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글을 쓴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의혹이 문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신경숙 본인과 출판사 창비의 해명이 있었지만 문단 내외의 비판은 점입가경이다. 안부, 쪽지, 카톡 등으로 이번 표절 의혹에 관한 내 견해를 묻는 질문이 적지 않이 쏟아지고 있다. 평소 나는 신경숙을 가장 아끼는 소설가로 자랑해왔다.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호평을 아끼지 않은 팬이었기에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내 주관이 이웃들로서는 궁금했을 것이다. 이에 적당한 선에서 솔직한 입장을 내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 글은 그 판단의 연장선상이다.

   신경숙이 누군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문단 최고의 스타다. 나는 이미 여러 채널을 통해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소설가로 신경숙을 꼽아왔다. 많은 서평에서 그의 작품을 한결같이 상찬했다. 『외딴방』에 대해 작품성에 있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능가한다고 말한 백낙청의 평가에 백번 공감했다. 210만 권이나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 "차후 십 년 동안 이런 소설은 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니체가 주창한 '피의 글쓰기론'을 인용하면서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순문학적 서정성과 발군의 시적 문체, 섬세한 감성 등은 신경숙 문학의 독특한 브랜드이자 그가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로 우뚝 선 힘이었다. 그런 그가 창작자에게 가장 큰 수치라 할 수 있는 표절 의혹에 휘말린 것은 그 자체만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가슴 아픈 일이다.

   이번 표절 의혹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의 문제제기로 시작됐다. 이응준은 인터넷매체 '허핑턴포스트'에 소개된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신경숙의 단편 소설 「전설」이 일본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우국」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게재된 이응준의 글을 면밀히 읽고 그의 논지를 살폈다. 그가 제시한 문제의 문단을 서로 비교했다. 기준은 '상식'이었다. 부분적인 어휘의 쓰임새와 문단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 때 원작(유키오의 단편 「우국」)과 무관한 독립적인 창작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였다. 더욱이 역자 김후란의 시적 의역을 그대로 옮긴 부분은 원작과 번역을 동시에 베낀 최악의 표절 사례로 의혹을 살 만했다. 우선 이응준이 표절의 증거로 내세운 두 소설의 문단을 비교해보자.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우국, 연회는 끝나고' 233쪽. 김후란 옮김. 주우세계문학전집. 1983년 발행)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확인하듯이 두 문단은 부분적으로 거의 동일한 문장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의미 배열의 순서까지 완벽히 일치한다. 소설 전체의 서사와 상관없이 상기 두 문단만 봤을 때 단어 선택과 문장 맥락에서 다분히 종속적이고 연계적이다. 더욱이 이응준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문구는 김후란이 의도적으로 의역화하여 역자 재량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시적 문체를 구사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문학적 창작력으로는 도저히 일치하기 힘든 부분이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위 정도의 유사성은 의식적인 개입 없이는 상응하기 힘든 문장 배열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겠다.

   물론 표절의 기준은 단순하지 않다. 음악은 별도의 표절 기준이 존재하지만 문학은 아직까지 보편적으로 정립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문학 외의 텍스트들은 나름의 허용되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예컨대 철학자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보자.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노동자들이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실제로 마르크스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를 얘기할 때 격문처럼 회자되는 문장이지만 진실은 칼 샤퍼와 장 폴 마라가 처음 사용한 문구를 마르크스가 짜집기하여 편집한 것이다. 서로 흩어진 독립적인 문장일 때는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 개의 문장이 상기의 순서로 배열되어 『공산당 선언』의 대미를 장식하니 거대한 매력을 발산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표절자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혁명 구호'로서 각 문장의 독립된 개별성이 화학적으로 합쳐져 전혀 다른 차원의 힘과 메시지로 치환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혁명 선언의 용도로 재배치된 구호일 뿐 창조물로서의 시간순서가 방점인 텍스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문학은 다르다. 순수문학은 창작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어떤 텍스트보다 엄격한 표절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텍스트가 창작의 영역이라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비문학보다 작가(저자)로 하여금 창작의 양심과 그에 따른 긴장감을 훨씬 더 많이 요구한다. 모든 문학적 글쓰기의 태동이 작가의 의식적 순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허구의 것으로 현존의 시공간을 재구성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문학의 일차적 힘은 바로 '진실성'에 있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말할 것을 말해야 하는 문학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작가는 문학 위에 진실을 쌓는 게 아니라 반드시 진실 위에 문학을 쌓아야만 한다.

   신경숙은 이번 표절 논란에 대해 신속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우국」을 읽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게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라는 말이 꺼림직하지만 이번 의혹을 단칼에 부인하려는 의지는 엿보인다. 하지만 당사자의 해명과는 상관없이 온라인상에서 폭포수처럼 번지는 비난의 목소리는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성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문단의 방향을 제시해온 책임있는 작가라면 한 걸음 더 나서서 자신의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번 논란의 본질을 '신경숙의 표절'이라는 단선성에 두지 않는다. 대형 작가의 표절 의혹을 음지에서 비호한 문단과 출판사의 잘못된 관행이 본질이다. 이번 표절 의혹에 대해 대부분의 평론가와 작가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표절의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온 한국 출판계의 더러운 민낯은 정말 충격적이다. 소위 '메르스급'이다. 한국 문단의 발전을 좀 먹는 거대한 병원성을 침묵과 비호로 잠복해온 바이러스의 존재를 밝힌 것만으로도 이응준의 용기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신경숙 개인의 입장표명과 별반으로 출판사 창비의 해명은 그야말로 수준미달이다. 국내 최대규모의 문학 전문 출판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아적 수준의 해명을 내놓았다. 창비의 해명은 '표절되었다고 주장하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가 극우민족주의다'라고 폄하하면서 신경숙의 글이 더 뛰어난 작품이라는 식의 논지를 펴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표절 글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대등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외연의 부차적 요소를 프레임화하여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쪽팔리지도 않는가. 그나마 트위터상에 일부 직원들이 잇따라 양심선언을 한 걸 보면 출판사 자체적으로 무언가 다른 목소리를 내줘야 할 상황임은 분명하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 글이 횡설수설했다. 입장을 정리하자. 이응준의 논지를 볼 때 표절 의혹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작가나 출판사나 침묵으로 시간을 끌며 결국 유야무야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결국엔 양심의 문제다. 모든 표절 논란이 그렇지만 '칸트의 도덕률'만이 작금의 사태를 밝혀줄 빛이 될 듯하다.

   고백한다. 『외딴방』을 벌벌 떨면서 읽었다. 『깊은 슬픔』의 여운에 장시간 경도됐었다. 『엄마를 부탁해』는 처음으로 울면서 읽은 소설이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내 생명력 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내가 사랑한 소설가 신경숙이 거짓을 말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잠재적 표절도 표절이다. "우주가 도와줬냐"는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조롱은 표절 논란의 중심을 관통한다. 진실은 신경숙 안에 있다. 지금은 엄마를 부탁할 때가 아니다. 부디, 진실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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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사랑 2015-11-1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본질을 짚어 주신 것 같습니다.

다윗 2015-12-01 15:47   좋아요 0 | URL
공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