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에밀 시오랑을 기억하며 (굿바이 서재) &gt; 제 5원소</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category/21488845</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연장 마니아</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25 May 2012 10:20:06 +0900</lastBuildDate><image><title>굿바이</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85508195725772.jpg</url><link>http://blog.aladin.co.kr/goodbye/category/21488845</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굿바이</description></image><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그때 놀라지는 마요, 화끈거려도 말이죠 - [이스탄불을 듣는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5409270</link><pubDate>Wed, 08 Feb 2012 16: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54092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2526&TPaperId=540927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405/40/coveroff/893202252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2526&TPaperId=54092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스탄불을 듣는다</a><br/>오르한 웰리 카늑 지음, 술탄 훼라 야크프나르 여.이현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br/></td></tr></table><br/>서른 여섯에 요절한 시인의 직접적인 사인은 뇌출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빠르게 세상과 격리시킨 원인을 술에서 찾는 사람도&nbsp;있는 모양이다.&nbsp;시인이 늘&nbsp;취해&nbsp;있었다 하니 그런 추측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언제가 죽게 되니&nbsp;어찌 죽으나&nbsp;뭐 그리 대수로울까 싶지만, 이건 말이 그렇지 어떤 이들은 그 죽음의 과정과 이유마저도 특별할 수 있다. 이건 시를&nbsp;읽고 난 후&nbsp;자발적으로&nbsp;동의한 생각이다.&nbsp;또한 그의 생애에서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도 뭐 그리 대수로울까 싶지만 그도 그리 말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nbsp;이 역시&nbsp;시를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의 삶과 죽음이 갑자기 특별하게 느껴진 건 순전히 그의 시를 읽었기 때문이고, 그만큼&nbsp;시인의 시가 특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nbsp;인생에 대해 뭘 좀 안다고 말하는 자신이&nbsp;화끈거렸기 때문이다. 물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말이다. 
&nbsp;
터키에서 시인의 시는 모더니즘시 운동의 상징으로 꼽힌다고 한다. 시인은 형식적인 혹은 상투적인 어떤(터키의 서정소곡) 시작법을 벗어났고,&nbsp;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리얼리즘과도 다른 길을 갔다고&nbsp;한다. 감히 짐작하건데 시의 세계에 있어 양대 산맥을 벗어났으니&nbsp;눈 밝은 독자는 즐거웠겠으나 시인은&nbsp;외로웠을 것이라 짐작만 한다.&nbsp;분석은 내 몫이 아니고, 분석할 깜냥도 없기에 그저 나는 짐작만 한다. 더 나아가 시인의 시를 읽고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며 즐겁고 외롭게 뒹굴 뿐.&nbsp;시는 그것으로 족한 것이&nbsp;아닐까 위무까지 하면서 말이다.&nbsp;
그럼에도 뭔가 좀 아쉬워 옮긴이의 말을 또 다시 옮겨보면 이렇다. "오르한 웰리가 하층 민중들의 삶을 그들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빌려 시로 노래했을 때 문학의 후원자임을 자처했던 부르주아 계층은 이를 모욕처럼 받아들였으나 그의 시는 곧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의 시에는 어떤 과장된 영탄의 효과도, 화려한 수사도, 부풀린 이미지도 없다. 정제된 운율, 미리 결정된 형식과 리듬, 점잖은 듯 감추는 시어들에 거역하면서, 단순한 삶의 진실을 제시하고 때로는 감상적으로 보일 만큼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오호, 내 말이! 여튼 이제 시를 좀 읽자.
&nbsp;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산다
&nbsp;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사서
그것으로 별을 만든다
음악은 영혼의 양식이라지
난 음악에 흠뻑&nbsp;빠진다
&nbsp;
나는 시를 쓰고
그것으로 오래된 물건과 바꾸고
또 음악을 산다
&nbsp;
아, 내가 라크 술병 속 물고기라면
&nbsp;
시를 써서 오래된 물건과 바꾸고 그것으로 별을 만들고 음악에 취한&nbsp;시인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nbsp;시인이 속한 식어가는 세계(오래된 물건으로 별을 만든다면 식어가는 세계가 아닐까)와 별빛 아래&nbsp;흐르는 음악은&nbsp;어찌 좀 와닿는다. 어쩌다가 이 구절이 내게 절로 다가와 별처럼 반짝이는지 설명은 불가하나 중요한 것은 어쩌면 영원히 반복될 지도 모를 절망을 이제는 좀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이것도 폼을 잡는 일일 수도 있으나 그럴 수 있다,는 뭐 그런 물고기같은 마음이라면 스스로에게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이 시는 어떤가.
&nbsp;
아름다운 날들
&nbsp;
이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망쳤지
이처럼 아름답던 어느 날에 일을 그만둔
나는 성실한 관리였네
이런 날에 처음 담배를 배웠고
이런 날이면 나는 사랑에 빠졌었지
집으로 빵과 소금을 가져가는 것도
이런 날에는 잊고 말았으니 
으레 이런 날이면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이 생겼네
나를 망쳤네, 
이토록 아름다운 날들이
&nbsp;
살다보면 정해진 일인지 그것과 무관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과거의 나와 작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좀 더 편하게 설명하면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직감하게 되는&nbsp;살 떨리는&nbsp;날이 있다. 아찔하고 비루하고 혹은 쓸쓸하고 여튼 예전의 나와 작별하게 되는 어떤 그날.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망쳤네, 라고 쓴 시인의 저 아름다운 날들이 내가 기억하는&nbsp;뭐라&nbsp;명명하기도&nbsp;묘한 그저 살 떨렸던&nbsp;그날들과 닮아 있을까.&nbsp;모르겠다. 그저 나를 망친 그날들마저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혹은&nbsp;세련되게 조작되어&nbsp;있으니 뭐가 뭐였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뿐.&nbsp;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나마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은 내게 없었다는&nbsp;것. 그러니까 마지막 정신줄, 창피해지는 일은 스스로 막았다는 것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nbsp;아니다.&nbsp;이&nbsp;문장을 쓰고&nbsp;있는 내 속내는 그런 아름다운 날에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이 생긴 시인이 그저 부러울 뿐이라는&nbsp;것.
&nbsp;
시집은 오르한 웰리가 1945년 이스탄불에서 쓴 『이방인』을 위해,라는 작가의 글도&nbsp;읽을 수 있고, 새로운 시 정신을 선언한 「이방인」의 서문도 볼 수 있고, 옮긴이의 자세한 설명도 읽을 수 있다.&nbsp;모두 다 아껴 읽은 글들이었으나&nbsp;여기에 옮길 이유는&nbsp;없을 것 같다.&nbsp;시가 굳이 어떤 해석들을 기반으로 존재할&nbsp;이유없고,&nbsp;예술이 어떤 옹호들로 안전지대를 찾을 필요없겠다,싶은&nbsp;마음이라면 이것도 개폼일까.&nbsp;그래도 할 수 없고. 
제일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집을 처음&nbsp;펼치면 「게믈릭으로」라는 시가 나온다. '게믈릭'은 에게 해 연안의 항구도시란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이런 건 옮겨야 한다.
&nbsp;
게믈릭으로
&nbsp;
게믈릭으로 가면
바다를 볼 수 있을 거요
그때 놀라지는 마요
&nbsp;
「게믈릭으로」라는 시는 오르한 웰리 카늑의 시집 &lt;이스탄불을 듣는다&gt;를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는 시다. 그러니까 "&lt;이스탄불을 듣는다&gt;를 펼치면 / 시를 읽을 수 있을 거요 / 그때 놀라지는 마요" 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BR>또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는 또 여기서부터. 시인의 시가 어떻게 나를 유혹했는지&nbsp;밝혀두고자 한다. 뭐랄까 "안 넘어갈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면 "왜요?"라고 물을 사람들을 위해서다. 시가 이렇게&nbsp;쓰여있고, 이렇게 읽히는데 어찌&nbsp;흔들리지&nbsp;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nbsp;취향이 영 다르면&nbsp;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또 이렇게 옮긴다. &nbsp;
&nbsp;
요염히&nbsp;눕다
&nbsp;
그녀는 몸을 늘이고 나른히 누워 있다
그녀의 치마가 조금 말려 올라갔구나
그녀가 팔을 올리니
살며시 겨드랑이 비치는데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보듬는구나
나는 안다,
그녀 안에 나쁜 마음이 없음을 
나는&nbsp;안다,
나 역시 그런&nbsp;생각을 품지 않음을
그러나......
저러면 안 되네
저렇게 요염히 누워선 안 되지&nbsp;&nbsp;&nbsp;
&nbsp;
&nbsp;
&nbs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405/40/cover150/893202252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2526</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이 여름이 꼭 찔레꽃만 같았으면  - [꽃이 핀다 - 자연에서 찾은 우리 색]</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976056</link><pubDate>Thu, 04 Aug 2011 14: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9760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3306377&TPaperId=497605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0/52/coveroff/894330637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3306377&TPaperId=49760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꽃이 핀다 - 자연에서 찾은 우리 색</a><br/>백지혜 글.그림 / 보림 / 2007년 04월<br/></td></tr></table><br/>그림책을 보면서 늘 느꼈던 아쉬움은 그림에 대한 것이었다.&#160;<br />
조금 더 색이 고우면 좋겠고, 조금 더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좋겠고, 보는 순간 울렁거리면 좋겠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겠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160;내 아쉬움의 이유들이었다.&#160;&#160;<br />
물론&#160;눈이 반짝 가슴이 콩닥거리는&#160;그림책들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서양 화가들이 일러스트에 참여한 경우라서&#160;반가우면서도&#160;조금은 아쉬웠던 것 같다.&#160;&#160;&#160;
그런데 이렇게 고운 그림책을 만났다. 백지혜작가의 &lt;꽃이 핀다&gt;라는 그림책이다. <br />
일전에 전시회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책의 존재를 왜 몰랐을까 싶다. 백지혜는 한국화를 그리는 화가다.&#160;그런 화가가 우리 산과 들에서 자라는 꽃과 열매를 전통 채색 기법으로 그려 이 책에 담았다. 자연 염료를 사용하여 비단에 그린 그림들은 손가락을&#160;올려놓으면 손끝을 타고 그 맑고 여린 염료들이 흘러들어 내 몸&#160;어딘가도 그렇게 젖어들 것만 같다. 그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애틋하기만 한 순간들이다.&#160;&#160;&#160;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은 말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책 속의 그림들을 여기에 조금 옮긴다. 이런 수고와 욕심을 내는 이유는&#160;혹여 오다가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있다면&#160;그분들도 이 그림책을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160;
&#160;&#160;
&#160;
&#160;
&#160;
&#160;
책은 빨강, 동백 / 노랑, 민들레 / 분홍,진달래 / 연파랑, 꽃마리 / 자주,모란 / 연두, 버들잎 / <br />
파랑, 달개비 / 초록,대나무 / 보라, 도라지 / 주황,나리 / 갈색, 밤 / 하양,찔레 / 검정, 송악<br />
등을 글과 그림으로 소개하고 있다. <br />
<br />
백지혜작가가 묘사하는&#160;사물들이 곱고 바람처럼 가볍고 정교한 이유는 그녀가 배체법이라는&#160;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불화에 많이 사용되는 방식인데 종이나 비단의 뒷면에 물감을 가볍게 칠해 맑은 중간 색조의 투명성이 강조되고, 뒷면의 색이 앞면으로 우러나온 상태에서 음영과 채색을 보강하는 기법이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160;조형미가 더해져 기존의&#160;그림에서 느낄 수 없는 시선을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멀리 어떤 것은 위에서 들여다 보듯이 그렇게 작품속으로 자연스럽게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160;
책 소개가 길었다. 부질없는 일인 것을 알지만 자꾸 뭔가 좋은 걸 만나면 이렇게 허둥댄다. <br />
내친김에 이 여름 지금 어디쯤 피어있을 찔레꽃 그림 하나&#160;더 보고 간다.<br />
이 여름이 꼭 찔레꽃만 같았으면 좋겠다.&#160; <br />
<br />
&#160;&#160;
마지막으로 백지혜 작가의 봄이 오는 소리,라는 작품을 여기 옮겨 놓는다.&#160;&#160;<br />
자꾸 봐도 고운 그림이다.&#160;&#160;<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0/52/cover150/894330637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3306377</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폐허에서 울고 있는 산파 -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801754</link><pubDate>Fri, 20 May 2011 15: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8017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4515&TPaperId=4801754"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57/71/coveroff/89546145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4515&TPaperId=48017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a><br/>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05월<br/></td></tr></table><br/>&#160;&#160;&#160;&#160;&#160;&#160; 애먼 사람&#160;많이 괴롭혔습니다.&#160;문학 따위가 뭘 할 수 있냐고 주제넘게&#160;숱하게 물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서둘러&#160;문학도 문청도 모두 폐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랄맞은 현실이&#160;만든 폐허가 딱히 싫지도 않았습니다. 폐허 앞에서도 박수치는 사람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물정 모르는 그들의 환호가 고소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폐허 어디쯤의 조등弔燈 앞에서 이렇게&#160;나직히 울고 있는&#160;사람도 있다는 것을&#160;말입니다. 이내 따뜻하고 아렸습니다.&#160;그런데 어떻게&#160;그가 울고 있는 줄 알았는지 궁금하십니까. 그의 비평에는 열등감도&#160;허세도&#160;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160;&#160;&#160;&#160;&#160;&#160;&#160;&#160; <br />
<br />
&#160;&#160;&#160;&#160;&#160;&#160; 이장욱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진실은 존재의 어떤 자세다" 라고 쓰셨더군요. 그 말이 몇 일 밤과 낮을 따라다녔는지 모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장욱의 시집 한 귀퉁이에 저도 그렇게 썼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도 지금도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전작 &lt;몰락의 에티카&gt;를 집었을 때 제 딴에는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제목이 전부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160;어찌되었건 저는&#160;"몰락의 에티카"라는&#160;제목이 책의 거의 모든 것이자 문학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김승옥과 이청준, 황지우와 강정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저작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보니 신형철이라는 이름의 울림도 나쁘지 않군요. 그럼 이번 책의 제목&lt;느낌의 공동체&gt;는 어떠했냐구요. 말을 빌려오자면 단독성이 특수성으로 나아갔다는 느낌이었습니다.&#160;특별한&#160;문학이 아닌&#160;어떤 문학에 대해서는&#160;비슷한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더 나아가&#160;그 느낌의 곁을 내주고 있다는&#160;사실이 반가웠습니다. 물론 모든 문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느낌도 아닐 것입니다. 그저 같은&#160;계열에 놓인&#160;그러나 꼭 일치할 필요도 없고&#160;극하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160;느낌일 것입니다.&#160;동일한 느낌을 공유할 필요도 없고 공유한다는 것도&#160;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br />
<br />
&#160;&#160;&#160;&#160;&#160;&#160; 순서에 매이지 말고 책을 좀 볼까요.&#160;&#160;<br />
심보선의 &lt;슬픔이 없는 십오 초&gt;를 더듬는&#160;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쓰셨더군요.<br />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160;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5.16 이후 김수영의 시가 그랬고, 10년 전 황지우의 시집 &lt;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gt;(문학과 지성사,1999)가, 최근에는 장석원의 시집 &lt;아나키스트&gt;(문학과 지성사,2005)가 그러했다. 이 시인들의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자聖者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 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라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160;&#160;-.p.126&#160;
&#160;<br />
저는 '실존적 깽판'이라는 표현을 보고 웃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내 머리를 조아렸지만 말입니다.&#160;여튼 시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 사람만이 입성한다는 직관의 영역에 입성한 듯 싶더군요. 이럴 땐 저야말로 실존적 '깽판'을 거두고&#160;그저 감탄과 존경을 바치면&#160;되는 일이죠.&#160;&#160;&#160;<br />
<br />
안현미의 &lt;옥탑방&gt;을 이야기는 장으로 넘어가 볼까요.&#160;<br />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체험도 풍성해질 테니 인생을 모르는 핏덩이들은 더 기다려야 하겠고. 그러나 아니지. 중요한 건 체험의 부피가 아니라 전압이지. 무엇이건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전感電의 능력. 그래서 생겨나는 언어, 그 언어에 흐르는 전류. 이건 나이와 아무 상관없어. 그 뒤로 20년 정도 더 살기는 했지만 사실상 랭보는 이미 십대 후반에 감전사한 거지. 감전의 천재가 자기 자신에게 타살된 거야. -p.206&#160;&#160;&#160; 
<br />
개인적으로 안현미의 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 시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비평이 꼭 날이 서있어야만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끼는 대목이었습니다.&#160;&#160; <br />
&#160; <br />
최갑숙의 &lt;밀물여인숙3&gt;과 안시아의 &lt;파도여인숙&gt;에 대해 쓴 글도 좀 볼까요.&#160;&#160; <br />
그런 날에는 또 이런&#160;남녀들의 뽕짝 같은 수작들이 위로가 된다. 나만 아는 그런 여인숙, 어딘가에 꼭 하나만 있어서, 사랑이든 신파든, 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기적이 없는&#160;세계에 신파라도 있어야지. -p.106&#160;
<br />
이런 감성도 있었단 말입니까.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순전한 가정이지만 알았으면 정말 오다가다 발목이라도 잡았겠습니다. 저는 늘 뽕짝 같은 수작에 들뜨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160;&#160; <br />
&#160; <br />
&#160;&#160;&#160;&#160;&#160;&#160; 책을&#160;나름 필사할 수는 있지만 이곳에 다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160;또한 문학을 이야기하는 비평가가&#160;현정권이 용산에서 벌인 일을 말하고, 최진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신경민의 멘트를&#160;옮겨 적고,&#160;가수인지 모르겠지만 여튼&#160;가수 비가 부른 노래말을 논하는 것은&#160;흥미롭다고&#160;말해버리기는 아쉬웠습니다.&#160;사유의 폭이 광폭이라고 하기에도 고종석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 꺼림칙합니다. 아니 사유의 폭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160;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을 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저는 특정한 부조리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것을 중용이라 말하는&#160;사람들이 참으로 뜨거운 불구덩이에 빠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160;&#160; <br />
&#160; <br />
&#160;&#160;&#160;&#160;&#160;&#160; 반갑고 고마웠습니다.&#160;문학을 절망의 형식이라 말해주는 이가 있어&#160;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160;"시인들이여, 부디 사산死産되지 말고 기어이 태어나라"라고 주문하는 그 떨리는 목소리가 있어 나도 떨렸습니다. 그리보니 당신은 울고 있는 산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허 속에서 태어난 것들을 기쁘게 받아 앉고 그들이 목도해야 할 절망의 현실을 울어주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창동의 &lt;시&gt;에서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밖에 없네요."라고 말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지 모르는 '양미자'씨가 있는 한, 그리고 '양미자'가 사산되지 않고 태어날 것을&#160;주문하는 산파가 있는 한&#160;폐허에서 제가 본 불빛은 조등弔燈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지만 정녕 조등은 아니었을 겁니다.&#160;&#160;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57/71/cover150/895461451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4515</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입이 없는 것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뭐든 활용하라. -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763698</link><pubDate>Tue, 03 May 2011 17: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76369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075496&TPaperId=476369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01/67/coveroff/89570754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075496&TPaperId=476369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a><br/>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02월<br/></td></tr></table><br/>최정우의 &lt;사유의 악보&gt;를&#160;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알 수 없다. 또한 나는 이 책을 꼼꼼히 정성스레 읽었음에도 서평을 쓸 수 있을까 포기해야 했을까. 또한 알 수 없다.&#160;그러나 오직 하나. 내가 이 책의 서평을&#160;쓰는 이유는&#160;루소의 말을 빌려 "때로는 던진 조각이 바로&#160;목표물에 맞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 의도는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한다"는 의심스러운 위로(물론 원문의 조각은 '악의'를 의미하지만)를 믿고,&#160;그래서 뭐든 될 대로 되더라,라는&#160;낙관을 믿고, 더 나아가 서평은 저자와 내가 나눈 대화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자위에 기댔기 때문이다.&#160;물론 나는 글을 다 쓰기 전에 내가 던진 의도가 부메랑이 되어 자폭할 것임을 안다.
