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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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코로나19와 고전(문학)

중국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밖에서 사람 만나는 일이 위험한 행동이 되었다. 아이들의 개학은 거듭 연기되고 바깥출입은 금기시되며 직장인들은 자택에서 근무 중이다. 외국 사정은 더 심각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유럽 일부 국가는 80세 이상 고령 환자들의 치료를 포기했고 물리적인 의료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해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문학이야말로 현실성의 극치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는 분야이다. 모든 베스트셀러는 동시대의 관심과 주제를 껴안는다.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페스트』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tvN 독서 예능에서 이 소설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영향도 컸다. 주지하다시피 『페스트』는 알제리(프랑스령)의 해안 도시 오랑에서의 전염병 사태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에서 봉쇄된 채 재앙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렸다. 소설에 묘사된 몇몇 장면에서는 현재의 우리 상황과 너무 흡사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역주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간접 공감의 열망들이 반영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에 코로나19 특집으로 카뮈의 『페스트』를 리뷰한다.

 

⑴ 이야기 (스토리 요약)

소설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각 부는 페스트의 양상에 따라 구분된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랑시(市)에 페스트가 발병한다. 전염이 확산되고 사망이 증가한다. 도시는 봉쇄된다. 도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사망자 수는 더욱 증가한다. 자고 나면 수백 명씩 죽어 나간다.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다. 괴소문과 가짜 뉴스가 급속히 퍼진다. 페스트균을 죽이겠다며 온 마을에 불을 놓아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다. 폭동이 일어난다. 혼란을 틈타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다. 지옥과 같다.

 

의사 리유(리외)와 동료 타루 등은 민간 보건대를 만들어 페스트와 싸운다. 도시 밖에 있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불법까지 동원해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 신문기자 랑베르도 리유와 타루의 진정성과 연대감을 느끼고 보건대에 합류한다. 그러던 중 실험 중인 페스트 백신 혈청을 맞은 어린아이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이의 주검 앞에서 의사 리유가 교회의 신부 파늘루에게 묻는다. "페스트가 신이 내린 형벌이라면 이 아이의 죄는 무엇입니까?" 페스트가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던 파늘루 신부는 리유에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후 신부의 설교는 조금 바뀐다. 얼마 뒤 신부도 페스트―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죽는다.

 

계절이 몇 차례 바뀌고 1년이 흐른다.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던 페스트균의 매서운 기세도 점차 꺾이기 시작한다. 백신 혈청이 효능을 보인다. 혈청을 맞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회복되기 시작한다. 도시에서 사라졌던 쥐가 다시 나타나고 길고양이의 모습도 포착된다. 페스트가 종식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 리유와 함께 최전선에서 페스트와 싸운 타루가 페스트에 걸려 죽는다. 리유의 동료 그랑은 페스트에 걸렸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다. 도시 봉쇄가 풀어지고 사람들은 그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과 동료를 재회한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기차 플랫폼에서 아내를 만나 포옹한다. 리유는 도시 밖에서 지병을 치료해온 아내가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⑵ 인물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페스트를 최전선에서 치료하는 의사 리유(리외), 민간 보건대 창설을 주도한 타루, 외지에서 건너와 페스트 종식을 위해 함께 싸우기로 한 신문기자 랑베르, 소설의 서술자로부터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시의 하급 공무원 그랑, 페스트 확산 과정에서 가장 큰 내적 변화를 겪는 가톨릭 신부 파늘루, 전염병 사태를 즐기며 그 와중에 범법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코타르 정도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 되겠다. 소설은 서술자의 관점과 등장인물 타루의 기록을 주축으로 뻗어나가는데 소설 말미에 서술자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독자를 놀라게 한다.

 

몇몇 인물에 대해 간략히 리뷰하고자 한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페스트』는 유독 다양한 인간상에 밑줄을 긋는다. 이 소설의 구조가 "무서운 질병으로 인한 참혹하고 극단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몇 가지 인간 군으로 그려낸 것"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역경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역경에 맞서 싸우는 사람(저항형), 역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방관하는 사람(방관·회피형), 신의 뜻으로 생각하며 절대자에 의지하는 사람(종교형), 범법을 자행하며 자신의 이익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악인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염병의 예기치 않은 심화과정을 통해 일부 인물은 큰 내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매력은 충분하다.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인물은 단연 리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리유의 경험과 생각이 소설의 주된 재료가 된다. 서술자는 유독 리유의 사유와 행동에 집중하는데 그 외의 인물들이 모두 리유를 중심으로 얽혀있기에 그렇다. 처음으로 죽은 쥐를 발견하고 감염자의 초기 증상을 검토하여 페스트의 발병을 최초로 짐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의사였기 때문에 시종일관 페스트에 맞서 싸운다. 그의 열심과 사명의식은 기자 랑베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랑베르의 회심은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랑베르는 "자신과 페스트는 본래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랑시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굳건하게 감당하는 의사 리우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다. 결국 랑베르는 도시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 리유 일행과 함께 페스트와 싸우고 타인을 돕는다.

