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소녀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2
오카모토 기도 외 지음, 신주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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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오래된 물건에 정령이나 신(付喪神, 쓰쿠모가미)이 깃든다는 믿음이 있다. 그 물건은 언젠가 스스로 생명을 얻어 요괴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7년)에 나온 책과 화첩을 펼치면 요괴가 우르르 쏟아진다. 이런 나라이니 가는 곳마다 괴담이 들려온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여러 종류의 신을 믿는 일본인들답게 일본 각 지역에는 정말 많고 많은 귀신과 요괴, 전설과 괴담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 때문인지 귀신이나 요괴가 등장하는 추리소설, 공포소설이 많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괴담을 소재로 다룬 문학 작품도 적지 않다.

 

‘고서점 주인 교고쿠도 시리즈’를 쓴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京極夏彦)는 요괴 연구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요괴 마니아다. 사실 교고쿠 나츠히코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요괴에 관심이 많은 작가가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 작가가 바로 오카모토 기도(岡本綺堂)이다. 그는 괴담을 수집하면서 요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괴담과 요괴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오카모토 기도의 대표작은 1917년에서 1937년까지 잡지에 연재(한차례 연재가 중단된 적이 있었음)《한시치 체포록》시리즈이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탐정소설이며 연재된 작품은 총 68편이다. 한시치는 범인 잡는 일을 하는 하급 경찰 관리이다. 그의 별명은 ‘에도시대의 숨은 셜록 홈즈’이다. 「오후미의 혼」은 한시치의 활약상이 처음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한시치는 매일 밤 무사의 아내와 딸 앞에 나타나는 여자 귀신 오후미의 실체를 밝혀낸다. 「단발머리 소녀」는 ‘단발 뱀’ 전설에서 시작된 기이한 저주에 관한 이야기다. 단발 뱀을 보면 3일 안에 죽는다고 한다. 단발 뱀을 본 사람들이 연달아 죽거나 중병을 앓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전설이 진짜였다고 생각한다. 한시치는 전설을 두려워하는 대중 심리 속에 감춰진 ‘죽음의 진실’을 파헤친다.

 

이상출판사‘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두 번째 책《단발머리 소녀》에 오카모토 기도의 작품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오후미의 혼」과 「단발머리 소녀」, 그리고 불가사의한 괴담의 색채가 짙은  「맹인의 강」이다. 「단발머리 소녀」는 1935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번역본의 첫 번째 수록작은 《한시치 체포록》 시리즈 말기 작품에 해당하는 「단발머리 소녀」이고, 이 작품의 제목이 번역본 제목으로 정해졌다. 번역본 제목은 ‘단발머리 소녀’로 정하되, 원작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오후미의 혼」, 「단발머리 소녀」 순으로 배치했어야 했다.

 

 

사토 하루오(佐藤春夫)는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지만, 요코미조 세이시(横溝正史)와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 등의 추리소설 작가에게 영향을 준 작품들을 남겼다. 번역본에 수록된 그의 작품은 총 다섯 편이다. 이 중에 ‘최고의 소설’과 ‘최악의 소설’을 각각 한편씩 고르라면, 나는 「무기력한 기록」과 「불의 침대」를 선택하겠다.

 

「무기력한 기록」은 한마디로 평가하면 ‘스고이(すごい)’다. 스고이는 대단하거나 굉장한 것을 보고 감탄할 때 쓰는 일본식 표현이다. 또 무서운 것을 봤을 때도 이 표현을 쓸 수 있다. 나는 「무기력한 기록」을 읽으면서 ‘대단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알게 돼서 기뻤고, 한편으로는 이 소설에 묘사된 암울한 미래의 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다. 「무기력한 기록」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SF에 가깝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모든 인간이 철저히 ‘상류’와 ‘하류’, 두 가지 계급에 맞춰 살아가는 미래 사회이다. 지하 300m에 최하층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가 있다. 상류 사회 사람들은 따사로운 햇볕과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지상에 살고 있다. 하류 사회 사람들은 상류 사회 사람들이 허락한 자선 데이(자선의 날)에만 지상에 올라가 고작 반나절 정도 산책할 수 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통로는 나선형 계단, 딱 하나뿐인데 지상으로 오르다가 추락하여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자선 데이’를 만끽하는 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지상에 오르는 데 성공한 하류 사람들은 상류 사람들의 실험 대상이 된다. 상류 사람들은 인구를 줄인다는 목적으로 하류 사람들을 식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도한다. 「무기력한 기록」은 당대 계급사회에 대한 은유와 인간성이 사라진 미래사회의 모습을 암울한 상상력으로 담은 의미 있는 SF 단편소설이다.

 

「불의 침대」는 화자인 시인이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어설프게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고사리를 캔 노인은 자작나무에 양 발이 묶인 채 불에 타 죽은 나체의 여자 시신을 발견한다. 언론들은 이 끔찍한 사건에 주목했고, 사실과 전혀 거리가 먼 정보를 퍼뜨리면서 이 사건을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보도한다. 시인은 살인사건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언론의 보도 방식에 못마땅해 한다. 그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사건을 재구성한다. 그는 피해자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히스테리 여성’으로 가정한 다음, 피해자의 몸이 불에 타는 과정까지 상상한다.

 

 

  나는 더 이상 사실과는 상관없이 창작가의 의식과 의욕만 가지고 내 마음대로 공상의 날개를 펼친다.