달려라 하니_서곡을 듣는다. <br />
<br />
불가능,&#160;폭력, 리셋,&#160;조바꿈, 도돌이표,&#160;오역, 초월, 정밀독해, 불확실한, 불편한, 비평적 농담, 분열, 파국, 중독, 유서.&#160;서곡과 목차를 훑으며&#160;잡아 둔 단어들이다.&#160;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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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하는...자들의 저 역겨운 교훈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복해야 하는가 하는&#160;극단적이고 실천적인 질문으로부터 탄생한 기형과 잡종의 것들이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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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쓰면서&#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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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명과 폭로로써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160;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 우리 세대가 지닌....불안과 우울증에 대한 저 깊은 무감각은 그것의 직접적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파악하고 제시한다고 해서 절대 깨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여기 모인 글들은 모두 그러한 증폭과 심화, 때로는 어떤 '악화'를 위해서, 심지어 어떤 '폭발'을 위해서 작성된 것들이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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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며 &lt;사유의 악보&gt;의 서곡을 힘있게 연주한다.&#160;서곡은 감동적이다. 품위의 그늘 따위를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발랄하고 집요하게 달려라, 달려라 하니처럼 달리되 결승점에서 멈추지 말고 냅다 쭉 가봐라, 경기의 룰 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이세상 끝까지, 끝이 시작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달려라 하니야, 이렇게 독려하는 것&#160;같았다. 그러니 일단 달린다. &#160;&#160;&#160;
달리는 하니_13개의 악장을 듣는다, 따라한다,&#160;혹은 변주한다.&#160;&#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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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하지 않은가, 때로는 가장 익숙한 것이 또한 가장 낯설게 날을 세우며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 질문(들)은 아마도 '형식주의'에 대한 물음의 형태가 아니라, 더 적확하게는, 물음에 대한 '형식' 그 자체가 될 것이다" (5악장,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_166)&#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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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나는 사유의 악보, 제 5악장을 쏘아본다.&#160;그리고,<br />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낯설게 날을 세우며 다가오는 순간,&#160;익숙한 것의&#160;날이 내 무능의&#160;몸통을 깊숙히 찌르는 이 감각, 그래서 이 통증(들)은 아마도 '쪽팔림'을 가장하기 위한 어깃장의 형태가 아니라, 더 적확하게는, 불가능과 동거해야 한다는&#160;'신비' 그 자체가 될 것이다,라고 혼잣말을 가장한 대화를&#160;시도한다.<br />
&#160;<br />
폭력, 저자는 소설 &lt;부서진 사월&gt;로 1악장을 시작한다. &lt;부서진 사월&gt;을 읽지&#160;못한 나는 &lt;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gt;를 떠올린다. &lt;부서진 사월&gt;속에 형이 흘린 피를 회수해야&#160;하는 아우가 있다면 &lt;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gt;속에는 아버지가 흘린 피를 회수해야 하는 아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누군가 피를 흘리면 반드시 회수한다,는 상호주의의 원형을 보여준다.&#160;'상호주의' 명분 중의 명분이며 뒤끝없는 계산법의 으뜸이라고&#160;발화하고 싶지만 그것이 폭력이라는 단어를 지시하는 순간 복잡해진다.&#160;왜 복잡한가? 폭력의&#160;상호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아니 폭력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시원은 어디인가? 그것이 문제라면 폭력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누가 어떻게 무엇을 희생하고 용서하는가? 나는 신경증환자처럼 1악장을 또&#160;쏘아본다. 그리고,&#160;<br />
나는 원효가 마셨다는 물 한 바가지를 마시지 않고도 내&#160;복잡한 심중의&#160;밑바닥을 본다. 머리를 다 비워낼 요량으로 생각을 게워내도 소용없음을. 나는 벤야민과 바타유를 최정우를&#160;그리고&#160;폭력의 아포리아를 끝내&#160;온전히 해석할 수 없고&#160;더는 어떤 생각도&#160;적확히 밀어부치지 못했다. 그저 다만&#160;어떤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폭력'의 미학 안에서 눈뜨기에&#160;대한,&#160;'반폭력'의 불가능성을&#160;직시함에&#160;대한,&#160;더 나아가 세계를 해석할 수 없다는 불가능과 동거해야 한다,는 감각만이 미친듯이&#160;증폭하고 있소,라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160;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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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새로운 분류법으로 인해 탄생하는 것은 곧 새로운 인식론이며 새로운 담론의 체계일 터. 그렇다면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골이 가리키는 새로운 담론의 체계란 어떤 것일까(그런데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4악장,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_144)&#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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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질문과 마주하는 순간. '정지'한다.&#160;정지는 이내&#160;자연스럽고 고통스럽게 사유로 이어지고&#160;내 머리속의 어떤 공 하나가&#160;어떤 담장을 넘는다. 혹은 넘는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 질문에 나는&#160;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러므로 '실패'는 반복을 태생적으로 내제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실패'이후에 오는 '완성'은 실재로 내가 시도했던 그 무엇의 결과물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래서 '절멸'이 그리고 '복음'이 쌍을 이루어 세상을 떠돌고 있었군요,라고 나는 이미 놀랄 것도 없는 생각 한 자락을 끌어안는다. 
이렇게 쓰니 &lt;사유의 악보&gt;가 독자를 미치게하거나 푸념하게 하는 책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대목은 어찌나 즐거운지 로시니의 오페라를 듣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살짝 들려 드리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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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존재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에 비해, 없는데도 마치 '있는 듯이'제사를 올리는 저 공자의 유물론은, 그래서 얼마나 우월한가....그래서 저들은 신에게 아무것도 따질 수 없는 반면, 나는 어제 제사 내내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변변찮은 영력을 지닌 조상님을 이것저것 따지고 대들 수 있었던 것이다(조상이 돌본다고?)"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_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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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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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도 필요란 언제나 적당함이라든지 중간쯤이라든지 하는 것을 전혀 모른다. 언제나 필요는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필요는 그래서 무엇을 채우는 것이라기보다는 항상 비어 있는 곳을 찾아내고 만들어낸다....어쩌면 이를 두고 필요의 일반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요는 나로 하여금 욕망의 충족보다는 욕망의 결핍을 알게 해준다, 뼈아프게.(정신은 뼈다)."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_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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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지 않은가. 익숙한 것들의 전복. 
여전히 달리는 하니_종곡, 입이 없는 것에 귀를 귀울여라, 그리고 뭐든 활용하라.<br />
<br />
모든 악장에 대해 하나하나 공들여 대답하고 싶었고, 저자의 질문을 뒤집어 보고자 노력했다. <br />
8악장 초월의 유물론, 변성의 무신론,은 박상률의 문학을 다시 한 번 읽고 하나하나 짚어보고 싶었고, 10악장 불확실한 광장에서 나눈 불편한 우정, 역시 승산은 없지만 거론된 작가들의 이야기와 여전히 떠돌고 있는 문학의 '순정성'에 대해 시간을 들여 다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160;<br />
그러나 그것들을 이 공간에 다 옮기는 것은 무리한 일이고, 어쩌면 죄다 '오답'만을 표기한 답안지를 들고 있는 그런 막막함과&#160;쪽팔림을&#160;경험하게 되는 일일&#160;수도&#160;있다. 실은 더 부끄러울 일도&#160;없지만 그래도 나는 늘 내가 창피하고 창피하다는 사실이 또 창피하다. <br />
&#160;<br />
여튼, 이제 종곡을 듣는다. 혹은&#160;읽는다.&#160;내가 내 생각들을 이렇게 딱 꼬집어 쓸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 매번&#160;호들갑을 떨며 놀라지면 역시나 또 놀란다. 그럼에도 종곡에서 얻은 어떤 한&#160;문장이 있다면 그리고 마땅치는 않지만 굳이 애를 쓰며 표현한다면 그것은 '몰락'에의&#160;권유, 흥건하지만 침묵하고 있는 여전히 뜨거운 피,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잠시 신형철의 어떤&#160;글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김영민의 어떤 독한 문장들이 떠오르기도&#160;했다.&#160;여튼 나는 '몰락'혹은 '절멸'의 어떤 상태와 그것을 대해는 태도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라 접는다. <br />
좌우지간에 이 한 권의 뜬금없고 독한 책은 너무 많은 것들을 '조근조근' '잘근잘근' 생각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함께(나는 '중독'이라고 쓰여있는 글자들을&#160;'함께'라고 읽었다) 보자고&#160;꼬시는 것 같았다. 그 유혹에 화답하기로 작정은 하였으나 언제 체념이라는 놈이 역습할 지는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동시에'맹인직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나는 어떤 문을 그것도 정문을 통과할지도 모른다는 맥락없는 희망을 품는다. 알면 다치고 모르면 썩겠지만, 그 중간에 어떤 샛길이 있지 않을까.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공처럼. 팽팽한 긴장의 샛길. 뭐 그런.&#160;&#160;
사족1 : 저자의 어떤 문장들은 시인의 것이었다. 옮기고 싶지만 아까워 싫다. <br />
사족2 : 이것은 서평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글이지만 더는 쓸 수 없다. 나는 늘 실패하니까.<br />
사족3 : 책 274쪽의 포스터, 불온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를 본다.&#160;그리고 나는 이 책을 삐라뿌리듯이 뿌릴 것이다. 삐라를 줍는 긴장과 즐거움을 아니까. 실제로 나는 5살에 송추에서 삐라를 한 바가지 주웠다.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01/67/cover150/895707549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075496</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역사적 기억으로서, 전략을 끌어낼 수 있는 성지로서 -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581096</link><pubDate>Wed, 02 Mar 2011 13: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5810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854262&TPaperId=458109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28/7/coveroff/89938542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854262&TPaperId=45810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a><br/>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br/></td></tr></table><br/>&lt;리영희 평전&gt;을 가장 달가워하지 않을 사람을 꼽으라면 박씨 일가도 아닐 것이며,&#160;요란한 기소장을 썼던&#160;D검사도 아닐 것이다. 아마 리영희선생 자신일 것이다. 물론 선생은 이 책을 무척 기다리셨다고 했으나, 이 책이 그저 시대가치를 등에&#160;업고 여전히 그것들을&#160;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먹이는 무슨&#160;호적부쯤이&#160;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는 이 책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160;내 억측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리 믿는다.&#160;&#160;
그가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토로하며 한 시대의 전면에서 물러섰을 때, 
"내가 할 일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 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라고 그의 책 &lt;대화&gt;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 하나로도 가슴 벅찼지만, 저항하고 고발하는 지식인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두렵고 서운하였다. 욕심이었고 파렴치한 생각이었지만 이 시절에도 계속&#160;스승은 살아서&#160;작동해주길 바랬다.&#160;강준만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기집권'을 원했다. 그러나, 2010년 겨울&#160;시끄러운 세상속에는 선생의 부음 소식도 끼어 있었다. 마음이 헝크러지는 날들이었다.&#160;&#160;&#160;&#160;
리영희선생에게 있어 '생각한다'라는 말과 대비되는 말은 '우상'이었다. 선생이 평생을 혼자 치열하게 싸워온 것도 그것이었다. 리영희선생이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교의식에서 쓰이는 숭배되는 어떤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숭배하는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음, 말 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것들은 그것이 전통의 이름을 달고 있건, 종교의 이름을 붙이고 있건, 정치적으로 처벌되는 무엇이건, 사회안에서 암묵적으로 동의한 관행이건, 나름의 체제를 만들고 폭력적인 방법(여기서 폭력이란 타인에게 자신의 혹은 사회적 취향을 강요하거나 굴종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깨닫게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을 동원해 사유를 금기시한다.&#160;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여전히 '우상'과 '헛것'이 판치는&#160;아수라판을 살고 있는 셈이다.&#160;
그렇다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병권씨는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전제나 토대에 입각해서 추론하는 일이 아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사유의 전제까지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160;
라고 정의했다. 나는 여기서 리영희선생의 스승됨을&#160;본다. 그로부터 의식을 각성당한 한 지식인은 스승의 역사적 기억을 자양분으로 이렇게 반듯하게 세상을 향해 그리고 그의 학생들에게 말할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리영희선생의 힘이라고 믿는다. 단순히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 용기가&#160;되어주는 선생, 세상에 그런 선생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책과 그의 말과 그의 행동을 보며&#160;부르르 떨고,&#160;울고, 악을 쓸&#160;수 있었던 그들이 나는 내심 부럽다. 물론, 그 시절을 내게 살아내라고 했으면 나는 어떠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무뇌충으로 살았거나, 술주정뱅이가 되었을 것이다.&#160;&#160;