 

타루와 그랑도 리유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다. 이 세 명이 페스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전사들, 소위 '저항형'의 대표자들이다. 타루는 아버지를 차장검사로 둔 금수저 출신인데 과거 아버지가 참여한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는 과정을 목격한 뒤 사형 반대론자가 되었다. 그는 민간 보건대 창설을 주도하며 초반부터 불군의 투지를 표출한다. 리유와 두터운 우정과 신뢰의 관계를 쌓기도 하는데 페스트의 최절정기에 함께 바다에 입수해 수영하는 장면은 굉장히 감동적이다. 자신의 수첩에 일상의 기록을 남기고 그 메모를 소설의 서술자는 자주 인용한다. 서술자의 해설과 타루의 기록은 소설을 끌고 가는 두 개의 축이다. 하지만 타루는 끝내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소설의 서술자는 그랑을 매우 훌륭한 인간상으로 평가한다. '보건대를 살아움직이게 하는 조용한 미덕의 실질적 대표자'로 상찬해 마지않는데 선하고 모범적인 보편 시민을 상징하려는 것 같다. 하는 일이 소소하고 눈에 띄지 않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랑은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선의를 가지고 페스트와 싸워가는 인물이다. 극한의 대재앙 앞에서 한 명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랑은 잘 대표한다. 리유의 감사 표시에 대해 그랑이 한 다음 답변은 이 소설의 주제를 웅숭깊게 관통한다. "제일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

 

신부 파늘루는 종교성을 대표한다. 페스트 발현 초기에는 "페스트는 신의 재앙이지만 신이 원한 게 아니다. 세상이 악과 타협하였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라고 거침없이 설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페스트의 발병을 초월적 차원의 문제로 끌어올리며 신(하느님)에게 회개해야만 함을 촉구한다. 그러나 아무런 악의도 없는 어린아이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파늘루는 동요한다. 그 이후 설교에서 '여러분'이라고 부른 회중을 '우리는'으로 바꾸어 부른다. 설교자로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앞서 언급한 신문기자 랑베르와 함께 페스트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큰 심경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페스트를 초월적 관점으로 본 그도 끝내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파늘루의 변화와 그가 강조한 종교적(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⑶ 종교]편에서 구체적으로 후술하겠다.

 

거대한 재앙 앞에 선하고 사명감 있는 사람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혼란과 공포를 역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코타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평상시에 자살을 기도할 만큼 무기력하고 우울증에 빠져 있다. 하지만 페스트가 창궐해 도시가 혼돈에 빠졌을 때에는 오히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누린다. 타인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법을 일삼고 밀수와 같은 악의적인 행동을 벌인다. 페스트가 수그러들고 도시가 안정화되기 시작하니 또다시 불안 증세를 보인다. 결국 소동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된다. 흥미로운 건 작가 카뮈가 코타르를 묘사함에 있어 상황과 인물에 대해서만 담담히 전할 뿐 절대로 선악의 가치판단을 독자에게 주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⑶ 종교

소설에서 가장 논쟁적인(논쟁이 될 만한) 부분은 신부 파늘루의 설교 장면이다. 파늘루의 설교는 소설에서 총 두 번 소개되는데 첫 설교와 다음 설교 사이에 묘한 온도차가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첫 번째 설교는 거침없이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다. 2부 중반에 자리한 파늘루의 첫 설교는 꽤 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는 "페스트는 인간 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과한 표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제의 입장에서는 마땅한 설교였다. 교회 내부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세상 어떤 것도 신의 의지 밖에서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이 아담과 하와 이래 이 땅의 교회가 세상과 격렬히 씨름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와 씨름하다 죽는 장면을 보자. 여기에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총집합해 있는데 파늘루는 "주님, 이 아이를 구해주소서!"라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아이는 죽는다. 혈청 주사 영향인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 모습을 보고 리유는 "페스트가 신이 원하지 않는 불행이었다면, 이 어린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파늘루에게 강변한다. 파늘루는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한다. 결국 그도 페스트로 죽는다. 사실 이런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면이 있다. 교회 사제라는 자가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하게 기독교를 공격해온 논리에 대해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후퇴하는 듯한 모습은 현실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카뮈가 분명한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반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장면은 딱 그것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 선한 자가 고통을 받고 악한 자가 성공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신의 죽음(부재/비존재)을 주장하는 수많은 무신론자들의 논거도 이 부분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포이어바흐가 그랬고 러셀이 그랬다. 그들의 공격은 매서웠다. 이 부분은 코로나19로 인한 한국의 현재상과도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천지 집단감염 사태와 주일예배를 강행한 일부 교회에 대한 비난과 조소가 끊이질 않는다. 절체절명의 대재앙 앞에서 종교(기독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신에게 엎드려 기도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문제 군상으로 묶어 조롱하는 형국이다. 신을 믿는 한 성도로서 서글프다.

