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는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의 역사이다. 즉 흑인 민권운동(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63년 노예해방령 이후 혹독한 시련과 투쟁의 시기를 견뎌내야만 했던 흑인 민권운동은 이제 단순히 흑인 해방을 넘어 유색인종과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미국 사회의 정치 · 경제적 모순에 대해 저항하는 시민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 마틴 루서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예찬사, 2015)

 

 

 

마틴 루서 킹은 1963년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말했다. 그는 ‘공민권을 위한 행진 시위’에서 인종 차별이 없는 사회의 도래를 꿈꾼다는 취지의 연설로 수만 명의 청중을 감동하게 했다. 킹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꿈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백인 경찰의 흑인에 대한 린치, 유명 커피숍에서의 흑인 차별 등은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 미국 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윌리엄 에드워드 B. 듀보이스는 20세기 초 일찍이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거로 내다봤다.

 

 

 

 

 

 

 

 

 

 

 

 

 

 

 

 

 

 

* W. E. B. 듀보이스 《니그로》 (삼천리, 2013)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근거 없는 가정, 즉 피부색이 열등함을 상징한다는 가설에 직면하고 있다.”

 

(듀보이스, 《니그로》 12쪽)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지금, 듀보이스의 말은 여전히 진실로 다가온다. 인종, 피부색 등에 따른 차별이 옳지 않다는 것은 보편화된 논리다. 그럼에도 편견에 시작된 차별이 지속되는 것은 그 논리가 행위로 이어질 만큼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절판] 알라 라탄시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한겨레출판, 2011)

*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 (사회평론, 2003)

 

 

 

 

 

 

 

 

 

 

 

 

 

 

 

 

* 조지 오웰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이론과 실천, 2013)

 

 

 

미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은 인종 차별에 대해 어떤 의심을 하지 않았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 명인 토머스 제퍼슨은 ‘평등’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흑인의 열등한 면을 믿었으며 1801년에 백악관이 완공되었을 때 백악관 내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1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다. 사실 백악관은 흑인 노예들의 강제 노동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남북전쟁에 승리하여 노예해방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에이브러햄 링컨은 지독한 백인우월주의자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보수파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을 내세웠다. 이 표현은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쓴 시의 제목이다. 키플링은 공공연히 제국주의를 옹호했고, 미개한 유색인종을 바르게 이끌 수 있도록 지배하는 일은 백인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주장했다. 키플링처럼 인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지 오웰『러디어드 키플링』(《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수록)이라는 글에서 키플링을 ‘배타적 제국주의자’로 규정하여 비판했다. 키플링이 만든 ‘백인의 짐’은 식민주의자, 인종주의자들이 자신의 지배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 자주 인용됐다.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 [절판] 제임스 H. 콘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갑인공방, 2005)

 

 

 

하지만 역사가 ‘신화’가 되고, 역사적 인물이 ‘위인’으로 박제되면 역사와 인물의 한계 그리고 누락되거나 잊힌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흑인 민권운동에 뛰어든 ‘남성’ 흑인 지식인은 성차별 문제와 여성의 강간 피해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간주하지 않았고, 흑인의 노동을 착취하게 만드는 백인 중심 자본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인종 차별 철폐’와 ‘흑인 해방’ 사이에 ‘흑인 여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었다. 듀보이스는 ‘니그로 혈통’의 장점으로 ‘강한 형제애’라고 내세웠다.[1]

 

 

 

※ 흑인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단편적으로 언급된 책도 포함)

 

 

 

 

 

 

 

 

 

 

 

 

 

 

 

 

 

 

 

 

 

 

 

 

 

 

 

 

 

 

 

 

 

* 재닛 윌렌, 마조리 간 《노예제도에 반대한 여성들, 자유를 말하다》 (초록서재, 2016)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절판] 사빈 보지오-발리시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부키, 2007)

* [절판] 수잔 앨리스 왓킨스 《페미니즘》 (김영사, 2007)