여튼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 우리는 무작정 출처도 정확하지 않은 쎈 것들을 읽었고, 쎈 것들을 말하는 것이 뭔가 더 알고 더 나아간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왼쪽에 모여있는 사람들끼리 '입으로만 싸우는'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는 했다. 얼굴을 들기 민망한 시절을 산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 밑둥없이 부유하는 그래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는 어른이 되어, 그저 산 목숨 하나를 지키기 위해 생계라는 슬로건 아래에서&#160;눈을 감기 바빴고, 우상에 절하고 침바르는 일을 알아서 하느라 바빴다.&#160;그러면서 입은 여전히 살아 있어 늘&#160;봄이 오지 않음을&#160;투덜거렸다.&#160;어쩌면 아예&#160;봄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고.&#160;
"다소는 외람되고 조금은 자화자찬격인 평가지만 1980년대에는 나의 글과 책이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60~70년대에 나의 글들이 지녔던 일정한 의미와 역할은 거의 지양되고&#160;초극되었다. 얼마나 반가운 발전인가! 이를테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의 역할을 했다는 셈일까? 그렇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리영희선생이 &lt;30년 집필의 회상&gt;에 남긴 글 일부다. 물론 이 글은 6월 항쟁의 과정에서 각성된 민중,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모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청년들은 그 바탕에 선생의 글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2011년의 우리는 반가운 발전이라는 말을 과연 들을 수 있는 처지에 놓인 것일까.&#160;
최장집교수가 그의 책&lt;민주화 이후 민주주의&gt;에서 밝혔듯이, 한국사회는 질적으로 민주화 이후 더 퇴보한 것 같다. 질적으로 물러섰다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지 그것을 통계적으로 들이밀 수는 없지만, 민주화 이전의 사회적 패권이 민주화 이후 또 다른 소수에게 옮겨 갔음을&#160;짐작할&#160;수 있는 예들은 차고 넘친다.&#160;게다가 그들은&#160;훨씬 명민해졌다. 이런 시절 선생의 퇴장은 일견 더 한 꼴을 보지 않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는 어찌해야&#160;합니까,라는 혼자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는 양심도 없이 등대가 서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160;그러면서 또 양심도 없이 모든 유적지가 그러하듯이 나는 그 자리가 그저 관광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역사적 기억으로서, 교훈의 자리로서, 각성의 불빛으로서, 전략을 끌어낼 수 있는 성지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너무 견고하고 높기만 했던 선생, 어디선가 멀고 먼 나라에서 온 것만 같던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160;선생마저도 의심해보자고 달려들 수 있도록&#160;깨어 있겠습니다.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28/7/cover150/899385426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854262</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이성으로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서 낙관할 수 있다 -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574486</link><pubDate>Mon, 28 Feb 2011 17: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57448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691&TPaperId=457448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37/10/coveroff/895862369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691&TPaperId=457448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a><br/>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br/></td></tr></table><br/>이 책의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제목을 고민하다가, 언젠가 홍세화선생님께서 술자리에서&#160;흘렸던 말씀이 떠올랐다. "이성으로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서 낙관할 수 있다" 아마 그즈음 나는 이성도 아닌 감성으로 세상을 비관하고, 주위에 침을 뱉고, 속으로 악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쪽팔리고 한심하지만, 공부도 사유도 그 끝을 가보지 못한 나는 어디에도 쓸모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160;여하간, 그 시절&#160;내 최대 낙관은 어서 빨리 종말로 가세, 정도 였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다시 이 책&lt;反 자본발전사전&gt;을 읽으며 그 때의 어리석음을&#160;복기했던 것은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는 인간이었으며 더 나아가&#160;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160;사실을&#160;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을 주장할 때, 혹은 내 신념이 무엇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없는지, 혹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발화했던 부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생활우파에 속했던 것은 아닌지 점검했어야 했는데 늘 나는 게을렀다. 심지어 비관적이었고.&#160;&#160;
책은 19가지의 개념으로 나뉘어져 있다. 개념 하나하나가 내게는&#160;매우&#160;유용했고, 어떤 호소는 애틋했다. 책의 첫 장은 [발전, 두 개로 나뉜 세계]라는 개념으로 글을 풀고 있는데, 그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말이 가슴을 친다.&#160;&#160; <br />


"문명의 수준을 생산의 수준과 동일시하고 하나로 융합된 것이 발전이다. 트루먼의 연설 이래로 세계 20억 인구는 저발전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온갖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남들의 현실로 자기를 비추는 뒤집힌 거울로 일그러졌다."&#160;
<br />
우리 사회도 70년대&#160;이후 경제적 가치는 모든 사회적 존재의 형식이 지닌 가치들을 폄하하거나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었던 존재들을 무기력한 개인으로 몰아세우곤 했다. 그 결과물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발전이라는 논리앞에서 무차별하게 얻어맞은 것들을 떠올리면 치근이 욱씬거린다. 물론, 여전히 상황은 진행 중이고,&#160;지금 이 순간에도&#160;두들겨 맞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라는 말로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에, 우리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 그저 나만의 곡해일 수도 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전과 경제적 가치라는&#160;헛것에&#160;한 사람도 빠짐없이&#160;두들겨 맞아야만 우리 모두 죄인이었다는&#160;고백이&#160;살아서 작동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쉽게 그리고 자주 죄인임을 고백하기만 했던 나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 번째 개념으로 소개된&#160;[평등,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를 좀 더 들여다 보자.&#160;&#160;
"빈곤층의 가난은 부유층의 풍요를 만들고, 빈곤층의 굴욕은 부유층의 자부심을 낳고, 빈곤층의 의존성은 부유층의 자립성을 낳는다. 따라잡기를 통한 평등은 현실의 불평등을 조직하고 합리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평등과 관련해 소개된 레인즈버러의 정의는 이렇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도 가장 잘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야 할 삶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레인즈버러의 발언은 사람은 살아야 할 삶이 있다는 똑같은 실존적 과제에 직면한 존재라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즉&#160;다른 개념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공동체의 재화가 분배되는 과정에 있어 똑같이 살아야 할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공동체가 어떻게 이해하고 분배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의 삶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모든 것들을 균일하게 배분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더 나아가 불평등의 문제 특히 빈곤의 문제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을 발전이라는&#160;신화에&#160;묻어가는 형태로는&#160;절대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상상력을 동원해 빈곤이 아닌 과잉의 문화를 바꾸자,라는 지점에&#160;방점을 찍는 것이 훨씬 빠른 그리고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가치관을 들이밀어야 가능해지는 것인지는 지금부터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해야 할 대목이겠다.&#160;
네 번째 개념으로 [도움, 세련된 간섭]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구원에 미친&#160;사람들 때문에 살아가는&#160;데 숨이 막힌다. 모두가 모두의 삶을 고치겠다고 나선다. 세상의 길거리와 병원에는 개혁가가 흘러넘친다. 사회는 구원자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이 되었다."&#160;
봉사자들의 자기위안과 자기과시를 몽땅 빼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할 말이 없다고 했던 것 같다. 타인의 뱃속까지 검열하기에는 늘 피곤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기꺼이 링크해줬다.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 입장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무엇인가에 쫓기듯 행동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서있는 지점, 즉 기만적인 사회적&#160;조건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심 그것들을 긍정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br />
여하간, 모든 도움이 자구를 위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것 역시 발전이라는 개념안에 갇혀있다면 그저 세련된&#160;형태의 간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160;또한,&#160;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이건 사회의 문제이건 발전이라는 것을 미리 염두해 둔다면 이미 도움이라는 것을 불신한다는 말이&#160;될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만큼은 특별히&#160;명민한&#160;두뇌와 뜨거운 가슴을 소유한 그대들의&#160;전복적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겠다. 나는 정녕 모르겠으니.&#160;
책에 소개된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개의 개념은 어느 것 하나&#160;버릴 것이 없다.&#160;전부 소개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 책을 참으로 욕보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공부도 짧고 의지도 박약하고 글도 만신창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꼭 하고 싶은 말은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익히 알고 있거나 사유한 것들일 수도 있으나, 이제 막 움트는 청춘들에게는 한 번쯤 권하고 싶은 책이다. 청춘이 아니더라도 오늘과 다른&#160;내일을 꿈꾸는 그대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160;마지막으로 열 여섯번째 개념으로 소개된 [사회주의, 오해와 오류의 역사]라는&#160;편에 실린 한 구절을 적는다.&#160;<br />

"사회주의 전통은 자본주의에 갇힌 상상력을 벗어나게 해주었으나 점차 수많은 개념상의 어려움과 의미 전달의 어려움, 역사적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상투어가 되었다."&#160;&#160; 
이 문장을&#160;옮기는 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줄기차게 공격했던 사회주의가 어찌 몰락할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의 해답은 자본주의적 특징이었던 사회적 환원주의의 덫에 갇힐 수 밖에 없었던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즉 하나의 사회적 패권을 또 하나의 사회적 패권으로 바꾸는 수준에 머물렀던 개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 하나는 사회적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서구식 자본주의에 맞서 싸울 사람들이나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간과해서는 안될 지점일 것이다.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37/10/cover150/895862369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691</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보이는 것 VS 보는 것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472519</link><pubDate>Wed, 26 Jan 2011 23: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4725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401943&TPaperId=447251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13/50/coveroff/895940194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401943&TPaperId=44725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a><br/>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br/></td></tr></table><br/>미술시간, 정물화를 그린다. 쟁반 위의 과일 몇 개, 똑같은 것을 보고 스케치를 시작했고, 색을 입혔다.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 확인한 바에 의하면 50명의 그림은 달랐다. 같은 것을 혹은 비슷한 것을 바라보는데, 어찌 그들의 그림은 다른 것일까? 그들은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것을 보기 때문을 아닐까.&#160;&#160;<br />
촘스키와 푸코의 토론을 지면으로 확인하면서 비슷한 의문이 생겼다. 두 학자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왜 다른가? 억지스러울지 모르나 50명의 그림이 조금씩 혹은 제각각이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까? 그렇다면, 두 분의 어르신은 보이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발화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160;
네덜란드, 1971년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 '인간성'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 언어와 정치의 관계, 담론분석에 있어 권력의 역할이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오간다. 팔은 안으로 굽을 때 자연스럽다고 했던가. 내 마음대로 안으로 굽는 팔에 해당하는 푸코의 입장에 훨씬 많은 밑줄을 긋는다.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이다. <br />
"진리는 권력과 무관하다거나 권력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그 기능과 역사가 의심스러운 신화에 따르면, 진리는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보답이고, 오래 견딘 고독의 자식이고,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리는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60;그것은 복합적인 형태의 제약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의 주기적인 효과를 유도합니다. 각 사회는 진리의 체계가 있고, 진리의 '일반 정치학'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가 받아들여 진리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만드는&#160;담론 유형이 있는 겁니다."&#160;&#160;<br />
<br />
그러니까 푸코는 우리가 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지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둔 셈이다.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정의'의 개념에 대해 내 안으로 굽는 팔인 푸코는 다시 이렇게 주장한다.<br />
"제가 보기에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 경제 권력의 지배 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160;<br />
소쉬르가 언어를 기호라고 했을 때, 내가 소쉬르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의'의 정의로 가장 알맞은 것이라고 나 역시 합의하고 싶어진다.&#160;그것도 알아서 열광적으로.