 

솔직히 말해 기독교 바깥에서 지적하는 '기독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기독교 안에서밖에 해결(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신의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사이의 인식 괴리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인데, 신은 전염병과 전쟁 같은 재앙으로 인간을 심판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기도 했다. 신의 섭리란 공의와 사랑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데 바로 이 부분이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비극을 발생시킨다. 기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소화되지만 기독교 밖에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즉 안팎 간의 극한의 아이로니컬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현실 기독교인으로서 갖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이자 도전임을 고백한다.

 

 기독교에 대한 카뮈의 부정적인 묘사를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부조리의 문제를 종교가 다루는 것은 적절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뜻이다. 앞서 묘사한 카뮈의 설정은 충분히 논리적이지만 기독교의 절반만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전혀 다른 관점이자 차원이다. 믿음(신앙)의 영역은 그 전제 자체가 부조리하다. 그것은 그것대로의 여백으로 남겨두는 게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이 아닐까. 카뮈식 무신론에 대한 내 입장이다.

 

⑷ 카뮈와 부조리

카뮈의 작품세계를 흔히 '부조리 문학'이라고 부른다. '부조리(不條理, Absurdity)'는 카뮈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데 이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카뮈 전집을 가까이 두고 탐독할 만큼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지만 부조리에 대해 설명할 역량은 부족하다. 철학 전공자를 위시하여 주변의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과 밤을 새우며 깊은 대화를 나눠봐도 부조리를 명확하고 시원하게 해설하는 걸 보진 못했다. 의미의 외연 자체가 상당히 러프할 뿐만 아니라 용어를 사용하는 자의 의도된 모호성까지 추가하면 더없이 난해한 개념이다. '부조리'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다.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수상 연설에서 소설 『페스트』를 통해 긍정을 다루고 싶었음을 밝힌다. 반면 『이방인』은 부정(否定)을 다룬 소설이며 『페스트』와 모든 면에서 대비된다고 말한다. 『이방인』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이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 「오해」이며, 『페스트』의 편에 서있는 작품이 『반항적 인간』,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순서다. 카뮈는 부정은 먼저 말했고 그다음 긍정을 말했다. 이러한 시간 순서는 소설 『페스트』의 철학적 구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준다. 그것은 외연적으로는 부정과 반항을 다루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명징한 긍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걸 잡아먹을 것 같은 페스트의 세력이 약화되고 지옥 같던 오랑시가 점차 일상으로 회복되는 모습은 카뮈가 말한 부정에서의 긍정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맥락이다.

 

이 소설은 1947년에 발표됐다.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열심히 전후 재건사업에 열을 올리는 시기였다. 동시에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지옥 같은 전쟁이 남긴 후유증을 치유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시의성 측면에서 '페스트'는 하나의 비유와 상징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 시기의 페스트는 곧 전쟁이었다. 6년간 유럽과 전 세계를 휩쓴 '전쟁 페스트'의 발병은 인류에게 가장 현실적인 지옥의 쓴맛을 맛보게 했다. 다양한 인간상이 있었고 여러 형태의 역설이 존재했다. 현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았다. 부조리했다. 카뮈의 말대로 어떤 현실도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고 어떤 합리도 전적으로 현실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카뮈의 작품을 읽으면서 항시 느끼는 건 그의 소설이 철학과 소설 사이의 적당한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완벽한 소설이면서 철학을 오롯이 담아내고, 하나의 철학서이면서 소설의 구조를 포용한다. 이 기묘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힘이야말로 카뮈 문학이 가진 마력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카뮈가 진정 위대한 것은 사상이든 철학이든 극단적인 단정(결론)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데 있다. 올바른 철학자의 태도는 "내 말이 무조건 옳다"라는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가 평생의 라이벌 사르트르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카뮈는 이 중용적 지성을 지켜냈기 때문에 당시 다수 지식인들이 혹했던 유행병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문체 얘기를 해보자. 카뮈의 문체는 역시 담담하다. 전염병 창궐의 재앙을 묘사하면서도 그 어떤 절규도 명령도 없다. 작가 스스로 서술자임을 거부하고 다른 등장인물에게 건네줄 정도로 객관적이고 냉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카뮈의 인물들은 작가와 완벽히 독립적이다. 카뮈 소설의 화자적 특징은 담담하고 묵묵하고 객관적이다. 사실만 건조하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카뮈식 문체는 불필요한 감정과 비본질적인 사색을 제외한 채 담백하게 텍스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소설 『페스트』가 극한의 상황을 그리면서도 자극적이지 않게 읽히는 이유다. 독자는 다른 정서적 낭비 없이 냉정하고 차분하게 '페스트'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천착하게 된다.

