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의 거짓말 - 여성은 정말 한 달에 한 번 바보가 되는가
로빈 스타인 델루카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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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카페인 금단 현상을 병으로 여긴 사람은 없었다. 하루 3잔 이상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섭취량이 줄이면 카페인 금단성 두통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카페인 금단 현상은 절대 방치해선 안 될 증상이 됐다. 실제로 2013년 『정신 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5판에 ‘카페인 금단 증상’이 새로운 장애로 추가됐다. 나이가 들면서 머리카락이 빠지는 현상은 탈모, 생리가 시작되기 전부터 슬슬 찾아오는 통증은 ‘생리전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치료 대상이 됐다. 중년 여성은 호르몬 에스트로겐이 결핍되는 ‘갱년기 증후군’을 겪는다.

 

호르몬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직 ·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호르몬은 인체의 내분비샘 등 여러 기관에서 만들어지며 분비되는 일종의 화학물질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호르몬의 종류만도 40여 종이 넘는다고 하니, 우리 몸 자체가 거대한 호르몬 생산 공장인 셈이다. 호르몬은 신경계는 물론 다른 체내 기관들과의 작용을 통해 몸의 대사를 조절하고 몸에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호르몬은 과다 분비되거나 분비량이 적어지면 건강에 적신호를 보낸다. 인류가 호르몬제를 개발해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연 호르몬요법은 만병통치약일까? 호르몬요법은 그동안 화끈거림, 식은땀 등 완경기(폐경기) 여성의 증상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노화 현상을 막아주는 건강보조제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중년 여성을 위한 호르몬요법이 유방암과 뇌졸중, 심장 마비 등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여러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사실 호르몬요법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호르몬요법의 위험성을 제기한 의사들이 있었지만, 대중 매체들은 치료제의 치명적인 부작용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호르몬 결핍과 관련된 새로운 질병들이 나오고, 여기에 맞춰 의료업계와 제약회사 들은 새로운 호르몬요법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바람몰이’에 나섰다.

 

《호르몬의 거짓말》여성의 신체적 · 심리적 반응에 ‘호르몬 이상(과다 또는 결핍)’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치료와 약을 권하는 ‘호르몬 신화’가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낸다. 1970년대 초부터 많은 학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르몬 신화’는 수천 년간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고정관념과 함께 가부장제를 견고하게 떠받쳐주었으며 의료업계와 제약회사에 의해 부풀려졌다. 여성이 ‘질병 없는 환자’가 되는 배후에는 제약 회사와 의사 집단의 결탁이 있었다. 음모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거대 기업 수준의 제약회사들은 의사들의 학술논문과 세미나 등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수많은 질병과 치료제를 ‘발명’해내고 있다. 질병이 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약이 질병을 만드는 것이다.

 

정신과에 갈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중년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딱히 병명도 없는 우울증을 겪는다. 생리 전이나 출산 뒤, 수유 기간, 완경기 전후에는 에스트로겐 수치가 낮아지며 이런 때에 우울증이 걸리기 쉽다. 그런데 대부분 의학 전문가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이 많은 이유를 남녀 간의 뇌의 구조적 차이, 월경, 임신 및 출산과 관련된 호르몬의 차이 등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여성의 우울증 문제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호르몬이 주기성을 가지기 때문에 기분 변화가 더 심하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울증은 여성의 생애주기별로 나타난다. 생리전증후군, 청소년 우울증, 산후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 등 여성의 삶에서 우울증에 시달려야 할 일이 많다.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여성의 생애주기별로 나타나는 우울증은 치료받아야 할 ‘질환’으로 명명된다. 정신의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성은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존재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임산부는 기억력이 떨어지고, 수유기 여성은 쉽게 산후우울증에 걸리며 폐경기 여성은 신경질적이며 쉽게 짜증을 낸다는 식으로 거론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여성들의 태도나 행동들이 여성호르몬에 문제가 있어서 유발한다고 생각한다.

 

《호르몬의 거짓말》은 이제까지 여성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온 사람들(남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의학계는 결국 남성의 잣대로 여성을 재단하면서 그 건강과 생명을 위협해 왔다. 남성을 위주로 임상 실험한 결과물을 가지고 여성을 진단하고 치료하게 되면, 여성은 자신의 증상을 둘러싼 외적 요인을 말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의사 앞에 선 여성은 자신의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 취약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은 지금까지 과학의 이름으로 생산되어 온 건강에 대한 지식(또는 편견)이 어떤 식의 잘못된 근거에 기초하여 생산되곤 하였는지, 또 어떤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지, 그래서 왜 의학계가 결국 여성들의 건강 현실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도 ‘병’ 또는 ‘장애’라는 이름을 단 외우기 힘든 의학 용어에 넘어가 약을 처방받는 ‘가짜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그사이에 병원과 제약 회사는 살찌우고, 의료 체계를 세금으로 지탱해나가는 시민들의 지갑은 얇아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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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3-2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이 <호르몬의 거짓말> 책을 알게되고 알라딘 상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cyrus님의 글을 발견(!)해서 이제야 댓글을 남김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

cyrus 2019-03-22 12:39   좋아요 0 | URL
레드스타킹 멤버 중 한 분이 <호르몬의 거짓말>을 가지고 있어서, 그 분 덕분에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과학 지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