여튼, 이 주장에 관해 촘스키는 <br />
"저는 인간성의 내부에 뭔가 절대적 기반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당신이 그 근거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곤란해질 겁니다.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진정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까려 있다고 보는 겁니다." 라고 응수한다. 이렇게 두 어르신의 입장 차이를 놓고 보는 일은 한 번도 제대로 궁리해보지 못한 논제들을 끙끙거리며 생각해야 한다는 귀찮음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흥미롭다. 잠시 내 성향이 의심스러운 대목이지만 말이다. <br />
여하튼 촘스키는 뭔가 인간성에 바탕을 둔 정의로운 사회를 진단한다면, 푸코는 철저히 현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따라서&#160;촘스키를 관념론과 연결지을 수 있다면, 푸코는 경험론에 줄을 댈 수 있겠다.&#160;&#160;
이쯤되면 무엇을 말하든 두 어르신은 흥미진진하게 대립각을 세우겠지만, '인간성'과 '사회의 진보'라는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방점을 찍고 있는 두 어르신 덕분에 독자는 위의 주제들을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셈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br />
선행학습이 없다면 쉽게 읽힐 책이 아닐 수도 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혹여 이 책을 읽으실 분들 중에 나와 같이 선행학습이 부재하다면, 책의 1장부터 읽지 말고 2장부터 6장까지 촘스키와 푸코가 각각 주장한 내용을 먼저 읽고, 마지막으로 1장을 읽으면 훨씬 수월하게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읽었다. 몰랐으니까. 무지는 나의 힘이다.]]></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13/50/cover150/8959401943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401943</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 -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405944</link><pubDate>Wed, 05 Jan 2011 13: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4059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0279&TPaperId=4405944"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0/73/coveroff/89374202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0279&TPaperId=44059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a><br/>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br/></td></tr></table><br/>빌려준 것인지, 누구에게 그냥 줘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이응준의 책을 다시 샀고, 다시 읽는다. 어쩌면 놓쳤을 수도 있고, 지금에서야 혼자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160;아득하게 앉아&#160;이응준의 책을 읽고 있었을 한강을 떠올려본다. 이 책에 수록된 &lt;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gt;이라는 단편이 허망한 추리의 근거라면 근거다.&#160;&#160;&#160;
책을 옆에 두고 조카에게서 얻은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다 굴린다.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납득되는 숫자가 허공을 향한다. 다시 던진다. 역시나 그럴 수 있는 숫자가 내 앞에 놓인다. 반복할 수록 우연이 필연적인 숫자들의 조합으로 엮여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람들의 조합도 그러할 수 있을까. 우연이지만 필연적인 조합. 이응준을 한강을 그리고 나를 우연이 필연적으로&#160;이어지는&#160;조합으로 묶는다면, 그 필연에&#160;어떤 이름을 붙일&#160;수&#160;있을까. 아마도&#160;'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160;이 되지 않을까.&#160;&#160;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두고 힘빠지는 이야기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 이제 기억도 멀다. 단지 써야하기에 쓰는 것,이라 말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고, 써야한다는 그 말의 울림이&#160;그저&#160;먹먹해 집에 오면 으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곤 했다. 무엇인가 써야함에도 어떤 단어도 이어갈 수 없는 막막함. 치부와 상처가 활자로 떠돌다 부메랑이&#160;되어&#160;돌아올 것 같은 근거없는 두려움이 도시의 불빛처럼 밤에도 잠을 막아섰다. 그럼에도 겁쟁이가 숨어들 공간이 있을 수 없는 것 처럼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 들은 매번 활자로 떠돌며 나를 찾아낸다. 떠돌아야 한다고, 가벼이 떠돌아야만 한다고 최면을 건다. 서로가 서로에게.&#160;살아야 한다는 말 보다&#160;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말이다. &#160;
"음지는 양지를 탐하여 흉내낼 때 가장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법이니까. 너는 온갖 세상사에 얽혀 있는 듯 행동하곤 했지만, 실은 언제나 너 홀로 자신에게 골똘했을 뿐이었다. 나는 곧 너를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였고, 그 대신 너의 전체적인 존재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더불어 네가 어째서 나에게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던가도 깨달았다. 너는 내가 너처럼 병들었다는 사실을 동물적으로 간파했던 것이다. 그림자 같은 그림자에게 드리우길 원한다. 그거였다."&lt;Lemon Tree 中&gt;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은 타자를 염두한다기 보다 독백으로 일관하고,&#160;흘러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어디 쯤에서 단절되어 있다. 줄거리를 기억하기에는 모호한 추억들로 채워진 사람들이다. 책은 각각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160;각기&#160;다른 인물들이 출몰하지만, 한 명의 주인공이 다른 공간을 오고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은 몇 편의 단편속에 묘사되었던 푸른 안개속을 더듬는 듯 하다. 물가의 새벽을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시리고 명징한 그렇지만&#160;힘이 빠진 안개속을 허위허위&#160;내저으며&#160;걷는 기분이다. 물리적으로 큰 힘이 아님에도 진을 빼고야 마는 그런 경험.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어느 주인공처럼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의 지친 새벽같은 소설이 바로 이응준의 소설이며,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함'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엉뚱한&#160;얘긴지 모르겠지만,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까.&#160;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160;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160;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160;&lt;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中&gt;&#160;
이 푸르고 외로운 별에서 내가 태어난 순간, 나는&#160;앞으로 얼마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숨쉬는 한 춥고 쓸쓸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울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를 바라보던 내 부모의 눈은, 너를 만나 다시 뭔가 잘해보리라는 마음이 들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외로웠으리라. 그렇게 우리의 쓸쓸함은 무성해졌으리라.&#160;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죄와 알려지지 않은 죄를 모두 저지르고 난 오늘, 어느 문지방에서 돌아보니, 문득&#160;그 모든 것들도&#160;'추억의 속도로 걸어가고'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160;여전히 뒷모습은 보이지만, 꼭 그 날의 새벽처럼, 푸른 안개속으로,&#160;무성하고자 했던 욕심들과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두려움마저 멀어지고 있다.&#160;&#160;&#160;
&#160;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0/73/cover150/893742027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0279</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푸른 밑줄 - [바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360983</link><pubDate>Wed, 22 Dec 2010 16: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36098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592949&TPaperId=436098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792/47/coveroff/89555929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592949&TPaperId=436098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바다</a><br/>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br/></td></tr></table><br/>가끔, 어떤 책은 밑줄을 그을 수가 없다.&#160;책&#160;그 자체가 이미&#160;작가가 그어놓은 거대한 밑줄이기 때문이다. 다만 밑줄을 들키지 않는 작가의 노련함과 배려에 감탄할 뿐이다.&#160;이 책 &lt;바다&gt;가 그렇다. 온통 푸른 밑줄이다.&#160;&#160;&#160;
저자 쥘 미슐레는&#160;프랑스 태생의 역사학자이자 문필가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한 1850년대는 요동치는 사회였다. 종교가 쇠락하고 이성과 과학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며, 시대는 인간이라는 개인을 발견하게 되지만, 조명을 받기 시작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한다.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고, 그것은&#160;자연스럽게 신비의 영역이었던 자연을 개척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결과는&#160;설명이 필요없게 되었다.&#160;여하간, 저자는&#160;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잠시&#160;접고 [바다]와 [바다와 더불어 사는 생명체]와 [바다와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역사학사적인 고증과 문필가적인 감성으로 풀어낸다.&#160;&#160;
책은 크게 1부 바다를 바라보며, 2부 바다의 기원, 3부 바다의 정복, 4부 바다의 르네상스로 구분되어 있다. 먼저 저자는 [바다]를 이렇게 묘사한다.&#160;&#160;<br />
"세상의 큰 운명인 굶주림은 육지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바다에서 굶주림은 예방되므로 있는지조차 모른다. 식량을 찾는 어떤 움직임도 없다. 삶은 마치 꿈처럼 떠다닌다. 그런 힘을 무엇에 쓸까? 힘의 소진은 불가능하다. 그 힘은 사랑을 위해 비축한다.....이것이 바다다. 바다는 지구의 거대한 암컷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영원한 수태로 새끼를 낳는다. 절대로 끝이란 없다."&#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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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성한 작업을 지켜보자. 바닷물 한 줌을 쥐어보자. 거기에서 원시의 창조가 다시 시작된다.....이렇게 나타나는 물방울은 식물성의 실일까? 그것은 어떤 존재라고 하기 어려운 가벼운 솜털 같다. 이미 예민하고 사랑스러운 솜털이다."&#160;
그는 바다에 서식하는 단세포 생물의 느릿한 움직임부터 어느 날 갑자기 들끓는 폭풍과 해일을 그리고 적도의&#160;숨막히는 고요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해와 달의 움직임에 따라 부푸는 바다라는&#160;거대한 암컷을 샅샅히 훑으며 생명이 태어나기 전 이미 그들을 사랑한 생명의 신을 노래한다. 이제 이 푸른 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 [고래]를 생명의 신이 얼마나 가학적으로 사랑했는지&#160;묘사하고 있는 저자의 글들을 살펴볼까 한다. 
"움직이는 불덩어리 같은 이 애인들은 일순간 몸을 치켜세우고, 노트르담의 탑처럼, 너무 짧은 팔에 끙끙대면서, 서로 부둥켜안으려 기를 쓴다. 그들은 그 거대한 체중으로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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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창조력이 처음으로 시적인 상상을 발휘해 내놓은 놈 같다. 우선 숭고함을 겨냥했지만, 그 뒤에 가능한 수준으로 복귀했다. 지속 가능한, 즉 생존 가능한 수준으로. 크기와 힘에서 모두 감탄할 이 짐승은 피는 뜨겁고 젖은 따뜻하며 선의에 넘친다. 오로지 생존 수단만 부족하다."&#160;&#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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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10미터 높이로 뿜어올리는 물기둥과 분수구멍은 바로 유치하고 야성적인 기관이라는 표시이자 증거다. 힘껏 공중으로 분수를 쏴올리면서 그 '숨 가쁜 통풍기'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오 자연이여, 왜 나를 노예로 만드셨나이까?"&#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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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답고 힘찬 더불어 선량한 생명체를 지면으로 옳겨온 저자를, 또한 저자의 글들을 도무지 아끼지 않을 수가 없다.&#160;이어서 저자는 바다를 정복한 인간의 역사와 바다를 두고 싸웠던 전쟁의 역사, 뒤를 이어&#160;바다를 끼고 꽃피웠던 아름다운 문화들을 소개한다. 참으로 바다에 관한 모든 것이라 해도 부족함이&#160;없는 책이다.&#160;&#160;&#160;
바다의 정복편에서 저자는 허기진 인간은 무섭다,고 썼다. 그리고, 과거의 영웅들이 숭고한 것은 무지한 데다 그 맹목적인 용기와 절망적인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바다의 길을 찾고,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심지어 둥근 지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태풍을 제압할 수는 없었지만, 무지는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웅들이 밟았던 땅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의 삶은 영혼 대신 돈을 긁어모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원주민들의 존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뒤에 일들은 입에 담기도 민망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다루는데, 동물은 또 어찌했겠는가. 학살하고 또 학살하고, 죽이기 위해 죽인 고래와 바다코끼리와 해표와 수많은 물고기들. 이제는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험에 놓여있다. 어느 여름 대륙을 강타했던 폭풍과 해일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절규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160;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그런 책이 있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 어느 페이지를 들춰보아도 고마운 책. 위로가 되는 책. 울렁거리게 하는 책. 쥘 미슐레의 &lt;바다&gt;가 그렇다. 바다가 요동치는 것 처럼 마음이 요동치고, 바다가 고요한 것 처럼 마음도 고요해진다. 
이제 &lt;바다&gt;에 수장된 심정은 언어로써 언어의 바깥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책을 덮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먹먹할 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재한다면 이럴까, 마음으로 마음을 넘어설 수 없는 막막함. 마음을 전달하려고 발화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잠시 하얗게&#160;부푸는 물거품에 불과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초라함. 추태를&#160;부릴 수 없음에 두근거리기만 하는 민망함.&#160;몰려드는 무력감에 좌초된 독자는 허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곳, 욕망이 끓어오를 틈을 주지 않는 곳, 그렇다고 금욕도 절욕도 아닌 곳, 해석이 아닌 사실이 존재하는 곳, 영원히 검푸른 바다를 두고 고래처럼 솟구쳐 오른다. 오 자연이여, 왜 나를 바보로 만드셨나이까.]]></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792/47/cover150/895559294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592949</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알고 있어 -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251377</link><pubDate>Mon, 08 Nov 2010 16: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25137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4234&TPaperId=425137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777/20/coveroff/898431423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4234&TPaperId=425137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a><br/>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09월<br/></td></tr></table><br/>책에&#160;실린 &lt;문학 예방&gt;이라는 에세이의 한 대목은 이렇다.<br />
"아주 낮은 수준이 아닌 이상,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다......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진실을 비틀고 풍자할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할 수는 없다."&#160;
작가의 글이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정하면, 오웰은&#160;녹록하지 않은 경험으로 얻은&#160;마음의 풍경을 어떤 목적으로도 곡해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작가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오웰도 &lt;작가와 리바이어던&gt;이라는 에세이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160;문단의 지식인들이 글을 쓰며&#160;의식하는 이들은&#160;대중이 아니다.&#160;오히려 작가들이 속해있는 그룹, 시쳇말로 업계 종사들일 것이다.&#160;그러니 그들을 향한 두려움을 접고,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책 &lt;나는 왜 쓰는가&gt;에 대한 해답의 반은&#160;얻은 셈이다.&#160;&#160;
그러나, 작가의 글이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한계에 봉착한 독자로서 고백하자면, 그의 글이 사실이 아닌 어떤 풍경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에세이 &lt;작가와 리바이어던&gt;에서 그의 말을 빌려오자면,&#160;<br />
"그렇다면 작가는 정파 우두머리들의 지시를 거부할 뿐 아니라 정치에 '대해'쓰는 것도 삼가야 한다는 뜻인가? 이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 원한다면 아무리 서투르더라도 정치적인 글을 써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 다만 한 개인으로서,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정규군의 측면에 있는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160;
정치적인 글을 쓰되 다만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의 위치를 주문하는 작가의&#160;말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불편하다.&#160;그것은 그가 강조한 두려움 없는 글쓰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하지 않는 글쓰기에 오히려 흠집을&#160;남기는 일이&#160;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가 딛고 있는 땅을 살피는 일이 힘겹고 심지어 불가능에&#160;가깝다 할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응시할 수 있을 때,&#160;응시를 통해&#160;깨달은 곤란한 진실들과&#160;마주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160;발화할 수 있을 때, 적어도 작가가 말한 정치적인 글쓰기에 힘 혹은 진정성이 실린다고 믿는다. 그리고,&#160;그런 글이야말로 사후적 해석에만 머무르지 않는 글이 되리라 믿는다.&#160;&#160;
언제나 그러하듯, 모든 어긋남은 어떤 의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그러하기에&#160;작가의 글과 내 마음이 어긋나는 자리에서 나는 작가의&#160;의도를 짐작해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160;불구하고, 애써&#160;어긋나려고 한다. 그것은 작가의 시절과 또 다른 시절, 21세기의 무람없는 냉소주의자들의 행태가 눈에 밟혔던 까닭일 것이다.&#160;그러나, 작가에 대한 별쭝맞은 트집을 잡는 것도 잠시다. 참으로 잠시다.&#160;
"전체주의는 신앙의 시대보다는 정신분열의 시대를 약속한다." 는 문장은 오웰의 통찰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내 마음대로 선정한 조지 오웰의&#160;경이로운 성찰이자, 전체주의에 대한 이 시대 최고의 폭로다.&#160;이 문장은 오웰의 &lt;1984&gt;로 이어져 전체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구성원 자신들을 기만하는지 보여주는&#160;모태가 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lt;나는 왜 쓰는가&gt;에 대한 작가의 남은 답변이 있다면 감히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160;
누군가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어느 여인을 두고 매혹적이라 했다. 일견 맞는 말이다. 선택과 유기를 두고 망설이는 일은 성가신 일임에 틀림없지만,&#160;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160;맞는 상황이라면,&#160;망설임은 필요한 시간이고,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나름대로 현명하고 예의바른 태도의 여인을 가르켜 매혹적이라고 발화한 것이라면 나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160;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유기할 것을 들고 애매함을 보이는 것은 매혹적일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간교한 행동일 뿐이다. 더 나아가 선택할 것을 들고 애매함을 보이는 것 역시 매혹적일 수 없다. 그저 어리석을 뿐이다. 따라서, 조지 오웰의 &lt;나는 왜 쓰는가&gt;를 두고 보인 잠시나마&#160;어정쩡했던 태도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어리석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그의 글을 곁에 두고 싶기 때문이다.
&#160;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777/20/cover150/8984314234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4234</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볼테르의 재발견 -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반양장)]</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204227</link><pubDate>Tue, 19 Oct 2010 17: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20422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1907&TPaperId=420422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764/60/coveroff/89546119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1907&TPaperId=420422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반양장)</a><br/>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08월<br/></td></tr></table><br/>어느 가수의 노래였는지, 시인의 글이었는지, 혹은 드라마 대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160;<br />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그저 무슨 위로가 마땅하지 않을 때, 가벼이 등 토닥이며 쓰기에 썩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br />
그러나, 아무런 고민없이 내뱉었던 무책임한 그말이 참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았을 때는 내 자신 [아플 만큼 아프고도 여전히 그만그만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다.&#160;&#160;<br />
무엇이든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들은 일단 의심하고 볼일이다. 
여튼,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의 작품 &lt;캉디드 혹은 낙관주의&gt;를 읽으며, 저 문구가 떠올랐던 이유는 주인공 캉디드의 스승인 낙관주의자 팡글로스의 놀라운 언술때문이었다.&#160;<br />
"특별한 불행들이 일반적인 선을 만듭니다. 그러니 특별한 불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것은 더욱더 선이 되는 것입니다." <br />
어머나! 요즘 유행하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생 역정 누가누가 제일인가] 경합이라도 벌이는&#160;것 같은 주인공들의 상황앞에서도 끊임없이 [최선의 세계]를 운운하는 철학자라니, 또 그것을 무슨 진리로 받들어 [스승이 말씀하시길, 세상은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읖조리는 주인공을 어찌할 수 있을까. 또 한 번 어머나!&#160;
그러나 이 철학 꽁트는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그렇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만 하는 것은&#160;위험하다는 것, 대략 그렇게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을&#160;떠드는 사람은 한 번 의심해야 한다는 것, 또한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생각으로 밀고나간 [믿음]은 헛것이자 공포라는&#160;것.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br />
"어떤 게 더 최악의 상황인지 모르겠군요. 검둥이 해적들한테 백번 겁탈당하는 것, 한쪽 엉덩이를 잘리는 것, 불가리아인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것, 종교 화형식에서 죽도록 매 맞은 다음 교수형당하는 것, 교수형당한 후에 다시 해부당하는 것, 그리고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것" 이라는 상황속에 모든 주인공들을 한 번씩 담근 후 묻는다.&#160;<br />
"낙관주의가 뭔데요?"&#160;<br />
주인공의 입을 빌려 볼테르는 말한다.<br />
"아아! 그건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160;<br />
즉,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들이&#160;실재한다고 생각하고&#160;또한 믿는 것은&#160;광기다. &#160;
이 철학 꽁트를 더 재미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치의 낙관주의를, 루소를, 더 나아가 종교전쟁을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기괴한 역사를&#160;알면 더욱 흥미진진하겠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몰라도 찾을 수 있는 재미는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발견한 최선의 세상 3곳]이라던가, [몰락한 여섯 왕들과의 식사] 라던가, [알고도 당하는 사기는 무엇무엇이더라]던가, [사랑이라는 기막힌 환상은 누구를 위해 뻥을 치나]등. 그 재미는 여러 곳에 포진하고 있다.&#160;모든&#160;세계문학전집이 라면냄비 받침으로 존재하려고 인쇄되는 것은 아니다. 고전이 왜 고전인지 무릎을 치게 하는 작품도 간혹 있다. 이 책이 그렇다.
