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하우스의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독자들은 우드하우스가 코믹 작가이자 조크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력적인 플롯이나 흥미로운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는 거의, 혹은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고마워요, 지브스』[주1] 항목 중에서)

 

 

 

 

나는 나이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아재다. 그래서 아재 개그를 좋아한다. 아재 개그는 흔히 말장난이 주를 이룬다. 동음이의어를 사용하거나,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활용한다. 분위기를 한순간에 얼어버리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개그는 뻔뻔하게 해야 한다. 체면도 내려놓고, 나이도 내려놓고, 눈높이도 낮추면서 자신을 낮춰야 개그가 나오고 펀펀(fun fun)해진다.

 

 

 

 

 

 

 

 

 

 

 

 

 

 

 

 

 

*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 편집자는 후회 한다 외 38편》

(현대문학, 2018)

 

 

 

영국 출신의 작가 P. G. 우드하우스(P. G. Wodehouse)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대부분은 귀족이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권위나 체면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있다. 그들은 명석하지 않다. 난처하게 만드는 상황에 직면하면 엉뚱한 방식으로 대처한다. 그들의 엉뚱하고 어리숙한 모습은 독자들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지브스와 우스터’ 시리즈에 나오는 귀족인 버티 우스터(Bertie Wooster)는 혼자 감당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에 마주치면 집사 지브스(Jeeves)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지브스는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가끔 그에게 딴죽을 건다. 집사에게 트집 잡히고 툭 하면 무시당하는데도 우스터는 그걸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활기차고 재미 넘치는 작가의 성격은 순진하고 낙천적인 우스터의 모습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드하우스의 소설에 나오는 남성 인물들은 재치 있는 말장난에 의존하는 영국식 유머를 구사한다. 우스터는 귀족이 아니라 ‘영국 아재’이다. 귀족 같지 않은 귀족. 이러한 인물의 특징은 우드하우스의 작품이 사랑받게 된 비결 중 하나이니라.

 

그런데 번역가들은 유머를 번역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우드하우스의 소설에 나온 유머, 즉 영국식 유머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건 까다로운 작업이다. 일상적인 대화는 그대로 번역해도 의미 전달에 크게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말장난, 농담, 비꼬는 말 등은 해당 언어에 특화된 유머 코드나 언어 표현으로 바꾸지 않으면 청자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말장난은 청자의 취향에 좌지우지되는 부분이기에 재미를 못 느낄 수가 있다. 그렇지만 번역가는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원문을 우리말로 맛깔나게 번역하지 못하더라도 원문 속에 숨어있는 유머 코드를 파악하여 주석을 통해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일례로 우리말로 번역된 『모든 것은 지브스 손에』라는 소설에 지브스와 우스터가 처음 만나면서 대화하는 장면을 무심결에 보고 있으면 작가가 의도한 웃음을 지나쳐버린다. 왜냐하면 번역가는 지브스가 언급한 ‘우스터소스’가 무엇인지 주석으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한번 마셔 보시겠습니까?” 그[지브스]가 마치 환자를 대하듯이 말했다. 병든 군주에게 기운을 북돋는 음료를 권하는 궁중 의사 같았다. “이건 제가 직접 개발한 음료인데, 색이 이런 것은 우스터소스 때문입니다. 날달걀을 넣었으니 영양가도 좋지요. 빨간 고추가 매콤한 맛을 내고요. 저녁 늦게 귀가한 뒤 이것을 마시면 아주 기운이 난다고 많은 신사분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아침 나[우스터]는 무엇이든 생명줄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냉큼 달려들고 싶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것을 꿀꺽 삼켰다. 순간적으로 누가 내 머리 속에 폭탄을 터뜨린 뒤 횃불을 들고 내 목구멍을 느긋하게 걸어 내려가는 것 같더니만, 갑자기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창문으로 햇살이 비쳐 들고, 나무에서 새들이 지저귀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희망이 다시 밝아 오고 있었다.

  “자네를 고용하겠어!” 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가 세계 최고의 일꾼 중 한 명이라는 것, 어떤 집에든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제 이름은 지브스입니다.”