* [절판] 소피아 포카 《포스트페미니즘》 (김영사, 2000)

 

 

 

 

흑인 페미니즘은 흑인 남성 중심의 ‘형제애’와 ‘흑인 해방’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비판사회이론이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남성과 흑인 여성 모두 억압하는 자본주의, 이성애 중심에 기반을 둔 가족,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 등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성 중심 역사에 가려진 흑인 여성운동가, 여성 작가들의 삶과 업적을 발굴하여 주목한다.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만큼이나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흑인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 1851년 미국 오하이오주 ‘여성권리대회’에서 말한 소저너 트루스의 연설 한 자락은 일상 속 인종 차별, 성차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 윤보라, 김홍미리, 나영, 박이은실, 손희정 외 《그럼에도 페미니즘》 (은행나무, 2017)

 

 

 저기 저 남성이 말하는군요. 여성은 탈것으로 모셔 드려야 하고, 도랑은 안아서 건너드려야 하고, 어디에서나 최고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한다고. 아무도 내게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탈 것으로 모셔진 적도, 진흙구덩이를 지나도록 도움을 받은 적도, 무슨 좋은 자리를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날 봐요! 내 팔을 보라구요! 나는 땅을 갈고, 곡식을 심고, 수확을 해 왔어요. 그리고 어떤 남성도 날 앞서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나는 남성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 게 있을 땐 남성만큼 먹을 수 있었어요. 남성만큼이나 채찍질을 견뎌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난 13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리는 걸 지켜봤어요. 내가 어미의 슬픔으로 울부짖을 때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소저너 트루스의 연설, 《그럼에도 페미니즘》 『여성을 사랑하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인용)

 

 

 

지금도 페미니즘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은 ‘서구 백인 페미니즘’에 비해 소개되지 않고 있다. 출판사들이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이 ‘우리나라 페미니즘’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아니면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이 ‘이해하기 쉬운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출판계가 대중(특히 여성)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페미니즘만 골라 찾는 행태는 문제가 있다.

 

 

 

 

 

 

 

 

 

 

 

 

 

 

 

 

 

 

 

*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문학동네, 2017)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

* [절판, 읽을 거예요!] 앨리스 워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이프, 2004)

 

 

 

 

 

 

 

 

 

 

 

 

 

 

 

 

 

* [절판 / 안 읽었어요!] 안젤라 데이비스 《미국, 아직도 노예제 국가?》 (사람소리, 2013)

 

 

 

그나마 국내에 많이 알려진 흑인 페미니스트들을 꼽자면 벨 훅스, 록산 게이, 앨리스 워커가 있다. 페미니스트 작가로 확대하면 조라 닐 허스톤, 토니 모리슨 등이 있다. 이슬람 혐오, 인종주의, 여성 혐오, 자본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을 펼친 안젤라 데이비스도 국내 페미니스트들이 주목해야 할 흑인 페미니스트이다. 2013년에 그녀의 약전(略傳)과 인터뷰, 그리고 그녀가 쓴 글을 선별해서 묶은 《미국, 아직도 노예제 국가?》 (사람소리, 2013) 가 출간되었지만,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되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안젤라 데이비스를 소개한 유일한 책이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부키, 2007)이었다. 그런데 이 책도 절판되었다…‥.

 