21세기, 낙관도 비관도 모두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시절을 사는, 한 발 더 나아가 [비아냥이 최선의 세계]를 만드는 초석이라도 되는&#160;듯 행동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160;내가, 암울한&#160;시절을 살아낸&#160;사상가의 작품을&#160;앞에 두고, 책을 읽는 내내 낄낄거렸다. 그저 낄낄거렸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느끼는 허무함에 대한 또다른 조롱일 것이다. 역시나 내 한심함은 강에 유람선 띄우려는 이들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다. <br />
그러나, [인간과 시스템을 조롱]하는 역사적 사명을 띄고 나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허무와 냉소로 좋은 시절을 다 보낼 일이 아니다. 진득하니 끈기있게 때로는 오기스럽게 무엇이든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고 때로는 모른 척 하기도 하지만, 찾는 것은 [공부]일 것이고, [공부]의 목적은 [행동]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라는&#160;어딘지 세련되지 못한 주인공의 발언이 오늘 나를&#160;깨운다.&#160;또다른 계몽이자 볼테르의 재발견이다.<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764/60/cover150/895461190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1907</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호의가 신뢰를 호출하지는 못한다 - [동무론 - 인문연대의 미래형식]</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4100695</link><pubDate>Thu, 09 Sep 2010 14: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41006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2789&TPaperId=410069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34/34/coveroff/898431278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2789&TPaperId=41006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동무론 - 인문연대의 미래형식</a><br/>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07월<br/></td></tr></table><br/>사회적 생존을 위한 관계 맺기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복식부기해 보면 손실이 더 크다.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생산적인 관계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어리석음이 고질병인, 더 나아가 그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아둔함마저 겸비한 나는&#160;여전히&#160;"세속의 어둠을 배경으로 외로이 빛나다가 때로는 다른 별들과 합쳐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진중권) 가 되는 그런 관계를 꿈꾼다. 
물론, 2008년 '별자리 연대'를 꿈꾸며 시작한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열정을 이해관계적으로 분배하고 조율하라'(A. 허쉬만)는 빌어먹을 조언을 무시한 결과였고,&#160;'호의와 호감'이 '신뢰'를 호출할 것이라고&#160;혼자 그냥 그렇게 믿었던 탓이다. 결국 모두 내 탓인 셈이다.&#160;그럼에도&#160;생존을 위해&#160;여전히 관계를 벗어날&#160;수는 없었기에, 결국&#160;명민함이라&#160;착각한 평범한 자기방어와 냉소만&#160;키워왔다.&#160;그런 내 미련함에 찬물을 끼얹어&#160;다시 정신을 차리게&#160;한&#160;이가 있으니 바로&#160;김영민이다.&#160;그러니 그의 글은&#160;두고두고 쓰고&#160;두고두니 달다.&#160;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김영민의 &lt;동무론&gt;은 정신적으로 여전히 유아인 그래서&#160;늘 관계 맺기에서 칭얼거리는 이들에게 벼락과도 같은 책이다.&#160;친구, 연인이라는 이름의 타자와의 관계에서 [사적 호의]와 [사회적&#160;신뢰]를 혼동하는 [세속]의 한 특징을 일갈하는&#160;그는, 호의와 신뢰를 준별하는 태도를 기르라고 조언한다.&#160;&#160;
"대부분의 호의가 어떤 식이든 넓은 의미의 이기심과 연루해 있다는 사실은 거의 분명하고 또 피할 수도 없어 보인다." (p.30), "세속이 슬픈 이유는 악(惡) 때문이 아니다....슬픔은 적들의 횡포 탓이라기보다 오히려 친구들의 선의와 그 무모함이, 연인들의 호의와 그 어리석음에, 가족들의 애착과 그 타성에 얹혀 생긴다." (p.265)&#160;라는 그의&#160;말은&#160;그늘 한 점 없는 광장으로&#160;우리를 끌고 나온다.&#160;공사가 사통하고, 모든 관계의 그믈망이&#160;어느 20대 청년들의 88만원짜리 일자리마저 싸그리&#160;포획하는&#160;시절을 우리는 견디고 있다. 분노와 열패감이&#160;태풍처럼 무자비하게 우리들을 강타한다. 그러나&#160;정작 우리 자신의&#160;소소한(?) 연정은&#160;포기할 수 없는&#160;이 일상은 또&#160;얼마나 슬픈 지옥인지.&#160;&#160;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연대란, 좋은 [동무]란 무엇인가?&#160;&#160;"좋은 '동무'란, 사사화된 정리의 늪 속으로, 그 한 패거리의 움직임 속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저락하는 '친구'를 불러세우는 일견 메마르고 '서늘한' 행위속에서 (부사적으로) 자생"(p.211) 하는 것이며,&#160;&#160;&#160;
"그것은 같은 관습에 몸을 의탁하는 짓으로써 상식과 도덕의 알리바이를 내세우지 않는&#160;관계, 이념과 진보를 빌미로 같은 언어와 사정(私情) 아래 집결하지 않는 관계"(p.217)&#160;라고 그는 동무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한 치도 틀린 것이 없는 그의 지론은 기어이 멀다. 그것은 기어이 닿을 수 없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며 강기슭에 주저 앉은(?) 김훈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나 역시 기어이 닿을 수 없는 관계를 동무,라고 부른다며 세속의 오늘을 붙들고 주저 앉고 싶은 심정이기에 말이다. 
&lt;동무론&gt;은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으로서의 동무,를 군더더기 없이, 그러나 온몸으로 압통을 느끼게 사방에서 조여온다.&#160;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160;한 마디 거들자면,&#160;그가 말하는 동무나 연대는 그저 약소자끼리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160;아니다. 오히려 "약소자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연대하려는 것은 유력자의 사회구성체 형식과 그 메커니즘을 답습하려는 권력의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p.373)고 지적하고 있다.&#160;
비트게인슈타인의 말처럼, 앎이 아니라 의심이 사유인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좋은 관계라 믿었던 모든 관계들을 의심하고 부정하는&#160;일로부터 이 슬픈 세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것은 "호의가 에고이즘과 사통하고 선의가 나르시시즘의 미끼로 전락하는 그 속절없는 무능 속에" 포획당하지 않고 사회적 신뢰를 다시 취할 수 있는 기회이자 시작이기 때문이다.&#160;&#160;
마지막으로 책의 첫 장부터 나를 붙들어 세웠던 그의 글로 이 책에 보내는 감사를 마무리한다.&#160;
"인사가 채&#160;끝나기도 전에 상처는 예감되지만, 그 상처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깨달은 것을 밝은 길 위에서 놓치듯, 말이다. 구조와 패턴의 인과성은 환하게 보이더라도, 개인의 이치를 설명하는 인과율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 개인은 영원히 어리석다.&#160;실은, 너를 만나는 일이 재난인 줄 알고 만난다. 그리고 그 재난이 어떤 종류의 반복인 사실도 환하게 안다. 정작 내가 모르는 것은, 그 재난을 회피할 정도로 내가 내게 행복을 허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p.13)&#160;
&#160;
&#160;&#160;&#160;&#160;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234/34/cover150/898431278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312789</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가만히 있으면 진다 -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862580</link><pubDate>Tue, 29 Jun 2010 16: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8625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101&TPaperId=386258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99/73/coveroff/8958623101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101&TPaperId=38625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a><br/>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05월<br/></td></tr></table><br/>소탐(小貪)해서 대실(大失)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160;나는 어리석게 굴었다. 달성하지 못한 최종 목표에&#160;대한 미련보다 취할 수 없었던 작은 욕망이 더 절절했다. 이렇게 앎과 삶은 불일치한다. 적어도 내 일상은 그렇다.&#160;어쩌면 민주화를 앞당긴 이들의 실수가 이 대목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을 우습게 생각했던 것 말이다.&#160;최종 목표를 달성했다고 착각했기에, 개인들의&#160;작은 욕망은 무시해 버렸던 것. 그러나 나도 우리도 어리석기에 개인적인 작은 욕망들이 얼마나 절절한가. 결과적으로 그 절절함이 우리를 철저히 망가뜨렸다. 욕망하는 대상에게 힘을&#160;실어 주는 행위를&#160;하게 한 것이다.&#160;&#160;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다시 한&#160;번 그 어리석음을 돌아보는 마음이 있고, 고쳐보고자 하는&#160;의지가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려고 하는 이 책의 저자들과 내가 오늘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160;&#160;
"낡은 것은 사라졌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위기]라고 그람시는&#160;말했다. 위기에 관한 명쾌한 정의다.&#160;2010년의 한국은 정치, 경제,&#160;교육 등&#160;사회 전반에&#160;걸쳐 위기의식이 팽배해있다. 이 책에 언급된 12명의 살아있는 지식인들처럼 조목조목 그 위기를 진단할 수는 없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즉자적으로 느낀다. 그런데 좀 다른 의미의 위기가 아닌가 싶다. "낡은 것이 좀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오히려 더 낡은 것으로 회기하려는 상태!"&#160;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 현상을 깊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다.&#160;2010년의 한국은 왜 더 낡은 것으로 회기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말이다.&#160;&#160;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열거하기에 너무 많다. 그것을 대표하는 무엇을 꼽으라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대결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대목 박명림교수의 지적은 날카롭고 옳다. 그는 공공성이 실종되고 국가가 사사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공공성이 실종된다는 것은 권력이 일부에게 독점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신분이 부활함을 의미한다.&#160;&#160;
현재 한국사회의 신분은 돈에 의해, 학벌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 사라졌던 문중이 현대식으로 부활하는 셈이다. 아버지가 기거하는 아파트의 이름으로 혹은 학벌의 이름으로. 이제 수도 서울의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라는가, 어떤 사교육을 받고 어느 대학을 나오는가에 따라 밥벌이가 달라지고, 그들 다음 세대의 운명도 달라진다.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160;이렇듯 먹고사는 문제가 공공의 영역에서 해결되지 못하는데 어찌 하겠는가. 새로운 신분제로,&#160;좀 더 상위 신분으로 편입하는 수 밖에. 이렇게 되면 모든 판단이 멈춘다.&#160;단지&#160;자본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본이라면, 경험상으로 토건이라도 해야 한다는 혹은 경제 대통령이 필요하다는&#160;신앙에 가까운 맹종만이 남는다. 그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갈 지는 모른다. 그저 욕망만 남는다.&#160;개인간의 이익&#160;충돌을 막을 수 있는 장치로 공공의 영역, 즉 국가라는 형태가 필요했던 것인데, 공공의 영역이 과두화된&#160;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욕망하고, 속고, 주변으로 내몰리는, 악순환만이 우리 앞을 완강히 버틸 뿐이다. 이런 사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망한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에 소개된 지식인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민주주의의 빠른 후퇴를 말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다른 그림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목소리다. 그 하나의 목소리를 도정일교수의 물음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 더 나은 세계란 누구를 위한 더 나은 세계인가?" "나는 누구의 이익을 위해 지금 이 결정을 내리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은 사적인 그리고 공적인 영역에서, 무엇인가의 시비를 가리고, 선택하고, 옹호해야 할 때&#160;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주입되는 모든 가치를 의심할 때, 그것에 맞서야 할 때, 이 물음을 기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160;&#160;
그리고 마지막으로&#160;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160;퇴행하는&#160;사회를 어떻게&#160;막아야 하는지 대답해야 한다.&#160;그것은 더 낡은 것으로 회기하려는 의도를 가진 자들과 맞서는 일, 그들의 실체를 까발리는 일, 정보화 시대의 리듬으로 현실을 대처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옳은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일 것이다. 먹고사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필요하다.&#160;최소한의 것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160;한홍구교수의 말처럼 "가만히 있으면 진다." &#160;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99/73/cover150/8958623101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101</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암울한 시절, 힘을 사유하는 모든 청춘들에게 -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766196</link><pubDate>Thu, 27 May 2010 13: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7661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0524X&TPaperId=376619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76/99/coveroff/899390524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0524X&TPaperId=37661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a><br/>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04월<br/></td></tr></table><br/>이론은 근육이다,라는 저자의 정의는 명쾌하다. 알기 쉽고 주저없이 동의할 수 있다. 안팎에서 대량생산하는 [판타지]를 자유롭게 [사유]하고,&#160;특정한 [입장]을 선택하기 위해&#160;이론은 필수조건이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하게&#160;하는 모든 이론에 [절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이론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듯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이론이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하게&#160;한 것도 아니었다. 질 나쁜 이론도 도처에 널려있다. 그렇기에, 개인이 납득하고 수용한&#160;이론을 바탕으로 어떤 [선택]을 하고,&#160;특정한 [행동]을 취하는 동안 발생하는 [흠결] 역시 필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흠결마저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이론이다. 따라서, 이론의 쓸모는 인간의 신체에 있어 근육의 쓸모 만큼이나 절대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다.&#160;아!&#160;현정권에 기생하는 어느 경제연구가의 실용도 실용이겠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다.&#160;&#160;
여하간, 내 자신 이론의 쓸모까지 운위할 깜냥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의 제목처럼 이론 가이드라도 어떻게 한 번 읽어보면 이 암울한 시절을 살아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속내였다. 그러니 반가울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물론, 나는 저자가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인문좌파]라는 정의가 어느 구석 어색했지만, 인문좌파가 누구인지를 설명한 그의 진정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160;정치적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 듣기만 해도&#160;솔깃해지는&#160;정의가 아닌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보기 힘들다고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니, 앞으로 키워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160;&#160;
저자가 책을 통해 소개한 이론가들은,&#160;춘삼월 꽃노래처럼 나를 설레게 하지만, 어설프게 끝나버린 첫사랑 만큼, 아쉽게 내 손을&#160;떠난 이들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나의 무지와 게으름이었다.&#160;두 번째 이유는 그들을 소개한 이론서들이&#160;한국의 현실을&#160;잘 버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낯 두껍지만 이론서들의 겉도는 느낌이 내 무지의 결과만은 아니었다고, 나는 항변하고 싶다. 좀 더 알기 쉬었으면, 좀 더 현실정치와 가까웠으면&#160;이렇게&#160;데면데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있는 이론들은 뭐랄까, 답답했고 오기스러워&#160;보였다. 이 또한 나의 무지이지만 말이다.&#160;늦었지만 그래도 올 봄에&#160;만난 이 책은 다행이랄까, 그래 다행이었다. 매번 도망다녔던 [벤야민]과 [데리다]를 다시 찾게 했고, 대학시절 덮어버렸던 [루카치]에게서 내가 놓친&#160;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책에서&#160;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그람시]를 다시 찾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했다. 내게는 너무 명민해 보여 얄미웠던&#160;[지젝]이나 뜬구름이었던 [라캉]도&#160;어디쯤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실로 내게는 다행이고, 저자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표할 일이다.&#160;&#160;
물론, 개인적으로 얻은 답이 있어,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이 다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160;이 책은 가이드 북이다.&#160;나머지는&#160;저자가 안내한 곳에서 궁금증을 느낀, 혹은 괘씸함을 느낀, 혹은&#160;심한 현기증을 느낀 독자의 몫이다. 여행지에서 아무리 살뜰하고&#160;총명한 가이드를 만났다고,&#160;현지의 아름다움을 짧은 순간에 모두 체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사족이지만, 그런 가이드를 만나는 일 역시 현실세계에서는&#160;사실 드물다. 
