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