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광들
옥타브 위잔 지음, 알베르 로비다 그림, 강주헌 옮김 / 북스토리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 수백 권의 책들이 나오는 이 세상에 당신이 그 정도의 책만 가지고 있다면 ‘애서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애서가에게 책은 소중한 대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지중지 대하듯이 읽고 간직해야 한다. ‘책을 사랑하는 것’은 책 내용이나 책 읽는 행위를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애서가와 애서광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책에 과도하게 빠져 있다는 건 같지만, 이 두 단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보통 애서가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책이나 작가를 보고 선택한다. 애서광은 그러한 목적이 없으며 구하기 힘든 희귀한 책들을 찾으려고 한다. 이를테면 저자 친필 사인이 있는 책이나 한정판, 초판본 등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를 말한다. 또한 애서가는 자신이 좋다고 보는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어 하지만, 애서광은 책을 개인 수집품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려 들지 않는다.

 

《애서광들》은 책을 너무 사랑해서 황당한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집이다. 총 열한 편의 단편소설이 채워져 있다. 이 소설집을 쓴 프랑스 출신의 작가 옥타브 위잔(Octave Uzanne)도 애서가이다. 그는 사드 후작(Marquis de Sade)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등 작가들의 미발표 작품을 발굴해 세상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처럼 책을 사랑하고 모으는 것 자체도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 의미 있는 문화 활동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의 애서가가 묘사하는 애서광들은 ‘책의 노예’가 되거나 ‘책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애서광들》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에 애서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뮤즈 연감, 1789년』의 화자이다. 뮤즈 연감은 프랑스 18세기 중반부터 매년 발행된 시 전문 잡지다. 헌책방에 자주 드나드는 화자는 1789년 판 뮤즈 연감을 사들인다. 그는 이 책을 읽다가 그 안에 끼워져 있는 조그마한 종이봉투를 발견한다. 그 봉투 안에 1789년 판 뮤즈 연감의 전 주인 이름으로 추정되는 머리글자가 적혀 있다. 화자는 이 책의 주인이었던 18세기 인물이 누군지 조사하게 되고, 그와 결혼한 여인의 정체까지 밝혀낸다. 두 사람은 불행하게도 1789년 프랑스혁명에 휘말려 생이별을 한 연인이었다.

 

『시지스몽의 유산』은 《애서광들》 완역본이 나오기 전에 이미 두 차례나 번역된 적이 있는 단편[주1]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애서가인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모은 수많은 책을 경매장에 보내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는 다른 애서가들이 자신의 책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시지스몽은 무덤 안에 가지고 가지 못할 책들이 경쟁자인 애서가들의 손에 넘어가는 걸 원치 않았고, 자신의 사촌 엘레오노르에게 넘겨준다. 엘레오노르는 거대한 저택에 보관된 책들을 관리하는 주인이 된 것이다. 시지스몽이 살아있었을 때 그의 장서를 호시탐탐 노리던 경쟁자 중에 라울 기유마르로 포함되어 있다. 기유마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파리의 유명한 애서광이다. 그는 시지스몽의 유산인 책들을 어떻게든 손에 넣기 위해 엘레오노르에 찾아가 애걸복걸한다. 기유마르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엘레오노르 앞에서 사정하는 모습은 ‘책에 빠진 바보’다운 면모이다. 엘레오노르는 책에 전혀 관심이 없고, 애서가들을 업신여기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책을 싫어하는 악녀’‘늙고 못생긴 마녀’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시지스몽은 엘레오노르와 같은 여자를 ‘음란한 욕망을 가진 하와(Ḥawwāh: 아담의 아내)의 판본’이라고 무시한다.

 

 

 

[기유마르의 대리인] “이게 시지스몽 씨의 유언장 사본입니다. 나의 사촌 엘레오노르 스테파니 퓔셰리 시지스몽 양에게 이것 등등을 유증한다.”

 

[기유마르] “결혼하면 그 책들이 내 재산이 되니까, 엘레오노르 시지스몽 양과 결혼하는 겁니다!”

 

[기유마르의 대리인] “엘레오노르 시지스몽 양의 나이가 지금 58세입니다.”

 

[기유마르] “당신은 내가 성욕이나 풀려고 결혼을 계획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비난받아 마땅한 색욕! 육체를 탐하는 욕정! 음란한 욕망! …‥쳇! 여자라는 게 무엇입니까? 하와의 한 판본에 불과합니다.”

 

[기유마르의 대리인] “퐁투아즈행 기차가 몇 시에 있습니까? 당장 달려가서 내가 청혼한다고 알려주십시오.”

 

[기유마르의 대리인] “안 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또 내가 엘레오노르를 봤습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빼빼 마른 노파였습니다. 대패로 제대로 다듬지 않은 낡은 나무판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기유마르] “당장 출발하세요! 서둘러주세요!”

 

[기유마르의 대리인] “세월의 풍파에 쭈글쭈글해진 사과처럼 주름투성이였다고요! 괴물이 따로 없었습니다!”