현실로 돌아와, 시절이 하 수상하다. 결여로서 존재한다,는 라캉의 생각에 비명에 가까운 공감을 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없다'라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여로서 존재하는 그 무엇이, 데리다가 언급한 유령,이 어떻게 현실에서 작동하는지, 나는&#160;소름끼치게 그 장면들을 보고 있다. 지젝이 언급한 실제적 실재, 상징적 실재, 상상적 실재까지도 목도하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코미디 앞에서 누군가를 향해 욕을 퍼붓기 이전에 내 머리를 바람벽에 찧고 싶은 심정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데,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라는&#160;사실 앞에서&#160;모르쇠로 일관하고, 그저 혼자만 깨끗한 척 하느라, 정치는, 권력은, 속물적인 것이라고,&#160;눈 감고 귀 막아버린&#160;덜떨어진 청춘을 어찌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 내가 힘없게 부르짖었던 [정의]도 힘을 가져야만 지켜낼 수 있는&#160;것임을 이 험난한 시절에서야 알았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 미안함과 이 참담함을 조금이라도 씻기 위해, 나는 6월 2일 조용히 힘을 행사할 예정이다. 너무 작아 힘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하지만 말이다.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76/99/cover150/899390524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0524X</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가망 없는 시절의 목발,리영희 -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523321</link><pubDate>Mon, 15 Mar 2010 17: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5233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4528&TPaperId=352332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40/28/coveroff/895828452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4528&TPaperId=35233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a><br/>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 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출판사 / 2010년 02월<br/></td></tr></table><br/>리영희,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160;상념들을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160;막막하다. 어차피 이 책에 글을 올린 필자들처럼&#160;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160;현실 사회를 진단할&#160;능력이 없음을 제 깜냥에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160;고개 숙여 큰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보다 어쩌면 더 가망 없어진 시절을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슨&#160;나침반 하나라도 거져 얻고&#160;싶었다.&#160;끈 떨어진 마음이 갈 곳&#160;몰라 떠돌고 있다고&#160;자백하는 꼴이니,&#160;알고는 있었지만, 사람&#160;덜 된 꼴을 이렇게도 확인하는 요즘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모호한(?) 성격의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그곳에 있던 쌘(지금&#160;보면&#160;무섭지도, 선동적이지도 않지만 그땐 그렇게 보였다)&#160;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배는 나를 잘 못 골랐다.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은 후, 되려 쌘 책들과 멀어졌고, 선배들의&#160;주입식 교육을&#160;의심했고, 자연스럽게 주변인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병권은 이 책에 적고 있다.&#160;&#160;
정녕 그러했다!&#160;절대의 이름으로&#160;맹목적으로 외우고, 익히던 시절에 마침표를 찍게 한 사람, 내가&#160;안다고 믿었던&#160;신, 인간, 사회구조, 주의, 냉전, 자본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그가 리영희,였다.&#160;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IMF라는 재갈이 물려, 무한 경쟁이라는 시절을 벼락처럼 맞아야 했고, 그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수일지라도 구조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곁을 멤돌면서, 국가도 조직이라고 본다면, 조직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떻게 개인들을 위축시키는지,&#160;조직원으로서 더 잘 조련되는지를&#160;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160;이 특별한 조련에 동원된 언론, 지식인 사회,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160;꾸준히&#160;봐야만&#160;했다. 리영희 선생님이&#160;전 삶을 걸고 완강하게 싸운 [우상]을 떼거지로 목도한 시절이었다.&#160;또한, 사회가 지능적으로 잔인하다는 것도, 그에 대한&#160;각 개인의 대비가 이렇게 허술했구나,라는 사실도 이처럼&#160;일목요연하게&#160;경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160;자리를 잡고 가망 없는 시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시절&#160;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160;말이다.&#160;&#160;&#160;&#160;
얼마 전, 보험설계사 한 분을 만났다. 요즘처럼 영업이 힘든 건,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라고 했다. 해약은 많고, 가입은 적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통령 시절이고,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고, 토건 사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 경제가 그리 얼어붙었을까요,라고 나는 물었다.&#160;내 음험한 물음에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니까요,가 그분의 대답이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다뇨,라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싶었지만, 그분이 무슨 죄라고&#160;내 비아냥을 참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만두었다.&#160;&#160;
여튼&#160;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중산층뿐일까? 아니 중산층이라&#160;정의되는 계급이 무너진다는 것이 경제적 의미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구조적 소수자로 내몰리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160;사유가 깊어질수록,&#160;나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스승에게, 예의없는 태도로, 스승이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가망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최장집의 말을 빌려, 권위주의 시대처럼 명백한 부정의 때문에 정의가 쉽게 파악되는 시절도 아니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위한&#160;질서도 그 외피를 바꿨을지언정 변하지 않은, 그러기에&#160;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속고 속이는&#160;시절이라고.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평화의 옷을 입고, 글로벌이라는 이름이 무한 경쟁을 재촉하고,&#160;루저가&#160;되지&#160;않으려면 사교육에 올인해야 하고, 조직의 무탈을 위해서 부속품으로&#160;전락하는 개인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160;투자와 저축보다 투기만이 이 땅에서&#160;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160;상식이 되어버린 시절이라고. 이보다 가망 없는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고.
생각없는 노예로 죽어가는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깨어있는 삶을 그리고 잠든&#160;사람들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을 통해 각성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160;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체제, 자본, 시장이라는 [우상]앞에서&#160;정녕 어찌해야 하는지,&#160;쪽팔림이라도 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두려움과 기갈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160;그러면서 또 한편, 따져 묻지도 말라는[우상]의 엄포앞에서 작은 용기, 내 삶이 피해입지 않을 정도의 용기로 맞섰으니까, 내가 할 몫은 다한거 아니냐고,&#160;그런데&#160;현실은 갈수록 왜 이모양이냐고,&#160;계속 불평만을 늘어놓는&#160;나에게, 삶과 앎이 불일치한 너는 리영희,를 왜 읽었느냐고,&#160;리영희,가 그저 지적 유희로 소비되었던 것이었냐고,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네가 읽은 책 속의 어떤 글 한 줄도 너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면 그 책들은&#160;무엇하려 읽은 것이냐고, 이제는 선생이 다시&#160;꾸짖고 있는 것만&#160;같았다.&#160;&#160;
선생의 글이, 선생의&#160;삶이 여전히 내 주위를 떠돌며 나를 부끄럽게&#160;하고, 깨우치게 하는&#160;한, 적어도 가망 없는 시절을 핑계삼아 어딘가에 숨는&#160;일도 이제는 어려울 듯 싶다. 화끈거리는 마음은 쥐구멍 앞을 서성이지만 그도 할 일은 아닌 것 같다.&#160;선생님, 사랑을 목발 짚어 살아온 어느 시인처럼, 선생님을 목발 짚어 살아보려는 후학, 아니 후학이라고 혼자 우기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반가우실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160;선생님, 다독이고 독려해야 할 청춘이, 제가 아니더라도&#160;아직 많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강건하십시오. 
&#160;
&#160;&#160;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40/28/cover150/8958284528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4528</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오라버니들의 즐겨찾기 -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489230</link><pubDate>Mon, 08 Mar 2010 14: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48923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6091&TPaperId=348923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41/75/coveroff/897297609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6091&TPaperId=348923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a><br/>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02월<br/></td></tr></table><br/>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 무엇이더냐고 묻는다면, 그는 [거대한 바위에 들어있는 형상을 꺼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시가 무엇이오, 그리고 철학이 무엇이란 말이오,라고 이 책의 저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삶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160;&#160;
일상에서 우발적인 사건을 접하게 되는, 의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준비되지도 않은 어느&#160;시점, 그렇게 벼락 맞듯이 삶을&#160;뒤흔드는&#160;사건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160;경험에 의하면 대부분 그런 순간들은 비젼으로서 제시된&#160;이념과 구호들이 사실이라는 견고한 힘앞에서&#160;무너져내리는 순간들이다. 이 책에 소개된 유하의 [오징어]라는 시를 보자. "눈앞의 저 빛!/찬란한 저 빛/그러나/저건 죽음이다./의심하라/모오든 광명을!"&#160; 어떤 이유를 들이대서라도 [모오든 광명을]향해 기를 쓰고 달려들던,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자극하고 유효성을 제시하는지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몸과 마음을 다해 광명을 탐하던 내게 혹은 우리들에게, [욕망의 저 빛!],은 [죽음]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광명]을 [죽음]이라는 기표로 치환함으로써 시인은 [광명]을 낯설게 만든다. 낯설어짐은 삶을 긴장하게 만들고, 이 긴장은 우리를 두리번거리게 혹은 멈추게 한다. 그리고 낯선 풍경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160;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시는 가치론적인 측면으로만 평가될&#160;수 없다. 시에는 존재론적인 측면도 엄연히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시가 언제나 삶을 낯설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미학적 측면만이 강조될 수도 있고, 시의 목적성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160;여기서 이런 다양성이 배제된다면 그건 또&#160;다른 폭력이기에 시를 읽고 시적 감흥을 혹은 낯설어짐을 경험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취향에 맡기는 것이 온당하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떠한가? 철학은 이 점에서 시와 구분될 수 있을 것&#160;같다. 철학은 타자에게 건너가기 위해&#160;또는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이 새로운 삶, 새로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기존의 정서와 사유를 거스르는 측면이 시보다&#160;강하고,&#160;지속가능한 실천을 끌어내야 한다는&#160;점에서&#160;태생적 무게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160;물론 철학도 기존 정서와 사유를 거스르지 않는 영역이 있지만 그 부분은 논외로 하자.&#160;
이 책에 소개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일부분을 보면 "아르헨티나와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160;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아이히만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은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할 수 없음은 그의 생각할 수 없음, 즉,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160;점점 더 분명해 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타자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160;라고 기술되어 있다. 아이히만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성실히 살해한 전범이다. 아이히만이&#160;검거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지켜본 아렌트는 여타의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분노와는 달리, 아이히만의 엽기적 행각을 개인의 악마적 본성으로&#160;규정하지&#160;않고, 타자와의 소통할 수 없음 그리고 그 근본에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이 있음을&#160;드러냈다. 다시 말해, 사유하지 않는, [무사유]가 [악]임을, 또한 그것은 아이히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향할 수 있는&#160;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160;마주하기 싫은 사실을 마주하게 하고, 그 낯설음을 강제하고, 이를 통해 사유하고&#160;변화하기를 촉구하는 일련의 과정인 것이다.&#160;&#160;
저자의 말처럼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다. 시가 어떤 특정한 순간에 우리를 깨우는 죽비라면, 철학은&#160;이 순간이&#160;갖는&#160;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시인들, 넘어설 수 없는 철학자들, 스스로 오라비라 이름 붙였던 그들앞에서&#160;숱한 좌절을 한 내게 그럼에도 시를 읽어야 하고 사유해야 함을, 그래서 누구나 악일&#160;수 있는 동시에 소수로 내몰릴 수&#160;있는 현실에서 유연하면서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잃지 않기를&#160;독려하는 이 책은 오랜만에 조우한 오라비처럼 반갑고 뜨거웠다. 역시나 오라비들의 즐겨찾기는 나를 실망시키지도 나를 우롱하지도 않는다. 다만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160;매우 애.닯.다.
&#160;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41/75/cover150/897297609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6091</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작은, 그러나 메울 수 없는 균열 -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439474</link><pubDate>Tue, 23 Feb 2010 17: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43947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012&TPaperId=3439474"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26/41/coveroff/895862301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012&TPaperId=343947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a><br/>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01월<br/></td></tr></table><br/>이진경의 새책 [역사의 공간]을 접하기 얼마 전, 나는 지인과 함께 한국인의 [빨리빨리]라고 불려지는 습속에 대해&#160;논쟁을 한&#160;적이 있었다. 내 주장과 지인의 주장은 달랐는데, 나는 우리사회가 [빨리빨리]라는 사회적 리듬에 젖게 된 시점을 일제 강점기로 보았고, 지인은 군인에 의해 산업화가 본격화된 시점을 그 계기로 판단했다. 그때 나는 [빨리빨리]라는 것이 시간의 개념이라는 것을 주장의 근거로 가져왔었다. 분침과 초침으로 명확히 계산되고 누적될&#160;수 있는 시간! 새로운 시간! 즉, 원형적 시간이 아닌 선형적 시간이 언제 역사의 공간에 등장했는지, 선형적 시간의 개념이 무엇을 목적으로 유포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160;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160;결과적으로 초기 자본을 끌어들인 침략국 일본은&#160;노동을 착취해 생산잉여를&#160;극대화하려고&#160;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민중에게 강요했을 것이고, 근대화되지 못한 신체를&#160;근대적 리듬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근면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그럴싸한 명분을&#160;제시했고, [빨리빨리]라는 사회적 리듬을 강제했을 것이다,가&#160;내 주장이었다.&#160;이진경의 [역사의 공간]은 이 개인적인 논쟁에 온전한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내 주장을 뒷받침해 줄 광범위한 사유를 던져주었다. 이 아니 어여쁠쏘냐!&#160;
[역사의 공간]은 필자가 밝힌 것처럼 역사, 시간,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등의 공동성을 역사의 공간안에서 사유한 책이다. 필자의 사유가 워낙 광폭이고 또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 책에 실린 모든&#160;내용을 소화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능이었다.&#160;그럼에도 불구하고,&#160;전통적인&#160;시공간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욕망을 새로운 시간 혹은 역사가 요구하는 욕망의 구도로 어떻게 편입시켰는지를 보여주는 부분과, 어떤 이념이&#160;지배하는 사회건&#160;그 사회안에서 소수로, 타자로 존재했던 사람들을 향한 억압과 착취 그리고 혁명을 사유하는 부분은 선험적 지식의 양과 무관하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공포의 정치로 기억되는 시절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70년대에 태어났지만 70년대와 80년대를 버텨냈다고 할 수 없기에 나는 공포정치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다.&#160;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권력이 어떤 유효성을 제시해 대중을 포섭하고 길들였는지를&#160;체험하지 못했다는&#160;점에서 불행이라면 불행이다.&#160;내가&#160;정치적 판단이 가능해진 시점의 한국은 민주화의 초입이었고,&#160;내가 경제적 판단이 가능해진 시점은 IMF의 초입이었다. 하여 그당시 실존으로서의 먹고 사는&#160;일이 어찌나 큰 화두가 되어 버렸는지,&#160;사회혁명의 짜투리를 넘겨다 보는 일조차 실로&#160;사치였다면 개인적인 과장일까, 여튼 그랬었다. 그렇다고&#160;중심부에&#160;편입되었던 것도 아니니 나는 주변부의 상황 역시 모른 척 할 수 없었다.&#160;그렇게&#160;불편한 심기를 자극했던&#160;사건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때마다 작게 분노하고, 작게 동정하는 일이 내가 취한 최대한의 도덕이었다.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위안이었지만, 쉽게 얻은&#160;만족이기에&#160;한편 하찮을 수 밖에 없었다.&#160;
집단적 이익만이 존재하는,&#160;심지어 생명의 권리마저 자본의 권리를 위해 폐기되는 사회를 산다는 일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사회적 리듬에 엇박을 놓을 수 있는, 적어도&#160;제단된 욕망을 의심하기라도 하는 사람들을 찾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160;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그러나 쉽게 메워지지 않는 균열을 내고 싶었다. 그렇게&#160;시작한 일이 버려지는 것들을 되살리는 일, 그 일을 통해&#160;얻어진 댓가를 주변부의 사람들과 나누는 일이었다.&#160;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실패했다.&#160;필자가 말하는 [흐름의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공간에 존재하는 [대중]을&#160;파악하지 못했고,&#160;[소수자] 혹은 [타자]들의 연대를 구축하지 못했다. 실패의 기억은 쓰라리지만 그렇다고&#160;얻은 것이 없지는 않다.&#160;&#160;
책으로 돌아가자. 필자는 내게 이렇게 묻는다. "자신들의 고통, 자신들의 저항마저도 자신만의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모든 타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것, 이를 통해 다수자들과 거리를 느끼고 간극을&#160;만들기 시작한 모든 이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저항과 돌발의 지대로 유인하는 것,.......어떤 저항과 투쟁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그 공감이 공명되며 확대되어갈 때, 그리하여 또 다른 커다란 돌발의 흐름이 만들어질 때, 그것을 소비하는 속물들이 출현하는 일이야 어디서나 피할 수 없는 '조그만 불행'아닌가. 그 조그만 불행을 피하기 위해 자기들만의&#160;순수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조그만 불행을 큰 불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160;&#160;
어리석음과 오기로 탈진해 버렸던 지난 시절이 안쓰럽고,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무엇을 할 것인지', '운동이란 대체 어떻게 해야&#160;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160;또한 내가&#160;꿈꾸었던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려 할 때가&#160;온다면, 그때는 정주하면서도 떠날 수 있고,&#160;이동하면서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160;준비가 된 시점일 것이다. 거대하고 단단한 그 어느 지점에 균열을 내기 위해 되돌아 간다는 것, 그것은 이미&#160;내게 정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160;&#160;&#160;&#160;&#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26/41/cover150/895862301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3012</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돌아보면 또 마주하게 되는, 나와 그와 녹슨 철문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403948</link><pubDate>Mon, 08 Feb 2010 16: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40394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191009&TPaperId=340394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45/12/coveroff/897719100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191009&TPaperId=340394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a><br/>백석 지음, 시와사회 편집부 옮김 / 시와사회 / 2003년 12월<br/></td></tr></table><br/>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을 딱히 뭐라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에 나를 포함한 그들을 천후파(天候派)라 부른적이 있었다. 어제 저녁&#160;비가 온다는&#160;일기예보를 듣고, 어쩌면 봄비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에&#160;피식웃었다. 그시절 일들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br />
<br />
1997년. 그 해&#160;봄에는 유난히 비가 잦았다. 한 두 달가량 수요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그런&#160;날이면, 바람결에 실려오는 젖은 흙비린내에&#160;나는 반쯤 미쳐있었다. 반쯤 미친 상태로&#160;회사 근처 작은 서점으로 향하면, 그곳은&#160;습기에 민감한 오래된 책들이 눅눅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고, 비좁은 공간에&#160;마련되어 있던 간이 의자는 식빵처럼 푹신하게&#160;부어올라 있었다.&#160;그곳에서 나는 아낌없이 남아있는 정신의 반도 놓아버렸다.<br />