 

⑸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소설 『페스트』는 영웅주의와 거리를 둔다. 카뮈 스스로 영웅이라면 질색을 했던 작가다. 주제와 묘사 방식도 거대한 역경을 헤치며 분투하는 인간상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고 인간 승리의 위대한 드라마도 없다. 그런 통쾌한 이야기를 원해서 이 소설을 들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다만 인간의 힘으로 차단하기 어려운 불가항력적 사태에 맞서는 나름의 방법을 알려줄 뿐이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해 우리가 소설 『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답을 소설의 서술자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상으로 묘사한 그랑이라는 인물에게서 찾았다. 페스트에 대항해 그랑이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시의 하급 공무원으로서 늘어난 서류 작업과 행정 업무를 보조하는 것뿐이었다. 전과 달라진 건 근무시간이 늘어나 야근한 것뿐이다.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한 것뿐인데 그 열심에 리유는 감복하여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렇다. 자기 위치에서 사명감을 갖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재난에 닥친 모든 인간들이 해야 할 유일한 책무인 것이다.

 

그랑의 모습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소설 속 오랑시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 도시의 모습과 닮아 있다. 확인되지 않은 괴소문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혼란한 상황을 틈타 마스크를 불법 유통하려다 적발된 이들이 수두룩하다. 정치인들은 표심을 얻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둔다. 기회주의가 흘러넘친다. 이러한 혼란과 위기 속에서 자기 자리를 냉정히 지키는 건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고, 교사는 교사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며, 의사는 의사의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부모의 책임을 다해 아이를 살피고, 아이는 아이의 위치에서 부모의 통제를 받으면 된다. 영웅은 없다. 각자 본분을 잊지 말고 자기 일에 전심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카뮈는 페스트의 완전한 종식을 선언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올 가능성을 전제한다. 인간은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나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궁극의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반항하고 저항할 뿐이다. 하지만 그 반항마저도 승리한다는 믿음을 전제한 건 아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반항하는 것이다. 인간 한계에 대한 소중한 깨달음은 결국 겸손의 문제로 환원된다. 위기일수록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인간성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페스트가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어 우리의 영혼을 좀먹기 때문이다. 이 경고야말로 카뮈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 에필로그 : 중소기업 영업사원이 맞이한 '코로나19'라는 페스트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오랜 연차의 중소기업 영업사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몇몇 일상을 기록한 글에 종종 내 직업과 이력을 소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컴퓨터 전산용품과 모바일 액세서리를 전문적으로 제조 판매하는 중소기업이다. 거의 대부분의 품목을 중국으로부터 수입(OEM)한다. 할인점을 위시하여 다양한 채널에 공급 판매한다. 1/4분기는 전통적인 시장 성수기다. 하지만 지난 2월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오프라인 채널은 고객이 없어 매출이 급감했고, 중국에서 건너와야 할 품목은 공장이 돌아가지 않아 품절 대란이 지속됐다. 매출실적은 곤두박질쳤고 지난 3월에는 목표 대비 70%밖에 채우지 못했다. 편차야 있겠지만 당분간 이런 기조는 계속될 것이다. 실적이 곧 인격인 영업사원으로서 존재가 휘둘릴 수밖에 없는 서글픈 일이다.

 

