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예술이 된다 - 셀피의 시대에 읽는 자화상의 문화사
제임스 홀 지음, 이정연 옮김 / 시공아트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자화상은 어떻게 봐야 하나. 화가의 의도, 구성 방식 등 여러 사항이 있지만,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투적이지만, 그냥 천천히 하나하나씩 세심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자화상에는 화가의 기술적 숙련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성격이나 관심 그리고 화가가 속한 한 시대의 풍경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자화상은 화가 개인의 얼굴이고, 역사이고, 기억이다. 화가가 살아온, 살아낸 자취들로 자욱하다. 따라서 자화상은 책이다. 《얼굴은 예술이 된다》는 예술가의 ‘얼(spirit: 정신)과 ‘굴(form: 형상)을 담는 미적 표현으로 예술가의 자화상에 초점을 두고, 중세부터 시작된 ‘셀피(selfie)’ 문화 읽기를 시도한다. 이 책이 주목한 것은 자화상에 남아있는 예술가의 흔적, 즉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표현했고, 어떻게 자기 삶을 살고 갔을까? 예술도 적어도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동시에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한 방식이다.

 

미술사에서 자화상의 발전은 거울의 발명과 기술력에 의존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에는 은이나 청동, 금속을 가공해서 거울을 만들었고, 오늘날에 쓰이는 유리 거울은 17세기 유럽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림과 거울은 의미적인 면에서 다양함을 전해준다. 인간 존재와 거울의 갈등 관계, 즉 선악의 문제,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양면적 관계 속에서 늘 화가들은 고민해 왔으며 자화상을 통해 내면적 자아를 표출해 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유리 거울에 비친 상(象)을 똑같이 그리는 자화상의 일반적 정의가 자화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화가의 다양한 변주를 축소한다고 강조한다. 책의 저자는 자화상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하여 접근한다. 그는 또 거울 기술의 발달과 자화상은 크게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제까지 통용되어 온 ‘거울 신화’는 자화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중세 시대 미술의 참모습을 가려왔다. 그래서 이 책은 흔히 ‘암흑의 시대’로 알려진 유럽 중세를 찬란한 빛의 미술을 꽃피운 시대임을 강조하면서 중세에 나온 자화상들을 소개한다. 중세의 자화상은 수도원에서 제작한 필사본에 많이 등장한다.

 

책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예술가들의 ‘자신’에 대한 인식과 표현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준다. 대부분 예술가는 아틀리에에 있는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똑같이 재현한 건 아니었다. 15세기까지 예술가들은 자화상에 자신을 드러내더라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주변 인물로 등장하거나 심지어 다른 인물로 위장한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이 시대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자화상이 등장한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화가로서 분명한 자의식이 담긴 자화상을 그렸다.

 

‘얼’, 즉 정신(영혼, 기분,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을 시각화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림이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일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시각화하고자 애쓰는 일이다. 시스티나 대성당 천장화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재능보다 혼(spirit)이 담긴 걸작이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엄청난 작업의 진행 계획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누운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눈과 목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몸을 혹사할 정도로 힘든 작업에 불만이 많았던 미켈란젤로는 한껏 몸을 뒤틀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의 캐리커처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카라바조(Caravaggio)는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살인자 혹은 살해당한 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보면 다윗이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다. 다윗은 젊은 카라바조를, 골리앗은 중년 카라바조를 의미한다. 젊은 카라바조가 타락한 중년 카라바조를 살해하는 의미로 해석되는 이 그림 속에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던 화가의 참회가 반영되어 있다.

 

온전히 ‘나’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무래도 어렵다.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고흐(Gogh)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리기도 어렵다”고 고백했다[주].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으로부터 내면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울은 내 외모를 잠깐 확인하게 해줄 뿐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는 ‘굴’만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 즉 ‘얼’은 이미 거울 속에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자화상 대부분은 전통적인 자화상과 거리가 멀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참신하고 개성 있는 형태(다른 사람으로 변장하거나, 가면을 쓰거나, 얼굴 형태를 변형하는 방식)로 구현하면서 내면의 깊이를 전달하려고 했다. 따라서 자화상은 끊임없이 거울을 깨고 변화하지 않으면 틀(거울에 비친 상)에 갇히고 마는 장르이다. 자화상이 참된 예술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예술가 자신만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 상상력도 필요하다. 훌륭한 자화상이란 완성되었어도 ‘지금도 나를 찾고 있는’ 그림이다. 자화상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내면의 감정을 가시화하는 현재진행형 예술이다.

 

 

 

[주] 제임스 홀, 이정연 옮김, 《얼굴은 예술이 된다》, 시공아트, 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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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9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12 12:5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게다가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북플 접속이 뜸해졌어요. ^^;;

페크pek0501 2018-11-1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인에 대해 알기 어려운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알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면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또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뿐, 다 알았다고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겠지요.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가 있고, 오늘과 다른 내일의 내가 있을 테니까요.

cyrus 2018-11-12 12:57   좋아요 0 | URL
글을 쓰면서 과거에 했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나‘에 대해서 글을 쓰려면 자서전 같은 글 한 편으로는 안 되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