<br />
내가 정신나간 여자로 변해 찾아 헤매던 숱한 책들중에서 나를 쉬게 했던 책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집이었다.&#160;시집과의&#160;조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갑자기 이루어졌다. 나,라는 단어의 절박함에 나타샤,라는 단어의 울림과 당나귀,라는 단어의 떨림이&#160;나를&#160;붙들었던 것이다. 나는 멈추고, 숨을 고르고, 천천히 책장을 열었다. 빗소리에 맞춰 아주 천천히.....<br />
<br />
흰밤<br />
&#160;<br />
옛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br />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br />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br />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1935년 11월)<br />
<br />
수절과부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외로움에 치를 떨며 행간속에서 먹먹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 시와 마주앉아 그렇게 꼼짝없이&#160;바람벽앞으로 불려나와 있었다.<br />
&#160;<br />
흰 바람벽이 있어<br />
<br />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br />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br />
이 흰 바람벽에<br />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br />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br />
그리고&#160;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br />
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br />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이가<br />
이 흰 바람벽에<br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br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br />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br />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br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br />
내 사랑하는 어여쁜&#160;사람이<br />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br />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br />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br />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160;어느 사이엔가<br />
이 흰 바람벽에 <br />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br />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br />
- 나는 이&#160;세상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br />
&#160; 도록 태어났다<br />
&#160;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br />
&#160;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br />
&#160; 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160;&#160;
<br />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br />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br />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br />
&#160;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160;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br />
&#160;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br />
&#160;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160;<br />
&#160; 또 '프란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160;&#160;<br />
<br />
<br />
그 밤 나는 내 가난하고 높고 쓸쓸한 가장 소중한 그것들을 떠올리며, 이 시를 앞에 두고&#160;곡(哭)하였다. 오늘도 비가 오면 백석이, 백석을 앓던 시절이, 그 봄밤의 빗소리가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마스카라가 다 번져 엉망이 된 젊은 처자를 지긋이 바라보시던 책방 아저씨도. 깜빡이던 백열등도.<br />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45/12/cover150/897719100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191009</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2월, 어김없이 당신이 보고싶습니다. - [관촌수필]</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384906</link><pubDate>Mon, 01 Feb 2010 12: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38490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08507&TPaperId=338490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7/coveroff/89320085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08507&TPaperId=338490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관촌수필</a><br/>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02월<br/></td></tr></table><br/>삶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에는 일종의 체념과 허무가 포함되기 마련인가 보다.<br />
그런 연유로 반백이 되어버린 내 아버지의 말씀은 항용 벼락처럼 내 귓전을 치지만, 아버지의 뒷태는 흡사 안개처럼 흐려지기 일쑤다. 어쩌면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혜와 깨달음을 내 아버지를 통해 엿볼 수 있었으나 그 값으로&#160;원치 않는 허무를 알아챘는지도 모르겠다. <br />
하여 내게&#160;[관촌수필]은&#160;또 다른 이름의 아버지이자 사라져버리는 것들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이의 심중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br />
<br />
이문구의&#160;[관촌수필]을&#160;거론함에 있어,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160;충청도 사투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여담이지만 나는 한때 모든 농촌은 충청도라&#160;믿었었다. 그만큼 그의 글은 살아 움직여 마음을 헤집고 들어온다. 허나&#160;방언은 잘 알려진 특징일 뿐, 작가의 수사학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작가가 조부로부터 득한 한문의&#160;수사학에&#160;힘 있고 격조있는 문어체가&#160;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관촌수필]의 매력은&#160;반감되었을 것이다.&#160;관촌수필이 한 권으로 묶여 있지만 여덟편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나, 작가가&#160;집필한&#160;다른 저서들 역시 단편의 형식을 갖춘 것을&#160;볼 때,&#160;그의 글은 단편으로서의 묘미가 가장 크다. 그것은 구어체적 특징 때문이다. 그의 글은 툭 터진 웃음보마냥 또는 사레들린 사람의 기침처럼&#160;거침없이&#160;쏟아져 나온다.&#160;거기에&#160;더해진&#160;에피소드들은 풍성하며 반듯하고, 훈훈하며&#160;가슴을 쥐어지르는 것들이다. 이만한 글의 성찬이 또 어디있겠는가.<br />
<br />
[관촌수필]을 술회하는 마음이&#160;모두 같을 수는 없겠으나,&#160;나는 이 책의 독자라면 누구나 심중에 간직한 나무 한 그루를 꺼내 보지 않았을까 싶다.&#160;따라서 일락서산(日落西山)과 관산추정(關山芻丁)은 좀 더 각별했다.&#160;조부를 상징하는 왕소나무, 어머니를 상징하는 감나무 그리고 이제&#160;홀로 고향을 지키는 복산이라는 구부러진 나무를&#160;물끄러미 바라보며,&#160;기분에 취해 내 유년기의 그때로&#160;잠깐 헛발을 들여 놓고&#160;허망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은 제 깜냥에도&#160;친가에 있던 감나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몰락하는 존재의 운명앞에서 그리고 삭정이처럼 간신히 매달려있는 것들 앞에서 나는 비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행운유수(行雲流水)의 옹점, 녹수청산(綠水靑山)의 대복, 공산토월(空山吐月)의 석공이라는&#160;등장인물들은 책을 덮고도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160;옹점과 대복 그리고 석공처럼&#160;무엇으로 설명하지 않아도,&#160;그리고 무엇도 채근하지 않으며, 언제든 달려가면 덥썩 끌어안아&#160;줄&#160;인연들을&#160;삶의 어느 지점마다 매듭지어놓은&#160;작가가 한없이 부러웠다.&#160;<br />
<br />
이 책을,&#160;작고한 작가를, 아련하고 서운한 풍경을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이십년은 묵은 친구와 밤을 세워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그만큼 작가의 모든 것에&#160;각별하다. 이는 누구의 말처럼 그는&#160;내게 깜깜한 밤에도 길을&#160;보여주는 북극성이었고, 울화가 치미는 속내를 털어놓고 치기를 부리고 싶은 선배였고, 연애를 걸고 싶은 진짜 남자였다. 그러니 2003년 2월 그의 부음을 듣고&#160;부레가 끓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개인적인 욕심과 무관하더라도,&#160;우리 문단에 그대로 있어야 할 어른이 아니었던가. 진짜 어른말이다.<br />
올해도 어김없이 2월이 왔다.&#160;나는 한동안 그의 글 속에서 여투어 둔 마음을 담아 기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 글이&#160;축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락서산의&#160;한 대목으로 감히 축문을 갈음한다.<br />
&#160;&#160;
잘 있어라 옛집,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옛집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 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있었다. [현대문학, 1972년 5월]&#160; <br />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7/cover150/893200850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08507</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그대,그리고,나 - [입 속의 검은 잎]</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370011</link><pubDate>Tue, 26 Jan 2010 14: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3700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03971&TPaperId=337001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27/coveroff/89320039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03971&TPaperId=33700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입 속의 검은 잎</a><br/>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02월<br/></td></tr></table><br/>살다보니 시적 순간이란 것과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br />
갑자기&#160;사방이&#160;특정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느낌, 그 순간의 기억은 언제 꺼내 보아도&#160;동일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특별한 시간이 존재한다. 나는 그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단어를 시에 삽입하듯, 내 기억에서는 그 순간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특정한 이미지로&#160;채워지는 것이다.<br />
<br />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br />
깡깡 얼어붙은&#160;하늘에서 무언가 쏟아질 것 같았고, 내 손에는 기형도의 시집이 들려 있었고, 분홍색 스웨터는 추위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그 아이의 손은&#160;하얗고 부드럽고 길었다.<br />
&#160;&#160;
쥐불놀이<br />
<br />
- 겨울 版畵 5<br />
<br />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br />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br />
<br />
사랑을 목발질하며<br />
나는 살아왔구나<br />
대보름의 달이여 <br />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br />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br />
돌리세요, 나뭇가지<br />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br />
돌리세요, 술래<br />
는 잠을 자고 있어요<br />
헛간 마른 짚 속에서<br />
대보름의 달이여<br />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br />
어디까지?<br />
<br />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br />
<br />
<br />
시인과의 지독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내게 인연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 인연은 어긋남의 다른 기표였다.&#160;내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그의 유년시절의&#160;상처와 우울한 정열과 못다 이룬 사랑에 통감하며&#160;그를 찾았을&#160;때, 그는 이미 죽은자였다. 하여 내가 그에게 표할 수 있는&#160;경의는 그의 시를 잊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손이 유난히&#160;고왔던 그 녀석과의&#160;인연도 마침표에서부터 새로운&#160;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 이야기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길을 잃고 이야기속에 갇혀버렸다.&#160;<br />
&#160;<br />
<br />
빈 집<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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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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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br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br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br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br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br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br />
<br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br />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갇혔네<br />
<br />
&#160;<br />
기형도를 기억하는 이는 많다. 그의 한 권 뿐인 시집에 찬사를 보내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기형도가 고통스럽다. 그의 시는 내 삶의 중요한 어느 부분마다 불쑥불쑥 찾아와 생채기를 내놓고도 아무런&#160;복수도 할 수 없게 너무 쓸쓸히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다. 미워할 수도 없이 힘이 빠진 말간 얼굴을 하고 말이다.&#160;<br />
이미 겪은 고통이 아무리 잔인한 것이었다고 해도 덤덤하게 여겨질 날이 올 것이라는,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고 해도 나는 또 먹고 자는 일을 반복하리라는 사실이 오늘 덜컥 서.럽.다.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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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2/27/cover150/893200397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03971</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탈근대라는 유토피아를 향해 -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 현대문화론 강의]</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266720</link><pubDate>Mon, 14 Dec 2009 12: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2667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976X&TPaperId=326672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1/5/coveroff/897682976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976X&TPaperId=32667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문화정치학의 영토들 - 현대문화론 강의</a><br/>이진경 엮음 / 그린비 / 2007년 04월<br/></td></tr></table><br/>이 책 [문화정치학의 영토들]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이념을, 현대문화를 특징짓는 일련의 현상들 안에서 살펴봄으로써, 근대의 삶과 현대의 삶을&#160;조명한 현대문화 강의서다.&#160;<br />
이 책이 다루려고 하는 문화정치학은&#160;이미 알만한 학자들이&#160;대부분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분야이고, 나름의 깃발을 꼽고&#160;그들의 진지陣地를 구축해 놓은&#160;상태다. 따라서 우리의 재기 발랄하고&#160;젊은 집필자들은&#160;[근대]와 [탈근대]라는 이념을 설명함에 있어, 단지 현상만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복의 실현 가능성&#160;그리고 긍정적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듯 하다.<br />
<br />
대체적으로 이 책의 주요 논쟁거리인 [근대]를 특징 짓는&#160;어떤 이념들은,&#160;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삶과 땔 수 없다는&#160;태생적 한계를&#160;내포하고 있지만,&#160;인간을 神으로부터 빼돌리는데 일조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절대자로부터 도망친 인간이 완전한 해방을 누렸는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160;여하간&#160;신으로부터&#160;탈주한 인간들은 독립적인 영토를&#160;구축하고,&#160;그 땅에 새로운 씨앗을 뿌렸으니,&#160;씨앗이 싹터 맺은&#160;열매를 우리는 [이성理性]이라고 부른다.&#160;&#160;&#160;&#160;&#160;&#160;
따라서 [근대]의 시간은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이며, 이성의 잣대로 가늠할 때, 비합리적인 것들을 합리적인 상태로&#160;극복,하려는&#160;노력이 존재했던 시간이라 할 수 있다.&#160;그런데 여기서 의심하고 주목할 점은 바로 [합리적인 상태]다. 말은 그럴싸 하지만 [합리성]을&#160;강요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합리성]인지, 마지막으로 [합리성]의 결과물이 어때했는지를&#160;검증해 본다면, 의도도 투명하지 않으며&#160;결과도 기대에 못미친다는 사실을&#160;간파 할&#160;수 있다.&#160;따라서 쉽고 간단하게 짚으면 [근대의 시간]은 그것이&#160;주장했던 [합리성]과는 무관하게 비합리적인 행태와 문제점을&#160;적지 않게 표출하였다. 이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선언이 바로 [탈근대]다.&#160;
근대는 이미 지나간 시절이라고 하지만, 특히 예술의 영역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던이 지배적인 추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현대의 삶은 근대적인 삶의 형태와 사유로부터 벗어나 크게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주제 중 [현대 자본주의와 현대문화], [근대의 욕망과 신체], [근대의 이념적 경계들]은 우리의 신체와 감각이 서구적 지배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근대적&#160;사유에&#160;어떤 식으로 철저히 붙들려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160;&#160;<br />
<br />
현대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들을 무수히 많다.&#160;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거운 현대 문화의 현상들은,&#160;매우 그럴싸해 보이지만,&#160;전혀 그럴 듯 하지&#160;않으며, 또한 새로울 것도 없으며,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160;너무 쉽게 매몰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간들 무슨 큰 일이 생기겠냐고 하겠지만, 현대의 문제점은 현대 문화의 병패가 단순히 외부적인 공격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160;인간이 자각할 수 없는 교묘한&#160;장치들을 동원해&#160;인간의 내연에 틈을 만들고,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스미스의 몸 안에서 그를 조각조각 찢어 놓듯이, 인간의 내부를 폭파시킨다는데 있다. 따라서 현대의 특징으로 불려지는 무수한 지점들, 자본주의로 포장된, 이제는 나열하는&#160;것도 지겨운 현상들을 의심하고, 판단하고, 극복하지 않으면 神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160;&#160;
물론 현대 문화의 괴기스러움을 극복하고 제시되어야 하는&#160;새로운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막연하다.&#160;즉 서양적인 것을 극복하는 것이 동양적인 것인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공동체주의인가,라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내게 있어 가장 큰 숙제인, 인간은&#160;그럴 수 있는가, 모두가 더 낳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의심하는 것으로 부터&#160;출발해 고민하고 검증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160;이는 인간 스스로 무차별하게 소비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여기서 답을 얻고 방법을 찾아 현대 문화의 비정상적인&#160;현상들을&#160;균열낼 수만 있다면, 균열된 영토에서 새로운 시대의 유토피아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상상만 하는, 불평만 하는&#160;나는 얼마나 또 근대적인 사람인가.&#160;아! 포스트모던한&#160;신체에 깃든 모던한 정신이여!&#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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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1/5/cover150/897682976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976X</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사미인곡 - [제망매]</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261658</link><pubDate>Fri, 11 Dec 2009 15: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2616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810498&TPaperId=326165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0/20/coveroff/89828104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810498&TPaperId=32616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제망매</a><br/>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05월<br/></td></tr></table><br/>미리 밝히는 바, 나는 고종석교의 신도다.<br />
무슨 이유로 이런 음험한 소리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맘,이라고 말하리라.<br />
여하간 그는, 그의 소설, [제망매] 일부분을 흉내 내자면, 일천구백구십오년 이후,&#160;나에게 세상사를&#160;조근조근, 또박또박, 치우침 없이,&#160;일러준&#160;스승이었고, 부스럼 일고 생채기 난&#160;마음을 다독여 주는&#160;은혜로운 분이었다.&#160;그러니 물고기 몇 마리와 빵 몇 조각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다소&#160;판타지 영화같은&#160;사건은&#160;보여주시지&#160;않았으나, 그의 메세지는, 그의 글을 읽고 그를&#160;흉내내며 폼을 잡았던 나에게, 별다른 매력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나에게, 선배들과 동기들의 관심을&#160;쏠리게 하는 밑천이 되었으니,&#160;이것이 인간의 의한&#160;인간의 구원아니겠는가.&#160;모든 것이 그의 덕이며,&#160;그의 은총은 그렇게 깊었다. <br />
<br />
따라서 나는 그의 글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책이건 신문이건 매체를 가리지 않고, 그의 글에 담긴 뜻을 알아 듣던 못 알아 듣던 그건 중요한게 아닌지라, 그저 신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천구백구십칠년에 구입한 그의 소설 [제망매]를 무려 십년이나 묵혔다 비로소&#160;꺼내 들었다. <br />
나는 왜, 어찌하여,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던 것일까.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곰곰히&#160;숙고한 결과,&#160;나는 그의 글이 소설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160;미덥지 않은&#160;편견 비슷한 것이 있었고, 말 그대로 편견이었던 생각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혹시라도 그에게 실망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그럼 이제 새삼 그 두려움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첫 장을&#160;젖힐 때 까지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다만 배짱이 좀 붙었을 뿐이다. '네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정도!