듀보이스는 자신의 책을 “모든 새로운 것은 아프리카에서 나온다!(Semper novi quid ex Africa!)”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를 지었다.[2] 그는 아프리카의 자립적인 힘을 믿었으며 아프리카가 아픈 과거사를 딛고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길 희망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흑인이 아니면서 왜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합니까?” 이 질문에 상세한 대답이 필요한가? 당연히 ‘페미니즘’이라서 공부하는 거지. 나는 항상 서구 백인 중심 페미니즘을 ‘페미니즘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페미니즘을 연대별로 구분하는 하이픈 페미니즘 담론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 담론은 '독자적'인 흑인 페미니즘을 '제3세계 페미니즘(제3세대 페미니즘)'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급진적 페미니즘, 더 나아가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 가장 중요한 사상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새로운 페미니즘은 흑인 페미니즘에서 나온다. 흑인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를 단일화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며 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젠더, 계층, 인종, 사회적 환경 등)을 인식한다. 너무나도 어려워서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계층, 인종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것 또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관적인 자세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다중의 문제’를 놓친다면 과거 페미니즘 운동의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1], [2] 《니그로》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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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5-19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에서 흑인들의 전쟁 파병과 임무에서도 많은 차별을 받아왔네요.
유독 흑인들의 참전과 사망자수가 많은 것도 가슴 아픕니다.

cyrus 2018-05-23 15:28   좋아요 1 | URL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흑인이 차별받은 사례들이 아주 많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은폐되거나 잊힌 사례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대부분은 승자나 지배자 위주의 기록이니까요.

2018-05-20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23 15:29   좋아요 1 | URL
흑인여성 못지않게 유색인 여성들에 대한 차별도 심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

페크pek0501 2018-05-2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 몇 세기인데 아직도 인종 차별 운운하는 뉴스를 보면 이해가 안 가요.
사람들의 두뇌에 한 번 심어 놓게 된 고정관념의 힘은 그렇게 센 것일까요?
인종 차별을 해도 된다는 고정관념은 언제 깨질까요?

cyrus 2018-05-23 15:32   좋아요 0 | URL
고정관념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정관념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다음에 태어날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저는 고정관념의 탄생을 사회화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결국, 고정관념의 유해성을 막으려면 그것이 잘못 되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알려줘야 합니다.

psyche 2018-05-21 0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는 인종문제가 마음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피상적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많이 공감하지 못하는 거 같더라구요. 저 역시도 한국에 살고 있었을때는 백인 페미니즘에 많이 공감했었어요. 미국에 산 기간이 길어질 수록 경제적 계층보다는 유색인이라는 인종에 더 방점이 찍혀지더라구요. 페미니즘은 인종, 계층, 성적 정체성 등등에 따라 각자 다른 시각과 문제들이 있는데 암만해도 출판사에서는 팔릴 책을 내놓게 되니 서구 백인 중심의 책을 내놓는거 같아요. 아쉬운 일이죠.

cyrus 2018-05-23 15:34   좋아요 0 | URL
흑인, 유색인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영화 한 편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다 읽고 나면 책의 주제와 관련된 영화 한 편을 볼 예정입니다. 지금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흑인여성 문제를 다룬 영화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

AgalmA 2018-05-24 08:41   좋아요 2 | URL
psyche 님/
흑인인 벨 훅스나 록산 게이 책을 보면 중산층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이 주류가 된 문제점과 그것으로 페미니즘이 오도된 현상을 잘 짚어주더군요. 특히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요.

cyrus 님/
토니 모리슨 원작 영화화 된 거 있음 좋을텐데...
유명한 <칼라 퍼플>은 다들 보셨겠죠?

cyrus 2018-05-24 14:11   좋아요 0 | URL
To. AgalmA님 / 생각해 보니 토니 모리슨의 소설 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게 없군요. 영화 <더 컬러 퍼플> 다시 한 번 보고 싶네요. 레드스타킹 영화 모임 때 이 영화 보자고 건의하고 싶은데, 옛날 영화라서 안 될 것 같습니다... ㅎㅎㅎ

AgalmA 2018-05-2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인 민권운동이 페미니즘에 영향을 준 걸 생각하면 ‘강한 형제애‘는 여성 페미니즘의 ‘강한 자매애‘ 이론 형성에 영향을 줬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cyrus 2018-05-24 14: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데 여성의 동료애나 우정이 남성의 동료애만큼이나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동성애를 ‘정신적 사랑’으로 봤잖아요. 그런데 여성의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사랑으로 간주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