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진화 - 몸, 생애사 그리고 건강
웬다 트레바탄 지음, 박한선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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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과 채집 시대의 인류는 수명은 짧았지만, 체력은 좋았다. 윤택한 삶을 살며 장수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각종 알레르기 질환을 비롯한 암, 당뇨와 같은 생활습관병에 시달리고 있다. 진화 의학자들은 이 난제의 해법을 진화론의 관점에서 찾고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의 질병과 건강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분 분야를 진화 의학(evolutionary medicine)이라고 부른다. 진화 의학은 1990년대에 진화생물학자 랜돌프 네스(Randolph Nesse)[주1]조지 C. 윌리엄스(George C. Williams)가 연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의학이다. 진화 의학자들은 질병의 증상을 없애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현대 의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질병에 걸리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을 인류의 진화 과정과 인체의 구조적 특성을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진화 의학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의학계에 도입되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에 대한 기존 의학계의 이해 부족 때문이다.

 

진화 의학은 인간의 몸을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산물로 본다. 예를 들어 음식을 비만의 원인은 게으른 생활 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자가 구석기 시대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의 인류는 채식, 어류와 해산물을 주로 먹었다. 풍요로운 음식을 즐기기 시작한 지는 겨우 1만 년밖에 되지 않았다. 농경 시대의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곡식, 감자 등 탄수화물 섭취가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되면서 섭취 열량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비만, 고혈압, 당뇨 등 ‘현대의 문명병’의 위험에 노출된 이유가 우리의 식생활이 너무 빠르게 진화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구석기 시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농업 혁명으로 우리의 식생활만 엄청나게 달라져 버린 것이다.

 

질병은 인류의 발전과 함께 그 탄생과 진화를 반복하고 있다. 과연, 실제 문명과 의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더 건강해지고 있는 걸까. 과거와 비교하면 질병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운 걸까. 진화론적 관점으로 여성의 몸과 건강을 살피는 《여성의 진화》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책의 저자인 생물 인류학자 웬다 트레바탄(Wenda Trevathan)은 초경, 임신, 출산, 완경[주2]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진화적 요인이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한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적 · 의학적 지식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여성의 건강과 연관 지어 논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 여성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질환은 여성의 몸이 문명화에 따른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다. 예를 들어 유방암이 나날이 급증하는 원인을 해부학적 구조에서 찾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진화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여성들은 초경이 늦었고 그 직후 임신을 했으며 완경을 빨리 맞이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여성들은 이들보다 초경이 일찍 시작하며 생리 횟수가 많다. 구석기시대 여성들이 평생 150번 정도 생리를 한 데 반해 현대 여성은 400번 정도 생리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성 호르몬이 유방암의 발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초경이 빠르고 완경이 늦으면 그만큼 여성의 몸은 호르몬에 노출된 기간이 길기 때문에 유방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즉 임신과 출산 횟수가 많으면 유방암 발병률이 낮아지지만, 상대적으로 임신과 출산 경험이 적거나 없으면 발병 우려가 높아지는 것이다.

 

포유류의 성장에서 접촉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갓 태어난 동물이 살아남으려면 어미가 반드시 새끼를 핥아줘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어미가 핥아주지 않은 새끼 양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다. 접촉은 인간에게도 중요하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아기를 업고 다니고, 끼고 자고, 먹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젖을 물리는 육아 방식은 아기와 산모 모두에게 너무나 적합하다. 옥시토신(oxytocin)은 출산 후 아기를 돌볼 때에도 그 분비량이 많이 늘어나는데, 아이와 산모 사이의 유대감을 크게 만들고 모유 수유를 돕는다. 코르티솔(cortisol)은 신체가 스트레스에 반응하고 감염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호르몬이다. 아기를 안아서 달래면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코르티솔 수치가 내려간다. 하지만 안아주지 않고 계속 울게 내버려 두는 일이 잦아지면 아기의 코르티솔 분비가 촉진되면서 아기의 성장과 정서, 뇌 발달까지 저해할 수 있다. 모유 수유의 장점은 아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옥시토신은 임신으로 이완된 산모의 자궁을 임신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며, 출산 후의 출혈을 멎게 한다.

 

이 책에서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여성의 몸이 번식(생식, 출산과 육아) 성공에 초점을 맞춰 진화해온 과정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여성의 몸을 ‘출산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저자는 “여성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번식이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348쪽). 《여성의 진화》는 ‘여성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다이어트를 위해 구석기 시대의 식단으로 바꾸자는 식의 실현 불가능한 건강 비결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대해 잘 모르는 여성을 비난하지 않는다. 결국 책이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아우르는 여성 전체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남성이 이 책을 읽고 여성의 생리 · 임신 · 출산의 수고로움을 안다면 건강한 여성들이 정말 살만한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1] 《여성의 진화》 19쪽에 랜돌프 네스가 ‘랜디 네스’로 되어 있다. 랜디가 ‘랜돌프’의 애칭이라서 틀린 표기는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정확한 이름은 ‘랜돌프 네스’이다.

 

[주2] 책에서는 ‘폐경’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폐경은 ‘여성으로서 생명이 끝난다’는 부정적 어감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이 리뷰에선 ‘폐경’ 대신 ‘완전한 성숙’이란 긍정적 의미를 담은 ‘완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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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0-28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아우르는 여성 전체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 그래야 하는 것인데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또는 불행해진 여성들이 많은 게 현실이죠.

cyrus 2018-10-29 15:16   좋아요 1 | URL
임신과 출산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몰상식한 남성들은 임신을 ‘벼슬‘이라고 말하는데,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여성의 몸을 잘 모르니 여성의 건강권 보장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 없어요. 여성도 건강권을 지킬 수 있는 국민이에요. 정부는 모든 연령의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을 먼저 만들어야하는데, 출산 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어요. 제가 봐도 지금 우리 사회는 여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