최근 팀장님 주관으로 매출목표 수정회의를 진행했다. 나를 비롯한 전 영업사원들은 원안을 고수하기로 했다. 전대미문의 국제적 전염병 사태를 맞이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매출 목표로 조정(인하)하는 건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카뮈의 말을 인용했듯이 현실은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다. 비합리야말로 현실을 이끌어가는 코드다. 매출목표 조정회의를 준비하면서 나는 카뮈가 『페스트』를 통해 던진 메시지에 주목했다. 부조리한 현 상황을 깊이 사유했다. 그리고 결단했다. 저항해보기로. 부조리한 내 현실의 '페스트' 앞에서 작정하고 반항할 것을 용단했다. 모험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다. 현실은 항시 불합리와 섞여 있는 것이기에 담담히 그것을 인정하고 용기 내서 부딪혀보려는 것이다. 영업사원이라는 내 위치에서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도전한 것이다. 소설에서 리유와 그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결단이 비단 나만의 선언은 아닐 것이다. 수능 시험에 지장 있는 고3 수험생부터 학원업계 관계자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대표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힘겨워 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힘을 내 이 난국을 잘 견디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모든 재앙은 결말이 있었다. 코로나19도 반드시 지나간다. 이를 견디는 힘은 본질적으로 나 자신 안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너 사이를 잇는 공감과 연대의식에 있다. 우리 모두 이 지독한 2020년의 '페스트'를 잘 견뎌내자! 바로 그것이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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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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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은 모두 다른데 텍스트적 관점에서 크게 두 개로 나누면,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있고 산문―소설도 산문의 한 형태이지만 여기서는 수필(에세이) 정도의 소개념으로 산문을 칭함―을 잘 쓰는 작가가 있다. 시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제외하자. 산문가는 거의 소설을 쓰지 않지만 소설가는 가끔 산문을 쓴다. 그중 소설과 산문 모두 잘 쓰는 부류가 있다. 하루키나 김훈과 같은 작가는 소설과 산문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정작 소설보다 산문을 더 잘 쓰는 작가도 있다. 김연수를 꼽을 수 있겠다. 반면 소설가일 수밖에 없는 작가도 있다. 오직 소설가일 때 빛나는 작가 말이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소설가 공지영이다.

 

그렇다. 공지영은 천상 소설가다. 나는 그녀의 모든 소설에 감동했고 그녀의 모든 산문에 무감했다. 소설은 훌륭했고 산문은 별로였다. 그녀의 소설은 한결같이 읽기 쉽고 대중적이다. 쓸데없이 무겁지 않고 거들먹거리지 않는 솔직함으로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지만 어두운 곳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약자들의 처절한 삶과 힘(권력) 있는 자들의 고약한 위선에 대해 추적하고 고발했다. 문학에 대해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한 소설가 조정래의 말이 진실이라면 공지영은 문학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증명해가고 있는 작가이다. 그래서 나는 공지영을 좋아한다.

 

공지영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평생 먹을 욕을 최근 몇 년 동안 다 먹고 있는 느낌이다. 조국 사태 후 그녀가 쏟아낸 진영 논리식 목소리가 시발점이 된 것 같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투표 잘합시다'라는 글을 게시하여 한 시민단체로부터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그녀의 삶을 저리도 요란하게 만들었을까 우려하지만 작가는 우선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그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은 어렵지 않게 추스를 수 있었다.

 

예술의 모든 장르가 그러하듯이 고통과 허무를 통해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걸까. 공지영의 신작 소설 『먼 바다』는 정말이지 끝내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인 '첫사랑'을 그린다. 발군의 감성적 묘사와 유려한 문체는 이 소설을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와는 다르게 읽히게 하는 동력이다. 소설은 현재의 미국과 40년 전의 한국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두 주인공의 기억을 소환하고 조합한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과거의 진실이 들추어지며 긴장감이 누적되는 흐름은 땀이 날 정도다. 결국 두 인물의 희미하고 불분명한 기억은 소설적 절정을 통과하며 명징해진다. 결국 소설의 끝에 도달했을 때 긴장은 종결되고 독자는 농밀한 감동을 선사받는다.

 

미국에서 의자 사업을 하는 '그' 요셉과 안식년으로 미국 여행을 온 독어독문학과 교수 '그녀' 미호는 첫사랑의 기억을 추적해가는 두 주인공이다. 작가는 3인칭 시점으로 둘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적으로 추적한다. 4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을 연결해 준 매개는 '페이스북'이라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다. 40년 전 박정희와 전두환을 비판하고, 광장에 나가 민주주의를 외치고,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경멸했던 '그'가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의자 사업가가 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괴리를 작가는 유심히 포착한다. 다만 포착할 뿐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것과 애써 싸우지 않는다. 하나의 소설적 배경으로 지긋이 물러나 있을 뿐이다. 이제 작가도 운동권 담론에 매몰된 과거 순진한 시절의 공지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시종 두 인물의 기억을 추적한다. 둘의 기억은 조각나 있다. '그'는 '그녀'가 가장 궁금해했던 것을 잃어버렸고, '그녀'는 '그'가 가장 강렬해했던 것을 잃어버렸다. 둘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잃어버린 기억의 시간이었다. 이는 소설의 제목과 웅숭깊게 연결된다. 소설은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난다. 소설의 앞과 뒤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먼 바다'는 두 인물이 함께 공유한 공간적 배경이자 잃어버렸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었던 추억을 회복한 초월적 상징이다. 그렇기에 바다는 멀어야 했다. '먼 바다'여야만 했다. 그들이 다시 만나 진실을 확인한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그러한 것처럼, 멀고 길어야 했다.