  “당장 일을 시작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주인님.”

 

 

(『모든 것은 지브스 손에』, 180~181쪽)

 

 

※ 붉은색 글자는 필자가 표시한 것임.

 

 

 

지브스는 우스터(Wooster)의 침체된 기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스터소스(Worcester sauce)를 첨가한 음료를 준다. 음료의 효과에 만족한 우스터는 정식으로 지브스를 하인으로 고용한다. 이 장면에 인명 ‘우스터’와 지명 ‘우스터’의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유머가 나온다. 우스터소스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 우드하우스의 유머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 톰 닐론 《음식과 전쟁》 (루아크, 2018)

 

 

 

우스터소스는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우스터라는 도시에서 만들어졌다. 시큼함과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식초와 맵싸한 맛의 고추 추출물, 달콤함이 두드러지는 당밀과 설탕, 짭조름한 소금 등 다양한 맛을 내는 재료들을 한데 모아 숙성시켜 만든다. 우스터소스를 만든 사람은 요리사가 아니라 약사이다. 그래서 지브스가 만든 음료는 우스터소스가 들어간 일종의 ‘피로회복제’인 것이다.

 

우스터소스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조미료 중 하나이다. 특히 바다 위를 항해하는 해운회사 승무원들이 우스터소스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바다 위에 오랫동안 생활하는 승무원들은 육지에 나는 맛있는 음식들을 접할 기회가 적다. 게다가 선박의 전속 요리사들이 만들어주는 음식들의 맛은 대부분 밋밋했다. 그들은 음식이 싱거우면 우스터소스를 찾게 되었고, 우스터소스 특유의 시큼한 맛에 중독된 승무원들은 육지에 도착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했다.

 

 

 

 

 

 

 

 

 

 

 

 

 

 

 

 

 

 

* 백욱인 《번안 사회》 (휴머니스트, 2018)

* 오카다 데쓰 《돈가스의 탄생》 (뿌리와이파리, 2006)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스터소스를 생소하게 여기겠지만,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맛보고 있었다. 돈가스 위에 뿌려진 조미료가 바로 우스터소스다. 다만 우리나라에 돈가스와 함께 들어온 우스터소스는 일본식이다. 돈가스는 일본이 고기를 막 먹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시기에 유럽에서 건너왔다. 당시 해산물 위주 식사를 하던 일본인에게 고기 자체를 먹는 일은 낯선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후 고기를 먹는 식문화에 점점 익숙해진 일본인들은 그들만의 제조법(얇게 썬 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많은 양의 기름에 튀겨내는 방식)으로 돈가스를 만들기 시작했고 일본식 우스터소스도 만들어졌다. 일본식 우스터소스는 기존 우스터소스에 간장을 섞은 것이다. 우리가 평소 즐겨 먹은 돈가스와 우스터소스는 서양의 음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으로 ‘번안’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온 ‘변종’이다. 우스터소스의 기원, 일본식 우스터소스의 탄생 과정, 그리고 일본식 돈가스가 우리나라 경양식 문화 보급에 미친 영향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으면 《음식과 전쟁》(루아크, 2018)의 6장, 《번안 사회》(휴머니스트, 2018)의 2부 10장, 《돈가스의 탄생》(뿌리와이파리, 2006)을 참조하면 된다.

 

 

 

 

 

 

 

 

 

 

 

 

 

 

 

 

 

 

 

 

 

 

 

 

 

 

 

 

 

 

 

 

 

* 존 키츠 《키츠 시선》 (지만지, 2012)

* [e-Book] 존 키츠, 김천봉 옮김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 존 키츠 시선》 (글과글사이, 2017)

* [절판] 김천봉 옮김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3》 (이담북스, 2011)

* [품절] 존 키츠 《가을에 부쳐》 (민음사, 1991)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르, 2011)

 

 

 

‘지브스와 우스터’ 시리즈에 속한 『설교 대회』라는 소설에 유명한 시구를 이용한 재미있는 대화가 나온다. 우스터의 친구 빙고(Bingo)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날씨 상태에 빗대어 표현하는데, 이 눈치 없는 우스터는 런던 날씨가 화창하다면서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빙고는 시구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씁쓸한 처지를 계속해서 강조한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무의미한 대화는 우드하우스의 유머로 볼 수 있는데, 이 소설의 번역가는 대화에 나온 시구가 무엇인지 설명한 주석을 달지 않았다. 이러면 독자는 작가의 지적인 유머를 그냥 쓱 지나치게 된다.

