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 열화당미술문고 210
김진송 / 열화당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 '이O대'라는 글자로만 남은 화가

 

 

 

 

 

 

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1949년

 

 

혹시 이쾌대라는 이름의 화가를 아는가. 올해가 이쾌대 탄생 100주년이다. 이쾌대는 이인성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힌다. ‘월북작가’로 낙인찍혀 이름 없는 화가로 남아 있었다. ‘쾌’(快) 자가 빠진 채 ‘이O대’로만 알려졌다. 1991년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리면서 그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드문 대작, 그리고 근대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군상으로 당시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인 대구, 그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올해 문화계 계획에도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지역 출신의 또 다른 천재화가 이인성(1912~1950)이 작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에서 이를 기념한 전시, 학술대회를 대대적으로 연 것에 비하면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도 위안을 삼아본다면 지난 달 27일에 대구미술관에서 이쾌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끝이다. 하지만 대구시 그리고 시민들은 화가 이쾌대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 타 시도들이 저마다 연관 있는 예술가들을 문화 브랜드로 발굴하고, 스토리텔링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다. 한마디로 대구의 작가를 스타로 만드는 붐 조성에 실패한 것이다.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한 어느 미술 관계자는 “수창초교를 함께 다닌 이인성, 이쾌대를 잘 엮으면 대구의 훌륭한 브랜드가 될 텐데 아쉽다”고 했다.

 

 

 

 ♣ 혼돈의 시대에 낀 천재 화가

 

이쾌대는 1913년 1월 16일 칠곡군 지천면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아버지 이경옥은 창원 군수를 지냈던 인물로, 일찍이 신식문물을 받아들였다. 이쾌대는 1928년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담임선생으로 화가 장발을 만나면서 미술을 권유받았다. 당시 장발은 “이쾌대만큼 데생력이 뛰어난 학생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함께 서울 생활을 했던 12세 위의 형 이여성은 당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진보적 지식인으로, 미술에 남달리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사회주의 관련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려다 체포돼 3년간 복역하기도 했고 언론과 미술 분야에 몸담는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이쾌대와 그의 아내 유갑봉 여사

 

 

 

이쾌대는 1932년 한동네에 살던 유갑봉과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특히 아내를 모델로 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아내 유갑봉은 그가 북으로 간 후 소중하게 그림을 보관해왔다. 유갑봉은 포목점을 하면서 네 자녀를 키웠고, 198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회의 반공 분위기 아래서 그림들을 벽장 속에 감춰두고 지켜왔다. 물론 물질적 유혹도 잘 이겨냈다. 이런 유갑봉 여사 덕분에 오늘날 이쾌대의 작품을 고스란히 우리가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쾌대는 1934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했는데, 특히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 다양한 활동을 하던 이쾌대는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모든 미술 단체가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하기를 독려하고 있었으나 이쾌대가 중심이 된 신미술가협회는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치열하게 자신의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던 이쾌대는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48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고 미술학도들을 가르쳤다.

 

해방 후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사회는 그와 상관없이 혼란스럽게 흘러갔다. 그의 형 이여성은 근로인민당 대표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 월북했고, 그때 남한은 정부수립 이후 좌익 소탕에 나서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1949년 초 이승만 정부는 이쾌대를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미술가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반공 포스터전에 참가시켜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6.25전쟁은 다시 이쾌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미처 피란하지 못했던 이쾌대는 북한군의 점령하에서 다시 정치적 전향을 강요받았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실 때문에 자수를 강요당하고 조선미술동맹에 재가입해야 했던 것. 이들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을 그려야 했다. 얼마 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다시 유엔군의 수중에 들어갈 무렵, 이들은 다시 혹독한 정치 보복이 닥쳐올 것을 직감했다. 미술동맹원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북으로 갔다. 저자 김진송의 표현을 빌리자면 둘 다 신념에 의한 선택으로 보기에는 역사의 격량이 너무 거세었다.

 

서울이 탈환되기 일주일 전 이쾌대는 서울을 빠져나왔고, 국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수용소에 수감됐고, 그 이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가 좌익으로 몰렸다는 사실과 1953년 휴전이 되자 북을 선택해 갔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으로 올라간 이쾌대의 소식은 몇몇 자료에 등장하지만 그다지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987년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몇 몇 연구가들은 지금도 북한에 남아 있는 이쾌대의 흔적을 발굴하가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사료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인데다 북한 미술계에서도 이쾌대에 관한 언급을 쉬쉬하는 편이다. 그야말로 남북 양쪽에서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지 않은 독특함, 이쾌대만의 독창성

 

 

 

 

 

이쾌대 「무희의 휴식」1938년

 

 

이쾌대의 작품은 대개 인물풍속화다. 후기로 갈수록 당대 현실 속의 인물 즉 특정 상황 속의 인물을 묘사했지만 등단 초기만 해도 전통 속의 인물을 선호했다.「무희의 휴식」은 화사하기 그지없는 전통 복장의 젊은 무희의 좌상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에만 한정 짓는 제작에만 머무르지 않고 진일보한 표현방식을 위해 실험했다.

 

 

 

 

 

이쾌대  「운명」 1938년

 

 

애매한 상황 속의 인물의 배치는 점차적으로 뚜렷한 시공간을 알리면서 존재의 이유를 확실하게 들어내든데 중점을 맞추고 있다.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30년대의 야심작으로 「운명」과 「상황」을 꼽게 한다. 「운명」은 좁은 방안에 누워 있는 남성 주위로 슬픔에 젖어 있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품 「운명」은 구체적 사건이나 장소 혹은 인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화면에 나타난 사항만 가지고 볼 때, 가장과 같은 남성의 절망적 순간과 이를 슬픈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특정 상황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비극의 현장, 하지만 작품 속에는 그 구체성을 알리지 않고 있다.