 

결국 이 소설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기억은 절대 우주의 시간을 전복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시간의 일차월성과 무관하게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영장으로서의 인간적 생명력은 그 절반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잊힌 것은 잊힌 대로 의미가 있고 잊힌 것이 다시 복기될 때는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다. 두 주인공이 뉴욕 맨해튼의 9·11 메모리얼 파크에서 보게 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버질이라는 사람의 다음 시구절은 이러한 내 사유를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재청한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한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처음이라는 것과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에 있다. 처음이라는 건 '사실'의 세계이고 기억된다는 건 '이상(理想)'의 영역이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다는 사실은 한 인간으로서 삶의 종국에 이를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이상이다. 그렇기에 첫사랑을 '이루어지지 않은 아쉬운 기억' 정도로 갈음하는 건 적절치 않은 정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꿈이 있고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이상이 있기에, 그리고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와 현실을 더욱 냉정히 성찰할 수 있기에 말이다. 즉 첫사랑은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비된 나를 천착하는 아름다운 소환이요, 이후 사랑의 가장 순수한 시금석이 되는 경이로운 추억의 숙성이다. 이러한 첫사랑의 생명력을 아름답게 탐색하게 한 것만으로도 소설 『먼 바다』는 훌륭하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추신'으로 붙인 문장이 자못 이색적이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슬프지만 이 소설은 당연히 허구이다"라는 추신을 남겼다. 소설의 정의가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라는 점을 주지한다면 소설의 생명은 당연히 '허구(fiction)'에 있다. 작가도 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불필요하게 저런 끝맺음을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난 잠시 생각했다. 혹 지난 몇 년 간 작가 자신이 진실과 관련하여 지난한 싸움을 했다고 반추하며 스스로 지쳐있어 그런 건 아닐까. 즉 극한의 자존적 외로움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감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작가에게 조언하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독자는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몽매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추가로 작가에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제언하겠다. 소설로 말하는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작가가 작품 바깥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할 때마다 문학적 생명력은 소멸된다.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동시에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가가 광장에 나가는 시대는 종말했다. 87년 체제는 끝났다. 이제 대한민국은 절대로 과거 독재 정권 때로 돌아가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진영 구도가 남았을 뿐이다. 여기에 선악을 대입하고 '옳고 그름'을 외치는 순간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는 점증되고 서로 간 신뢰는 결핍된다. 그 선봉에 소설가 공지영의 이름이 없기를 바란다. 부디.

 

서평을 정리하자. 작품 소개보다 작가를 향한 잔소리가 많은 조잡한 글이 됐다. 정말 잘 쓴 훌륭한 소설인데 그만큼 객관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솔직한 내 심정을 보태느라 글이 장황해졌다. 정리하자면 신작 『먼 바다』는 정말 잘 쓴 소설이다. 그 자리에서 한달음에 완독했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첫사랑은 내용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숭고하다는 것을 소설가 공지영은 이 한 권의 소설로 아름답게 들려준다. 최근 읽은 한국소설 중 최고다. 오래간만에 읽은 수작이다. 읽지 않은 사람은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기 바란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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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네이버에서 가장 큰 북 카페의 서울모임을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순수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작가 지망생까지 책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정적이고 까칠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정식 모임 후 회식자리에서 가장 자주 안줏거리가 된 건 소설가 공지영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오(好惡)는 유독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나는 호(好)의 입장이었고 항시 소수였다. 다수의 공격은 매서웠고 광활했다. 과히 지독한 논쟁이었다. 밤을 새우며 공지영 문학을 토론했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공지영의 신작이 출간됐다. 응당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신간 『먼 바다』는 첫사랑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아직도 작가 개인을 철저히 배제한 완벽한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최근에 읽은 한국소설 중 탑이다. 최근 작가를 둘러싼 시끄러운 뉴스를 단박에 잠재울 만큼 소설 자체는 끝내준다. 공지영은 소설가일 때 가장 빛나는 것 같다.

 

오래간만에 그녀와 카톡을 주고받았다. 10년 전이다. 모 포털사이트에서 주관한 큰 규모의 시상식이 끝난 뒤 그녀와 나는 서초동에서 술자리를 함께 했다. 여러 안건에 대한 솔직하고 가식 없는 그녀의 아우라를 긍정적으로 기억한다. 어마어마한 주량에 놀랐던 것도 기억한다. 이후 둘은 작가와 독자라는 전형적인 관계로 돌아와 지금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최근 그녀가 많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고통과 외로움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적 동기가 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신작은 정말 재미있고 훌륭하다. 자세한 건 내일 오전에 올릴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소설가 공지영의 삶과 문학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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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두 딸과 TV로 월트디즈니의 명작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 2>를 시청했다. 극장에서 이미 본 영화였지만 케이블 TV 더빙판으로 다시 볼 기회여서 즐겁게 시청했다. 2편은 1편과 결이 달라 아이들과 함께 보면서 전작과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었다. 여자아이들이 워낙 좋아한 영화이기에 두 딸은 아빠의 분석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내가 평가한 <겨울왕국> 시리즈는 이렇다. 1편이 동생 안나의 영화였다면 2편은 언니 엘사의 영화였다. 내가 느낀 건 그랬다.