 

 

 

[빙고] “지난 몇 주는 힘든 시간이었어, 버티. 햇살은 더 이상 빛나지 않고…‥”

[우스터] “그것 이상하군. 런던 날씨는 아주 화창했는데.”

[빙고]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설교 대회』, 104쪽)

 

※ 붉은색 글자, 글꼴을 굵게 표시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표시한 것임.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No birds sing)…‥”라는 구절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무자비한 미녀(La Belle Dame Sans Merci)[주]에 나온다. 이 구절은 1962년 살충제 폐해로 봄이 와도 숲에서 새가 울지 않는 ‘침묵의 봄’을 예견했던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책의 제사(題詞)로도 유명하다.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 편집자는 후회 한다 외 38편》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 유머 작가의 작품을 수록한 최초의 선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 영국 작가의 유머를 어떻게 읽어야할지 잘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우드하우스의 유머’라고 주장한 것들은 가정(假定)에 불과하다. 우드하우스 선집의 번역가는 ‘영국 아재’의 영국식 유머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주1] 원제는 ‘Thank You, Jeeves’이다. 집사 지브스에게 늘 도움을 받는 주인 우스터가 하는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마워요, 지브스’보다는 ‘고마워, 지브스’로 옮기는 게 적당하다.

 

[주2] 민음사 판본의 번안 제목은 ‘매정한 아가씨’, 지만지 판본의 번안 제목은 ‘무자비한 미녀: 발라드’, 이담북스와 글과글사이 판본(모두 김천봉 교수가 번역함)은 ‘무정한 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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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1-29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역시 넌 이름값을 하는구나.
역시 박사네. 시루스 박사.
나중에 너만의 백과사전 하나 편찬해도 좋을 것 같아.^^

cyrus 2019-01-29 20:14   좋아요 1 | URL
며칠 지나면 제가 뭘 썼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래도 이렇게 기록을 남기면 나중에 다시 참고할 수 있어요. ^^

2019-01-30 0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9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1-29 20:18   좋아요 0 | URL
외국영화에 나오는 유머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 간혹 유머를 직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웃음 포인트를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

카알벨루치 2019-01-2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개를) 절레절레~👍

cyrus 2019-01-29 20:22   좋아요 2 | URL
이 글은 한 작가를 덕질하는 자세로 임하면서 썼는데, 우리나라에선 생소한 작가라 글을 봐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

psyche 2019-01-29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보다 유머가 제일 어려운 분야인거 같아요. 언어로 말장난 하는 건 그 언어를 잘 알고 있어야 이해가 되고 당시의 문화나 시대상을 알아야 웃기거든요.

cyrus 2019-01-30 16: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대부분의 외국 유머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야 이해할 수 있는 고차원 유머인 것 같습니다... ^^;;

목나무 2019-01-2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아재 개그가 문득 궁금해지는 리뷰입니다. ㅎㅎ
우스터소스라고 하니 저는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문득 떠올랐어요.
늘 그렇지만 오늘도 리뷰 보고 몰랐던 지식 얻고 갑니다! ^^

cyrus 2019-01-30 16:33   좋아요 1 | URL
글을 쓰면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돼서 좋긴 한데, 대부분 ‘알아두면 쓸데없는 잡식’들이네요... ㅎㅎㅎ

북깨비 2019-01-3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저도 cyrus님 아재 개그가 궁금합니다. 갑자기 돈까스도 먹고 싶고 ㅠㅠㅠ 우스터소스와 간장의 만남이었군요. 오늘도 깨알상식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