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미술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도구들
이소영 지음 / 모요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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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실력이 탄탄한 화가라면 재료와 도구에 구애받지 않고 훌륭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화가들은 당대 최신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는 데 누구보다 앞선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다. 미술사의 여러 거장은 그럴듯한 그리기 방식만을 만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직접 선정하면서 이용할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들이다.

 

《화가는 무엇을 그리는가》서양 미술사를 빛낸 진정한 조연들에 대한 책이다. 화가가 주연이라면 화가들이 사용한 재료와 도구가 조연이다. 대부분의 미술사는 주연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화가들이 즐겨 썼던 미술 재료와 도구를 통해 미술의 흐름을 읽어나가도록 한다. 화가들은 특별한 재료와 도구를 가진 것이 아니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든다.

 

 

 

 

 

 

인간은 불을 도구로 사용하여 다른 동물들과는 차별된 지점을 갖게 되고 인류로서 살아가게 된다. 인류학자들은 불을 사용하여 요리하며, 인류가 크게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불의 이용은 인류의 먹을거리 행태에도 큰 획을 그었다. 그뿐만 아니라 불은 동굴에서 사는 인간에게 ‘그림 그리는 방식’을 안겨주었다.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미술 도구는 ‘불’이었다. 구석기 시대 인간들은 불빛을 조명 삼아 동굴 벽화를 그렸다. 화려한 유채색은 아니지만, 동굴 벽화에서 발견되는 붉은색과 갈색도 그림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다.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채색 안료는 붉은색 황토에서 추출한 물질이다. 인류 최초의 그림 쇼베(Chauvet) 동굴 벽화를 비롯한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 등 고대 구석기 시대 벽화는 대부분 곱게 간 황토로 만든 안료로 그려졌다.

 

 

 

 

 

 

유화가 나오기 전에 화가들이 많이 사용한 물감은 템페라(tempera)였다. 안료에 달걀노른자 등을 섞어서 만드는 템페라는 중세 이후에 유행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최후의 만찬』은 템페라로 제작된 작품이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은 빨리 마르는 것이 장점이지만, 이 때문에 색이 매우 불투명하고 강력해 계속 그림을 그려도 섞이지 않는다. 달걀은 템페라 물감의 중요한 재료였다. 책의 저자는 템페라를 ‘부엌에서 태어난 물감’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역사적인 물감을 만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화가가 아니라 ‘부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템페라는 오래 보관할 수 없다. 여성들은 날마다 부엌에 가서 달걀노른자와 안료를 섞는 지루한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화가들은 템페라 그림의 장단점을 보완한 이후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이용해 그림을 제작한다. 이로써 목제 패널화, 판화, 캔버스에 그린 유화 등이 출현하게 된다. 기하학적 원근법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회화는 사진과 같은 원리로 작동되는 광학 장치, 즉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에 기초하고 있다. 렌즈와 거울을 사용하면서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나무 상자 형태로 발전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18세기에 이르러 화가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화가들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쓴다. 물감의 쓰임새도 다양하다. 손바닥이나 발바닥, 물건 등에 묻혀 꾹꾹 찍기도 하고, 문지르거나 뿌리기도 한다. 신문지, 모래, 돌멩이, 심지어 고철 기계 등 그림을 그리거나 공예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일상생활 속의 모든 것들이 다 ‘미술’이 된다. 헤겔(Hegel)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는 순간 예술은 끝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헤겔이 말하는 ‘예술의 종말’을 ‘예술가들의 해방’으로 해석했다. 지금도 예술가들은 일상적인 것을 예술로 변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주3].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생활하는 시대에도 예술가들은 우주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 것이다. 팝 아트(Pop Art)의 거장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는 나사(NASA)의 초청으로 아폴로 11호 발사대에 접근할 수 있었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사가 추진하는 유인 우주 탐사 계획 ‘아폴로 프로젝트(Apollo Project)에서 인류가 지구를 넘어 우주로 새롭게 도약하는 희망의 증거를 발견했고, 아폴로 프로젝트를 주제로 한 연작 석판화를 제작했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라우션버그는 나사가 제공한 수백 장의 우주 사진을 이용했다.

 

우리 사회는 변화에 관대하지 않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 너무 지나치게 바꾸려고 한다면서 다소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변화의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능사일까. 변화를 지향하지 않는 세상에서 창조라든가 예술이라든가 하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그렇지만 ‘얼리 어답터’인 예술가들은 변화와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미의식을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재료와 도구를 찾아보거나 이것저것 다 사용해볼 것이다. 예술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재료와 도구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주1] 로잘린드 마일스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동녘, 2005)

 

[주2]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부키, 2017)

 

[주3] 아서 단토 《일상적인 것의 변용》 (한길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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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1-0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적인 것의 변용, 을 생각하니 예전에 책에서 보았던 변기가 생각나네요. 변기로도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줬지요.

cyrus 2018-11-09 12:12   좋아요 1 | URL
똥도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된 적이 있어요. 이탈리아의 예술가는 캔에 담은 자신의 똥에 ‘예술가의 똥’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