 

2편을 보면서 '엘사가 이제 진정한 주인공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사실 <겨울왕국 2>는 엘사의 독무대라 할 정도로 엘사 중심의 영화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머리를 풀어헤치며 '렛 잇 고(Let it go)'를 부른 1편의 엘사보다 종횡무진 자신의 진본을 찾아 나선 2편의 엘사가 나에게는 더욱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그래서인지 2편을 시청하면서 내가 유독 엘사에 대한 매력을 자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둘째 딸이 "내 영어 이름이 엘사(Elsa)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했다. 아빠가 영화를 보면서 특정 인물을 한없이 칭찬하니 둘째 딸은 자신의 영어 이름에 아쉬움을 가지며 본인의 솔직한 감정을 말한 것이리라.

 

사실 그랬다. 몇 년 전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영어 이름을 작명해달라고 했을 때 아내와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첫째 딸의 영어 이름은 '벨(Belle)'이다. 당시 실사로 재개봉한 영화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에서 엠마 왓슨이 맡은 여주인공 벨의 매력이 우리 가족 모두를 적잖이 경도시켰기 때문이다. 문제는 둘째 딸의 영어 작명이었다. 둘째는 엘사로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워낙 흔한 이름이기도 했고 1편에서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전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여주인공 '안나(Anna)'를 선택했다. 그래서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은 안나가 됐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안나는 인류 문학사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인물로 꼽힌다. 나는 톨스토이의 불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보여준 진심에 대한 자유와 극한의 생명력을 긍정하며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문제는 둘째 딸의 이해(理解)에 있었다. 둘째는 자신의 영어 이름 안나를 톨스토이의 안나가 아닌 월트디즈니의 안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겨울왕국 2>를 보며 엘사를 거듭 상찬한 아빠의 모습에서 무언가 마뜩잖음과 결핍을 느낀 것이다. 솔직히 둘째 딸이 "내 영어 이름이 엘사(Elsa)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곧바로 아무 답변도 주지 못했다. 피상적으로 <겨울왕국> 시리즈의 주인공은 분명히 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잠자코 있던 첫째 딸이 엘사보다 안나가 더 대단한 존재라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더 놀랍다. "안나는 초능력(마법) 없이도 왕이 되었기 때문에 엘사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결코 생각지 못한 한방이었다. 첫째 딸의 해석과 웅변에 나는 잠시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 항시 비범함은 범상함을 전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비로움을 쫓는다. 기적은 현실과 괴리되지만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영원불변한 욕망이다. 많은 사람들이 엘사에 환호한 것은 그녀의 인간 됨보다 인간 되지 않은 초월성을 선망한 것이리라. 엘사의 강력한 마법과 초능력, 그리고 범상하지 않은 판타지적 카리스마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몽롱하고 화려한 미모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궁극일 것이다. 하지만 엘사에 가려진 안나의 매력을 우리는 너무 소홀히 감상해왔다. 첫째 딸의 말대로 특별한 능력 없이 오직 인간적인 근거만으로 왕이 된 안나의 매력에 대해 우리는 너무 간과해왔다. 반추해보면 인간적 관점에서 고도의 정신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항상 일관되게 현실을 긍정한 캐릭터는 안나였다. 나는 입장을 바꾸었다. <겨울왕국> 시리즈의 진정한(내재적) 주인공은 언니 엘사가 아닌 동생 안나였다는 것으로.

 

안나는 궁극적으로 <겨울왕국>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다. 1편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전환을 이루는 부분은 안나가 엘사의 장갑을 벗기면서 엘사의 정체가 탄로 나고 그 충격으로 엘사가 산으로 도망치는 장면부터다. 그 유명한 엘사의 '머리 풀어 헤친 <렛 잇 고>'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때 엘사를 찾기 위한 안나의 여정이 시작되고 두 캐릭터의 내면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 안에서만 지내며 외부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엘사와는 달리 안나는 적극적으로 부딪히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밝고 건강한 정신으로 언제나 당당함을 유지한 안나의 내면은 자아에 구속된 듯 보이는 엘사의 소극성과 대비되며 영화의 중후반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종국적으로 안나는 진정한 사랑만이 안나와 아렌델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낸다.