[제망매]는 내 불안을 냅다 걷어냈다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불안해질 이유도 없었다. 특히, 단편 [사십세]는 내게 특별하기까지 했다. 그 속내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가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뭔 말인지 알 것이다. 아마 그는 뭔 말인지 알 것이다. <br />
몸이 튼튼해지려면 음식을 가려 먹지 말아야 한다. 옳은 말이다.&#160;글도 마찬가지이다, 라고 하려니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지만 이번 경우라면 옳은 말이다. &#160;&#160;<br />
<br />
소설 [재망매]는 인문학적 소양과 재기 넘치는 문장들이 빛을 발하는, 세상을 향한 그의 안쓰러운 애정이 마구 드러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에밀 시오랑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찾기 쉽지 않은 소설이다.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따라서 나는, 일천구백구십오년 이후로 꾸준히 이어온 신앙을 앞으로도 굳게 지킬 것이다. 당분간, 쫌 오래, 나는 고종석교를 배교하지 않을 듯 싶다. 경험한 바에 의하면 배교는 아프고 또 힘들다. 사족이지만 나는 그것을 김훈에게서 배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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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후배가 고종석에게 반했다고 한다. 일천구백구십오년 생각이 났다. 아련했다.)&#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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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20/20/cover150/8982810498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810498</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세계를 뒤흔든 열흘 - [존 리드 평전 - 사랑과 열정 그리고 혁명의 투혼]</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253898</link><pubDate>Tue, 08 Dec 2009 13: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25389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55072&TPaperId=325389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9/80/coveroff/899205507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55072&TPaperId=325389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존 리드 평전 - 사랑과 열정 그리고 혁명의 투혼</a><br/>로버트 A. 로젠스톤 지음, 정병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03월<br/></td></tr></table><br/>존 리드(John Reed, 1887.10.22~1920.10.19)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다. 또한 더 잘 알려진 것처럼 러시아 혁명을 기록한「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르포르타주를 작성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160;상상속의&#160;그는 이미 뜨거운 사내, 강철같은 사내였다. 그래서였을까, 이 책은 유난히 오래 읽혔다. 왜냐하면 상상 속의 리드를 지우는 일과,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리드를 받아들이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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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뮤지컬처럼 부풀려진, 낭만적이며 이기적인,존 리드를 만나는 과정은 조금 난감했지만&#160;그가 패터슨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의 헤이우드와 교류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대목은, 그에 대한 나의&#160;상상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160;물론 그곳에서도 그의 객관성을 잃은 시선,&#160;뜨거움이라고&#160;상찬하기에는 부적절한 그의 열정이&#160;적잖이 불편했지만, 리드가 투쟁의 현장에서 빈곤의 추악함과 잔혹한 불평등을 목도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고&#160;또 그것을&#160;실천하는 모습은 그의 진정을 느끼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패터슨에서 자본주의의 '도구주의'와 맞서며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향후 그의 반전운동으로도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자꾸 마음이 쓰인다. 그럼에도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변명도 구차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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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리드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전쟁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본가들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라며 궁색한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을 노골적으로 규탄한다. 또한 소모적이고 가혹한 전장에 참전하려는 의뭉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거세게 항의한다. 그는 자본가들과 정치가들의 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전쟁은 무고한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애국자(?)들의&#160;깜짝 파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이는 지금의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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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의 행보를 따라가다 마지막에 만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내게 몇 가지 의문을 남겨준 채 끝나버렸다. 그것은 리드의 삶이 너무 일찍 막을 내린 탓일 것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그가 좀 더 살아있었다면,&#160;혁명의 추이를 지켜보고, 거기에 개입된&#160;인간들의 어쩔 수 없이 던접스러운 인간성을 확인했다면,&#160;레닌과 카오츠키 다음에 등장할 스탈린에 대해,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독특한 해석을 내놓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리드가 뜨겁게 환호했던 러시아 혁명 그리고 그의 벗 레닌은 인터내셔널의 슬로건 아래 '국가주의적 전체주의'를 실현한 마르크스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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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되짚는 일은 단순히 그를 거들떠보는 행위를 넘어선다. <br />
그것은 특정한 개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서 시작하여 독자가 처한 현실을 더듬는 일로 치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 리드, 그를 읽는 것은 한 세기를 뛰어넘어 21세기를 부유하는 나를 돌아보는 일이며,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에 대답하는 소극적인, 그렇지만 고통스러운&#160;행위였다. 그가 처했던 20세기와 달리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혁명은 이미 퇴물이 되어버렸고 자본주의는 폭발해버렸다. 하여 착취, 전쟁, 절대빈곤으로 내몰린 사람들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나불거리는 일은 죄악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160;&#160;
따라서 이렇듯 욕지기가 치미는 현실에서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라는 나의 물음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만나는 과정에서 느낀 다행스러움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 개념적으로 그러할 것이다,라고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타이밍만 허락하면 선할 수도 있다라는 신뢰의 회복이었다. 그의 삶에서 엿본 열려있는 사고체계와 신념, 그리고 신념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는 행위는 이미 자본과 상품이 신이 되어버린 이 시절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진실로 혁명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열정적인 사내를 내려놓지만 내 안의 혁명, 풀리지 않은 숙제들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 같다.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9/80/cover150/899205507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55072</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헉, 그리고 움찔 - [껌]</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222144</link><pubDate>Mon, 23 Nov 2009 1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2221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2987&TPaperId=3222144"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24/10/coveroff/89364229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2987&TPaperId=32221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껌</a><br/>김기택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09년 02월<br/></td></tr></table><br/>이번 시집 [껌]에서&#160;김기택의 언어와 시선은&#160;물질 문명을 비판할&#160;때는&#160;더욱 단단해졌고, 폭력을 목격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친절해졌다.&#160;또한 그의 친절한 시선이 안내하는 세계는 별거 없을&#160;것&#160;같은 일상적인 풍경을 단번에&#160;'헉'소리와 '움찔'거림이 존재하는 풍경으로&#160;바꾸어 놓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상에 늘상 존재하는 가리워진 폭력이다.&#160;&#160;
가령 그의 시「고양이 죽이기」를 보면&#160;"야생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었다./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나지 않게 삼켜버린 것이다./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160;듯 속도를 더 내었다" 라던가&#160;다른 시「껌」에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늘 함께 놀던 껌/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이빨이 먼저 지쳐/마지못해 놓아준 껌" 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작가의 시들은&#160;이미 문명의 폭력에 익숙해진 독자들 앞에&#160;폭력의 풍경을&#160;친절하게&#160;전시한다.&#160;이 때 작가의 의도된 친절함은 독자로 하여금 '헉'소리를 유발하게 하는&#160;계산된&#160;장치이며,&#160;거기서&#160;더 나아가 독자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기괴함으로 다가온다.&#160; 이렇듯 작가의 집요한 친절함이 독자를 '헉'에서 머무르지 않고, '움찔'거리게 만드는 것은 고통의 반대편에&#160;놓인 고통을 즐기는 자들의 무의식적인 즐거움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을 통해 허기를 채워야 하는&#160;모든 것들의 태생적인 비극을&#160;바라보는 일은&#160;제 스스로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 자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일 것이다.&#160;&#160;&#160;&#160;
살의를 드러내지 않고 식탁을 차릴 수 있는, 그래서 적당히 세탁되어진&#160;죽은&#160;생명들을 섭취하며&#160;사는,&#160;타자의 고통을 단순히 지폐 몇&#160;장으로 교환하며 눈 가리고 살아온&#160;내게 그는&#160;「코뚜레」에서 "코는/소의 몸에서 가장 예민하고 부드러운 곳/붉은 혀만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깊은 구멍일 뿐인데/저렇게 단단하게 잠가둔&#160;걸 보니 수상해./그 구멍에서 가끔 뜨거운 공기가 나오고/신음소리도 나오고/희고 걸쭉한&#160;분비물도 나오는 걸 보니 더욱 수상해./근질근질질해서 견딜 수 없는 열쇠/열쇠구멍 없는 자물쇠를 열 유일한 열쇠,도끼가/어느날 저 자물통을 부술 거야/허나 도끼가 범할 일을 자세히 열거하고 싶진 않네,/저렇게 일평생 순결을 감금당하고도/도끼에 겁탕당할 이마/겁탈당할 피 겁탈당할 죽음을,/겁탈당한 후에 다시 발가벗겨질 가죽과/그 속에 든 발갛고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순결을." 이라고 도살의 현장을 비밀스럽게 들려준다.&#160;그리고 겁탈당한 죽음과 말랑말랑한 순결이 내 이빨의&#160;살기와 내 혀의 황홀한&#160;미각에게 묻는다. 아직도 수염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자라고 있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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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24/10/cover150/893642298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2987</link></image></item><item><author>굿바이</author><category>제 5원소</category><title>고통 너머의 낯익은 고요_광기 - [광기]</title><link>http://blog.aladin.co.kr/goodbye/3185341</link><pubDate>Mon, 02 Nov 2009 16: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goodbye/318534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456126&TPaperId=318534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467/97/coveroff/898945612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456126&TPaperId=318534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광기</a><br/>라우라 레스트레포 지음, 유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0월<br/></td></tr></table><br/>집단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고통의 양이 증가할수록 정신적.육체적 통증을&#160;경험하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고통을&#160;경감하는 양태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으나,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현실, 고통받지 않는 자 없을 터이니 작가가 책 머리에 언급한 것 처럼&#160;[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는 자,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고개 돌릴 수 있는 독자도&#160;많지 않을&#160;터이다.&#160;그렇게 소설은 꼼짝할 수 없음을 전제로 시작된다.&#160;
소설은 여주인공 아구스티나의 광기와 욕망을 쫓는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통받는 연인 아길라르의&#160;헌신적인 사랑과 그녀의&#160;광기를 담담하게 받아내는 소피 이모의 증언을 통해&#160;광기로 감염된 아길라르의 가족사와 콜롬비아가 안고 있는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고백한다.&#160;또한,&#160;이미 초과해 버린 욕망을 대변하는&#160;어머니 에우헤니아와 오빠 호아코, 그&#160;욕망을 추격하며&#160;뒤틀려 버린&#160;미다스와 주변 인물들, 왜곡된 현실의 희생양 막내 동생 비치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위험한 욕망, 욕망을 조장하는 집단의 가치관, 욕망이 만들어 낸&#160;거짓 앞에서 좌절한 인간들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160;따라서 욕망, 거짓, 고통, 광기는 이 소설 안에서&#160;동의어가 된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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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은 진실을 까발려 아버지 앞에 들이댔고, 어머니는 그 진실을 거부하며 아들을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구한 거죠. 자네 말도 맞네만, 그게 다는 아니네, 소피 이모가 나선다, 왜냐하면 비치는 마지막 진실을 비장의 무기로 숨겨두고 있었는데, 바로 자기 자신의 자유였거든, 모두가 정신을 잃고 거짓말의 늪에 빠진 것을 보자, 비치는 입고 있는 차림 그대로, 그러니까 스웨터에 파자마에 양말에 부츠를 신은 채로 집을 나가 아랫길로 걸어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네.(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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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길라르와 소피 이모의 대화를 통해 아구스티나의 뒤틀린 가족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막내 아들 비치가 까발린 진실은 아버지와&#160;소피 이모의&#160;은밀한 사랑이었다.&#160;그러나 아버지를 엄단해야 할 어머니는 도리어 아버지의&#160;외도를 부정한다. 남편의&#160;패륜을 부정함으로써&#160;폭로 이후에 몰아닥칠, 자신이&#160;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폭로 이전으로 돌려놓아 자신이 포기해야 할 욕망을 지킨다.&#160;또한 아버지의 외도를 이미 알고 있던&#160;오빠 호아코도,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구스티나도&#160;거짓이 지탱해 주는 달콤한&#160;현실, 즉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을 붙든다.&#160;이 추악한 현실에서 막내 동생 비치는 현실을 도피함으로써 자신이 꿈 꾸는 자유를 얻는다고 착각한다.&#160;그러나 그 순간 그들이 은폐하고 도주하면&#160;극복할&#160;수 있다고 믿었던&#160;거짓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160;그들의 욕망이 만들어 낸 거짓 현실은 한 번 빠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으로 돌아온다.&#160;&#160;
욕망은 거짓을, 거짓은 또 다른&#160;거짓을 처녀생식한다.&#160;생식의 속도와 양은 감지할 수 없을 만큼&#160;빠르고 막대하다.&#160;이렇게 점점 불어난 개체(거짓)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주체(인간)는 고통에 처한다. 고통은 슬픔과 두려움을 배양하고, 잘 자란 슬픔과 두려움은 분노로&#160;성숙한다. 이렇게&#160;뭉뚱그려진&#160;분노&#160;덩어리가 어느 날&#160;삶 전체를 짓눌러 더 이상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160;삶의 달콤함을 스스로 거세할 수 없는&#160;인간은 무언가 새롭게&#160;대응 할 의지&#160;조차 갖을 수 없게 되고,&#160;고통 너머의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숨고 싶어한다. 이 때 인간의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낯익은 고요함이 바로 광기다.&#160;허니 부조리한 현실에 처한&#160;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죽거나 미치거나.&#160;
마지막으로 이 소설 [광기]에서 작가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불편한 글쓰기 방식은 단지 형식을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을&#160;보게 하고 불편하게 질문하는 방식,&#160;내키지 않는&#160;질문을 받고&#160;불편해 질 수 밖에 없는 독자, 그것이 라우라 레스트레포 소설 [광기]의 본질인&#160;것 같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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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467/97/cover150/898945612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456126</link></image></item></channel></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