 

[기유마르] “아 참, 그만하십시오!”

 

[기유마르의 대리인] “머리칼도 없어 가발을 썼고, 이빨도 다 빠져 틀니를 했습니다. 코도 매부리코였고, 뺨에 박힌 세 개의 사마귀에는 뻣뻣한 털들이 돋아 있더라고요…‥.”

 

 

(『시지스몽의 유산』, 55~57쪽)

 

 

 

18~19세기 남성들이 보기에 ‘책 읽는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들로 보였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남성들의 손가락질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펼쳤으며 빠른 속도로 책 속에서 현실 너머의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똑똑한 여자를 두려워한 남자들 그리고 그들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는 여자들이 애서가가 될 수 있는 사회적 · 경제적 여건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시지스몽의 유산』의 문제점은 ‘책 읽는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데 있다.

 

『프랑스계 일본인 무사의 이야기』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 유행하던 자포니슴(japonisme)[주2]이 반영된 소설이다. 라리브는 일본 서적을 수집하는 애서광이다. 일본에 푹 빠진 그는 프랑스 문화 및 예술이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프랑스인의 후손으로 알려진 오가타 리쓰를 소개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시지스몽의 유산』 다음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 이야기다. 서양의 입장에서 동양을 제멋대로 바라보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리브는 한 남자의 팔을 잡고 우리 쪽으로 잡아당겼다. 거스무레한 얼굴빛, 짧게 기른 검은 콧수염, 귀의 위쪽으로 당겨진 날카로운 눈…‥. 그는 일본인이었지만 완전한 일본인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피부색이 노랗고, 체구가 작은 사람들, 유럽식 옷을 입은 원숭이를 닮은 사람들, 유럽 대도시의 일본인 시장에서 흔히 보던 사람들과 약간 달랐다.

 

 

(『프랑스계 일본인 무사의 이야기』, 113쪽)

 

 

『프랑스계 일본인 무사의 이야기』는 ‘긍정적(positive) 오리엔탈리즘’‘부정적(negative) 오리엔탈리즘'의 사례를 동시에 제공한다.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를 낀 유럽인들은 동양 문화를 서양 문화의 대안으로 인식하면서 과도하게 찬양한다. 앞서 언급한 자포니슴은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의 한 축으로, 일본을 미지의 세계 혹은 신비의 대상으로 본다. 반면 부정적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를 끼게 되면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 달라진다.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동양인은 야만적(“원숭이를 닮은 사람들”)이고, 열등한 외모(“귀의 위쪽으로 당겨진 날카로운 눈”)를 가진 존재이다.

 

『나폴레옹 1세의 수첩』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전시 중에 들고 다니던 수첩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책의 종말』종이책이 사라진 미래의 모습을 그린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 언급되는 ‘스토리그라프(storygraphe)’는 저자의 목소리로 채워진 책이다. 미래의 독자는 이것을 언제든지 휴대하면서 들을 수 있다. 오늘날의 오디오북과 거의 비슷하다. 소설에 묘사된 종이책이 사라지게 될까 봐 불안해하는 19세기 유럽 애서가들의 모습, 그리고 종이책을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책이 등장할 거로 예언하는 화자의 주장은 현실이 되었다. 『책의 종말』은 쥘 베른(Jules Verne)이 썼다고 하면 속아 넘어가서 믿을 정도로 책이 진화되는 현실과 가능성을 정확하게 반영한 공상 소설이다.

 

‘책은 인간의 운명을 뒤바꿔놓는다’라는 말이 있다. 책 읽기가 중요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애서광들에게 적용한다면 그 의미는 180도 달라진다. 책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따라 애서가는 애서광으로 운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에 중독되고 ‘책의 노예’가 된 채 살아가게 된다. 애서가라고 생각하는 나는 《애서광들》을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책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1] 《애서광 이야기》(범우사, 2004), 《애서 잔혹 이야기》(이모션북스, 2017)에 수록되어 있다.

 

[주2] 자포니슴은 프랑스어 발음이며 영어로 발음하면 ‘자포니즘(Japon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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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4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1-28 16:59   좋아요 1 | URL
일하면서 돈을 벌면 그나마 책 살 형편은 될 줄 알았는데, 역시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ㅎㅎㅎㅎ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니 책을 많이 사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게 됩니다. 저비용으로 고효율 책을 사는 소비 방식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

레삭매냐 2019-01-24 17: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우리는 이미 책 읽는 노예
가 아닐까요 ㅋㅋㅋ

책 읽는 여성의 이야기에서는 선구적
페미니즘의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애서광보다는 애서가이고 싶으나,
현실계에서는 전자로 기우는 느낌이
듭니다. 책을 사고 또 한편으로는 팔아
치우는 역설적 인간의 모습이 바로
저네요.

cyrus 2019-01-28 17:04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책의 노예를 증명해주는 문서는 영수증인가요? ㅎㅎㅎㅎ
저도 가끔 필요한 책을 사고 싶으면, 가지고 있는 책을 팔 때가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