 

2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고 정령들을 깨워 마법 하나 없이 댐을 부수어 얼어버린 엘사를 녹여낸 것도 안나였다. 열정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모두를 구원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건 언제나 안나였다. 그 어떤 마법과 초능력도 없이 말이다. 드레스 변신 장면과 메인 테마곡이 모두 엘사에게 돌아가서 비주얼적으로 대중적 매력에 엘사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지만 인간 정신의 고결한 승리와 가치라는 면에서 안나는 항시 엘사를 압도했다. 그렇기에 결국 2편 말미에서 진정한 아렌델의 왕으로 등극하는 게 아니겠는가. 안나의 왕 등극 장면은 월트디즈니의 연출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극작술의 극치였다. 결국 중요한 건 현실성이다. 산타클로스는 신비롭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크린(영화)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우리네 삶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엘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안나는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안나의 진정한 매력인 것이다.

 

둘째 딸의 오해, 즉 톨스토이의 안나와 월트디즈니의 안나가 괴리한 지점에서 이렇게 깊은 사유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이는 전적으로 두 딸의 공이다. 가끔 아이들의 언어 가운데 신(神)의 터치를 엿볼 때가 있다. 특히 첫째 딸의 워딩에 가끔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 됨의 숭고함에 압도된다. 어른스럽다는 건 성숙하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그만큼 때가 묻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관찰과 해석을 통해 현상에 가려진 본질을 천착할 수 있다. 태도는 어른처럼 성숙한 외연을 갖되 생각은 아이들처럼 단순하고 순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어름 됨은 완성된다고 믿는다. <겨울왕국>의 진정한 주인공 안나에 대한 아이들의 관찰을 통해 그것을 깨닫는다. 둘째 딸의 영어 이름 '안나(Anna)'가 더없이 빛나는 순간이다. 가슴 벅찬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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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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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여러 책 속의 명문장을 끄집어내 통찰력 있는 해설을 덧붙인 에세이일 것으로 기대했다. 외연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었지만 정작 사유의 깊이와 문장력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밋밋하다. 고만고만하고 말랑말랑한 얘기들로 가득 차 있다. 최소한의 인문학적 무게를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자기계발서의 오류와 한계로 지적받는 '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 잡는 달콤한 소리' 등이 책 곳곳을 메우고 있다.

 

저자는 '책 읽어주는 남자'로 불린다고 한다. 여러 채널을 통해 책 속의 좋은 글귀를 소개하며 매주 150만 명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한다고 한다. 그의 이력을 모른 채 "인문 고전, 철학, 역사는 물론,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려 뽑은 130여 편의 ‘인생의 문장들’을 작가 개인의 진솔한 경험담과 함께 전한다"라는 모 인터넷서점의 홍보문구에 혹해 구입했다. 개인적으로 위로는 전혀 받지 못했고 몇몇 책 속 명문장을 소개받는 선에서 내 독서는 갈음되었다.

 

책의 구성은 심플하다. 고전 속의 여러 문장들을 독자에게 소개하며 그것에 대한 저자의 사유를 풀어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일관적인 구조로 쓰여 있다. 평가하자면 인용과 해석 둘 다에 문제가 있다. 고전 속 여러 문장을 인용했다고는 하지만 그리 와닿지 않는 평범한 문장들이 많아 호감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녹여내는 저자의 해설에 깊이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울림이 없었다. 더욱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라는 제목은 왜 갖다 붙였는지 책 내용과 괴리적이다. 이런 말랑말랑한 책에 '인문학'이라는 수식어구를 붙인다는 게 조악하고 어색하다.

 

언제부턴가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표지 전면에 배치한 자기계발서들이 범람하고 있다. 읽어보면 분명 자기계발서인데 책의 띠지와 출판사의 광고 카피는 '인문 에세이'라며 독자를 호도시킨다. 괴테나 프루스트의 글 몇 줄을 인용한다고 해서 인문서적이 되는 건 아니다. 저자(작가)만의 인문학적 콘텍스트가 그 재료들을 견인하고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저자의 문장 자체에서 깊이 있는 인문학적 사유와 울림 있는 전달력이 빛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나 일기장에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수준 이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내가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저자의 위상을 책 한 권으로 재단하는 게 아닐까 저어된다. 하지만 이 글은 서평이며 솔직하고 냉정하게 책에 대한 평가만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힐링서적 중에서 이 책은 최하위급에 속한다. 위로에도 수준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이한 말과 글로 타자(독자)를 위로할 수 있다는 용기가 가상하고 그런 위로에 따뜻함을 느끼는 독자의 수준도 안타깝다. 책이란 모름지기 차가움과 따뜻함을 혼용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멘토와 힐링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 권의 책이 인간에게 본질적 위로를 줄 수 있을지에 답하기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양서들을 통해 위로받았고 힘을 얻었다. 그 책들은 대개 '진짜'였고 탁월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이 세상에는 굳이 시간을 내서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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