 

 

 

 

이쾌대  「상황」 1938년

 

 

 

다만 제작년도인 1938년은 한 해 앞서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시기라는 점이다. 「상황」은 「운명」보다 적극적인 스토리텔링의 경우에 속하는 작품이다. 여타의 작품과 달리 서사적 구도는 무엇인가 엄청난 격동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무희가 춤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슬픔을 표하고 있는 젊은 여성은 상반신이 벗겨져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방바닥에는 깨진 그릇 파편이 뒹굴고 있어 뭔가 격렬한 상황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어떤 상황, 분명히 어떤 구체적 사건을 도해화한 것 같으나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이색 형식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가장 난해한 그림 중 하나일 것이다.

 

 

 

 

 

이쾌대  「2인 초상」 1939년

 

 

다만 「상황」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화면 중앙의 젊은 여성이다. 그의 자세는 춤추는 모습으로 ‘특정 상황’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식 전통복장, 암흑기 일제시대에 이러한 옷차림의 당당한 제시는 작가 의식의 단면을 확인하게 한다. 이쾌대는 화필을 들고 자신이 화가임을 천명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같은 자화상도 더러 그렸지만 인상적인 작품은 「2인 초상」이다. 이 작품은 부부초상으로 부인을 전면으로 내세워 강건한 존재로 부각시킨 반면 화가 자신은 부인 뒤에서 하나의 실루엣으로 약화돼 있다. 부인의 그림자, 이색적인 부부초상화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페미니즘 측면에서 부상시킬 수 있다. 여성 강조의 부부초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부초상 작품도 사례가 없어 의미부여를 각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쾌대 최고의 대작, '군상' 시리즈

 

 

 

 

 

이쾌대  「군상 Ⅳ」 1948년

 

 

이쾌대의 그림은 잔잔한 감동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시선을 압도하는 벅찬 감동은 강렬하다. 예컨대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펙터클한 ‘군상’ 시리즈(‘군상-1 해방고지’, ‘군상 Ⅱ’, ‘군상 Ⅲ’, ‘군상 Ⅳ’)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35명의 남녀가 나체로 한 덩어리가 된 ‘군상 Ⅳ’는 광복의 기쁨과 건국의 열기로 달아오른 격동기를 조형한 절창이다.

 

무엇보다도 해부학에 근거한 근육질의 인물들이 압권이다. 웅장하다. 그런데 이들은 비현실적인 관념 속의 인물이다. 단적인 예가 있다. 각 인물들의 포즈가 작위적이란 점이다.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처럼 포즈가 과장되어 있다. ‘칼레의 시민’의 작위적인 포즈가, 칼레를 구하기 위해 나선 시민들의 결연한 비장미를 극대화 해주듯이, ‘군상 Ⅳ’의 포즈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해방공간의 낙관적인 전망과 열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비탄에 잠겼다가 서서히 일어서는 인간군상은 마치 빛을 향해 자라는 ‘향일성 식물’ 같다. 이 식물의 ‘머리’는 그림의 왼쪽에 놓여 있는 셈인데, 이 지점에 선 인물들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난다. 이는 좌절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희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구성이 독특하다. 보편적인 시선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보통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의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 위에서 아래로 이동한다. 그런데 ‘군상Ⅳ’는 이와 반대다. 인물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서서히 일어서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불편을 감수하며 그림을 ‘읽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그림의 무게중심은 왼쪽에 있다.

 

김진송은 이런 동세를 좌절에서 희망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혼란에서 안정으로 향해 가는 과정으로 읽었다. 역사의식을 지닌 작가가 해방 후의 혼란한 현실을 극복해야 하며 또 극복 가능하다는 의지를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만약에 이런 동세를 고려하지 않고 보면 어떻게 될까? 감상이 불편해진다. 일반적인 시선의 방향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힘겹다. 인물들의 시선과 마주치며 오른쪽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보면 물살의 흐름을 타듯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서양화에 전통적인 조형방식을 접목한 것이다.

 

 

 

 ♣ 분단 대립의 희생양, 이쾌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이쾌대는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며 “서구적인 지성과 동양적인 감성을 융화”(김용준)시킨 역동적인 작품세계를 일궈갔다. 그 중에서도 ‘군상 Ⅳ’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해방공간에서 발견한 우리 민족의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하나의 ‘조형적 사상’이다. 서로 뒤엉킨 인물들의 역동적인 포즈와 풍부한 표정은 가슴 벅찬 ‘볼거리’를 제공하며,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았던 해방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적인 문맥에서 이탈하여, 작품 자체만 감상해도 심심하지는 않다. 그만큼 볼거리가 쏠쏠하다. 이러한 훌륭한 대작을 대구 시민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지 못했고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남한에서는 월북화가라 해서 금기인물이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파가 아니라서 역시 금기인물이었던 이쾌대, 그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희생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20세기 전반부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뚜렷한 예술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은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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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분야에서 이런 이유로 잊혀져버린 이름들이 제법 있을 것 같아요.
남에서는 월북했다고, 북에서는 숙청당했다고 양쪽 모두에서 금기가 되어버린 사람들이요.

문외한이지만, 딱 보기에도 그림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특히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참 독특한 느낌이네요.
덕분에 좋은 그림 잘 보았습니다.

cyrus 2013-08-02 00:0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은빛님이 선물한 <현대사 아리랑>이 생각났어요. 최근에 납북 문학가들이 재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환영하지만 여전히 남북한 양쪽에서 외면받거나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한 예술가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이쾌대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가장 독창적인 재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외면받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