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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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정말 심각해”라는 생각으로 대충 반응하고 넘겨버리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 너무나도 쉽게 뻔한 이야기로 치부되는 문제 중 하나가 ‘성폭력’이다. 우리는 이 ‘성폭력’이 끔찍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 각 영역으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개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지만은 않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문제, 피해자와 지원자들만이 가해자를 상대로 싸우는 문제, 즉 일반 시민에게는 상관없는 문제로 설정되자마자 개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관심 두지 않을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무관심은 타인을 배제하는 행위가 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 ‘관심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무관심하고 침묵하면서 그 문제에서 멀어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또 하나의 권력이다. 이런 상태에 오랜 시간 지속한다면 개인의 분별력과 사유능력이 상실돼 부조리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말했다.

 

불특정 여성을 공격하거나 강간한 범죄를 ‘그들(피해 당사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나는 너다’,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등의 문장이 적힌 포스트잇을 붙였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우리(여성)’의 문제로 인식되었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 문제라고 인식했을 때 피해자의 ‘정체성’을 우리와 동일시하게 됐지만 피해 자체는 여전히 타자화하는 우를 범했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약칭 ‘피가페’)은 성폭력 문제의 현재 담론의 지형을 살펴보고 미투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책이다. 성 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가 세 번째로 기획한 책이다(첫 번째 책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두 번째 책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그 출발로 권김현영‘피해자 중심주의’‘2차 가해’라는 용어의 한계들을 살핀다. 그녀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 편을 들고, 피해자를 위해 폭로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용된 ‘피해자 중심주의’의 페미니즘으로는 성폭력 문제를 ‘권력과 폭력’의 문제로 볼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윤리-정치적 결단은 공동체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성폭력을 관리하고 해결하려는 절차 속에서 피해자는 오직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로서의 역할만을 요구받는다.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닌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라는 역할’ 속에서 피해자는 오직 피해자의 권리만을 특별하고 이질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처럼 비치게 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권리의 형식을 띤 타자화라고 생각한다. (권김현영, 63쪽)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성폭력 근절을 위해 ‘분노하고 폭로하는 정치’를 반복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되는 목록을 늘리면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하지만 점점 피해자의 폭로가 공론화가 되면서 피해자는 ‘싸우는 사람’이기보다 ‘보호받을수록 고통스러운 사람’으로 전락했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를 편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사건 해결에 목소리를 내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피해자에 연대하는 사상이다. ‘강간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누가 더 고통받는가’ 식으로 경쟁하는 길로 빠진다면 성폭력 문제 해결에 대한 논의를 더 어렵게 만든다.

 

‘2차 가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2차 피해’라는 용어를 살펴봐야 한다. 2차 피해는 피해자가 1차 피해(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부당한 상황을 뜻한다. 대표적인 ‘2차 피해’ 사례가 피해자의 증언을 불신하고, 소극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태도이다. 그런데 2차 피해는 성폭력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부추겼다. 가해자로부터 법적으로 공격받는(무고죄, 명예훼손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2차 피해’ 대신 ‘2차 가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김현영은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무분별하게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2차 가해’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그렇게 되면 공론장에서 주목해야 할 1차 피해, 즉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만다. 따라서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는 피해자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반 성폭력 운동 전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정희진도 피해자를 타자화하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비판한다. 그녀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피억압자 또는 피해자로 규정하는 반응이 여성 자체를 ‘남성 권력의 피해자’로 한정된다고 지적한다.

 

 

피억압자 스스로 피해자화는 경우, ‘피해자화’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남성 권력의 피해자라고 보고 여성에게 그에 맞는 이미지와 역할을 요구한다. 또한 ‘피해받은 불쌍한 여성’은 여성의 존재성을 남성과의 관계로만 한정하는 방식이다. 남성 권력은 여성이 피해 상태에 머물기를 원한다. 피해 여성만이 남성을 권력의 주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정희진, 223쪽)

 

 

오용된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권김현영과 정희진의 입장 모두 여성의 피해 경험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의 피해 경험을 ‘폭로’하고 ‘발견’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페미니즘의 진짜 역할이고, 미투 운동 이후 우리 사회가 실천해야 할 자세이다.

 

이 책의 2장은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기록하고, 관련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해온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의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3장(한채윤)4장(루인)퀴어 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성소수자 관련 쟁점들을 다룬다. 앞서 《피가페》가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 책이라고 말했지만, 페미니즘과 퀴어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1] 그리고 성 소수자도 같은 성 소수자 또는 비(非) 성 소수자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며 죽음을 부르는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성폭행을 경험한 레즈비언, 트랜스 여성도 미투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혹자는 페미니즘 책에 ‘성 소수자 문제’를 다룬 글이 두 편씩이나 있다는 점에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특히 성 소수자를 배격하고 오로지 ‘여성’을 위한 여성운동을 표방하는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 진영에 속한 독자라면 3, 4장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도란스’는 성 문화 연구 모임이다. ‘페미니즘 문화 연구 모임’이 아니다. ‘성(性)’에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건 아니다.

 

여성이 성적 피해를 보는 이유는 ‘복장’과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성이 갖는 권력과 폭력성 때문이다. 그리고 방관자가 그런 폭력성에 대해 침묵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만들었다. 이런 위계적 관계와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피해자들의 저항을 어렵게 하고 가해자의 계획적 함정에 고스란히 빠져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다.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런 모순된 구조를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정희진은 성 소수자를 차별하고, ‘여성 순혈주의’만 고집하는 TERF를 에둘러 비판한다. 그러면서 ‘퀴어’가 빠진 페미니즘은 성립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페미니즘도 퀴어 이론도 결국 차별 받지 않고, ‘인간’으로 존중받는 삶을 위한 사상이다.

 

성적소수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태도가 가부장제의 원리이다. 그래서 퀴어 정치는 페미니즘의 성립 조건이다. 이는 마치 계급이 젠더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퀴어는 인간의 성별을 양성으로 고정시키려는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젠더들이다. 젠더 환원주의나 ‘여성 순혈주의’는 옳고 그름을 떠나, 가능하지 않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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