 

  만약 그녀가 혐오스러운 체취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잊기 위해 꽃을 가까이 했을지도 모른다. 그 체취 때문에 남편의 사랑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녀는 남편을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혐오하고 자신의 몸을 저주할 것이다. 어쩌면 이 불쾌한 악취가 사타구니에서 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이는 불길이 변사체의 허리부분에서부터 사타구니, 대퇴부를 가장 강렬하게 태웠다는 사실을 보고 떠올린 공상이다. 가공의 히스테리녀의 자살 원인을 창작한다면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부득이한 사실의 기록이 아닌 이상 자연주의적 작풍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공상인 경우는 오죽하랴. 그래서 다시 한 번 공상의 날개를 시(詩)의 하늘로 펼쳐본다.

 

 그녀의 선조는 야쓰가타게 봉우리의 상카(山窩: 떠돌이 생활을 하며 특수 사회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 출신이고(시인의 공상은 이런 전설을 좋아한다), 그녀는 지금은 산촌이긴 하지만 보통 농촌의 근면하고 강건한 여자로서, 성격과 외모 모두 보통으로 자라났다. 그런데 결혼해서 다른 집에 들어가보니 인정과 풍습이 조화되지 않는 바가 있어 자타의 호의와 노력도 부부 금실이 나쁜 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의 호의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과 격렬한 노동으로 이 고독감을 겨우 잊을 수 있었는데, 패전 후 국내에 만연한 허탈감과 불안이 그녀의 고독감을 복잡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극수면(極睡眠)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최근 특별한 원인도 없이 죽음을 동경하고 죽음을 위한 죽음을 생각하는 병적인 상태였다. 사후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그 시체를 화장하자고 마음먹는다. 그녀는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듯이 즐겁게 장작과 나뭇가지, 낙엽 등을 그러모아 쌓아올렸다. 그리고 화톳불 위에 몸을 눕히고 죽음의 침상을 준비했다. 화톳불 속에 불을 던져놓고 서서히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침상 위에 몸을 눕히고 느낌을 시험한 끝에 결국 안정감을 찾는다. 높은 산의 조용함과 따뜻한 봄의 온기에 감싸여 그녀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귀에는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눈에는 멀리 봉우리들의 잔설이 보인다. 등 뒤에는 마치 정화작용과 같은 기분 좋고 통렬한 자극이 밀려오는 것을 특유의 오기로 참아내는 사이 영혼은 화창한 하늘을 방황하고 강한 졸음이 몰려온다. 이 상쾌함에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급작스레 황홀한 질식사의 순간에 다다른 것이다. 불은 타오를 대로 타올라 그녀를 태울 만큼 태우고 거의 잦아들었고, 시체는 희망하던 것에 비해 많은 부분을 남기고 불은 자연스레 꺼졌다.

 

 나는 변변치 못한 산문시(소설가 모리 오가이의 와카 초고에 있는 구절)를 읊은 것 같았다.

 

 

베어 쌓아둔 가슴속 땔나무를 한바탕 태운

모닥불 그 속에서 웃으며 죽었으면

 

 

 

(「불의 침대」, 208~210쪽)

 

 

 

아주 오래전부터 월경과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은 오염이 가능한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혐오스러운 체취’와 ‘사타구니에서 나는 불쾌한 악취’는 여성의 몸을 혐오하는 남성들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부정적 인식이 오랜 시간 재생산되면서 남성은 손쉽게 여성을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로 규정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여성은 월경이나 몸의 냄새를 감추려 하고, 청결하지 못할수록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시인은 여성이 죽기 직전에 황홀감을 느꼈을 거라고 상상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개소리’다. 분신(焚身)은 자살 방법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이다. 여성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여성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물화(物化)시키려는 내러티브는 남성 중심의 왜곡된 판타지다. 일부 작가와 비평가들은 여성을 타자화하는 편협한 틀은 못 깨면서 그저 일탈적인 성을 다루는 게 파격과 혁명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나는 파격을 가장한 문학의 성 착취를 보고 싶지 않다. 추리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추리소설은 ‘소설’의 한 장르이며 더 넓게 보면 ‘문학’에 포함된다. 여성, 여성의 신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주체로 보지 않는 문학 작품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한, 의미 있는 불편함이다.

 

 

 

 

 

※ Trivia

 

* 책 앞날개에 오카모토 기도의 간지(한자)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 ‘奇(기이할 기)가 아니라 ‘綺(비단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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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28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타 이런 거 기똥차게 잡아내는 거 보면 천상 기곈데......

cyrus 2019-01-29 14:20   좋아요 0 | URL
‘현미경 리뷰’를 쓰다 보니 책을 읽을 때마다 오탈자 한 두 개 정도 찾게 되네요. ^^;;

2019-01-28 2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1-29 14:28   좋아요 0 | URL
네. 일본 문화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을 뛰어넘는 것들이 많아요... ^^;;

psyche 2019-01-30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신을 황홀한 질식사라니.. 정말 헐 이군요. 그것보다 정말 cyrus 님은 인공지능 이신가요. 오타면 오타, 잘못된 지식, 이름 이런 거를 어찌 그렇게 잘 찾아내시는지요. 이름의 간지 틀린 거 까지 잡아내시다니!!

cyrus 2019-01-30 17:08   좋아요 0 | URL
옛날에 나온 소설들을 보면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그 때 그 시절에 당연하게 여긴 상식이라고 해도 잘못되었으면 비판해야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신기하게도 이번 달에 제가 읽은 책들 대부분은 오자가 한 두개 정도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