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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통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3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현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7월
평점 :
나에게 '서른'은 두려운 숫자였다. 나이 서른이 된다는 것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순수성에 대한 대한 의심이자 우려였다. 주변에서는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몸과 마음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과 빠른 속도로 쇠퇴한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십 대에 그토록 반복해서 읽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와 닿지 않는 나이. 인간과 사물을 관찰하는 내면의 감도가 보다 '세상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나이. 경험의 축적으로 청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노련함을 갖게 되는 나이. 바로 서른. 그랬다. 나는 서른이, 두려웠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결혼을 했고 서른을 한참 넘겼다. 돌아보건대 서른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서른을 관통하면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자세와 경각에서 비본질보다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내면과 정신을 지향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경험화를 통해 고양된 인간의 사회적 성장방식의 산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우 놀랄 만한 매혹적인 진화가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것이다.
천재 시인 괴테의 명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이나 읽었던가. 젊은 시절 나는 괴테의 심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괴테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자전적 고백이 투영된 책이었기에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 즈음에 수차례를 반복해서 읽었었다. 당시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 후 그녀를 잊지 못한 그리움으로 삶을 둥개고 있던 시기였다. 현실의 내 사랑이 버겁고 힘들어서 감당할 수조차 없던 때였다. 그렇기에 이백여 년 전 문학으로 봉인된 베르테르의 사랑을 내 가슴에 담아낸다는 것은 과히 역부족이었다. 괴테를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다. 서른이 넘었고 그토록 날 힘들게 했던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괴테의 명작을 다시 손에 잡았다.
괴테가 그려낸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는 비극 이전에 희극이며 희극이 될 수 없는 비극이다. 어느 한 대상이 세계의 전부이자 자신의 실존 근거가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사랑. 그 열정적 사랑에 베르테르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자신의 전존재全存在를 혹사시킨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사랑이다. 사랑의 최고 수준 '아가페(agapē)'는 자아의 실존을 부정할 때 발현된다. 사랑의 궁극은 아가페이며, 아가페의 속성은 절대선絶對善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행위는 희극적이다. 세계의 어떤 사랑이든 본질의 선상에서는 희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요컨대 사랑 자체는 분명 '희극'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사랑은 결국 비극이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순전했지만 끝내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도덕적 일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참혹한 것은 일방성이다. 작품 속에서 로테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베르테르의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만약 둘의 사랑이 쌍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불멸의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과히 슬펐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픔보다 더 슬픈 슬픔이었다. 그것은 인간 심연의 처절한 괴로움이자 실존을 파괴하는 매머드급 고통이었다. 결국 베르테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지시킴으로써 로테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종결시킨다.
나는 베르테르의 연인 로테에게 불만이 많다. 정말 화가 나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불분명한 태도와 애매한 감정처리로 베르테르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로테는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에 의해 꽤 매력적인 여자로 묘사되지만 애정관계라는 측면에서 가장 저급하고 위험한 존재의 전형이다. 로테의 불명확성은 작품 속 갈등의 동기이자 전부이다. 괴테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베르테르의 말을 빌어 이를 암시한다. "오해와 태만이 간교함과 악의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이다. 로테의 사랑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의식하는 사랑이다. 타자와 외부로부터 발현된 모든 사랑을 종국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의 충전으로 대체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런 태도와 이와 동류적同類的인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행태들을 혐오한다. 정말 싫다. 사랑에 불분명한 여자가 발생시키는 갈등의 악마성을 나는 철저히 증오한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 해석한다. 사실 괴테가 그렸던 베르테르의 열정과 성실은 한 개인의 애상愛想을 넘어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맹렬한 분투로 은유된다. 괴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봉건 질서의 염증과 새로운 인간상의 기대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르테르의 헌신적이고 순교적인 사랑은 기독계 세계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오롯한 사랑의 일방성과 그 대가로 지불되는 죽음의 운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적 삶과 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사회적 혹은 종교적으로 읽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슬프고 치열하며 열정적인 사랑만으로도 눈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적 밀도와 중량은 충분하다.
번역본을 추천해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국내에 제일 많이 번역된 고전 중 하나다. 다양한 역자들에 의해 출판사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민음사를 위시한 여섯 출판사의 번역본을 읽어본 바로서 나는 을유문화사의 것을 일 순위로 꼽는다. 을유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있는 번역본으로서 제목부터 독일어의 본래성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배치했다. 이미 잘못된 발음으로 검증된 '베르테르'를 올바른 표기법의 '베르터'로 수정했다. 또한 원어가 담은 의미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은 '슬픔'을 가장 적합한 단어인 '고통'으로 대체했다. 베르테르의 고통이 개인적인 연애사를 넘어 봉건 질서 내에서의 사회적 번민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외면적 함의에서 더욱 적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문장 또한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통속적 관행을 타파하고 독일어 본래의 의미로 올바르게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의 용단이 멋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반드시 을유판으로 만나보길 바란다.
괴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임이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시인은 천재라 했다. 하물며 인류사에서 가장 강렬한 획을 그은 시인 괴테의 작품을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서두에 언급했지만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 사랑의 본질에 더욱 진지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사랑의 모든 동기와 형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찬란하다. 서른 이전에는 사랑의 현상에 주목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사랑 자체에 경도된다. 나이차가 만들어내는 사랑에 대한 역설적 수용은 매우 흥미롭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춘시기에 한 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서도 꼭 한 번 읽어야 한다. 반드시.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것은 삶과 사랑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독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원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을 기점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독하고 고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