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큐어 하는 남자 - 강남순의 철학에세이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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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남성, 여성이라는 두 개의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상한 존재로 규정해버린다. 젠더(gender)는 외모와 행동을 통해 단박에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믿음은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의 외모와 행동만으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정하거나 판단한다. 상대방의 젠더를 외모와 행동과 같은 외적인 단서로 추정하는 것을 ‘젠더 귀인(gender attribution)이라고 한다.[주1] 젠더 귀인에 의해 부여된 성 역할은 개개인을 속박하고 예외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은 안정적이다. 견고하던 젠더 이분법에 파열음이 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남녀 사이의 구분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더 많은 젠더가 있으며 그 젠더마다 어떤 규범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각각 부여된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며 새로운 성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 또 외모와 행동이 알려주는 정보, 그중에서 젠더 귀인과 관련한 정보는 그리 정확하지 않다. 상대방의 젠더가 모호하거나 젠더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하여 ‘저 사람은 남자일까, 여자일까?’라는 반응을 드러내는 순간 젠더를 인식한다. 이를테면 손톱에 매니큐어를 한 남자를 만났다고 치자. 아마도 당신은 ‘저 사람, 남자 맞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지 않은 남자를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자가 매니큐어를 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고 매우 자연스러운 사실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게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화장하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자가 화장하는 것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게이들이 외모에 많이 신경을 써서 미용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한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실제 인물이다. 신학자 강남순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또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젠더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사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남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젠더 귀인에 익숙해진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남성으로, 매니큐어 하는 행위를 보고 여성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자기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할까? 이것은 본인만이 답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할 수도, 남성인 동시에 여성으로 인식할 수도, 자신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에이젠더(Agender)로 인식할 수 있다.

 

강남순이 쓴 글의 제목이자 에세이집의 표제인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젠더 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퀴어(queer)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견고한 젠더 이분법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 구조 바깥에서의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젠더 이분법은 너무 일상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 이분법은 젠더에 대한 구분과 편견을 강화하고 다른 젠더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대상을 둘로 나누면 편하다. 이러한 간편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젠더 이분법은 성소수자를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효과적인 선전 도구가 된다. 강남순의 말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병은 ‘획일화된 존재 방식의 절대화’이다. 쉽게 말하면 시스젠더(cisgender)는 성별과 관련된 ‘획일화된 프레임’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시스젠더는 성별이 남성과 여성, 이 두 가지로 고정돼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의사나 부모에 의해 하나의 성별을 지정받고 그것에 따른 겉모습, 성역할 등을 요구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젠더 이분법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겉모습이 어떤지, 성격이 남자/여자답지 못하다든지 등 여러 가지 간섭과 억압을 받는다. 이러한 억압이 강압적으로 반복되면 획일화된 젠더 이분법의 틀에 벗어난 퀴어를 향한 혐오와 증오 범죄가 일어난다.

 

저자는 성서의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전통 신학의 맹목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그녀는 성서가 인간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적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서를 잘 읽는 방식’을 제시한다. 성서와 함께 생각하면서, 성서에 ‘저항(비판)’하는 독서 방식이다. 교회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말하면서 소명을 거부하는 불순종은 죄악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여성 해방과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면 창녀 · 죄인 · 이단으로 취급하여 배척한다. 보수적인 기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물음표를 박탈하는 종교’[주2]이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문제이다. 차별과 혐오를 묵인하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기독교는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성서에 갇힌 종교가 되었다.

 

누구나 ‘연대’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연대’는 참으로 어렵고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말이다. 특정 집단이나 상대방을 지지하면서 ‘연대’를 누누이 외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차별할 수 있고 차별을 묵인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든 진보주의자이든 누구나 ‘인식론적 사각지대’[주3]에 빠진다. 그러나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인식론적 사각지대’라는 함정에 여러 차례 빠질 수 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한 지속적인 사유를 멈출 수 없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젠더 트러블》 서문에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 의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인간이라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욕망이 있다. 이 기본적인 욕망이 없는 인간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사유하지 않게 된다.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이다. 나를 둘러싼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지, 더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며, 누구와 함께 연대해야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제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독자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욕망을 깨운다.

 

 

 

 

 

 

 

 

[주1] 케이트 본스타인, 조은혜 옮김,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54~56쪽, 2015.

 

[주2] 강남순, 「아담과 하와는 몇 살이었을까」,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212쪽, 2018.

 

[주3] 강남순, 「유아인은 페미니스트인가」,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136쪽,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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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9-02-23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서지상주의, 문자지상주의, 특히 절대적으로 구약에 기대는 문제는 비단 LGBTQ에 대한 자세를 넘어 한국개신교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포교/선교/헌금활동/교리/강론을 들어보면 구약을 근거해서 나오는 것이 많고 신약은 곁다리 같이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신약은 용서와 관용이 주된 내용이지만 구약은 아전인수로 갖다 붙일 것들도 많고 흑백을 나누는 성향이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cyrus 2019-02-24 16:20   좋아요 1 | URL
대부분 사람은 성서를 고전으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지 못하게 한다면 성서가 고전으로서 자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